본문 바로가기

기타자료실/사회학자료

앙드레 비엘레의 칼빈의 사회적 휴머니즘

1.이 책의 목적

 

존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의 사상을 휴머니즘, 특히 사회적 휴머니즘과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을까? 대부분의 휴머니스트들의 사상이 인본주의적이라면 칼빈의 사상은 신본주의적이며 신학적이지 않는가?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독교인의 경우에는 하나님 없는 인간의 존재는 실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 보지 않는 휴머니즘은 진정한 휴머니즘이 아니다. 또한 인간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늘 사회를 구성하여 살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휴머니즘은 사회적 휴머니즘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이해한 휴머니즘이다.

 

◇인본주의(Humanism)또는 인문주의는 모든 사람의 존엄과 가치의 존중을 강조하고 기본적으로 세계는 신이 지배한다는 신본주의에 반대하고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인간중심주의적 정치 사회사상.

 

2. 경제정의를 이루기 위한 교회의 시도와 그 시조 칼빈

 

1)경제의 세계화

세계화는 지금 세계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핵심적인 화두가 되어있다. 특히 경제부문에서의 세계화가 두드러진다.

경제의 세계화는 우리에게 돈의 메시아적 권능을 주입시키며 시장을 우상화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섬길 수 없는 물신(mammon)을 섬기도록 강요하며 이의 귀결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깨어지는 파멸이다.(경제의세계화의 신학적 문제)

이에 세계개혁교회연맹은 "경제적 불의와 생태계 파괴에 대해 인식하고 교육하고 고백하는 고백신앙의 과정"을 선언 했다. 그러나 경제정의를 이루기 위한 교회의 시도는 이미 옛날에도 있었다. 그 시조는 바로 존 칼빈이다.

◇물신-신으로 둔갑한 돈의 세력

 

2)경제적 세계화의 사상적 기초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다.

 

◇신자유주의-인간 문제의 열쇠는 결국 경제가 쥐고 있으며 시장을 완전히 자유경쟁시킬 때 경제가 가장 잘 성장하며 무역과 시장을 자유화 하면 경제가 무한대로 발전할 수 있고 경제가 발전하면 세계는 가난에서 해방되고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 사고.

 

신자유주의의 폐해-빈부격차의 심화, 생태계 파괴, 소수를 위한 다수의 배제, 소비주의의 의식화, 금융시장의 사유화, 국민국가의 약화...

 

3)칼빈의 사상에 비추어 볼때 하나님의 경제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비교

 

->칼빈은 정의로운 사회 공동체의 보전이 궁극적인 관심 이었다. 정의로운 사회 공동체의 보전은 가난한 자들의 생존권리가 최대한 보장될 때라고 보고 칼빈은 이 가난한 자들의 생존권리가 사회적으로 보장되게 하는 데 그의 모모든 경제적 사고를 집중시켰다.

 

 

하나님의 경제

신자유주의적 경제

포괄적(inclusive)

보호적(protective)

연대경제(economy of solidarity)

부의유통: 부자->가난한 자

경제지표: 사회적 가난

목표: 사랑과 은총과 봉사

인간의 타락성 때문에 규제가 필요하다고 봄

인간본성: 전적타락

배제적(exclusive)

착취적(exploitative)

경쟁경제(economy of competition)

부의유통: 가난한자->부자

경제지표: 국민총생산(GNP)

목표: 탐욕과 부의축적, 권력의 추구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 탈규제화, 자유화

인간본성: 긍정적 입장

 

 

제1장 인간과 사회

 

-사회적 개인주의(personnalism social)

(인간으로 하여금 그 개인의 삶이 완전히 펼쳐지도록 보장하는 것이 칼빈의 지속적인 관심사였다. 개혁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서로 연합하도록 연대하고 형제애로 완전히 뭉쳐지게 되는 것을 보장하기를 강력히 원했다.)

 

 

1). 칼빈의 휴머니즘의 기초

중세 지성의 요지는 신학 즉, 하나님에 대한 탐구였다. 르네상스 지성의 요지는 휴머니즘 즉, 인간 됨에 대한 연구와 지식이었다.

칼빈의 학문은 한편으로는 인간에 의해 알아지는 인간에 대한 지식, 다른 한편에는 하나님을 통해 알아지는 인간에 대한 지식이란 이 두 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연구로서, 이름한다면 신학적·사회적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2). 인간의 본성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서는 하나님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그의 피조물에게 알리실 수 있다. 인간에게 자신의 말씀을 선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신 독생자를 보내심으로써 자기를 인간에게 알리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본래 모습이 지극히 아름다웠다고 전하고 있다. 어떤 휴머니스트들도 생각할 수 없는... 그러나 이 모든 면에서의 인간은 오직 창조주에 속해 있을 때만이 진정한 자유를 즐길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복종 가운데 주어진 이 자유 밖에서는 노예화와 자기 파멸만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만의 자유를 찾으려고 자유 그 자체이신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는 순간 자신의 자유를 잃게 된다. 오늘의 인간의 상황이 바로 이렇다. 오늘 인간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은 죽음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며 결국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칼빈은 인간들 속에서 또 다른 사람이 존재함을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태초의 인간, 진정한 인간의 표상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회개(그리고 세례)를 통해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와 연합함으로써 타락했던 인간은 새 본성을 받는다.

 

 

3). 인간의 역동성

참된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하여, 인간은 반드시 스스로 엄격한 영적 단련을 가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몸을 잘 다스림으로써 인간은 성령께서 그의 인격에 역사하고 계심을 나타내야 한다.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 사랑의 힘, 성령의 역동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반드시 그 이웃을 만나게 하신다.

 

 

4). 사회의 구성

칼빈이 이해한 휴머니즘-사회적 휴머니즘(인간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함께하는 동반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

첫째, 인간은 본래 다른 인간과 함께 벗하며 살아갈 때에만 진정으로 인간일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창조될 때부터 타고난 이 동반자 의식(compagnonnage)은 먼저 부부 관계에서 표현되고, 그 다음에는 가족 공동체에서 표현된다. 동반자 의식이 완성되는 것은 노동과 경제적 상호 활동에서다. 상품과 서비스의 상호 교환은 인간 공동체를 하나로 연결하는 깊은 연대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인간은 자기의 자유를 확보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시켰고 그래서 자기 자신만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생활과 경제적 활동 자체를 왜곡 시켰다.

 

그러면 회복은 어떻게 가능할까?

앞에서 말한 인간이 그리스도와 만나고 연합함으로써 받는 새 본성을 결코 자기 혼자의 힘으로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칼빈은 "하나님이 택한 자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모두 서로 상호 의존적으로 연결되어 한 몸을 구성하는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되어 있다." 고 말했다. 개인적인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공동체가 사회 한가운데 한 핵으로 존재하는 것이 그 규모가 아무리 작더라도 인간성의 사회적 복원을 위한 작은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 그런 사회생활의 모습을 우리는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5). 교회, 사회, 국가

사회와 국가에 대한 교회의 역할

교회가 생성되고 옛 인간성에서 새 인간성이 태어났다고 해서 인간과 사회를 파괴시키는 세력들에 저항하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교회 그 자체도 이 땅에서 단지 부분적으로 회복된 것일 뿐이다)

모든 것이 혼돈과 무질서에 통째로 삼켜져 버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칼빈이 말하는 소위 정치질서라는 잠정적인 질서를 사회 전체에 부여하셨다. (정치질서-관습적인 도덕법, 정부조직을 통해 다스리는 국법)

정치질서는 하나님의 질서와 관련이 있다. 어느 사회에서건 정치질서는 국민들의 현재의 영적인 발전을 지키면서 가능한 한 하나님의 질서에 가까운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신실한 교회의 존재는 사회적 삶과 그 사회의 삶에 모든 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교 회는 사회적·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인 삶에 영감을 주고 촉진시키는 효소가 되어야 한다.

 

법과 강제력으로 정치적인 질서를 추구해야 할 국가도 그 자체의 혼란과 부패를 막을 보장이 없다. 참된 교회가 끊임없이 국가로 하여금 그 사명이 무엇인지 상기시켜 줘야 한다. 사실상 국가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의 질서를 알 수 없다. 정부에 하나님의 질서를 증언하는 일은 교회가 할 일이다.

 

제2장 돈과 재산

-칼빈이 돈에 부여했던 위치와 역할 그리고 재산에 부여한 의미

 

1). 칼빈 시대의 사회 경제적 상황

신대륙의 발견은 사실상 유럽에 금의 홍수를 가져다 주었고 그것으로 유럽에는 수많은 산업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상업적 교류가 엄청나게 증가하게 되었다. 무절제한 자본주의가 생겨나게 되었고 엄청난 자본의 축적과 증가가 이루어지는 반면 비참한 대중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대량 생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변화들과 종교개혁으로 인한 내적인 신앙의 갱신은 교회 전체로 하여금 사회적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게 했다. 개인적인 종교를 세상을 향하여 열게 했고 신학적 사상들을 사회적 문제와 나란히 놓고 보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당시 종교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개인적인 종교였다. 칼빈을 이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칼빈은 신앙세계를 두 영역- 즉 하나는 종교세계, 다른 하나는 세속세계-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개혁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에게는 세상에 대한 관심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직접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2).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돈

칼빈은 성서를 인용하면서 물질적 재화는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재화를 인간에게 맡기셔서 인간 스스로 자기의 삶과 그가 연대할 책임이 있는 사회를 함께 운영해 나가도록 하셨다.

(1)돈의 영적 기능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도록 주선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 더 나아가서 돈은 하나님나라에서 누릴 풍성함의 표시이다.

(2)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사회적 삶

인간의 호혜적인 삶과 연대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재화의 끊임없는 순환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목적에 따르면 인간들 사이의 부의 불평등은 끊임없는 재화의 재분배를 유발 시키는 기능을 하는데 이 재분배는 부자에게서 가난한 자들을 향해 이루어진다.

 

부자=가난한 자의 봉사자(les ministeres des pauvres) //가난한 자= "하나님의 수취인(receveurs)", "그리스도의 보좌(vicaires du Christ)", "하나님의 대리자(Procureurs de Dieu)"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질서는 변질되어 있다. 마귀는 경제적 재화의 올바른 질서가 파괴되도록 사회를 황폐화시켰다. 돈은 하나님께서 부과하신 그 기능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다. 하나님의 도구였던(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의 도구로 부름을 받고 있는) 그 사명이 완전히 변질되어 물신(mammon)의 지배도구가 되어 버렸다.

 

3). 사회적 억압과 경제적 무질서의 도구로서의 돈

마귀의 행위와 죄의 영향(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인간의 마음속에 스며듬)으로 하나님 앞에서 물질적 재화와 부 그리고 돈을 선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인간의 책임이 소멸되었다. 돈이 마귀의 도구가 되었다. 돈이 마귀와 연합하여 이제 피조물을 다스리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재물의 신의 승리는 인간 개인의 왜곡만 초래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즉시 사회와 교회의 타락을 가져온다. 경제적 삶에서 극심한 혼란이 초래되고 사회적 무질서가 야기된다.

칼빈은 인간 예수를 사회적 인간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예수의 청빈 의식과 모든 인간에게 그가 주관하시는 피조물의 모든 재화를 주시는 자유로운 베푸심이 사회 경제적 회복의 길을 온 세상을 향해 열어 놓으신 것이다.

 

4). 교회에서 재확립된 돈의 기능

인간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다시금 그의 이웃과 바른 관계를 회복한다. 바로 이런 사람이 돈의 역할에 대해 새롭고 정확한 이해를 하게 된다.

교회는 돈이 영원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축귀되고 그 악한 영이 발가벗겨져서 섬기는 존재로서의 본래적 기능을 회복케 하는 행위를 헌금을 통해 확인한다.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간의 재화의 재분배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직접적인 결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재분배는 부의 균형을 재확립해 준다.

 

만일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믿음으로 인하여 새로운 삶이 회복된 신자들의 돈이 교회 안에서 그 본래의 기능을 회복한다면 그것은 사회 전체적으로도 같은 회복을 해낼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칼빈은 이를 이루는 책임은 국가에 있다고 했다.

 

 

5). 국가에 의해 보호되고 제한되는 재산

칼빈의 가르침에 따르면, 제1장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국가는 죄적인 인간들 사이에 통치질서를 가능한 대로 신적인 질서에 가깝도록 세워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칼빈에게서 국가의 정치적 사명이란 경제에서 행해야 할 개입을 의미한다. 국가는 이를 행함에 있어 강제적 힘을 쓰거나 생산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경제적 활동과 이익 배당의 규제자로서 행해야 한다. 만일 국가가 이런 규제자로 나서지 못하면 죄가 경제생활의 모든 좋은 기능을 다 파괴하고 말 것이다.

 

 

제3장 노동, 임금, 상업, 금융

 

 

1). 하나님의 노동으로서의 인간의 노동

인간이 모든 면에서 올바르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을 하나님의 행동과 태도와 일치시켜야 한다. 인간의 노동은 그것이 바르게 이루어질 경우 바로 그 노동을 통해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의 생활을 위하여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노동 자체가 되므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도 인간의 다른 모든 것처럼 죄 때문에 손상되었다. 인간의 노동을 진정한 노동으로 회복하려면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의 노동과 인격적으로 제휴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은 침묵을 지키고, 자기 독단적 활동을 중지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유하시게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노동을 경영하시게 해야 한다.

"믿는 자는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의 노동에서 잠시 떠나 쉬어야 한다."

 

노동은 이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순종케 하는 수단이며 그것이 없이는 진정한 인간이 되지 못하고 진정한 기독교인은 더욱 되지 못하기 때문에 실업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사회적 병폐며 가장 강도 높게 비난받아야 할 사회악이다.

더 나아가서 칼빈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남용하거나 착취하는 것도 범죄행위로 간주하였다.

 

 

2).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임금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보수를 받을 권리가 없다. 인간이 받는 일체의 것은 인간을 지탱케 해주시려 순수한 사랑의 자비로 베푸시는 구세주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은 신성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시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임금은 하나님의 은총의 표현이기 때문에 인간이 마음내키는 대로 할 수 없다. 남에게 갈 임금의 일부나 전부를 체불하거나 지급하지 않는 것은 신성모독(un sacrilege)에 해당하는 죄다. 이는 이웃에게 뿐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죄악이다.

 

(1)정당한 임금을 정하는 전제조건

임금은 고용주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노동자에게 속한 것도 아니다. 고용주나 노동자 둘 다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며 둘 다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야 한다. 이러한 경우 그들은 임금의 액수를 그들의 책임에 대한 충분한 자각을 지니고 자유로운 의사로 이룬 공통된 합의에 의해 정할 수 있다.

 

(2)노동자의 비폭력 저항과 파업

칼빈은 착취당한 자들의 폭동과 그들이 불법적인 폭력에 의지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종종 착취자들을 심판하시고 응징하는 수단으로 노동자들의 불복종을 이용하신다고 단언했다.

(칼빈은 비폭력 저항과 파업을 반대하지 않는다.)

 

3). 하나님의 피조물들의 상부상조의 가시적 표현으로서의 상업

 

노동은 인간 연대의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그리고 필요한 모습이다.

 

(1)상업의 거룩한 목적

상업은 노동분업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거래는 하나님께서 권장하신 조화로운 사회질서의 실현을 위해 꼭 필요하다. 상품의 교역은 사회구성원간의 영적 교제의 표징이다. 따라서 각 상업의 일차적 목표는 각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획득하도록 하는 데 있다. 상업은 인간의 고통을 줄이고 삶이 즐겁게 해야 한다.

 

(2)상업에서의 사기와 부정

상업이 거룩한 목적에서 동떨어지면 그 본질이 급속하게 변하게 된다. 사기와 부정이 경제적 관계 형성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인간과 집단들을 소외시키고 거래와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사회질서를 손상시킨다. 따라서 상업에서의 부정은 단지 인간의 도덕성에 반하는 잘못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그 지향하는 목적에서 왜곡시킨다는 점에서 신성모독이다.

 

(3)새 삶으로 거듭난 인간의 상업

법에 억눌려서 기회만 있으면 속이려고 하는 그런 태도에서 벗어나 기독교인들은 자발적인 순종을 하게 되고 이로써 해방의 윤리로 진입하게 된다. 그렇게 되어 기독교인들은 정상 거래의 조건을 다시 발견하고 모두 삶에 필요한 경제 질서 회복에 기여한다.

 

(4) 국가의 임무

3번과 같은 갱신이 이 땅 위에서의 현실에 단지 부분적이며 교회와 사회가 결코 같은 것이 될수 없는 상황이고 기독교인들 역시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 있는 이상, 외적인 질서가 반드시 상업과 거래질서를 규제해야 한다. 이것이 국가의 임무 중 하나이다.

칼빈 "정부는 개인이 자기에게 속하는 것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4). 금융과 은행

 

교회는 이자를 받고 대부하는 것이 교회법상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묘하게 시행하여 일반화되었고 16세기에 들어서면서 급속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1)칼빈이 말하는 성서의 이자금지법의 적용범위

 

칼빈은 먼저 일반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현실을 발견했다. 칼빈에 따르면 이런 이유로 성서는 고리대금과 그것의 모든 폐해를 비난한다. 다른 한편으로 성서는 우리의 이웃을 도와준다는 관점에서 무이자 대부의 가치를 훨씬 더 강력하게 강조한다. 그래서 성서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 대부를 할 때 이자를 받는 것을 잘못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서의 이자금지법을 모든 대부에 적용해서는 안된다(소비성자금대출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생산자금대금에 적용해서는 안된다). 운전자본(un capital de travail)을 형성하기 위해 돈을 빌려 주는 것에는 이자를 받아도 된다. (예)부동산

칼빈은 돈은 다른 상품들처럼 생산성이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렇지만 칼빈은 인간이 죄악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현실을 인식했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규제를 가함으로써 돈의 페해성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2)적정 이자율

 

칼빈은 일률적인 기준을 정해 놓기를 거부한다. 적정 이자율을 정하는 결정적 기준은 대출자가 그리스도의 자비심에 영감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차입자에 대해 가지는 책임감이다. 이 기준을 정할 때 국가는 단지 대출자와 차입자의 개인적인 이율만 고려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공공의 이익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제4장 칼빈주의와 오늘의 시대

 

칼빈의 사회적 휴머니즘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1). 칼빈주의는 구시대적 사고

 

칼빈 자신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본다면 칼빈주의는 구시대적이라는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우리 개혁자는 한 교리체계를 세울 때 그것이 모든 시대에 다 적용된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포부는 하나님 말씀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한 역사의 시점에 사는 인간의 삶에 최대한 완벽하게 해석하는 것이었다. 칼빈은 이것을 그가 살던 시대적 사고방식과 그가 살던 시대의 삶의 상황 속에서 시도한 그러므로 우리가 칼빈에게 충실한다고 할 때 결코 그가 한 말을 전혀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서 단순히 기계적으로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

  

2). 통전적·개인적·사회적 휴머니즘

 

우리는 인간의 인간 됨을 손상시키는 여러 가지 휴머니즘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술 과학적 휴머니즘- 경이적인 과학의 발견으로 인간의 가치를 수치와 양으로 재어보고 평가하는 물체로만 보려고 하는 경향(서양의 과학적 개인주의)

무신론적 휴머니즘- 인간을 한 사회적 구성요소로 볼 정도로 인간을 격하시키는 경향(동양의 집단적 휴머니즘)

 

→성서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인간의 사회적 측면을 완전히 무시한 채 종교적 정치적 개인주의 안에 가둠

(인간의 사회적 차원을 절단시킴)

 

칼빈의 통전적 휴머니즘- 인간의 통전성을 고려하는 휴머니즘이며,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형성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에 의해 형성된 휴머니즘. (과학을 불신하지도 않으면서 성서적 계시를 경시하지도 않는)

더나아가 칼빈은 성서적 사회관으로 휴머니즘을 개인주의로 타락되는 것을 방지했다.

 

복음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개인과 사회를 항상 통전적으로 고려하도록 하는 통전적 사회주의를 끊임없이 추구하도록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휴머니즘은 에큐메니컬적이어야 한다.

 

3). 에큐메니컬적 휴머니즘

 

"우리는 그 누구도 떨어져 나가 자기 자신의 세계에만 만족해서는 안 되며 모두 함께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고 유지해야 함을 믿습니다"

칼빈에게서 교회는 하나였다. 그 이유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기독교인이 하나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이미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개혁자에게 교회는 우주적이다. 그 이유는 신자들이 전세계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이 땅 위의 모든 인간을 위한 유일한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컬 적인 칼빈주의

칼빈주의는 절대로 엄격하고 절대적이며 더는 변화가 없는 최종적 교리 속에 갇혀 있은 적이 없다. 칼빈주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고의 주권자이심을 증언하는 성서만이 교회의 유일한 권위며, 그 권위만이 교회가 복종하는 살아있는 권위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므로 교회는 절대로 교회 스스로 진리를 가져서는 안된다. 교회는 항상 움직여야 하며 항상변화해 가야하며, 항상 개혁될 수 있어야 한다.

 

칼빈의 휴머니즘은 종교적 울타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모든 인류를 향해 열려있다.(우주적 휴머니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