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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의인의 긍휼

요즘 잠언을 애독하고 있다. 인상적인 말씀 한 구절을 소개하자면, "의인은 자기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잠언 12:10)는 구절이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짐승의 피는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없다. 그럼에도 구약에서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를 다룬 것은 짐승이 사람과 가깝기 때문이다.

바빙크는 짐승에게도 혼이 있다고 가르친다. 실제로 전도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21).

특히 창세기 2장의 분위기는 반려를 짐승들 중에서 찾다가 못 찾은 것 같은 뉘앙스를 하고 있다. 18절에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하고선 19-20절까지 짐승의 이름을 짓는다. 특히 20절의 후반절에는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되어 있다. 이는 돕는 배필을 짐승에게서 찾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태초의 창조의 상태는 지금과 같은 자연의 상태가 아니다. 하와가 뱀이 말하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그리고 위의 암시로 보아서 만물을 다스림에 있어서 짐승과의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서 같은 경우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하게 될 때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성경의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과거 애완견이라고 했지만 최근에는 반려견이라고들 말하는 변화는 일종의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사실 바람직하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문제는 사람에게 쏟아야 할 사랑과 관심을 짐승에게만 쏟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우려와는 달리 해마다 수많은 반려견이 여름 휴가 때 버려지고 있다. 전라도의 어느 지역에서는 안락사를 시키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자 거기다가 가져다 버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반려견을 키운다고 사람에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의로운 사람은 반려견이나 사람을 공정히 긍휼로 대하고 악인은 반려견에게도 악을 행하고 사람에게도 악을 행한다.

오히려 사람에게는 외식으로 대하지만 말 못하는 짐승이기 때문에 자기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개나 고양이를 가져다버리는 것은 이미 학대가 있었다는 의미며 그 생명을 돌보는 교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쁘고 재롱 피우는 모습만 보고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개나 고양이한테 관심을 많이 둬서 사람에게 소홀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소홀한 사람이 개나 고양이를 통해 그나마 사랑을 배울 기회를 갖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집에 장애아가 태어나면 하나님이 천사를 가정에 보내셨다고들 말하곤 한다. 누군가를 돌보면서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성경은 짐승을 돌보는 것에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악인이 보이는 긍휼은 잔인이라고 말한다. 예전 서부 활극에서 자기가 타던 말의 고통을 덜어준다고 총으로 쏴서 죽이는 행태가 떠오르는 말이다.

짐승의 생명을 돌보지 않는 자들이 사람의 생명인들 돌보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 긍휼의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들이겠는가?

물론 이런 자연적 구분이 우리 구원과 관련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은 자기 생명을 돌보신 그리스도를 생각한다면, 만물을 충만케 하실 그리스도의 충만으로서 교회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자연의 생명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세월호는 정치 쟁점 이전에 사람이면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면서 그들의 아픔을 돌보는 것이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이며 서울 시장이 자신의 생명을 끊었을 때, 유족들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정치 쟁점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도리이며 신자됨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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