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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욕동과 성화의 분여

욕동이나 추동은 내면의 동기처럼 보이지만 대상과의 관계를 전제하는 개념이다. 좌절이란 결국 대상에게서 받고자 했던 이쁨과 사랑의 좌절이기 때문이다. 그 좌절은 이쁨을 받는 자기만의 방식을 발달시키게 되고 그렇게 사랑과 인정의 욕구는 대상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욕구이면서 동시에 대상이 뿜어내는 가장 기묘한 매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예컨대, 곤충들이 보이는 "주광성"은 곤충이 가진 빛에 대한 끌림이기도 하지만 빛이라는 것이 지닌 고유한 특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욕동이 우리 편에서 작동하는 힘일 때, 이것을 drive라고 하지만 특히 초자연적인 끌림의 경우,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될 때,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가진 고유한 매력과 거룩에 우리 내면에 심긴 믿음이 끌림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리스도 그 자체가 가진 끌어당김을 derive from라고 한다.

우리가 칭의는 전가(imputation)이라는 단어로 설명하지만 성화는 분여(impartation)란 표현을 사용한다. 믿음이라는 내적 동기(drive) 역시 심겨진 습관이며 이 믿음이 교회로부터 제공된 외적인 은혜의 방편에게 끌림(derive)으로 인해 은혜가 주입된다. 이 주입된 은혜를 분여(impartation)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분여된 은혜가 있어야만 순종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예레미야나 에스겔에서 말하는 우리 심비에 새긴 새로운 율법이 되는 것이다.

분여는 사실 신사도운동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안수하면 능력이 나눠진다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정통 장로교회 안에서의 분여는 첫째 내적으로 참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둘째, 은혜의 수단을 사용해야 가능하다. 셋째, 그것이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넷째, 이 두 가지 끌림, 곧 믿음이라는 drive와 그리스도로부터 derive from이 서로 스파크가 일어서 은혜의 분여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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