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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존 오웬, 내 안의 죄죽이기, 브니엘, 2007

존 오웬, 내 안의 죄죽이기, 브니엘, 2007
존 오웬
존 오웬은 1616년 영국 옥스퍼드주 스타드햄에서 그곳 교구목사인 헨리 오웬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교도 시대의 신학과 신앙을 연구하는 많은 이들이 존 오웬을 가리켜 ‘최후의 청교도 신학자’로,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심오한 신학 저서를 방대하게 내놓은 저술가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신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신실한 목회자요, 은사받은 대 설교자요, 옥스퍼드 그리스도교회의 감독이요, 옥스퍼드대학교의 부총장이요, 크롬웰 경의 국목이요, 한 세대에 걸쳐 가장 많은 신학적 저작을 낸 저자요,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긴 인격자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15세에 옥스퍼드 퀸스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았고, 대학을 나와 석사학위 과정을 거칠 때 쯤 이미 수많은 고전에 통달하는 한편, 헬라어와 라틴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히브리어와 랍비들에 대한 지식에도 깊이 몰입하는 등으로 천재성을 널리 인정받은 인물이다. 70세에 못미치는 그의 전 생애를 쉼이 없는 학문 연구와 목회자로서의 열심적인 삶에 바친 결과 말년에 담석증과 천식으로 고생하다가 1683년 8월 24일에 소천하였다. 
저자 서문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주요 이유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이유는 오늘날 크리스천이라고 공헌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주위의 유혹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혹들은 주로 크리스천들이 겉으로는 세상을 평화스럽게 살고 있지만 동시에 속에서는 죄와의 싸움으로 갈등하고 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자신들의 행동을 뒤돌아 볼 필요성을 깨닫도록 북돋아주고 싶고, 성도들에게 어떻게 죄를 이길 수 있는지 좀 더 분명한 지침들을 주고자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최근에 죄를 죽인다고 하면서 위험한 실수의 함정에 빠진 일부 사람들의 행태 때문이다. 복음의 신비와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능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과 자신의 선조들도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죽이기 위한 방법들을 스스로 고안해서 추종자들의 목에 씌우고 있다. 사람들의 양심에 근심을 일으키고 미신과 결국 자기 의를 생산케 하는 개탄스런 결과를 가져왔다. 
은혜 언약 아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답을 주고, 복음의 글과 정신에 부합하는 담론이 되기를 소원한다. 확실히 성도들의 마음속에 복음적인 방법으로 죄를 죽이는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그들의 영혼이 안전한 길을 통해서 안식처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이 작업이 필요하다. 
진실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나의 목표와 바람은 이 글을 통해 나의 마음과 다른 성도들의 마음과 삶에서 죄를 이기고자 하는 열망과 모든 분야에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가 더욱 고취되는 데 있다. 
1956년 옥스퍼드, 존 오웬
1. 육체적 행위를 죽이는 일
그러나 만약/ 너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살리니
2. 죄를 죽이기 위해 힘써야 할 이유
우리 속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죄의 잔존/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죄의 활동성
죄는 항상 극단을 추구한다/ 우리의 죄를 대적하는 성령
의무를 소홀히 했을 때의 결과/ 우리의 의무는 온전히 거룩해지는 것이다
3. 죄를 죽이기 위한 원천인 성령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죄를 이길 수 없다/ 죄를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4. 영적 은혜의 전제 조건
평화와 위로는 하나님만이 주시는 특권/ 죄를 죽이는 삶과 영적 은혜의 상관 관계
5. 죄를 죽인다는 의미
마음속에서 죄를 몰아내는 것이 죄를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죄를 숨기려는 것이 죄를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차분한 성품이 죄를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시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죄를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순간적으로 죄를 이긴 것이 죄를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6. 죄를 죽이기 위한 3가지 지침
지침1. 타락한 죄의 습관을 무력화시켜라/ 지침2. 죄의 힘을 억제하라
지침3. 죄의 정욕과 싸워 승리하라
7. 죄를 죽이기 위한 기초와 원리
그러므로 성령을 소유한 자만이 죄를 죽일 수 있다/ 죄를 죽이는 일은 중생과 관련이 있다.
원리1. 그리스도께 먼저 관심을 가져라/ 원리2. 모든 영역에서 순종하라
8. 죄를 죽이기 위한 9가지 방법
방법1 정욕에 동반되는 여러 위험한 징후들을 살펴라/ 방법2 죄의식, 죄의 위험, 죄의 사악함을 항상 인식하라/ 방법3 양심으로 죄를 느껴라/ 방법4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기를 끊임없이 갈망하라/ 방법5 성품 속에 죄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라/ 방법6 죄에 대항하여 항상 깨어 있으라/ 방법7 처음부터 죄에 대해 결사적으로 대항하라/ 방법8 자신의 사악함을 깨닫고 겸손하라/ 방법9 죄 앞에서 스스로에게 평안하다고 말하지 말라
9. 죄를 죽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죽여라
그리스도의 죽음, 십자가 그리고 보혈의 토대 위에서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라
그리스도의 죽음의 토대 위에서 믿음을 가지고 행할 때의 전제 조건
죄를 죽이기 위한 성령의 사역
1. 육체적 행위를 죽이는 일
이 글의 토대는 롬 8:13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이 말씀에 함축된 위대한 복음의 진리와 신비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로마서 8장 서두(1-3)에서 사도 바울은 이신칭의의 교리와 그 은혜에 참여한 자들의 축복을 재요약해서 말한 후, 그것을 더욱 확대설명하면서 성도들이 갖는 거룩과 위로에 초점을 맞춘다. 거룩을 위한 바른 동기들을 주장할 때, 바울은 13절에서 죄의 반대편 관점에서 그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여기서 ‘육신대로 살면’이라는 말과 ‘죽는다’라는 말은 확실히 성도가 추구해서는 안되는 삶믈 가리킨다. 그리고 그 의미는 13절 하반절의 말씀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의 기초가 되는 13절 후반부를 분석하면, 첫째 우리가 행해야 할 의무에 대해 먼저 말한다. 즉,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의 자격 조건을 언급한다. ‘너희들’. 셋째로 그 의무를 수행할 때 어떤 약속이 따르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되면 산다는’ 약속이다. 넷째로 이 의무 수행의 원천과 수단은 성령이라고 말한다. ‘영으로써’. 다섯째로 여기서 제시되는 명제는 모두 조건부라는 점이다. ‘만약--한다면’. 
“그러나 만약”
첫째, 약속의 조건으로 제시된 의무를 수행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의무를 수행하여 약속을 받는 일은 매우 불확실하다. 그가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의무 조항을 절대적으로 충족시켜야 하는데, 실상 그에게는 그런 의무 충족을 확실히 보장해 줄 수 있는 원천이나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8장1절에서 이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사람들로 묘사했다. 이들은 확실히 그 의무를 충족시켜 약속을 성취하는 자들인 것이다. 
둘째 일반적으로 조건으로 제시된 의무와 약속 사이에는 논리적 응집력이 있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의무와 ‘산다’는 약속 사이에 확실한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 ‘이 약을 먹는다면, 병이 낫게 될 것이다’와 같다.
하지만 죄를 죽이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아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고 말하면서 영생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의 관계는 수단과 목적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자유롭게 약속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 수단을 미리 정하신 것이다. 수단은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결국 그것은 자유로운 약속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은사를 얻는 것이 사람의 행동에 달려 있다면, 그 상관관계는 일관적이지 못하고 불확실한 것이다. ‘죄를 죽이는 것과 영생 사이에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연관관계가 있다’. 당신이 이 수단을 사용한다면 그 목적을 선물로 얻게 된다. 의무에는 이런 동기와 효력이 있다. 
“너희가”
그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당사자들이다. 성도들을 가리킨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사람들로서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5절)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살려진(10-11절) 자들이다. 이 의무를 성도가 아닌 사람들이 억지로 수행한다면 그 결과는 이 세상에 만연된 미신과 자기 의로 귀착될 것이다. 즉, 복음을 외면하고 경건하려는 사람들의 인간적 업적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롬10:3-4, 요 15:5).
결국 이 책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나의 논점은 죄의 지배에서 자신이 해방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아무리 훌륭한 성도일지라도, 그는 마음 속에 거하는 죄의 힘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으로써”
이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원천은 성령이다. 이 영은 11절에 언급한 ‘그리스도의 영’, 즉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9절)이다. 이 영을 통해 우리가 다시 사는 것이다(11절). 또한 이 영은 ‘양자의 영’(15절)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는 영(26절)이다. 성령 외에 다른 방법으로 죄를 죽이는 것은 헛된 일이다. 다른 모든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이 의무를 성취할 수 있다. 다른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스스로 고안한 방법을 가지고 자신의 힘으로 죄를 죽이고자 하는 노력은 세상의 모든 거짓된 종교의 본질이며 그것은 결국 자기 의이다. 
“몸의 행실을 죽이는”
여기서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몸의 행실’이라는 뜻을 무엇인가? ‘죽인다는 것’(극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첫째, ‘몸’은 상반절에 있는 ‘육신’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몸은 우리의 타락한 품성과 관련해서 우리 속에 그것이 자리잡고 있는 좌소이며 도구를 뜻한다. 몸의 지체는 불의를 섬기는 종들이라고 할 수 있다(롬6:19). 결국 몸이 하는 것은 타락한 육체 또는 정욕으로서 우리 속에 거하는 죄의 속성이다. 몸은 ‘옛사람’과 ‘죄의 몸’(롬6:6)과 같은 뜻이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전인적 모습으로 정욕과 병적인 감정이 거하는 곳이다. 
둘째, 몸의 행실. ‘행실’은 외적인 행동으로 갈5:19에서 현저하다고 명명한 ‘육체의 일’을 가리킨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육체의 행실을 죽이기 위해서는 그 행실의 원인부터 잘라내야 한다. 바울은 그 원인들을 육신의 정욕이 지향하는 행동들로 묘사했다. 정욕은 인간을 속이고 거짓된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완벽하게 죄를 짓도록 만든다. 바울은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서두에서 죄의 정욕이 죄의 행동의 토대이자 원리라고 바울은 지적한다. ‘몸의 행실’은 ‘육신의 생각’(롬8:6)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 행실은 육체의 열매와 행동의 원천이 되는 ‘육체의 정과 욕심’(갈5:24)과 동일한 의미이다. 이 몸에 대해서 롬8:10은 그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셋째, ‘죽인다.’ 이 비유적 표현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음의 상태로 놓는다는 뜻을 함축한다. 그 힘과 활력의 원리들을 제거해서 더 이상 행동하거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우리 속에 거하는 죄를 살아 있는 인격체인 옛 사람으로 비유한다. 그 옛 사람은 자신만의 기능, 자질, 지혜, 기술, 통찰력, 힘을 가지고 있다.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이 옛 사람을 죽여서, 즉 죽음의 상태로 놓아서,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옛 사람을 완전히 죽이고 극복한 모범적인 예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라고 말하고(롬6:6), 우리 자신이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지적한다(롬6:8). 그 결과 비록 우리 마음속에 부활에 반대하는 파괴적인 소욕들이 여전히 공존하지만(갈5:17), 성도인 우리는 이제 주님의 부활에 처음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롬6:3-5). 이 부활의 완성은 점진적으로 우리의 일생을 통해 성취되어 간다. 롬8:13은 우리의 썩어질 몸에 거하는 죄들을 죽여서 더 이상 육신의 행실을 하지 못하도록 그 힘과 능력을 제거하는 일이 성도들의 의무임을 보여주고 있다 
“살리니”
이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약속이 주어진다. 앞에 언급된 죽음의 위협과 대조를 이룬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갈6:8). ‘썩어진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멸망의 심판을 뜻한다. 약속한 생명은 영생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영적인 생명을 뜻한다. 신분상의 변화에서 파생되는 기쁨, 위로, 그리고 활력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3:8). 한마디로 “너희가 살리니”라는 말은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선하고 활력있는 안락한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저 세상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육신의 행실을 죽일 때 우리는 영적 삶의 활력, 힘 그리고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의무 수행의 동기가 된다. 
2. 죄를 죽이기 위해 힘써야 할 이유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3:5)
이 편지의 수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1절), 그분과 함께 죽은 자(3절), 그들의 생명이 그리스도이며 그분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사람들이다(4절). 죄를 죽여라. 실로 죄를 죽이기 위해 매일 노력하라. 그리고 항상 살아 있는 동안 죄를 이기는 삶을 목표로 삼으라. 하루라도 이 일을 중단하지 말라. 죄를 계속 죽이지 않는다면 죄가 당신을 죽일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실제로 죽어서 그분을 통해 새 생명을 얻은 당신은 더 이상 이 의무를 회피할 수 없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15:2).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일반 성도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바울도 그런 일을 매일매일 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그런 의무와 일들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우리 속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죄의 잔존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죄는 항항 우리 속에는 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는 죄를 죽여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죄를 안 짓고 온전하게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헛되고 거짓된 무지한 사람들이다. 더욱 영악하게 온전한 상태에서는 선과 악의 차이가 사라지게 된다고 까지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완전함이란 사실상 가장 사악한 것이다. 그들은 육신의 허황된 생각으로 교만해져 복음과 상관없는 전혀 다른 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2).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새 사람의 계속적인 변화로 인해 옛 것이 파괴되고 무너진다는 뜻이다. 
영을 대항하는 육을 가진 탓에 우리는 원하는 바대로 모두 순종하지 못한다. 이 ‘사망의 몸’(롬7:24)인 우리의 육체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의 낮음 몸이 변화되는’ 방법밖에 없다(빌3:21). 죄를 죽여야 할 의무가 있는 우리는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를 극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 적을 물리쳐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이 적이 죽기도 전에 싸움터를 떠난다면 그는 자신의 의무를 온전히 수행한 것이 아니다(갈6:9,히12:1,고후7:1).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죄의 활동성
죄는 우리 속에 거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활동하여 육체의 행실을 행하도록 자극한다. 죄의 물줄기는 외관상 고요해 보이지만 그것은 조류의 움직임이 심한 매우 깊은 물이다.
또한 죄는 우리 속에 거할 뿐만 아니라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의 법과 싸운다(롬7:23). 그래서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른다(갈5:17). 욕심은 우리를 속이고 유혹하는 죄이다(약1:14). 욕심이 추구하는 목표는 악이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9). 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자신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자신 속에 거하는 죄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죄는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의 행동을 오염시키려고 발악을 한다. 그런 죄를 죽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 죄는 교묘하고 강력하여 고삐를 늦추지 않고 호심탐탐 우리의 영혼을 죽이기 위해 기회를 엿본다. 우리의 날은 항상 죄가 이기든지 아니면 죄를 죽이든지 양자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믿음의 성인들은 죄로부터 해방된 후에도 죄로부터 피할 수 있는 도피처는 없으며, 죄와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는 항상 극단을 추구한다
우리가 죄를 계속적으로 죽이지 않고 방치한다면, 그것은 영혼을 파괴하는 더욱 더 큰 저주스런 수치를 가져다 준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
죄는 항상 극단을 추구한다. 즉, 우리를 유혹할 때 그 유혹과 같은 노선에서 가능한 한 더 큰 죄를 짓도록 유도한다. 그 결과 불결한 생각은 나중에 우상숭배가 되고, 탐심의 욕구는 탄압으로 변하게 된다. 죄는 우리 마음속에 정욕을 자극해서 그 경로를 통해 더욱 큰 죄의 최고봉에 오르도록 유도한다. 무덤과 같아서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 죄가 승리할 때 인간은 강퍅해져서 파멸하게 된다(히3:13). 죄의 행동과 속삭임은 처음에는 매우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일단 우리의 마음 속에 그 뿌리를 내리면 죄는 계속해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 더 큰 죄를 짓도록 유도한다. 죄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을 포기하고 대적하도록 하는 데 있다. 죄의 거짓됨 때문에 그렇게 된다. 
죄를 막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죄를 죽이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므로 매 시간마다 죄의 뿌리를 마르게 하고 그것의 머리를 쳐서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를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 
우리의 죄를 대적하는 성령
우리에게 성령과 새로운 품성이 주어지게 된 것은 죄와 그 욕심을 대적하기 위함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라는 말 다음에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갈5:17)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육체가 성령을 거스르는 것처럼 우리 속에 주어진 성령, 또는 새로운 영적 품성은 육체를 거스르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특권을 주셨다(벧후1:4-5). 우리 속에는 육체 속에 거하는 죄의 법뿐만 아니라 마음의 법이 생기게 된다(롬7:23). 이 두 개의 법이 싸울 때 마음의 법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그것을 가두고 죄의 법을 자유롭게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처럼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영적 싸움은 우리의 삶과 영혼이 달려 있는 싸움이다. 매일매일 죄를 이기기 위해서 우리의 새로운 품성과 성령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최대 적과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훌륭한 자원을 경홀히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많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 
의무를 소홀히 했을 때의 결과
이런 의무 태만은 우리 영혼을 사도 바울이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라고 말한 상태와 완전히 정반대가 되는 상황으로 만든다. 거꾸로 다윗의 집이 죄를 짓고 사울의 집이 은혜를 받는 형국이 되는 셈이다. 마음 속에 주어진 은혜를 잘 간직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성취라는 두 개의 축이 필요하다.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 때 은혜는 시들게 되고 대신 죄의 욕망이 번성하게 된다. 그래서 마음이 점점 악화되고 강퍅하게 된다. 
죄를 죽이는 의무를 태만히 함으로써 죄가 승리를 거두게 되면 우리의 영혼의 뼈는 쇠하게 되며(시31:10,51:8) 사람은 연약해져서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시40:12, 사33:24). 한때 겸손하고 상냥하며, 상한 심령을 갖고, 타인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주님의 계명에 열심을 가진 자라고 여겨졌던 크리스천들이 죄를 죽이는 의무를 소홀히 해서 결국 세상적이고 육적이며 차갑고 화를 잘 내며, 세상의 사람들과 사물에 동화되어 신앙을 저버리고 무서운 유혹에 빠져드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죄를 죽이려는 노력에는 두 극단이 있다. 한 극단은 굳은 결의로 죄를 이기려는 자세인데, 이것은 결국 율법적인 태도로 남의 흠을 잡고, 분노와 시기, 그리고 악독과 교만함을 낳는다. 또 다른 극단은 자유함과 은혜라는 핑계로 죄를 죽이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진정한 복음적 입장은 이 양극단을 회피한다. 아쉽게도 오늘날 우리의 모습 속에는 이 중용의 입장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우리의 의무는 온전히 거룩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의무는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거룩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고후7:1). 우리는 매일 은혜 안에서 자라나야 하는 의무가 있다(벧전2:2).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 우리의 속사람은 새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후4:16). 하지만 이와 같은 의무들은 매일 죄를 죽이지 않고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죄의 소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거룩함에서 진보를 이룰 수 없다. 죄의 공세를 느끼지 못하고 죄를 이기기 위해 자신을 자제하지 않은 사람은 죄에 대해 죽었다기보다 죄와 타협한 사람이다.
제일 원리는 처음 회심해서 죄의 자각과 수치심을 느끼고 죄와 대항하는 새로운 원리를 마음속에 심어 죄를 이기는 보편적인 삶의 토대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성도의 마음속에는 죄가 거하며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자칭 신앙인이라고 공언하는 일반 사람들의 삶을 보면 죄를 죽이는 자세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헛된 시간 낭비, 게으름, 비생산적인 자세, 시기, 싸움, 알력, 경쟁, 분노, 교만, 세속적인 생각, 이기심 등이 오늘날 크리스천의 지표가 되고 있다. 죄를 죽이지 않는 신앙인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악은 무엇일까?
우리 자신에게 있는 악
죄를 죽이지 못하는 원인은 마음속에서 죄의 쓴 맛을 음미하지 않고 그 죄를 그대로 삼키기 때문이다. 은혜와 자비에 대한 생각에 자신의 상상력을 고정시켜 일상적인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통 없이 그대로 소화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음탕한 것으로 바꾸고, 죄의 속임수로 인해 그 마음이 강퍅해지게 된다. 인간의 마음이 거짓되고 부패했다는 것을 이처럼 잘 보여주는 증거도 사실 없다. 
타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악
1) 죄를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도 선한 상태에 있다는 잘못된 선입관을 갖고,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경우이다. 죄를 이기려는 노력이 없는 신앙인의 내부는 모두 오염되고 무가치한 것들이다. 죄를 죽이지 않는 사람들은 방탕함을 부인하지만 실제로 매우 세속적이다.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면서 전적으로 자신만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은 영적이지만 실제의 삶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언급하지만 철저히 세상과 영합한 삶을 영위한다. 죄로부터 용서받은 사실을 자랑할 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2) 죄를 죽이지 못한 신앙인들은 타인들에게 그들도 자신들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잘못된 믿음을 심어 주어 그들을 속인다. 종교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외형적으로 높이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럴지라도 결코 영생을 얻을 수는 없다. 
3. 죄를 죽이기 위한 원천인 성령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죄를 이길 수 없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종교 행태는 대부분 죄를 이기기 위한 잘못된 방법과 수단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죄를 죽이기 위해 ‘거친 베옷’을 입는데 이것은 사실 거짓된 위선이다. 그들의 맹세, 계율, 금식, 고행 등은 모두 죄를 이기기 위한 행위와 연관된다. 혹자는 로마 가톨릭 수사들을 ‘무저갱’에서 나오는 ‘황충’(계9:2)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괴롭혀서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계9:6)하게 한다. 로마 가톨릭은 사역의 본질과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른 사람들을 더욱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데 죄를 이기기 위해 로마 가톨릭 신부들이 고안한 방법과 수단들을 복음의 빛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똑같이 답습하며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이다.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로 죄를 죽이고 극복할 수 없다. 그들이 사용하고 주장하는 방법과 수단들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온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잡다한 고행적 행위들은 모두 인간적인 방법이라는 공통된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지정한 방법인 기도, 금식, 철야, 묵상 등과 같은 것들을 로마 가톨릭 사람들이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샘에서 나오는 물줄기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이것들을 샘 자체로 동일시한다. 
옛날 수도원 주창자들이 행한 미신적인 고행들을 보면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끔찍하다! 경직된 방법으로 죄를 이기려는 시도로 인해 타락한 옛 사람을 죽이기보다 천성적인 인간적 성품을 죽인다. 죽을 몸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가는 자연스런 몸을 죽인 것이다. 
의무는 건강한 영혼에게는 훌륭한 음식이다. 하지만 병든 영혼에게는 결코 약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영혼을 속이는 사람들은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죄를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이 죄를 죽이는 일을 위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겔11:19). 실로 이런 일은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다른 방법은 실패한다(사57:17-18).
둘째, 죄를 죽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사로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그리스도는 오직 이 성령을 통해서만 성도 안에 들어와 역사하신다. 우리가 죄를 이기는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 자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그리스도 때문이다.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5:31). 
첫 번째 질문: 성령이 어떻게 죄를 죽이는가? 
첫째, 성령은 우리 마음을 은혜로 넘치게 하고 육체의 열매에 반하는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게 함으로써 죄를 이기게 만든다.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는 대조 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러면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한가? 그 해답은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함으로써” 일어난다(25절). 즉 우리 안에 내주하는 성령의 풍성한 은혜에 따라서 행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이야말로 죄를 이기는 가장 위대한 방법이다. 성령은 육체의 열매와 우리 속에 거하는 죄의 활동을 무너뜨리고 그것들을 대적하게 하여 주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자라나고 성장하도록 역사하신다. 
둘째, 성령은 실제적인 효력을 발휘하여 죄의 뿌리와 습관을 무력화시키고 파괴하고 제거한다. 성령은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사4;4)이다. 성령은 돌같은 우리 마음을 전능한 능력으로 없애주신다. 실로 성령은 정욕의 근원을 소멸시키는 불이시다. 
셋째, 성령은 믿음으로 성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져다 주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분의 고난에 동참케 한다. 구체적 방법은 나중에 자세히 다룬다.
두 번째 질문: 죄를 죽이는 것이 오직 성령의 사역이라면 왜 성경은 인간인 우리에게 죄를 죽이라고 권면하는가? 
첫째, 성령의 사역 방식은 우리 안에 은혜를 주고 그 은혜를 통해 우리로 선행을 하도록 역사하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는 분이시다(빌2:13). 
둘째, 성령은 우리 안에서 죄를 이기도록 역사하실 때 죄를 이기는 행위를 여전히 우리의 순종의 행동으로 간주하신다. 성령은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받기에 적합할 때만 우리에게 간섭하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역사하신다. 순종을 위한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는 방식은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어 태만하지 않고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죄를 자각하지만 그 죄를 대항할 힘이 없는, 가련한 영혼들은 죄를 죽이기 위해서 수많은 기괴한 방법과 의무들을 지어내어 자신들을 속박으로 얽어맨다. 하지만 그 결과는 헛된 것이기에 결국 하나님의 영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된다. 그들의 싸움은 승리 없는 싸움이며, 평화 없는 전쟁이다. 이들의 삶은 항상 노예와 같다. 그들은 마치 일부러 죽기 위해 적의 칼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람과도 같다. 
율법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죄의 세력에 굴복하고 만다. 단순히 죄의 겉먼지만 털어낼 뿐이다. 다시 죄와 대면하게 된다. 그들이 죽였다고 생각했던 육체의 욕심은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은 채 다시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이런 노력 자체도 하지 않는 상태는 불을 보듯 뻔하다. 
4. 영적 은혜의 전제 조건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사 57:18)
마지막 원리는 우리의 영적 삶의 활력과 위안은 죄를 죽이고 이기는 삶에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힘, 위로, 능력, 그리고 평강 등을 갈구한다. 그것들은 계속 죄를 죽일 때만 가능한 것이다. 
평화와 위로는 하나님만이 주시는 특권
그렇다고 죄를 죽이면 무조건 그런 것들이 온다는 뜻은 아니다. 평화와 위로는 주는 것은 하나님만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위로의 은혜를 베푼다고 말씀하신다(사57:18). 그러면 어떻게 위로하시는가? 한마디로 새로운 창조를 통해서이다.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고 하신다. 평화를 얻는 수단을 이용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지만 그것을 베푸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특권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결정적 원인은 신분상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죄를 죽이는 삶과 영적 은혜의 상관 관계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의 영적 삶에서 위로와 활기는 많은 부분 죄를 죽이는 삶에서 기인한다. 어떤 면에서 죄를 이기는 삶은 절대적인 필요조건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영향을 미치는 효과적인 요소이다. 
죄를 죽이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결과
첫째, 죄는 영혼을 약하게 만들고 그 힘을 빼앗는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시38:3). 정욕을 죽이지 못할 때 그 정욕은 영혼을 삼키고 영혼의 기운을 빼앗아 약하게 만든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희미하게 하고 무력화시킨다. 영혼은 하나님께 똑바로 진실하게 “당신은 나의 기업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원하는 영혼의 갈망, 소망, 그리고 경외심 등이 죄로 물들게 된다. 
죄는 영혼의 생각을 죄에 대한 나쁜 생각으로 채운다. 육체를 윤택하게 하고 육체를 만족시킨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경건한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둘째, 우리의 영혼을 약하게 만드는 죄는 또한 영혼을 어둡게 만든다. 죄는 영혼 위에 드리워져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의 광채를 차단하는 빽빽한 구름이다. 
우리의 영적인 삶의 활력과 힘은 죄를 죽이는 삶을 살 때만이 누릴 수 있다. 죄를 죽이는 삶만이 우리에게서 죄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죄를 죽이기 위해 필요한 희생과 경계
죄를 죽이는 삶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서 더욱 번성할 수 있도록 때때로 은혜의 가지를 자른다. 영적인 삶의 생명과 기운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은혜의 나무가 얼마나 활력을 갖고 번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당신이 정원에 귀중한 화초를 심고 땅을 일구었지만 주위에 있는 잡초를 방치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화초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잡초를 제거해 주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화초는 확실히 번성하며 자랄 것이다. 
우리 마음에 심겨진 성령의 은혜도 이와 마찬가지다. 사실 성령의 은혜는 죄를 죽이는 의무를 태만히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계속 존재한다. 하지만 그 은혜들은 거의 죽은 상태나 다름없다(계3:2).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진배없는 은혜들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죄를 죽임으로써 마음 밭을 정결하게 하고 정욕의 잡초들이 생겨날 때마다 게속해서 뿌리를 뽑았다고 하자. 그리고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자라나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되면 마음속의 은혜들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유용한 목적으로 사용받게 된다!
또한 죄를 죽이지 않는다면 신실할 수가 없다. 죄를 죽이는 사람만이 가장 확실한 신실함의 증거를 가질 수 있다. 이런 신실함은 우리가 누리는 평화의 커다란 기초가 된다.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영혼이 자아와 격렬하게 싸워야 한다. 그런 싸움에서 신실함이 나오는 것이다. 
5. 죄를 죽인다는 의미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앞의 내용을 기초로 해서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성도들이 죄를 죽이려 할 때 발생하는 실제적인 문제와 질문들을 다루어 보기고 하자. 
마음속에서 죄를 몰아내는 것이 죄를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죄를 죽이는 일은 죄를 완전히 도말하거나 근절시키고 파괴시켜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진실로 죄를 완전히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마음속에 죄가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그것을 억제하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의 영과 은혜로 우리는 죄에 대해 괄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고 엄청난 성공과 함께 죄를 거의 계속해서 죽일 수 있지만, 그것을 완전히 죽이고 제거하는 일은 이 땅의 삶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빌3:12). 
바울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썼던 불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전히 우리처럼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씻김을 받아야 하는, 죄로 더러워진 몸을 가진 자였다(21절). 그것이 유익한 것은 모든 일에 우리를 위해 최선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온전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골2:10).
죄를 숨기려는 것이 죄를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죄를 죽인다는 것이 죄를 감춘다는 의미는 아니다. 외형적으로 죄의 행동을 포기하는 외식자를 보고 우리는 그를 변화된 사람으로 칭송할 수 있다. 그는 이전의 죄에다 저주스런 위선 죄를 덧붙인 자이다. 그는 전보다 훨씬 지옥의 문에 더 가까워진 셈이 된다. 이런 사람의 마음 속에는 거룩한 새로운 마음보다 더욱 교활한 마음이 자리잡게 된다. 
차분한 성품이 죄를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들 중에는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다혈질적인 기질이나 참을 수 없는 격정 등이 없이 고요한 사람들이 있다. 일생동안 화를 거의 내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보다 오히려 때때로 화를 내는 사람이 죄를 죽이는 삶을 더욱 잘 실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솔직하게 자신 속에 있는 불신, 시기 또는 그 밖에 영적인 죄를 시인해야 할 것이다. 
일시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죄를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당신이 아무리 신앙을 고백하고 모든 불의의 행위를 버렸다 할지라도 여전히 당신 마음속에는 이전처럼 정욕이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 정욕의 물줄기를 잠시 딴 곳으로 전환시켰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시 다른 형태로 위력을 발휘하며 나타나는 까닭은 은혜에서 떠난 인간의 속성 때문이다. 죄의 전환은 인간의 생활 방식, 관심, 관계, 그리고 계획에 영향을 받아 여러 형태를 취한다. 
세월이 가면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신체의 변화도 전환되어 나타나는 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젊었을 때 정욕을 추구하던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정욕의 형태가 바뀌는 것도 죄의 전환이다. 교만한 삶을 살거나 바리새인적인 삶 대신에 외설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자신이 특정한 죄의 형태를 피했다고 다른 모든 죄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는 단지 자신의 주인을 바꾸었을 뿐 여전히 죄의 종이다. 
순간적으로 죄를 이긴 것이 죄를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첫 번째 상황은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보고 극도의 슬픔을 느끼고 마음의 평화가 깨지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이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사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는 경우이다. 자신을 일깨우고, 죄와 자신에 대해 혐오감을 갖게 된다. 하나님께 나아가 생명을 위해 울부짖는다. 정욕과 싸우려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면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 
고린도교회의 죄상을 보면 그들이 처음에 얼마나 일치단결해서 죄를 무너뜨리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후7:11). 죄는 잠시 몸을 낮춰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도둑같은 죄는 상황이 달라지면 다시 살아나서 이전처럼 행동을 개시한다. 
두 번째 상황은 재난과 고통의 압박, 그리고 심판을 받는 상황이 올 때 그런 현재의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경우이다. 죄 지은 사람은 하나님의 분노로 벌을 받는 일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 분노를 피하기 위해 죄와 대항하기로 결심한다. 이 때 죄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죽은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죄가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의 다짐들이 사라지게 되면 죄는 다시 등장하여 이전의 활력을 되찾는다.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시78:32-37).
결국 가련한 영혼들은 자신들을 계속적으로 속인다. 그래서 자신들 속에 죄가 강력하게 살아 있고 틈만 나면 자신들을 괴롭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죄의 정욕을 죽였다고 착각한다. 
6. 죄를 죽이기 위한 3가지 지침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지침1. 타락한 죄의 습관을 무력화시켜라
정욕은 계속적으로 마음속에서 악을 행하도록 만드는 타락한 습성 또는 습관이다. 또한 성경은 진정으로 죄의 생각을 죽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씀한다.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사람은 항상 죄를 짓고자 하는 강한 성향에 사로 잡혀 있다. 사람 속에는 다양한 정욕이 있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죄를 짓는다. 결국 그 모든 것은 자아 만족을 지향한다. 
우리가 죽여야 하는 정욕과 영적인 병은 강력하고 뿌리 깊은 습관으로서 우리의 의지와 감정을 움직여 실제적으로 죄를 짓도록 만든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악을 품고 있으며, 그들의 정신은 악을 향해 기울여져 있고 육체에게 자양분을 제공한다(롬3:4).
타락한 죄의 습관은 다른 천성적인 습관이나 도덕적인 습관과는 다르다. 천성적인 습관은 영혼으로 하여금 부드럽게 자신의 원하는 바를 행하도록 유도하는 반면, 죄의 습관은 폭력과 충동을 통해 영혼에게 강요한다는 데서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은 영혼을 거스려 싸운다(벧전2:11).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죄의 습관을 약화시켜야 한다. 특정 정욕이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정욕의 물줄기는 그 사람의 생각을 어둡게 하고 그가 이전에 가졌던 지식들은 그의 의지에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된다. 대신 타락한 감정과 열정들이 죄로 인해 고삐가 풀린 채 분출된다. 특별히 정욕은 유혹을 통해 힘을 얻는다. 
어떤 정욕이 다른 정욕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폭력적인 경우가 있다. 바울은 음행을 다른 죄들과 구별하여 따로 명시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6:18). 
죄를 죽이기 위해 첫 번째 할 일은 이런 습관을 약화시키고 죄의 습관이 전처럼 우리에게 강요하거나 소동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다. 성경은 이런 행위를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갈5:24)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죄에게 힘을 공급하는 피와 정신을 차단하는 행동이며, 매일매일 우리가 우리의 죽을 몸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이다(고후4:16).
사람이 죄를 죽이려고 할 때 죄는 더욱 폭력을 휘두르며 발광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울부짖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죄를 계속 죽이게 되면 죄의 피와 정신은 소진되고 무기력하게 된다. 울부짖음도 거의 들리지 않게 된다. 계속해서 그 죄를 제지한다면 그것은 곧 소멸하게 된다. 
이러한 죄들을 사람이 십자가에 효과적으로 못박지 않는다면 일시적으로 물리칠 수는 있지만 곧 지치고 만다. 죄의 원리와 뿌리에 무관심하면 죄를 죽이는 그들의 노력에는 별로 진보가 없다. 
지침2. 죄의 힘을 억제하라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항상 죄의 힘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먼저 사람은 자신이 싸워야 하는 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실로 무엇보다 적을 주목하고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 적을 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이 싸움은 격력하며 위험한 투쟁이다. 이것은 영원과 관련된 싸움이다. 사람이 자신의 정욕을 일단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자체는 정욕을 죽이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 행위이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의 마음의 재앙을 깨닫는 행위(왕상8:38)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행위가 없다면 결코 죄를 죽일 수 없다. 하지만 두렵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적을 잘 알지 못한다. 그 결과 쉽게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자신들이 처해 있는 위험을 모른 채 타인의 충고나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대하16:10). 
둘째, 죄와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죄가 취하는 방법과 계책을 알고, 죄에게 유리한 상황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즉,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죄이며, 죄는 항상 그런 방식으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승리하기 때문에 그것을 막지 않는다면 죄는 계속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윗은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3)라고 말했다. 실로 가장 실제적인 영적 지혜는 마음속에 거하는 죄의 계책과 미묘함, 그리고 그 깊이를 알아내는 것이다. 즉, 죄의 가장 큰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그것이 상황과 기회들을 어떻게 이용해 유혹하는지, 그것의 논리와 핑계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은 전략은 무엇인지를 간파하는 것이다. 또한 성령의 지혜를 통해 옛 사람의 계교를 물리치고, 간교한 뱀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추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임전태세의 준비를 잃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싸움의 성공 열쇠이다. 
셋째, 죄를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죄를 향해 필살의 일격을 가할 수 있는 무기들로 자신을 무장해야 한다. 이것이 죄와의 싸움에서 가장 큰 핵심이다. 이렇게 무장한 사람은 죄가 잠잠할 때에도 죄가 죽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죄에 대해 새로운 일격을 가하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예였다(골3:5). 만약 당신의 영혼이 이와 같은 자세로 죄와 싸우고 있다면 확실히 당신은 이 싸움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셈이다. 그래서 결국 죄는 공격을 받고 죽어가게 될 것이다. 
지침3. 죄의 정욕과 싸워 승리하라
정욕과 빈번히 싸워 승리하는 모습은 죄를 죽이는 삶의 증거이다. 승리는 도망가는 죄를 추적해서 완전히 쳐부순다는 뜻을 가진다. 예를 들어 죄가 활동해서 우리를 유혹하고 육체의 정욕을 채우도록 육신적인 생각을 부추길 때 즉시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깨닫고 그 죄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 앞으로 끌어내어 정죄한 다음 끝까지 따라가 멸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이른 사람은 정욕을 그 원리와 뿌리까지 약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죄의 활동과 움직임은 전보다 훨씬 수그러지게 되고 그 사람의 신앙과 평화를 방해하지 못하게 된다. 
이상의 것을 종합하면, 우리의 타락한 품성을 부추기는 죄를 죽이는 일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죄를 죽이는 삶의 핵심은 우리를 유혹해서 죄를 짓도록 강요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드는 죄성을 무력화시키는 데 있다. 우리는 교만을 겸손의 마음으로 물리치고, 흥분을 인내로, 불결함을 청결한 마음과 양심으로 누그러뜨려야 한다. 또한 세상에 대한 욕구를 천국에 대한 생각으로 무력화시켜야 한다. 이러한 은혜의 원리들은 성령의 은혜로서 성령을 통해 역사하는 습관적 은혜이다. 
둘째, 성령 또는 우리 속에 새 사람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기민함과 활력을 가지고 죄와 대항해서 기쁘게 싸운다. 그러므로 죄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우리에게 제공된 이러한 자원들을 계속해서 활용하는 일이 중요하다. 
셋째, 그 두 가지 사실로 인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타락한 성품은 난공불락처럼 극복될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며 보편적인 의미에서 이미 정복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영혼은 죄의 저항을 어느 때보다 더 잘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죄가 나타날지라도 적어도 은혜의 언약으로 인해 그 죄는 우리의 양심에 있는 평화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다. 
7. 죄를 죽이기 위한 기초와 원리
성령을 소유한 자만이 죄를 죽일 수 있다
성령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죄를 죽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8:9).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 분에게 관심을 갖는 자는 성령을 소유한 자다. 그런 자만이 죄를 죽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8). 
타락한 상태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무엇인가? 그것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이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9절). 즉,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성도만이 육신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죄를 죽이기 위해 성령은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이 되어 우리를 “금,은 같이 연단하신다”(말3:2-3). 그렇게 해서 성령은 ‘찌기와 혼잡물’ 그리고 ‘더러움과 피’(사1:25,4:3)를 제거하신다. 하지만 성령의 사역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기본 바탕에 금과 은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죄를 죽이는 일은 중생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죄를 죽이는 일은 기본적으로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 실로 하나님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죄를 죽이라고 요구하시 않는다. 그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회심이다. 즉, 전 영혼의 회심이지 특정한 정욕을 죽이는 일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사도들의 말을 듣고 자신들의 죄를 자각했을 때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그래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울부짖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교만, 분노, 악의, 잔인함 등과 같은 죄를 죽이라고 했는가? 아니다. 대신 그들에게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했다. 그들의 영혼이 먼저 완전히 변화되어 자신들이 찌른 주님을 진정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그들이 낮아져서 죄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좋은 나무의 품종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결국 나의 요점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 성도가 아닌 사람은 아무리 그럴 듯한 노력으로 죄를 죽이려고 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열심과 열정, 그리고 세심함으로 마음과 생각에 대항해서 싸울지라도 결국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중생을 위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라
하나님은 말씀과 심판을 통해 사람들 속에 죄의식을 심어주신다. 그래서 사람들의 양심에 찔림을 주고,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불안하게 만드신다. 이 때 사람들은 다른 것에 전신을 팔지 말고 자신 앞에 주어진 일에 전적으로 매달려야 한다. 즉, 자신이 처한 죄의 상태를 자각해서 하나님께로 더욱 나아가는 일이다. 이렇게 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엉뚱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죄악들을 스스로 발본하기 위해 힘을 쏟는다. 이것은 자기 사랑의 발로로, 스스로 죄의 고통에서 해방 받고자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부르심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제쳐두고 다른 일에 정신을 판다. 
--- 중생을 위해 자신의 상태를 직시하라
죄로 양심이 고통을 받고 불안할 때 우리는 영혼의 위대한 의사인 주님을 찾아가 그 분의 보혈의 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가기보다는 스스로 죄와 일전을 벌이려고 노력한다. 정말 얼마나 많은 가련한 영혼들이 이와 같이 속아서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가!
죄를 죽이는 일은 진정한 성도만이 할 수 있다. 죄를 죽이는 것은 진실로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죄를 죽이는 일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끼끗하게 하였다”(벧전1:22). 
원리1. 그리스도께 먼저 관심을 가져라
죄를 죽이기 위한 첫 번째 원리는 죄를 이기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일반 사람들에게 죄를 인식시키고 죄의 중압감을 깨닫게 하는 일은 말씀 전파자들의 의무이다. 사역자들은 죄인들의 죄를 지적해서 그들이 처해 있는 근본적인 상태와 상황을 직시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역자들의 말을 듣고 오히려 사람들은 형식주의와 위선에 빠질 수 있다. 말씀 전파자는 항상 특정한 죄를 잘 활용해서 그것을 통해 죄인에게 자신의 전체적 상황을 깨닫게 하고 회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단순히 그들의 특정한 죄의 문제만을 지적하고 그들의 전체 마음을 변화시켜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행동이 아니다. 
가톨릭 신봉자들은 사람들에게 죄를 죽이도록 강요할 뿐, 믿음을 갖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부분적으로 죄를 죽이는 삶을 자랑하는 이들의 행위는 실제로 수치 속에서 자신들을 영화롭게 하는 행동이다. 개신교 안에도 중생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이들은 자신들에게 죄와 정욕을 고백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적어도 한 시즌, 또는 한 달 동안 죄와 싸울 것을 맹세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짚이 없이 벽돌을 만들게 하여 오히려 전보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격은 아닌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이런 일을 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관심 없이 죄를 죽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또한 성령 없이 죄를 이길 수 있는가? 그 사람은 결코 자신의 마음과 상태를 바꾸게 할 수는 없다. 결국 이런 궤변자들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선자 또는 자기 의를 세우는 자들로 만든다. 
원리2. 모든 영역에서 순종하라
모든 영역에서 성실하게 부지런히 순종하지 않는 한 죄의 정욕을 결코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무절제와 과식, 그리고 과음 등 찌든 몸의 습관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자신의 습관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상처만을 치료하기 위해 열심을 낸다면, 그의 수고는 결국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특정한 죄의 분출에만 집착해서 그것을 막다가 그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영적 상태와 기질들을 간과한다면 동일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 모든 영역에서 타락한 인간 본성을 간과하지 말라
단순히 죄에 대해 괴로워하는 것보다 죄를 죄로 미워하고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영적으로 죄를 진정으로 죽이는 토대이다. 모든 악한 것들을 죄로 여긴다면, 지금 당장 당신을 괴롭히는 정욕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는 모든 다른 악들에 대해서도 당신은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지금 고통을 주는 죄에 대해서만 싸우려 한다. 그렇게 되면 죄가 있어도 당신의 마음의 평화가 방해받지 않게 될 때 당신은 죄와 더 이상 투쟁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특정 정욕을 제거하는 일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모든 분야에서 순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당장 자신들에게 찔림을 주는 죄를 청산하는 일에만 매달린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 하나님이 정욕을 허락하시는 이유
첫째, 그것은 사필귀정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진실로 정욕은 교활하고 간교하며 반항하여 사람을 유혹한다. 사람이 정욕의 뿌리이자 근원인 자신의 마음을 부지런히 성찰하고 무엇보다도 생명과 죽음의 원천인 마음을 다스린다면 정욕은 시들해져서 죽게 된다. 하지만 방심하게 되면 정욕은 특정한 방법으로 분출되어 우리의 감정을 통해 생각 속으로 파고든다. 
둘째,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정욕을 허락해서 우리의 태만을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때때로 믿는 자들의 나쁜 점을 예방하거나 치료할 목적으로 여러 난처한 상황들을 허락하신다. 바울에게서 사탄의 가시는 그로 하여금 풍부한 영적 게시를 통해 자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후12:7).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그의 헛된 자만심을 교정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결론적으로 죄의 정욕의 위력은 이와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정욕의 지배를 잠시 허락하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부주의한 신앙생활을 징계하며 교정하신다. 이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전체적인 삶이 개혁되지 않은 상황에서 특정한 정욕을 죽이려는 인간적 시도는 분명히 잘못된 발상이다. 
지금 자신을 괴롭히는 정욕을 철저하게 죽이고자 한다면, 모든 부분에서 부지런하게 순종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정욕과 모든 의무 태만이 하나님께 짐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사43:24). 마음에 악한 생각을 그대로 좌시하고 모든 면에서 온전히 순종하기보다 자신의 의무를 게을리한다면 그 영혼은 약해져서 믿음을 위해 힘쓰지 않게 되고 이기주의에 빠져 죄의 더러움보다는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죄의 고통에만 신경을 쓰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분노하도록 자극한다. 
8. 죄를 죽이기 위한 9가지 방법
방법1 정욕에 동반되는 여러 위험한 징후들을 살펴라
--- 고질적 습관
만약 어떤 죄가 당신의 마음을 오랫동안 타락시켜 왔는데 그것의 위력을 물리치고 거기서 치유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 죄의 병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혹시 당신은 오랫동안 세상적 생각, 야망, 욕심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동행의 삶을 위해 필요한 다른 의무들을 저버리지는 않았는가? 아니면 수많은 날을 헛되고 어리석은 악한 생각으로 보내며 당신의 마음을 더럽히지는 않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정욕은 매우 위험한 수위에 있다. 
다윗의 경우가 그랬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시38:5). 마음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정욕은 사람을 타락시키며 곪게 하고 짓무르게 하여 영혼을 비참한 상태로 만든다. 일반적인 처방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결코 평화를 맛볼 수 없다. 
특정 정욕은 당근과 채찍이라는 양면작전을 통해 영혼이 특별히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자신의 존재를 오랫동안 숨겨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각종 은사들의 도전 앞에서 오랫동안 굴복하지 않은 채 있을 수 있다. 정욕은 속병으로 일단 사람 속에 습관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 발본하기가 어려워진다. 그것은 스스로 죽은 법이 없기 때문에 매일매일 우리가 그것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 위력은 점점 더 커진다.
--- 죄와 타협하려는 마음
내주하는 정욕의 힘 앞에서 복음의 방법으로 그것을 죽이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명목으로 그것과 은근히 타협하려는 것은 마음속에서 그 죄가 치명적인 수위로 발전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첫째, 죄로 인한 생각으로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파괴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런 죄의 속성 외에 다른 좋은 면이 있는지를 찾아보고 그것을 찾게 되면 죄에 대해 관용하는 것이다.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죄성이 꾸짖음을 받을 때, 그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용서받고 성령으로 죽이기보다 오히려 전에 가졌던 좋은 경험들을 생각하며 위안을 얻고 하나님이 자신의 목에 놓은 멍에를 회피하는 것은 실로 위험한 행동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내세우며 스스로 위로하고 합리화했다. “악화일로에 있을지라도 자신 속에는 여전히 평화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태도는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화를 무시하려는 심리가 있다. 
둘째, 죄를 죽이기 위해 신실하게 노력하는 대신에 죄를 은혜와 자비의 논리로 합리화하는 것도 죄와 타협하려는 행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드는 셈이다(유4절). 
실로 사람은 천성적으로 이처럼 육신적인 거짓 논리에 무엇보다도 쉽게 사로잡힌다. 그래서 육신은 ‘은혜’라는 핑계를 대고 더욱 방종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비와 관련된 말은 무엇이든지 귀를 쫑긋하고 낚아채서 자신의 타락한 목적을 위해 왜곡시킨다. 
--- 죄의 유혹에 동조하는 태도
죄의 정욕이 치명적인 수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징후는 죄의 유혹이 성공을 거두고 빈번히 사람의 의지가 죄의 지배에 동조하는 경우이다. 정욕에 휘말리는 일을 의도적으로 하든 무심코 하든 그 결과는 동일하다. 
--- 죄와 싸우지 않고 논쟁하는 자세
사람이 죄와 싸워야 할 때 앉아서 죄의 문제와 죄의 심판에 대해 논쟁만 한다면 그것은 죄가 그의 의지를 사로잡은 증거이며, 그의 마음속에는 사악함이 가득 차 있다는 징후이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성도는 복음의 원리에 기초해서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죽음,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죄의 혐오스런 속성을 깨달아 하나님과 동행하며 죄를 죄로 여기고 경멸한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고후5:14).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율법적 자세에서 죄를 억제하려는 노력은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 강력한 복음의 요새를 떠나 스스로 정욕과 맞서 싸우게 되면 그 정욕은 즉시 당신을 삼키게 될 것이다. 적과 싸울 때 천 배의 힘을 발휘하는 무기를 적에게 넘겨준다면 결코 당신은 적의 지배에서 해방될 수 없다. 
--- 징계의 심판에 대한 무감각
당신이 정욕으로 인한 강퍅함, 또는 적어도 징계의 심판을 느끼지 못하고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을 때 이것은 죄의 또 다른 위험한 징후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죄나 정욕을 허락해서 그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그들이 가졌던 죄, 태만, 그리고 어리석음을 교정하신다. 
--- 죄를 교정하려는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
죄를 교정하려는 하나님의 방법을 정욕을 통해 방해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죄의 징후이다.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첬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사57:17). 실로 하나님의 사랑을 저항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경멸하는 행위다! 
위험한 죄의 징후는 이상에서 말한 것 외에도 많다. 주님이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면서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라고 하신 말씀은 정욕을 죽이는 문제에서도 적용된다. 일상적인 방법으로 죄를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만 죄를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죄와 싸울 때 위에서 말한 그러한 위험한 징후들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성도라는 증거를 갖기 원한다면 성도의 속성을 가져야 한다. 이런 속성을 가진 사람만이 “비록 성도이지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에 대해 곤고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곤고함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갖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성도인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들이 있어야 한다. 
방법2 죄의식, 죄의 위험, 죄의 사악함을 항상 인식하라
당신의 마음과 양심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변함없는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즉, 첫째는 죄의식, 둘째는 당신을 괴롭히는 죄의 위험, 그리고 셋째는 그것의 사악함을 항상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 죄의식
사람이 정욕의 지배를 받을 때 정욕은 그 사람에게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도록 속인다. 그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우상 신에게 경배를 할 때 하나님도 그 정도는 봐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이것은 나쁘지만 다른 악에 비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구실을 대도록 한다. 죄가 사람의 마음을 속여 올바른 죄의식을 갖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죄는 요란한 광기를 일으키며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올바른 사물판단 능력을 흐리게 한다. 
다시 말해 당혹스런 논리, 사람을 무력화시키는 달콤한 약속, 혼란스럽게 하는 욕망,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지나친 신뢰, 잘못된 목적으로 죄와 싸우도록 유도하는 것과 같은 방법들을 통해 비등해가는 정욕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호4:11).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종종 판단력, 지혜, 통찰력 등을 의미한다. 
죄의 정욕의 힘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최고조에 달하지만 부분적으로 중생한 사람들에게도 비슷하게 역사한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의식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어리석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호7:11) 자신의 비참하고 곤고한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분명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처럼 오랫동안 죄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욕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확실히 죄를 죽이기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죄성에 대해 우선적으로 올바른 판단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도움이 되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죄는 마음속에 은혜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위력이 약해서 다른 사람들의 경우처럼 그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도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의 죄성은 죄로 인해 더욱 악화될 수 있다.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죄보다 은헤를 받은 사람들의 죄가 더 사악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스스로 깨달아 반성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광스런 업적이나 하나님의 종들의 외형적인 행동보다 성도들 마음의 열망과 소원을 보고 거기서 더 풍부한 아름다움을 느끼신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있는 정욕을, 사악한 사람들의 공개적인 악랄한 행동이나 성도들이 곧잘 외형적으로 범하는 죄보다 더 큰 악으로 여기신다. 그래서 그런 성도들의 마음을 더욱 질책하시고 그에게 더 많은 수치를 주신다. 
당신은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자신 속에 거하는 죄성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갖기 위해 노력하라. 그래서 마음을 약화시키거나 변명하게 만드는 생각들을 청산하고 죄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라. 
--- 죄의 위험들
죄는 속임수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도록 유혹한다. 강퍅함이란 완고함이다. 모든 정욕들은 발전해서 사람을 완악하게 만든다. 한때 온유했고, 하나님의 말씀과 고난을 통해서 부드러워졌던 사람이 정욕으로 인해, 더 이상 설교 말씀이나 질병 앞에서도 찔림을 받지 않고 완고해진다. 죄가 자라나면 그 종착지는 죄, 율법, 천국과 지옥 등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주의하라. 당신의 정욕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심지어 정욕은 마음을 강퍅케 하고, 양심을 마비시켜서 생각을 어둡게 하고 감정과 영혼을 속인다. 
둘째, 죄의 위험은 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이 징계를 성경은 복수, 심판, 그리고 처벌이라고 말한다(시89:30-33).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불경한 죄로 인해 당신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지만 그 분의 막대기를 통해 당신을 징계하신다. 즉,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시지만 당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벌을 내려 그 결과에 책임지도록 하시는 것이다. 
다윗이 당한 고난을 기억해 보라.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광야로 피신했던 일을 생각하고 그에게 향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숙고해 보라. 하나님이 분노에 의해 당신의 아이를 죽이고 당신의 재산을 파괴하며, 분노로 당신의 뼈를 사르고, 당신을 죽이고 파멸시키며, 당신을 어둠 속에 가두었다면 당신은 그것을 대수롭게 여길 것인가? 
셋째, 죄의 정욕의 위험은 사람의 일생 동안 평화와 힘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데 있다. 정욕을 죽이지 못할 때 그 정욕은 영혼에게 평화와 힘을 빼앗는다. 이 진리를 우리는 다윗의 경우에서 극명하게 볼 수 있다. 다윗은 종종 죄로 인해 자신의 뼈가 쇠하며, 자신의 영혼이 불안하고, 자신의 상처가 중하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조금 지나면 당신은 하나님의 얼굴을 더 이상 보지 못할 수 있다. 아마도 내일쯤이면 당신은 기쁨과 활기를 거의 잃은 채, 기도, 성경 읽기, 설교 듣기 등과 같은 의무들을 억지로 수행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후에 당신의 삶은 고요한 평화를 전혀 맛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신의 생애동안 당신의 뼈는 고통과 두려움으로 채워지게 될 수 있다. 확실히 하나님은 자신의 화살을 당신에게 쏘아 고통과 불안, 두려움 그리고 혼란을 만드실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저주거리와 놀림거리가 될지 모른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에게 매순간 지옥과 분노를 보여주고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깨닫게 하여 당신을 놀라게 하실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당신의 상처는 계속 흘러 마르지 않고 당신의 영혼은 위로받기를 거절하게 될 것이다. 
넷째, 죄는 사람을 영원히 파멸시킬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계속해서 죄의 권세 아래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분리와 파멸의 위협이 그들을 사로잡게 된다. 이 점을 히3:12와 히10:38이 잘 말해주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규칙은 이와 같다. 즉, 하나님을 떠나 불신앙을 통해 다시 죄악의 길로 돌아선 영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가 파멸할 때까지 계속 그에게서 분노가 떠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누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한 말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는 사람”만이 그 주장을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두 가지 측면에서 스스로를 판단한다. 첫째는 자신의 인격이고 둘째는 자신의 행동 양식이다. 사람은 자신의 인격에 대해 좋은 증거들을 가지고 호의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자신의 사악한 행동 양식이 파멸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 능력이 없다면 그는 무신론자이다. 
물론 사악한 행동 양식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관심의 증거들을 내팽개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그 증거들을 삶 속에서 지키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자신의 사악한 행동 양식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 판단을 통해 자극을 받고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실로 우리 영혼이 죄의 정욕의 얽매임에서 해방되고자 한다면 이 점을 숙고해야 한다. 
--- 죄의 사악함
죄의 위험은 미래에 속하는 것이지만 죄의 악은 현재와 관련된 것이다. 정욕을 죽이지 못할 때 부수적으로 동반하는 많은 악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죄는 성도의 마음에 거하도록 보내진 성령을 근심케 한다. 부드러운 사람이 친구의 무례함을 보고 근심하는 것처럼 성령은 죄의 정욕을 보면 근심하게 된다. 우리에게 어떤 고통과 근심도 주지 않는 성령을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근심시킨다면 정말 배은망덕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마음과 생각을 항상 정결케 하고 모든 영역에서 거룩함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 속에 거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고 그들과 만나주시는 성령 때문이다. 
둘째, 죄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시 상처를 입히는 악을 행한다. 또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새사람도 그 죄를 통해 상처를 입게 된다. 실로 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을 빼앗고 대적자인 사탄의 욕망을 채워준다. 죄의 속임수를 통해 주님을 완전히 저버리는 행위는 주님을 다시 못박는 행위와 같다. 
셋째, 죄는 이 세상에서 사람의 유용성을 말살시킨다. 그래서 죄의 지배 아래에 놓인 사람은 아무리 노력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거의 받지 못하게 된다. 실로 이 세상은 신앙을 공헌하지만 스스로를 괴멸시키는 불쌍한 영혼들로 가득차 있다. 정말로 아름다운 영광의 빛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매우 극소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폐하여 거의 쓸모없는 사람들이다. 그 원인은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자신들의 영을 삼키는 정욕들을 계속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정욕은 벌레처럼 순종의 저변에 기생하여 매일매일 순종을 갉아 먹는다. 그래서 은혜의 효력을 증진시키는 은혜의 모든 수단과 방편들을 손상시킨다. 
방법3 양심으로 죄를 느껴라
단순히 죄의식을 가졌다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죄의 분출과 동요를 보고 당신의 양심은 괴로워야 한다.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
--- 점점 구체적으로 죄를 느껴라
첫째, 정직하고 거룩한 율법의 관점에서 당신 속에 나타나는 죄를 양심으로 느껴라. 하나님의 율법을 당신의 양심에 가져와 타락한 당신의 성품을 율법 아래에서 점검하라. 그 율법을 통해 자극받기를 기도하라. 율법이 갖는 거룩함, 영성, 불같은 엄격함, 절대성, 그리고 내면성을 생각하고 당신이 그 앞에서 어떻게 설 수 있는지를 느껴라. 율법 안에서 주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이신지를 양심으로 크게 느껴라. 그리고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당신의 범죄가 마땅히 응분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양심으로 깨달으라. 율법의 정죄 능력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율법에서 자유롭다고 변명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 속에 정욕이 아직 죽지 않는 한, 당신의 양심을 정죄하는 죄의 능력에서 당신이 자유로울 수 없다. 
은밀한 마음 깊은 곳에서 율법의 정죄의 능력에서 자유롭다고 항변하고, 죄의 정욕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은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 비록 겉으로는 그런 행색을 낼지라도 그는 결코 그런 영적인 증거들을 가질 수 없다. 
율법의 목적은 당신 속에 있는 죄를 발견하고 그 죄에 대해 당신 영혼을 일깨워 겸손하게 만드는 데 있다. 한마디로 그것은 죄를 반사시켜 주는 거울이다. 여기서 당신이 자신의 죄를 대면하기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강퍅하고 죄의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증거가 된다. 
실로 신앙을 공언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배교했다. 그들은 율법에서 자신들이 해방된 사람처럼 자부하고 율법의 안내를 전혀 받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판단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이런 태도를 통해 조금씩 죄의 원리가 그들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실제적인 이해력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사로잡게 되자 그들의 의지와 감정은 불경한 모든 죄에 노출되게 되었다.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나는 정욕과 타락에 대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율법의 소리에 당신의 양심이 부지런히 귀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실로 당신의 귀가 열려 있다면 율법의 소리에 당신은 떨림으로 땅에 엎드려지고, 당신 속은 놀람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둘째, 당신은 당신의 정욕을 복음의 빛 속에서 조명해야 한다. 이것은 복음에서 위로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더욱 자신의 죄를 인식하기 위함이다. 당신이 찌른 주님을 바라보고 비통해 하라. 그리고 당신의 영혼에게 이렇게 말하라. “내가 무엇을 했는가? 내가 어떻게 그 큰 사랑과 자비, 보혈, 은혜를 경멸하고 짓밟았는가? 보답이 이런 것이었는가? 주님께 이런 식으로 보상했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씻음을 받고 성령이 내주하게 된 나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내가 더럽혔단 말인가? 어떻게 그분 앞에서 뻔뻔스레 머리를 들 수 있는가? 그분과의 교제를 너무나 소홀히 다루어 나의 정욕으로 인해 나의 마음속에서 그분의 설 자리가 거의 사라졌던 것은 아닌가? 이 큰 구원을 무시한 내가 어떻게 심판을 회피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 속에 정욕을 품기 위해서 사랑, 자비, 은혜, 선하심, 평화, 기쁨, 위로 등을 보두 저버렸고 그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말았다.”
하나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던 내가 오히려 그 분의 얼굴 앞에서 그 분을 노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나의 영혼이 씻김을 받았던 이유가 단지 새로운 죄를 짓기 위함이었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을 훼손시키는 행동들을 나는 계속할 것인가? 나의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주는 성령을 매일 근심시킬 것인가? 매일 당신의 양심에 다음과 같은 약속을 지키게 하라. 즉, 죄로 악화되기 전에 죄에 맞서 양심을 세우겠다는 다짐이다. 
---구체적인 은혜와 죄성을 숙고하라
첫째, 특별히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인내와 참으심을 고찰하라. 만약 하나님의 당신의 죄를 보고 당신을 이 세상의 수치거리와 영원한 분노의 대상으로 만들려고 하셨다면 어떤 조치를 취하셨을지를 숙고해 보라. 
둘째, 죄의 속임수로 인해 거의 강퍅해진 당신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하고 풍부한 은혜로 자주 당신을 회복시키시고 그 분과 다시 교제할 수 있도록 그동안 역사하셨다! 그동안 당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헤는 점점 쇠퇴해갔고, 당신은 의무, 규율, 기도, 그리고 묵상과 같은 일에 흥미를 잃었다는 사실을 당신도 인정하지 않는가?
셋째, 하나님이 은혜의 섭리 가운데 당신에게 베푼 구원, 고통, 자비, 즐거움 등은 모두 나름대로 목적이 있다. 그런 섭리를 통해 당신의 양심에 죄의식의 짐을 지워야 한다. 그리고 당신 속에 거하는 타락한 죄들로 인해 그 상처를 인식하고 주님 앞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석고대죄하며 철저히 괴로워하라.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양심이 죄의식을 희석시킨다면 당신의 영혼은 죄를 죽이려고 결코 힘쓰지 않을 것이다. 
방법4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기를 끊임없이 갈망하라
일단 죄를 심각하게 인식하게 되면 그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기 위해 끊임없이 갈망해야 한다. 한순간이라도 당신의 마음 속에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안 된다. 영적인 구원을 갈망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은혜가 되어, 영혼으로 하여금 그것이 추구하는 대상을 닮도록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성인들은 자신들의 죄와 대항하고자 하는 강력한 열망이 있었다.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결코 당신은 구원 받을 수 없다. 
이 점을 확실히 깨닫는다면 당신의 마음은 경계심을 갖고 대적자와 싸우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모든 수단과 기회들을 강구할 것이다. 강력한 열망을 가져야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열망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힘을 발휘하게 되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속에서 항상 갈망하는 자세를 견지하라. 바라고 울부짖으라. “항상 기도하라”는 강력한 열망의 본뜻이다.
방법5 성품 속에 죄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라
당신을 혼란에 빠뜨리는 죄가 당신의 성품 속에 침투하여 뿌리를 내리고 당신의 체질로 정착하여 세력을 확산시키고 있는지 살펴라. 확실히 어떤 죄들은 사람들의 기질과 성향으로 굳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무조건 죄를 자신의 기질 탓으로 돌리지 말라
우리의 성품이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우리의 천성적인 기질에 죄의 자양분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특정한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신의 성품 속에 정욕이 특정한 모습으로 분출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분출로 인하여 당신은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 죄의 성향은 사탄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당신에게 각별한 경각심과 주의, 그리고 부지런함이 없다면 그들이 당신의 영혼을 확실히 잡아 삼킬 것이다. 실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이유로 서둘러 지옥으로 떨어졌다.
--- 하나님의 방법으로 몸을 복종시켜라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고전9:27). 몸을 복종시키는 행위는 죄를 죽이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것은 죄의 천성적인 뿌리를 억제하고, 죄의 기름진 토양을 제거하여 그것을 시들게 만든다. 
첫째, 자신의 몸을 외형적으로 손상시키고 약화시키는 행위 자체가 어떤 위력이 있거나, 그런 행위를 통해 자동적으로 죄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둘째, 금식이나 철야기도와 같은 수단들이 그 자체에 어떤 마술적인 힘이 있기 때문에 죄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수단들은 성령이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 때때로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요약한다면 죄가 우리의 천성적인 기질이나 성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영혼이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와 같은 죄의 천성적인 뿌리들을 억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법6 죄에 대항하여 항상 깨어 있으라
깨어 있는 것은 실로 우리의 의무이다(마13:37). 깨어 있는 삶은 이런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타락한 성품의 분출을 막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다윗은 이 의무를 스스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시18:23). 
죄의 상황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히려 즐기는 사람은 결국 죄를 짓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죄의 유혹의 모험에 빠져드는 사람은 결국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방법7 처음부터 죄에 대해 결사적으로 대항하라
죄가 당신의 마음 밭에 결코 서지 못하도록 항거하라. 죄는 일단 한 걸음을 내딛으면 그 다음 발걸음을 취한다. 죄가 진행되지 못하도록 그것을 묶어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강바닥에 흐르는 물과 같다. 그래서 죄가 일단 자리를 잡게 되면 물줄기처럼 자신의 경로를 따라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른다. 그러므로 분출된 죄를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는 일보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것을 원천봉쇄하는 일이 더 쉽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은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방법8 자신의 사악함을 깨닫고 겸손하라
--- 하나님의 탁월한 위엄을 묵상하라
하나님의 탁월한 위엄을 묵상하면서, 그것에 비해 너무나 동떨어진 당신의 초라한 모습을 생각하라. 이와 같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당신의 자신의 사악함을 깨닫게 되고, 속에 거하는 죄의 뿌리를 잘라낼 수 있다. 마음의 교만을 게거하고 영혼을 겸손케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비참함을 많이 생각하라. 동시에 하나님의 위대함을 깊이 묵상하라.
--- 자신의 지식이 미천함을 묵상하라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지식이 미천하다는 사실을 많이 생각하라. 이와 같은 성찰을 함으로써 교만한 마음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라. 당신은 그 분의 영광스런 존재의 빛을 감당할 수 없다. 
바울은 율법의 영광에 비교해서 복음의 빛의 영광을 높이 칭송하고, 지금 어두움을 일으켰던 수건이 사라져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수건을 벗은 얼굴”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그 분을 본다고 말했다(고후3:18). 거울은 사물을 뚜렷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이 없다. 거울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족한 지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바울은 ‘부분적으로’ 즉 천국의 실체에 대해 오직 뒷부분만을 보았다고 진술한다. 
--- 하나님의 무한하신 속성을 묵상하라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속성에 대해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딤전6:16). 하나님께 접근하여 그 분을 볼 수 있는 피조물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둠이 조금도 없는 하나님의 빛은 피조물의 접근을 허용치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음속에서 우리의 이해에 걸맞은 존재로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은 나무와 돌로 하나님을 만드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 때 최선책은 그 분의 존재에 대해 우리가 아무런 생각도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믿고 경배하는 것뿐이다. 단지 가르친 바대로 하나님이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며 영원한 분이심을 고백할 따름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 광대하심, 무한하심, 그리고 그 분의 영원성에 대해 토론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말과 개념들을 가지고 이야기할 뿐이며 우리가 실제로 그것들은 아는 것은 아니다. 실로 우리가 보는 것은 영원함과 무한함의 뒷모습에 불과하다. 
같은 본질 속에서 세 개의 다른 인격이 존재하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성자 하나님의 나심, 성령의 나오심, 그리고 그 둘 간의 차이를 누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괴리감으로 인해 우리는 어둠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분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분의 온전한 속성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식은 그 분의 존재 상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분의 행위를 통해서이다. 그런 지식도 욥이 말한 것처럼 매우 보잘 것 없다!
---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한 길밖에는 없다. 하나님과 그 분의 경륜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뿐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5:7). 이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믿음은 주님에 대한 증거의 말씀을 통해 생겨난다. 이 믿음의 성격은 그 증거에 동의하겠다는 표시이다. 믿음은 거울처럼 희미하게 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런 믿음을 통해 우리가 갖는 자식은 여전히 어둡고 매우 작은 것이다. 
그러나 이 어두움과 연약함이 우리의 태만과 불순종의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지식을 알게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그 분을 사랑하고 섬기며, 믿고 순종하면서, 죄를 용서하는 창조자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하는 영광과 존귀를 돌리도록 하는 데 있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지식만큼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으로 철저하게 변화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 
다른 것과 비교해서 우리가 복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알게 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영광스럽고 매우 특출한 것이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그 어떤 다른 방법보다 더 명쾌하게 선포되었다. 
신지식과 관련해서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는 무엇을 안다는 것보다 아는 방법에서 극명히 나타난다. 불신자들의 지식은 올바른 방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구원받기 위해 그런 지식을 소유하지 않는다. 또한 거룩한 천사의 빛 속에서 그런 지식을 갖는 것도 아니다. 성도의 탁월한 위치는 그가 많은 진리를 알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짧은 이해지만 그 진리를 구원의 빛 즉 하나님의 영의 빛 속에서 바라본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성도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되고 더 이상 호기심 어린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 자신에 속한 영혼들에게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모든 필요한 방법을 동원해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순종해야 할지를 가르치신다. 그리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품 안으로 인도하고 나중에 천국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영원까지 살 수 있게 하신다. 
하지만 여전히 다음과 같은 한계가 있다. 
첫째, 복음의 모든 계시의 의도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데 있지 않다. 복음의 계시는 단순히 믿음, 사랑, 순종,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계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둘째, 우리의 마음은 우둔하고 더뎌서 계시된 말씀 안에 있는 실체들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드시고, 그분의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결론으로 이제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의 목적과 그 유용성을 생각해보자. 확실히 하나님의 형용할 수 없는 위대하심과 그 분과 우리 사이에 있는 엄청난 괴리감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그 분에 대해 거룩하고 두려운 경외심으로 채워져 모든 정욕과 맞서 싸울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소부재하심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항상 잃지 말라.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모든 불경스런 행동을 경계하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묵상하라. 실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당신의 비천함을 알고 당신의 천성이 그 분의 본질적인 영광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왜소하다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라. 
방법9 죄 앞에서 스스로에게 평안하다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죄와 그 뿌리에 대해 찔림을 주고 죄가 분출될 때마다 당신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들 때, 하나님이 말씀하기 전에 당신이 스스로에게 평안하다고 말하려는 유혹을 경계하라. 대신 하나님이 당신의 영혼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라. 이와 같은 경청의 자세가 없다면 당신의 마음은 죄의 속임수에 노출되고 말 것이다. 
--- 하나님의 은혜는 그 분의 위대한 특권이자 주권이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분’으로서 자신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성화시키신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부름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평화를 말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성도들을 대할 때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위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선한 은혜 증에 하나이다. 이 은혜를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뜻에 따라 베푸신다. 은혜의 상태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은총인 평화와 기쁨을 주실 때도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특별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다. 
--- 평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특권이기도 하다. 
성부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따라 평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것처럼,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평화를 말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스스로 자신의 상처들을 거짓되게 치료하고, 자신들에게 평화를 말할 때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아멘이여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다”(계3:14)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두 가지 점을 주목했다면 이제 나는 우리의 평화가 스스로 지어낸 평화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평화인지를 분별해 주는 몇 가지 규칙들을 소개하겠다. 
--- 평화를 분별하는 몇 가지 규칙
* 규칙1. 자신의 죄를 증오하지 않는다면 결코 참된 평화는 오지 않는다. 
확실히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평화를 말한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죄를 가증히 여기지도 않고 그렇게 하는 자신들을 혐오하지도 않는다. 죄를 증오하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에 의해 치유받기보다는 스스로를 치료하는 셈이 된다. 이에 반해 치유와 평화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님을 찔렀다는 사실을 알고 애통하게 된다(슥12:10). 심지어 그분을 위해 애통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 분에게 상처를 준 자신들의 죄를 증오하게 된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접하고 그 분과 교제할 때 우리는 거기서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모습, 거룩함, 능력, 그리고 사랑의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치유와 평화를 구할 때 우리는 특별히 언약의 피, 즉 그 분의 고난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 분의 채찍 맞음을 통해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그분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치유와 평화를 얻기 위해 성령의 힘과 하나님의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증오하게 된다. 확실히 치유와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은 진정한 치유자를 찾아가서 올바른 방법으로 치유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언약의 약속 위에서 마음의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 한편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할 때 자신을 괴롭히고 상처를 준 죄를 증오하고 혐오하지 않는다면 그 평화는 하나님이 주신 평화가 아니라 스스로 만든 평화이다. 따라서 상쳐의 허물만 벗겼을 뿐 그 내부는 그대로 있는 셈이 되어 상처는 더욱 곪고 부패해져 나중에 더 큰 위험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죄의 고통만 느낄 뿐 죄와 동반되는 불결함과 타락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자세를 우리는 피해야 한다. 신앙을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의 평화의 뿌리에는 속임수가 자리잡고 있다. 때문에 진정한 평화가 없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자비와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외형상으로 하나님과 놀라운 교제의 삶을 살기도 한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을 슬퍼하기도 한다. 그런 행동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죄에서 완전히 떠났다고 착각한다. 또한 한시적으로 마음에 마족을 주는 평화를 누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좀 더 철저히 해부하면 그들 속에는 아직도 어리석음이 은밀히 도사리고 있다. 적어도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만큼 자신의 죄를 혐오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이 누리는 평화는 연약해져서 썩게 된다. 
* 규칙2. 자신의 신념과 원리에 근거해서 스스로에게 평화를 선언한다면 그것은 거짓 평화이다.
그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죄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 그는 그 죄 때문에 마음에 가책을 느낀다. 복음에 합당하게 올바로 살지 않았다는 자책 때문이다. 그때 그는 빛 속에서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할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들만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약임을 알고 그는 그 약속들을 의지하며 좇아간다.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상태에 적용하고 평화를 얻는다. 하지만 이것은 공허한 신기룰 좇는 행위이다. 이것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 지적이고 이성적인 영혼의 단순한 활동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이성을 가진 자연인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깨달음 속에서 마음에 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더 나아가 진실로 거듭난 성도들도 있다. 중생한 사람은 두 유형의 모습을 모두 공유한다. 그 결과 그는 때때로 이성적 원리에서 개달음을 가지고 행동한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영적 삶은 감정의 원리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사람은 단순히 죄의식과 깨달음의 원리에서 행동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자신의 천성적인 능력을 함양시킬 수는 있지만 결코 그에게는 성령의 물결이 일어나지 않는다. 
[*첫번째 질문: 우리가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의 평화를 추구할 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령이 함께 하는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 당신이 여전히 거짓된 평화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당신에게 신속한 깨우침을 주실 것이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25:9). 하나님은 당신의 실수를 계속 좌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이런 사람이 스스로에게 평화를 말할 때 그는 보통 기다리지 않고 말한다. 하지만 기다림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는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다. 때때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을 떠난 자녀들이 돌아올 때 잠시 문 앞에서 기다리게 하고 바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신다. 
셋째, 이렇게 해서 자신들의 양심, 생각, 이성 그리고 영혼을 안정시킬 수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은 진정한 안식과 은혜의 만족으로 소생되지 못한다. 
넷째, 더욱이 스스로 평안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바로잡을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평강의 말씀을 들은 영혼은 더 이상 완악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소유하게 된다. 또한 그 의지만큼 그의 영혼은 감미로움을 맛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 규칙3. 자신에게 평안을 말하는 것은 경박한 행동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비의 말씀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말씀이 믿음 안으로 융화되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그 말씀은 영혼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다. 
* 규칙4.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의 평화는 거짓 평화이다.
우리의 영혼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을 똑같이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죄에 있는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우리 속에 있는 극히 작은 죄라도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눈은 매우 정결해서 그 앞에서는 부정이 설 수가 없다. 
*규칙5. 교만한 양심에 찾아오는 평화는 거짓 평화이다.
양심에게 스스로 평강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겸손함을 좀처럼 갖지 못한다. 하나님의 평강은 다윗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며 낮아지게 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51:1). 하지만 스스로 평강을 외치는 사람은 다윗이 나단의 말을 듣고 취했던 그런 깊은 겸손함을 결코 보여주지 못한다. 
[두 번째 질문: 우리의 상처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해 위안을 삼으려고 할 때 그 시기는 언제가 적당한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평강은 빨리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다. 그 말씀은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임하기 때문에 영혼은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째 질문: 하나님이 평강하라고 말씀하실 때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목소리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은 믿음 안에 있는 비밀스런 본능이다. 동정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엘리사벳의 뱃속에서 아이가 뛰었던 것처럼 마음속에 있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가까이 오실 때 그것을 알고 뛰게 된다. 
다음과 같은 기준을 항상 명심하라. 즉,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그 분은 결코 사람의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 당신의 마음은 속에서 뜨거움을 느끼게 된다. 주님은 자신의 손을 문틈으로 내미는 것처럼 말씀하신다(아5:4).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당신을 사로잡기 위해 당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신다.
항상 자신의 감각을 훈련시키고 선과 악을 분별하며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방식, 성령의 역사,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효과들을 끊임없이 관찰하면서 판단력과 경험을 쌓아가는 사람은 확실히 주님이 말씀하시는 때를 잘 분별한다. 
둘째, 또한 주님은 자신의 말씀이 시기적으로 당신의 영혼에게 유익함이 된다고 판단될 때 말씀하신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당신이 겸손해질 수 있고, 정결해지며, 순종과 함께 자신을 비울 수 있다고 여겨질 때,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9. 죄를 죽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해4:15-16)
지금까지 앞에서 논의한 것들은 결론적으로 죄를 죽이기 위해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이와 같은 논의가 없다면 이 책의 결론으로 내가 제시하려는 것들은 당신은 실천할 수도 없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죽여라
주님의 보혈의 피는 죄로 병든 영혼들을 위한 그 분의 주권적인 위대한 치료제이다. 그 분의 피 안에서 당신이 산다면 당신은 죽지만 결국에 가서는 승리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죽이는 일에서 믿음을 발휘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행동과 방법을 취해야 하는가?
---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일들을 기억하라.
그 목적은 당신을 옭아매는 정욕을 믿음을 통해 죽이는 데 있다. 스스로 죄를 극복할 수 없고 죄와 싸우는 일에도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충분히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빌4:13)을 잊지 말라. 
비록 극도의 고통과 고난 속에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위해 예비된 풍부한 은혜, 힘의 보고, 도움들을 바라보라(요1:16,골:19. 사40:28-31). 그리고 그것들을 마음속에 항상 간직하라. 
주님이 승귀하셔서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는 임금과 구주가 되었음을 생각하라(행5:31). 회개케 한다는 것은 죄를 죽이게 한다는 의미이다. 죄의 죽임이 없는 회개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그 분으로부터 정결케 되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요15:3). 그리스도가 공급해주는 풍성한 은혜 위에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우리가 접붙임을 통해 주님께 거하는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이다(롬11:19-20).
우리가 처진 손과 연약한 무릎으로 낙담할 필요는 없다.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 분은 힘없이 죽어가는 영혼들을 잡아 승리자 이상으로 만들어 주신다(롬8:38).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영원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27-31). 
그 분은 나의 영혼의 메마른 토양을 저수지로 만들고, 나의 목마르고 빈약한 마음을 샘물로 만들어 주신다. 확실히 그 분은 가증스런 정욕과 불같은 유혹으로 가득찬, 용이 거하는 나의 마음을 그 분 자신을 위한 정원으로 만드신다(사35:7). 우리에게는 결코 낙심이 있을 수 없다. 만약 당신이 불신앙으로 주저앉고 주님에게서 떠나서 거짓된 치료책을 구한다면 당신은 결국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은혜의 효과는 오직 믿음의 훈련을 통해서만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도움의 은혜를 기대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고통과 당혹감 속에 있는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헤가 약간 더디 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은 예수님이 정하신 가장 좋은 때에 올 것이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시123:2)을 향하듯이 주님께 무엇을 받고자 하는 태도로 그 분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분명 만족함을 얻게 될 것이다(사7:4,7-9). 그 분의 손을 통해 그것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올 것인지 기대하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7:9).
[*첫번째 질문: 내가 속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토대 위에서 그런 기대를 가져야 하는가?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은혜의 공급을 받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 죄를 죽일 수는 없다.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골1:19).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헤 위에 은혜러라”(요1:16).
새 사람의 속성은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새 생명과 힘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속사람이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되는 것은(골1:11)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거하시기 때문이다(엡3:16-17). 이 일은 성령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성령은 어디에서 오는가? 성령을 받기 위한 모든 기대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도움에 대한 기대 없이 이루어지는 모든 노력과 싸움은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결국 당신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기대를 갖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의 오른 편에 계신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자비하심, 부드러움, 그리고 인자하심을 생각하라. 확실히 그 분은 곤궁에 빠진 당신을 불쌍히 여기신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다”(사66:13).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8).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은혜는 때를 따라 우리에게 온다. 대제사장의 자비하심에 근거해서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도움을 기대하기 위해 우리의 영혼을 굳건히 한다면 우리의 정욕과 죄는 더 쉽게 파괴되고, 지금까지 사람들이 스스로 해왔던 가장 엄격한 고행보다 더 빠르게 우리는 효과적으로 죄를 죽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구원과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결코 죄의 정욕과 타락으로 멸망하지 않는다(사55:1-3,계3:18).
둘째, 당신을 세워주시고 당신에게 도움의 보증이 되겠다는 주님의 신실한 약속을 생각하라. 메마른 대지에 내리는 이슬과 비처럼 그 분의 도움의 은혜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임한다. 두 가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먼저 그런 기대를 가진 사람에게 주님은 온전하고 신속한 도움을 베풀어 주신다. 다음으로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뜻을 알기 위한 방법들에 부지런히 귀 기울이기 때문에 결국 주님으로부터 모든 은혜의 도움들을 취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가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방식은 말씀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그 분에게서 어떤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말씀 안에서 그 분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기대하는 자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 십자가 그리고 보혈의 토대 위에서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라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멸할 수 있는 토대이다. 실로 그리스도의 족음의 목적은 죄를 죽이기 위함이다. 주님은 사탄의 일을 멸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4). 주님은 우리로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모든 더러운 정욕에서 정결케 하는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런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5:25-27).
성령의 공급하심과 은혜와 능력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나온다. 우리의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표시이다. 세례는 그 분 안으로 우리가 들어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 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는 행위로서, 주님이 죄에 대히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해 죽어 우리의 타락한 성품을 이긴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영광으로 부활했던 것처럼 우리도 은혜와 새로운 삶으로 다시 부활하게 됨을 가리킨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못 박힘으로써 일어나는 효능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 자신도 십자가에 죽일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l해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 죄에 대해 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의미한 핵심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사탄의 일을 멸하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도들 안에서 죄가 더 이상 왕노릇하지 못하도록 죄를 죽이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토대 위에서 믿음을 가지고 행할 때의 전제 조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 조건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기대하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빌3:10,골3:3,벧전1:15-19). 실로 주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죄의 무게를 몸소 느끼시고, 기도하시며 피 흘리셨고, 나중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믿음을 통해 그런 주님을 당신 마음 속에 모셔라. 
죄를 죽이기 위한 성령의 사역
첫째, 성령만이 죄를 깨닫게 해준다. 성령만이 분명하게 우리의 마음 속에 죽어야 할 악과 죄, 타락, 정욕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깨닫게 해준다. 지혜와 지식은 있지만 성령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정욕의 활동을 죄로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성령만이 주실 수 있다. 실로 성령은 모든 정욕을 죽이기 위해 먼저 죄를 깨닫게 한다. 죄의 속임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죄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모든 통로를 차단한다. 그리하여 영혼들로 하여금 죄를 혐오케 만들고, 죄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둘째, 성령만이 풍성한 은혜를 보여준다. 성령만이 우리를 돕기 위해 예비된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들을 보여준다. 
셋째, 성령만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 성령만이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도움을 기대할 수 있도록 붙들어 준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1-22).
넷째, 성령만이 십자가의 능력을 갖게 해준다. 성령만이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져다 주고, 죄를 죽이는 십자가의 눙력을 베풀어 준다. 
다섯째, 성령은 성화의 저자이자 완성자이다. 성령은 거룩과 성화를 위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은혜들을 공급한다. 
여섯째, 성령만이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이러한 간구는 하나님과 함께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위대한 방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