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고통
노승수 목사
우리가 인간의 고통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엄밀하게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고통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이라서 타인은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언어는 기본적으로 사적일 수 없고 사적 언어의 불가능을 역설했죠.
시편에서도 인간이 겪는 다양한 고통과 절망을 우리는 만날 수 있고 욥기에선 의로운 사람을 살았음에도 찾아오는 환란과 고난 가운데 고통당하는 욥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는 아내의 정신 이상 때문에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고통을 경험했고, 한스 큉도 파킨슨 병 때문에 안락사를 호소한다고 하죠.
우리가 고통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이유들입니다. 인간사에 더러는 인간으로서 감내할 수 없는 고통에 노출...된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참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들을 허락지 않으심을 믿으며 유일한 위로가 그리스도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이 말입니다.
심각한 우울증으로 자살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충동을 결행해버린 것입니다. 사실 우울증의 자살충동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이럴 경우에 말이죠. 기계적으로 그가 지옥간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로마서 8장에 근거해서 인간의 어떤 행동도 천사들의 어떤 능력도 마귀의 어떤 위협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인간의 자살이라는 것이 그를 영원한 형벌로 인도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목회적으로는 우리가 인간이 겪는 고통과 자살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위로에 의거해서 권면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신 섭리에 근거해서 권면해야 합니다. TV에 자살 사건이 하나가 보도가 되면, 베르테르 효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감행합니다. 우리가 고통을 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을 두려움으로 겁박하는 것이 할 일이 아니라 진실된 그리스도의 위로로 돌보는 일이 우선이 아닐까요?
필립 얀시의 책이었던 거 같은데 제목은 생각이 안나네요. 루게릭 병으로 죽어가던 자매 그녀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신앙에 대해선 냉소적이었죠. 그런 그녀를 어는 자매회에서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따스한 온기를 경험했고, 마침내 그녀의 냉소적인 마음이 녹아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면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목회는 그런 게 아닐까요? 감히 누구의 고통을 우리가 재단할 수 있을까요?
2014.02.24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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