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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원의와 진선미

그리스도가 가지신 의를 원의라고 한다. 이는 아담의 창조시 아담에게 불어넣어졌던 것이다. 에베소서 4:24과 골로새서 3:10에 나타나 있다. 참 지식과 의와 거룩인데, 토마스 빈센트는 소요리문답 해설에서 이 지식은 인간 지성에, 의는 의지에, 거룩은 정서에 담겼다고 말한다. 원의를 통상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며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거칠게 표현하면 지정의는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지정의는 진선미를 담는다. 지성은 진리가 무엇인지 다시 말해서 사실이 무엇인지를 담으며 의지는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담는다. 우리 정서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담는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진리를,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선을, "판단력비판"을 통해 아름다움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원의가 참 지식과 의와 거룩인 것은 이런 진선미에 대한 고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지정의 안에 담겨져 우리로  그 형상을 닮아가게 한다. "의의 주입" 교리는 종교개혁에서 변곡점을 맞는다. 여기서 의의 주입은 원의의 주입으로 어거스틴이 마니교의 결정론적 운명론에 대항하여 제안한 신학적 변증이다. 마니교도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우리가 은혜에 의지하여 선을 행하게 됨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후기에 팰라기우스와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팰라기우스의 입장은 마니교의 정확히 정 반대였다. 우리에게 선을 행할 의지가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에 대한 논박으로 여기서 선행 은총, 곧 준비하는 은혜 교리가 처음 나오게 된다. 이는 우리 타락한 본성이 선을 행하기에 무능함에 기대어 있다.

이렇게 결정난 듯한 문제가 중세 들어 재발한 것이다. 주입 교리의 문제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범죄를 행하는 데서 발생했다.  죄를 짓고 나면 어거스틴을 따라 의의 부재, 곧 의의 상실의 상태가 되고 이를 회복하려면 고해-보속-사죄선언을 거쳐야 했는데 이 과정에 보속이 마치 의의 공로처럼 된 것이다. 그래서 이를 절반의 팰라기우스주의라고 한다.

이 때문에 어거스틴을 따라 의화라고 칭하던 이 교리를 창의와 성화로 구분하고 칭의에는 "의의 전가"를, 성화에는 "은혜의 주입" 교리로 장리한 것이다. 이때 전가란 이 원의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만 실재로 존재하고 우리는 그 복사본과 같은 의를 지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범죄에 의해 훼손되지 않고 계속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로 덮어쓰게 되는 것이다. 이는 칭의가 법정적 영역임을 함축한다. 동시에 성화는 존재적 영역임을 함축하고 은혜의 주입으로 전가된 의가 활성화되는 것이다.

거룩이 우리 정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에드워즈는 참된 믿음이 대체로 거룩한 정서에 있다고 진술하는 것은 믿음의 작동방식이 단순히 지적이며 법정적 영역에서만 아니라 우리 정서적 영역에서 횔성화되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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