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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주재권 구원 (Lordship Salvation) 논쟁

주재권 구원 (Lordship Salvation) 논쟁

임범진 집사

01 주재권 구원 논쟁이란?
02 주재권 구원 논쟁의 역사와 인물들
03 주재권 구원 논쟁의 핵심 쟁점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04 한국교회와 주재권 구원 논쟁
05 결론

01 주재권 구원 논쟁이란?
지금부터 몇 번의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1) 논쟁이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주재권 구원에 대한 논의는 미국에서는 1980년대에 존 맥아더 목사에 의해 본격적으로 촉발되어 지금까지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용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논쟁을 예수가족교회 성도들에게 소개하려는 이유는 첫째, 비록 용어 자체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CCC 등 청년들에게 영향력이 큰 캠퍼스 선교 단체들과 많은 교회가 이미 오래 전부터 주재권 구원에 반대하는 진영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 이 논쟁의 핵심 인물인 존 맥아더 목사를 한국 교회에 소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출판사가 바로 부흥과 개혁사이기 때문에 그의 구원론이 비성경적이라고 지적하는 우리나라의 주재권 구원 반대파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의 주장으로 인해 혼란을 겪는 독자들에게 책임 있는 답변을 내놓을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주재권 논쟁에 대해 완전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초에 달라스 신학교의 창설자인 루이스 체이퍼 (Lewis S. Chafer)와 걸출한 칼빈주의 신학자인 워필드 (Benjamin B. Warfield) 사이에 벌어진 지상 논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자세한 역사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이 논쟁의 현대적 버전이 존 맥아더의 Gospel According to Jesus (1988)라는 책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사실만 언급하겠다. 당시 미국의 교회에는 결단주의식 구원론, 즉 구원 얻는 믿음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해 동의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의지적 결단의 산물이며, 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후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유행하고 있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과 주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 구분된 단계라는 것이다. 맥아더는 이런 구원론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구원 얻는 믿음은 오직 중생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서, 중생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그의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고 인정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이 미국 교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특히 달라스 신학교 출신의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자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위와 같은 구원론을 미국 교회에 유행시킨 장본인이 세대주의자들이었는데 존 맥아더 또한 세대주의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집안 식구에게 뒤통수를 맞은 모양새였다. 이에 달라스 신학교의 교수인 핫지스 (Zane C. Hodges)가 Absolutely Free! (1989)라는 책을 통해 맥아더의 구원론이 믿음에 행위의 요소를 첨가한 행위구원론이며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변질시킨 것이라고 비판함으로써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세대주의 진영 내부에서 일어난 논쟁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맥아더의 주장이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구원론과 일치한다는 것을 인지한 개혁주의자들이 논쟁에 가세하면서 이제는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존 맥아더 측을 예수님의 주인 되심을 강조한다고 하여 주재권 구원파라 부르게 되었고2) 달라스 측은 자신들을 값없는 은혜파 (Free Grace)라고 명명하였다. 이하의 글에서는 주재권 구원 찬성파를 LS, 반대파를 FG로 약해 표기하겠다.
주재권 구원 논쟁의 주요 논점을 보여주기 위해 다음 몇 가지 항목에 대해 LS와 FG의 견해를 대조해 열거해 보겠다. 즉,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 양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대체로 일관되게 인정하는 답변들을 열거해 보았다. 각 항목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이어지는 글들에서 다룰 내용이기 때문에 답변의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는 않는다. 다만 FG 측의 모든 문구는 핫지스의 Absolutely Free!와 찰스 라이리 (Charles C. Ryrie)의 So Great Salvation (1989)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혀둔다.
1)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FG : 믿음이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진리, 그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진리를 인정하는 의지적 결단이다. 광야에서 놋뱀을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들이 한 번 쳐다 본 그 행위가 바로 믿음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 원인인 믿음은 결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다.
LS : 구원 얻는 믿음은 우리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라는 기적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일 뿐 아니라 믿음 역시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2)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FG : 구원은 값없이 얻으나 제자로 살아가려면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행위는 제자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의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일 뿐 구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LS : 믿음은 중생의 결과이기 때문에 믿음을 고백한 사람에게 행위의 변화가 수반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뒤집어 말하면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을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이라고 인정할 근거는 없다.
3)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FG : 회개 역시 행위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단지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일 뿐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행위구원론이다.
LS : 중생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회개한다. 믿음과 회개는 회심이라는 사건의 동전의 양면으로서 믿음이 중생의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회개 역시 중생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구원 얻는 믿음은 회개하는 믿음이며, 참된 회개는 믿음에서 나오는 회개이다.
4)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FG :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는 영생을 확신할 수 있다. 설사 외적으로 배교를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배교로 보시지 않는다.
LS :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창세 전에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하나님 자신이다.
5)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FG :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가 있다. 구원 얻는 믿음을 가졌으나 아직 육신에 속한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믿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의 삶을 사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구원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LS :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의상 영적이다. 중생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육신에 속한 것처럼 행동할 수 있으나 오직 중생한 자와 불신자가 있을 뿐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성화에 대한 강력한 소망을 갖게 된다.
‘주재권 구원’이라는 적절치 못한 작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지만 이 논쟁의 핵심은 결국 “중생(거듭남, regeneration)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FG파에게 있어서 중생은 인간이 믿음이라는 의지적 결단으로 예수의 구원자 되심을 인정한 결과 획득하는 사건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복음을 들었을 때 믿음을 선택할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을 발휘해 의지적 결단으로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의 삶,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 두 번째 결단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반면 LS파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스스로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믿기 위해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중생의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중생한 자는 믿음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의 행실은 필연적으로 거룩을 향해 변화되어 간다. 다시 말해 믿음과 행위는 모두 중생의 결과이며,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는다. 바로 이 입장차가 주재권 구원 논쟁의 배경이다. 이 논쟁은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 혹은 펠라기우스/반(半)펠라기우스적 세대주의와 개혁주의 구원론 사이의 논쟁이다. FG가 가장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개혁주의적 교리는 중생과 제한속죄 (limited atonement)의 교리이다. 이 두 교리가 의지적 결단으로서의 믿음이라는 FG의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반박하기 때문이다. FG파의 저자들이 이 사실을 매우 직설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주재권 구원 논쟁을 세대주의 내부에서 벌어진 집안 싸움으로서 FG를 은혜 구원론으로, LS를 행위구원론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글들을 통해 그 근거를 보여주도록 하겠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나는 개혁주의적 구원론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주로 FG파의 글을 수집하고 연구하였다. 위에 언급한 핫지스와 라이리의 작품들 뿐 아니라 FG파의 인물들이 중요한 참고문헌으로 다룬 책과 논문들은 거의 모두 수집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의 글로부터는 거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는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주재권 구원 논쟁을 다룬 출판물은 장두만 교수라는 분이 영문으로 기고하고 후에 일반 성도를 위해 우리말로 축약하여 번역한 논문3)이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상에 우리나라 사람이 작성한 FG 입장의 글들은 거의 항상 장두만 교수의 논문을 근거로 삼고 있다. 장두만 교수가 FG파의 일반적 성향에 비해 매우 온건한 입장을 보이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 자신 달라스 신학교 출신으로서 라이리나 핫지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기에 그의 글만으로 이 논쟁을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행동이다.)
예수가족교회 성도가 아닌 분이 이 글을 읽을 경우에 대비해 글의 성격에 대해 미리 밝혀둘 것이 있다. 이 글은 개혁교회에 속한 필자가 같은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쓴 글로서, 개혁주의 신앙이 다른 신앙 체계들보다 성경의 진리를 가장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신념을 독자들과 공유한 가운데 작성한 것이다. 현대 복음주의의 중요한 흐름을 판단하면서 오로지 개혁주의 신앙을 근거로 삼는 것에 불편함이 느껴지더라도 감내해 주시길 부탁드린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이 글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FG를 비판하고 LS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믿어 의심하지 않는 주류 신앙이 실은 종교개혁 이후 교회가 소중하게 지켜 온 참신앙으로부터 이탈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 년 전 필자가 개혁주의 구원론을 접하였을 때 느꼈던 충격을, 부족한 이 글을 읽는 몇몇 사람들도 동일하게 경험하게 되기를 감히 소망해본다.
1) Lordship salvation을 우리말로는 주재권 구원, 주권 구원, 주되심 구원 등 다양하게 번역하였다. 이 글에서는 주재권 구원으로 통일한다.
2) 누가 이 명칭을 처음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다른 정보를 제공한다. 주재권 구원이라는 말은 논의의 핵심을 정확히 짚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율법주의적인 냄새를 풍기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반대파가 자신들을 Free Grace라 한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다. 자신들은 값없는 은혜,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상대방은 율법주의 행위구원을 주장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주려는 계산이 깔린 작명이다.
3) Chang AD, The nature of saving faith: Another look at the Lordship salvation debate. Korea Journal of Theology 2004;4:153-91.
02 주재권 구원 논쟁의 역사와 인물들
주재권 구원 논쟁은 비록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교회 역사상 끊임없이 반복된 주제였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발생한 좁은 의미의 주재권 구원 논쟁의 역사를 다룰 것이다.
루이스 체이퍼 (Lewis S. Chafer)는 스코필드 (Cyrus I. Scofield, 스코필드 주석 성경의 저자)와 더불어 미국 세대주의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는 세대주의적 관점의 조직신학 교과서를 집필한 것과 현재까지도 세대주의 신학의 본산 역할을 하고 있는 달라스 신학교를 설립한 것을 꼽을 수 있다. 후에 주재권 구원 논쟁을 촉발시키고 지속시킨 주요 주제들이 20세기 초에 출판된 그의 저작들에 거의 모두 담겨있다. 그 중에서도 주재권 구원 논쟁과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1918년에 출판된 He That Is Spiritual 1)이다. 이 책에서 체이퍼는 고전2:9~3:4을 근거로 사람을 1) 자연인 (natural man), 2) 육적인 사람 (carnal man), 3) 신령한 사람 (spiritual man)의 세 종류로 분류하였다. 자연인은 불신자를 말한다. 문제는 구원 얻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는 점인데,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구원을 받은 이후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에 도달한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전제 하에 체이퍼는 신자가 신령한 사람의 상태에 도달하는 비결을 기술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사람을 오직 육적인 사람(불신자)과 신령한 사람(신자, 중생한 사람)의 두 가지로 분류했던 개혁주의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 개혁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워필드 (Benjamin B. Warfield)가 서평2)을 통해 체이퍼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워필드의 설명에 의하면 체이퍼의 주장의 핵심은 구원에 이르기 위한 첫 번째 결단이 있은 후, 성화의 삶에 도달하기 위한 두 번째 결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두 번째 결단의 유무에 따라 신자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님은 단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만을 제공하며 각자가 구원 받는 것은 스스로의 결단 여부에 달려 있다는 아르미니우스적 구원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과정인 성화를 구원 이후 이차적인 헌신 혹은 특별한 결단을 한 일부의 신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부가적인 과정으로 만듦으로써 당시 유행하던 더 높은 삶 운동 (higher life movement)3)에 동조한 것이다. 워필드를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후 체이퍼의 가르침은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서 인기를 얻었고 다음 세대에 이르러서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대중의 확고한 지지를 얻게 되는데 여기에는 빌리 그래엄 (Billy Graham)으로 대표되는 대중전도집회와 CCC (Campus Crusade for Christ, 1951년 창립)를 위시한 선교단체가 큰 기여를 하였다. 빌리 그래엄은 찰스 피니 (Charles G. Finney)와 빌리 선데이 (Billy Sunday)의 기법을 계승하여 ‘내 모습 이대로’ 등의 찬양을 배경으로 감정적, 심리적 반응을 자극하여 전도자의 초청에 응해 강단으로 걸어 나오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건을 흔들고, 특정한 기도문 (영접기도)을 따라 하도록 하고는 이것을 구원 얻는 믿음과 동일시하는 결단주의적 전도를 행함으로써 큰 성공을 거두었다4). 이렇게 하여 양산된 새로운 유형의 ‘회심자’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말하지만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을 진정 구원 받은 사람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체이퍼의 이론을 도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고, CCC는 다음의 모식도5)를 이용해 체이퍼의 가르침을 대중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체이퍼의 가르침이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할 때 즈음하여 다시 한 번 분명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었던 사람이 바로 존 스토트(John R. W. Stott)이다. 1959년에 Eternity 지에서 “그리스도가 구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이 되어야 하는가? (Must Christ Be Lord to Be Savior?)”라는 제목의 지상논쟁이 벌어졌을 때 에버렛 해리슨 (Everett F. Harrison)은 “아니다”의 입장에서, 존 스토트는 “그렇다”의 입장에서 글을 기고하였다6). 대체로 이때부터 주재권 구원론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사용되었다. 논의의 초점이 구주(Savior)로서의 그리스도와 주님(Lord)로서의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문제로 옮겨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체이퍼 식으로 말하자면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으나 아직 주님으로 모시지는 않은 사람이며,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이자 주님으로 모신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주되심까지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상태이지만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구원을 받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존 스토트는 이에 반대하여 그리스도는 구주이자 주님이지 그 둘이 분리될 수는 없으며,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칭의 뿐 아니라 반드시 성화의 과정이 일어난다고 주장한 것이다. 1994년에 출판된 로마서 주석에서도 존 스토트는 동일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은 그 안에 복종의 요소를 포함한다. 그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필연적으로 평생에 걸친 순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완전하고 거리낌 없는 헌신을 기대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이것을 ‘믿음의 순종’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는 모시지 않으면서도 구주로는 영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7)
Eternity에서의 논쟁과 비슷한 시기에 로이드 존스 또한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보여줬다.
“아마 여러분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모시면서도 수 년 동안 주님으로는 모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혹은 수년간은 그분을 당신의 주님으로 믿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들어왔을 것입니다....만일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그가 당신의 주님이심은 알지 못한 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당신의 믿음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분을 구주로만 모실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당신을 사심으로써 당신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분이 당신의 주님이심을 즉각 알아야만 합니다. 바로 여기서 모든 위험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화 없는 칭의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위험 말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주님이 되지 않는 한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사실을 인지하는 정도는 시시각각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도 구주로 모실 수 있다고 명백히 가르친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완전한 이단입니다.”8)
그러나 체이퍼식 구원론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대중이 인지하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존 맥아더의 공이다. 1988년에 출판된 그의 책 Gospel According to Jesus9)에 의해 미국 교계에서 소위 주재권 구원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등장 이후 많은 사람들이 미국 교회 안에 구원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현대 교회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신학자나 설교자들을 주재권 구원에 대해 취하는 입장을 기준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LS (Lordship salvation)파10)
존 스토트
마틴 로이드 존스
제임스 패커 (James I. Packer)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James Montgomery Boice)
존 맥아더
존 파이퍼 (John Piper)
R. C. 스프룰 (Robert C. Sproul)
존 거스너 (John Gerstner)
케네스 젠트리 (Kenneth L. Gentry)
아더 핑크 (Arthur W. Pink)
마이클 호튼 (Michael S. Horton)
FG (Free grace)파11)
루이스 체이퍼 (Lewis S. Chafer)
제인 핫지스 (Zane Hodges)
드와이트 펜테코스트 (J. Dwight Pentecost)
찰스 라이리 (Charles C. Ryrie)
로버트 라이트너 (Robert Lightner)
워렌 위어스비 (Warren W. Wiersbe)
Google에서 'Lordship salvation'을 검색해 보면 즉각 알 수 있듯 미국교회의 주류는 FG파를 지지하기 때문에 FG파의 인물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Amazon.com에서 맥아더의 책에 달려있는 부정적인 서평들을 읽어보면 그들이 LS파에 대해 얼마나 큰 적대감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사정은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재권 구원 논쟁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도 않지만,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글들은 대부분 LS를 행위구원론으로 폄하하는 내용이다. 주재권 구원 ‘논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논쟁에는 항상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려 하는 측과 기존의 견해를 반박하고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는 측이 있는 법이다. 주재권 구원 논쟁에서는 누가 수성을 하고 누가 공격을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LS파가 새로운 이론을 주장한다고 생각한다. 1950년대 이후 현대 복음주의의 배경 속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시야를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사로 확장해 보면 양상은 전혀 달라진다. 개혁 교회가 일관되게 고수했던 구원관에 더 가까운 것은 LS파이며 FG파가 오히려 변종에 해당한다. 실제로 FG파의 수장격인 핫지스는 LS파를 ‘현대판 청교도주의’라고 지칭하며 그들이 이미 사장되어버린 과거 개혁주의 교리를 현대에 다시 살려내려 한다고 말하였다12). LS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대부분 이런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LS파와 FG파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주재권 구원 논쟁의 핵심 쟁점들을 본격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이 사실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도록 하겠다.
1) 이 책의 전문은http://www.baptistbiblebelievers.com/BookList/HeThatIsSpiritualbyLewisSperryChafer 1918/tabid/271/Default.aspx 에서 읽을 수 있다.
2)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1919;17:322-7. 이 글의 전문은 http://www.thebluebanner.com/pdf/ bluebanner11-3.pdf 에서 읽을 수 있다.
3) 19세기 말 영국에서 케직(Keswick) 사경회를 통해 대중화된 운동으로서 신자는 회심 이후 ‘두 번째 복 (the second blessing)’, ‘성령충만’을 통해 완전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함.
4) 빌리 그래엄 전도집회에 대한 이안 머리의 묘사. Iain Murray, The invitation system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7) pp11-16.
5) http://www.ccci.org/training-and-growth/classics/the-spirit-filled-life/index.htm
6) Eternity Magazine, 1959;10:14, 16, 48&15, 17-8, 36-7. 아쉽게도 이 글의 전문은 인터넷 상에서 찾지 못하였다.
7) John Stott, The message of Romans (IVP, 1994), pp52-53.
8) D. M. Lloyd-Jones, Romans: Exposition of chapter 1. The Gospel of God (The Banner of Truth, 1985), p134. (설교가 행해진 시기는 1955년)
9)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의 개정증보판이 참된 무릎 꿇음-예수가 목숨 걸고 전한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10) Dennis Rokser, Examining the Lordship Salvation: Part 2, Grace Family Journal 2007:3, http://www.duluthbible.org/246451.ihtml 에서 인용. 원글의 저자는 FG파. 이 명단을 보면 부흥과 개혁사가 주재권 구원 논쟁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11) Gentry KL, Lord of the Saved (P&R Publishing, 1992), p5.
12) Hodges, Absolutely Free ! (Zondervan, 1989), p33, pp219-220 note 1.
03 주재권 구원 논쟁의 핵심 쟁점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지금부터 몇 회에 걸쳐 주재권 구원 논쟁의 핵심 쟁점들에 대한 주재권 구원 찬성파 (Lordship Salvation파, 이하 LS)와 반대파 (Free Grace파, 이하 FG)의 견해를 비교해 보겠다. FG의 견해는 주로 핫지스 (Zane C. Hodges)의 Absolutely Free!와 라이리 (Charles C. Ryrie)의 So Great Salvation에서 인용할 것이다. FG의 LS에 대한 공격의 대부분이 존 맥아더를 과녁 삼아 이루어지기 때문에 LS의 견해는 우선적으로 맥아더의 책에서 인용하겠지만 그 외 개혁주의자들의 글과 신조들도 인용하겠다.1)
주재권 구원 논쟁은 무엇보다도 구원론에 대한 논쟁이다. 개신교 구원론의 핵심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즉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LS와 FG가 ‘믿음’, 혹은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이 논쟁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두 진영 모두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S는 FG가 말하는 믿음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FG는 LS가 구원 얻는 믿음의 기준을 높여놓는 오류, 즉 믿음 뿐 아니라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추가하는 행위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이전 글에서 말했듯 대중들은 FG의 주장에 손을 들어 주었으며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LS를 행위구원론자와 동일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비록 주재권 구원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는 일은 드물지만 많은 설교자들과 선교단체 지도자들이 FG의 견해에 동조하는 입장에서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다. 첫 번째 글에서 밝혔듯 필자는 LS와 개혁주의의 구원론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 시리즈의 목적은 LS와 FG의 견해를 단순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LS가 성경적인 구원론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FG의 자료들을 인용할 때는 최대한 공정한 자세를 견지할 것이다. 특히 문맥을 무시한 부분적 인용, 일부의 극단적 저자들을 전체의 견해인양 과장하는 등의 흔한 실수는 최대한 피하고 FG 내부에서 충분한 합의에 도달한 결론만을 소개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먼저 FG의 견해를 살펴보고 이어서 LS의 FG에 대한 비판을 다루겠다.
믿음은 결단의 산물이며 믿는 것은 대단히 쉽다 : FG가 말하는 구원 얻는 믿음
핫지스는 그의 책에서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장에 ‘믿음은 그저 믿음일 뿐이다 (Faith Means Just That-Faith!)’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는 맥아더를 위시한 LS 주의자들이 단순한 지적 동의와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다. 이 장에서 그는 믿음이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성경이 말하는바 믿음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진실이라는 내적 확신이다. 그것이, 오직 그것만이 구원 얻는 믿음이다.2)
여기서 하나님의 증거란 구원하는 사실들(saving facts)에 관한 증거를 말한다. 핫지스가 말하는 saving facts는 첫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 둘째 그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 두 가지이다.3) 이 사실들을 믿을 때 그가 약속하신 영생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appropriate)4) 있다. 영생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 필요할 뿐이다. 그는 요한복음 4장의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너에게 주고자 하는 무언가를 너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너는 특정한 사실들을 알아야만 한다. 너는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보다 더 명료하고 이보다 더 단순한 것이 있겠는가? 이 죄 많은 여인은 중대한 정보를 얻기 전에는 영생을 얻을 수 없었다. 이 선물에 대해 알아야 했으며 이 선물을 주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야 했다.5)
믿음은 ‘단 한 번’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으로서 FG 측은 이 일이 대단히 단순하고 쉽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자주 드는 성경의 예화가 나사로의 부활과 모세의 놋뱀 사건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요11:25-26)는 나사로의 생명 없는 상태에 방해 받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사로야 나오라!”는 단순한 말씀이 죽은 자의 귀를 관통하였고 그 음성은 나사로에게 다시 생명을 주었다. 그 일은 이토록 단순했다. “나사로야 나오라.” (요11:43)라는 말은 직설적이었고, 명료했으며, 효과적이었다. 나사로는 단 한 번 듣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한 순간으로부터 그는 살아났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단 한 번 마시고, 단 한 번 아들의 음성을 듣는 것을 통해 새로운 탄생이라는 놀랍고도 비가역적인 기적이 일어난다.6)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다.(민21:9) 모세에게 이렇게 하고 나서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21:8)라고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 본즉 모두 살더라”(21:9) 구원 얻는 믿음을 보여주는 얼마나 놀랍고도 단순한 장면인가!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달았듯 하나님의 아들도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 달릴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죄로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해 정하신 구세주로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즉시 생명을 얻는다. 한 번 바라봄으로써 영생이라는 결과가 온다. 이보다 단순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7)
FG 주의자들이 이토록 ‘단 한 번’이라는 단어를 중요시하고 믿는 것이 단순한 일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믿음을 대상(saving facts)에 대한 단회적인 신뢰의 결단으로 규정한다는 사실과 연관되어있다. 전도에서 해야 할 일은 saving facts를 전달하고 이 사실들을 믿기로 결단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가 영생의 선물을 소유하게 되느냐의 여부는 이 결단에 달려있다. 단 한 번 결단만 하면 되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믿음을 지속하는 것(제자의 삶을 사는 것)은 어렵고 희생이 따르는 일이지만 영생을 얻는 것 자체는 쉬운 일이다. 심지어 그 믿음이 지속되지 않더라도 문제없다.
우리가 살펴보았듯 구원하는 믿음은 생수를 한 번 마시는 것과 같은 행동으로서 반복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바라보고 살았던 것처럼 구주 예수를 한 번 바라보는 것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영적인 들음이라는 결정적 순간이며 이 때 하나님의 아들의 목소리가 비가역적인 영적 부활을 일으킨다.8)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하나님과의 경험의 진실성이 자기 믿음의 견고함에 달려있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우리가 믿음이라는 행동으로 구원 받은 것은 사실이다.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우리의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일단 이 일이 일어나고 나면 우리 구원의 진실성은 그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는 전혀 관계없게 된다. 다시 말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확실한 약속을 하셨다. 우리가 그를 신뢰할 때 그는 우리가 영생을 소유했다고 보장하신다.(요6:47) 우리가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신다.(요5:24) 마지막 날에 그가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라는 것을 보장하신다.(요6:39-40) 심지어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믿지 않게 되더라도 그분은 여전히 신실하시다.9)
주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결정에 대해 신중히 생각하라고 하신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교육과정에 참가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문제는 끝마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10)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한 위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FG는 LS의 구원론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최근 인터넷에서 LS에 대한 비판의 글을 연재하고 있는 데니스 록서 (Dennis Rokser)는 FG의 입장에서 바라본 LS의 오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11)
1. LS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우리의 행위를 섞어 놓음으로써 복음을 왜곡한다.
2. LS는 죄에서 돌이키려는 의지나 실제 돌이킴, 일상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에 복종하는 것, 주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일생의 헌신 등을 복음에 대한 합당한 반응의 목록에 추가시킨다.
복음에는 saving facts에 대한 신뢰의 결단 이외에 어느 것도 추가시키지 말아야 하는데 그들이 보기에 LS 주의자들은 신자가 되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주재권에 대한 복종, 일생 동안의 헌신 등은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는 일과 관련되어 있을 뿐 saving facts를 전달하는 복음전도에서 요구하거나 기대할 반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는 LS는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획득하고자 하는 행위구원론일 뿐이며 변질된 복음으로서 값없이 주어지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위험한 가르침이다.
주재권 구원론자들은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한 거의 아무런 근거도 없는 정의를 가지고 신약성경 저자들이 알지 못했던 구원의 교리를 교회에 들여왔다. 그 교리는 영생이라는 거저 주시는 선물을 죄인과 하나님이 맺는 ‘계약’으로 변질시키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쁨을 우리의 믿음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비참한 노력으로 변질시킨다. 그런 신학은 완전히 재앙이다.12)
FG의 주장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어서 LS 측이 말하는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이며 LS의 주장에 대해 FG가 어떤 부분을 오해 또는 왜곡하였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믿음은 결단이 아니라 중생한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LS가 말하는 구원 얻는 믿음
FG와 LS의 구원론의 결정적 차이는 중생(regeneration, 거듭남)에 대한 이해에 있다는 것을 이 시리즈의 서두에서 지적하였다.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한 견해 차이 역시 중생이라는 주제를 통해 접근하면 가장 명쾌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FG 주의자들은 중생을 믿음의 결과로 생각한다. 내가 믿었기 때문에, 나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새 생명을 나에게 주시는 것이다. 반면에 LS 주의자들은 중생이 없이는 누구도 복음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중생이 믿음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나사로의 사건이 좋은 예화이다. FG 주의자들은 죽은 나사로를 살린 것은 딱 한 번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그 행위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LS는 이렇게 반문한다. 한 번이든, 열 번이든, 도대체 죽은 사람이 무엇을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나사로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무덤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살아나야 한다.
왜 중생이 믿음보다 선행하는가? 아니 왜 선행해야만 하는가?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그것도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어서 어떤 영적인 선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로의 상태에서는 누구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도 못하고, 더구나 구원을 위하여 복음으로 나올 수도 없다.(롬3:10-11)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요3:3) 이와 같은 상태의 사람이 복음의 초청에 응하기 위해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를 살리시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데(엡2:1), 이를 위해서는 기적이 필요하다. 개혁주의의 선조들은 그것을 천지창조에 비견될 만한 기적이라고 묘사하였다.13)
따라서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거듭나야 하겠다”(요3:7). 거듭남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절대적인 필요조건이다. 그 누구도, 심지어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라도 거듭남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예수님의 복음의 출발점이 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거듭남이 없이 구원은 불가능하다.14)
더욱이 인간의 부패함 때문에 타락하고 버림 받은 죄인 안에는 하나님을 갈망하거나 믿음에 반응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롬3:11~13 인용>죽음과 연관된 비유들을 주목해서 보라. 그것이 죄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상태다. 곧 보게 되겠지만 성경은 죄로 물든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라는 주권적인 개입이 없이는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15)
우리는 죄 가운데 죽었다. 죄 가운데 죽은 우리는 스스로를 살릴 수 없다. 죄 가운데 죽었기 때문에 우리 귀는 복음의 부르심에 귀 먹었고, 우리 눈은 복음의 빛에 눈 멀었다. 우리에게는 기적이 필요하다. 이 기적은 하나님이 그의 놀라운 은혜로 그의 성령을 통해 우리를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영적 어두움에서 그의 기이한 빛으로 효과적으로 부르실 때 일어난다. 영적으로 살리심을 받은 후에야 우리는 우리 구원의 과정, 즉 회개, 믿음, 성화, 견인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16)
중생한 사람이 갖게 되는 믿음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개혁신학은 전통적으로 믿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가르쳤다. 지적인 요소(notitia), 감정적 요소(assensus), 의지적 요소(fiducia)가 그것이다.17) 믿음에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 즉 전인이 관여한다는 것이다. FG는 이 중 의지적 요소를 부인한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객관적 사실(saving facts)에 대한 동의와 신뢰18)만으로 구원 얻는 믿음이 완성되며 의지를 동원한 헌신은 부차적인 요소이다. 반면에 믿음을 중생의 결과로 믿는 LS에게 있어서 의지와 행동의 변화는 필연적이며, 지성과 감정의 요소 역시 FG가 말하는 것과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중생으로 인해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심어졌고 영혼을 지배하는 성향이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질문을 생각해 보자. FG의 saving facts는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그가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두 가지 사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죄인이며,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다는 사실은 saving facts에 포함되는가 아닌가? FG 주의자들이 감히 명시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적극적으로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지식을 구원 얻기 위한 필수적 요소라고 말하는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영리나 다리예화 전도지에서 피전도자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언급하고 지나가는지 생각해 보라. 반면에 성경에 기록된 회심 사건에서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깨달음이 얼마나 격렬한 반응을 일으켰는지 관찰해 보라. 피전도자에게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의 방법으로 자신의 죄인됨을 이해시킬 자신이 있는가? 예를 들어 당신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담의 죄책이 당신의 죄책이고, 그러므로 당신은 정죄 받아야 한다는 성경의 설명을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중생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사람은 이런 말도 안 돼 보이는 설명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또 우리에 대해 가르쳐 주는 모든 사실들을 믿을 뿐 아니라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슬퍼하며, 도대체 내가 어찌해야 하는지를 묻게 된다. 예수가 당신의 그리스도시며 오직 믿음으로 그분께 연합하는 것만이 구원의 방법이라는 초청은 이때에야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FG는 놋뱀을 한 번 바라보기만 하면 살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LS는 놋뱀을 바라본 것은 정말로 죽게 된 사람들이었음을, 자신의 죽게 된 상태를 자각한 사람들이었음을 지적한다. 이렇게 하여 믿음을 고백한 사람이 그 이전과는 뭔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FG 주의자들이 오해 혹은 곡해하고 있지만 LS의 주장은 믿음에 행위를 더하여 구원 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구원 얻는 믿음을 참되게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행위의 변화도 일어난다는 말이다.
지난 글에서 FG 주의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개혁주의 교리가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라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제한속죄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뿌려졌으니 이제 각 사람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발휘하여 이 구원의 초청을 받아들이라는 FG식 복음전파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 교리는 우리가 믿음을 택할 능력이 없다고 가르친다. 사람에게는 누구도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지에 대해 강요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유의지가 있지만 이 의지를 지배하는 영혼의 성향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반란을 선택할 뿐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오직 은혜로 몇 사람을 택하시고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그들의 의로 삼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믿을 때에 구원을 베풀어주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획득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믿을 수 있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믿음까지 획득하셨다.19)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하는 제한속죄의 교리를 FG 주의자들이 그토록 혐오스러워하고, 무가치한 궤변으로 폄하하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엡2:8-9은 FG 주의자들도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것은’은 앞 구절의 믿음 혹은 구원을 받는 말이다. 믿음/구원은 나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이에 대해 자랑할 수 없다. FG와 LS의 가르침 중 어느 편이 이 말씀에 부합하는가? 결단이라는 하잘 것 없는 ‘나의 행위’를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은혜로 나를 택하시고 믿음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행위’를 의지할 것인가?
믿음은 우리의 반응이지 구원의 원인이 아니다. 믿음조차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20)
1) 마이클 호튼(Michael S. Horton)과 그의 White Horse Inn 사역(www.whitehorseinn.org 참조)의 동료들이 함께 저술한 Christ the Lord (WIFF and STOCK Publishers, 1992)는 주재권 구원 논쟁에 대한 매우 훌륭한 안내서이다. 이 책이 번역되었더라면 필자가 이런 글을 연재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호튼은 FG를 비성경적 구원론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지만 동시에 맥아더의 세대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또한 맥아더의 초기 저작들이 믿음의 본질에 대해 오해를 살 만한 문구를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후 맥아더가 개혁주의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자신의 오류를 기꺼이 수정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를 비판하는 것은 그의 초기 저작들만 읽은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FG 주의자들 중 이 책에서 호튼이 맥아더의 LS적 구원론을 비판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2) Hodges, Absolutely Free!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9), p31.
3) 위의 책, p39.
4) Appropriate, appropriation 등의 단어는 FG 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중요한 용어로서 믿음이 구원, 영생 등 하나님이 우리 외부에 베풀어 주신 선물을 나의 것으로 획득하는 수단임을 강조한다.
5) 위의 책, pp40-41, 강조는 원문의 것.
6) 위의 책, p61, 강조는 원문의 것.
7) 위의 책, p62.
8) 위의 책, p107
9) 위의 책, p112, 강조는 필자의 것.
10) 위의 책, p79.
11) http://www.freegraceresources.org/lordshipsalvation.html 세 번째 항목(LS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증언을 무시한다)도 있으나 이후의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룰 내용이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12) 위의 책, p27.
13) 도르트신경, III-IV, Art. 12.
14) 존 맥아더, 참된 무릎꿇음[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살림출판사, 2008), p86.
15) 존 맥아더, 구원이란 무엇인가[The Gospel According to the Apostles], (부흥과 개혁사, 2008), p89.
16) Anthony A. Hoekema, Saved by Grace (Eerdmans Publishing Co., 1994), p91.
17)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Eerdmans Publishing Co., 1996), pp503-6.
18) FG 진영 내에서 일부 저자들이 신뢰(trust)를 구원 얻는 믿음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19) 프란시스 튜레틴, 개혁주의 속죄론 (개혁된 신앙사, 2002), p211.
20) 존 맥아더, 구원이란 무엇인가, p99.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 이 진리에 대해서는 주재권 구원 찬성파(LS)와 반대파(FG) 모두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지난 글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타협이 불가능할 정도의 이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필자는 LS의 견해가 성경적임을 주장하였다.
이번 글에서 다룰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행위 문제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진술은 행위로는 결코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LS와 FG 누구도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걸음 들어가면 두 진영은 여기서도 심각한 견해차를 보인다. LS는 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필연적으로 행위의 변화가 동반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므로 행위의 변화가 구원 얻는 믿음의 소유 여부에 대한 간접적 증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FG는 믿음과 행위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며 LS의 주장은 결국 구원의 조건으로 행위를 내세우는 행위구원론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신자에게 있어 행위의 변화는 필수인가 선택사항인가? 자신을 신자라 말하면서도 행실의 변화가 없는 사람을 교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것이 이번 글의 주요 주제이다.
믿음의 결단 이후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 또 한 번의 결단이 필요하다: FG가 말하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
지난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FG는 구원 얻는 믿음을 대상(saving facts: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신뢰의 결단으로 정의한다. 그들은 이 결단이 단회적이며 매우 쉽게 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한다. 심지어 시간이 지나 이 믿음을 부인하는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가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다.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행위에 대한 태도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FG의 대표 주자인 핫지스는 행위는 값없이 영생을 얻은 후 신자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믿음과 행위를 분리시켰다.
다른 길은 없다. 영생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한 선물이다 (약1:17-18). 그것은 절대적으로 값없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다. 믿음의 진보를 이루려면 신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듣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 진리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1)
핫지스는 영생을 얻는 것과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별개의 사안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한 FG식 정의를 받아들이는 순간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다. 핫지스의 입을 통해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자.
이 말씀들[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 제자도가 치룰 비싼 값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지 않다 말한다면 요점을 놓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들이 영생을 얻는 문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 역시 명백하다. 그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슬프게도 현대 교회를 향해 이 말을 해야만 한다. 사실, 제자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그분이 수가성 여인에게 생수에 관해 하신 말씀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독해하는 것이 주재권 신학의 주요 오류 중 하나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지요?”라고 묻고 싶을 것이다. 영생은 값없이 얻는 반면 제자도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은 어린 아이라도 알 수 있다.2)
영생은 쉽고 제자도는 어렵다는 문구는 모든 FG 주의자들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핵심 사상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겠다는 ‘간단한’ 결단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영생을 얻은 사람이 하나님과 조화로운 삶(harmonious life)을 살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순종, 참된 회개 등을 하기 위한 추가적인 결단이 필요하며, 이 결단은 쉽지 않아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지는 못한다. 두 번째 결단은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한 추가사항 혹은 선택사항일 뿐이다. 두 번째 결단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결단을 권면하는 것이 필요할 뿐 결코 그의 구원 여부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중생한 사람은 이전과 같이 살 수 없다: LS가 말하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
존 맥아더를 위시한 LS 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FG의 입장을 ‘값싼 구원론’이라고 비판하였다. LS에게 있어서 행위의 변화, 제자도로의 헌신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에 속한 문제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LS에 대한 격렬한 반대가 촉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행위에 대한 LS의 강조를 행위구원론으로 오해 또는 곡해하고 있다. 데니스 록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난 후에는 그분을 섬기기 위해 피로 사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언가가 요구된다. 이것은 영생의 결과이지 결코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성경의 결론은 분명하며 [LS에 대한] 판결 역시 명확하다. 주재권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에 인간의 행위를 뒤섞음으로써 복음을 왜곡한다...주재권 구원의 교리가 행위구원론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3)
회원 수가 2만이 넘는 우리나라의 인터넷 이단 상담 카페의 운영자는 행위구원론에 관한 질의에 답하면서 LS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님이 맥아더목사의 Lordship Salvation을 지지한다는 자체가 개혁주의신학이 아니라 존다비의 형제교회와 같은 극단적 세대주의 신학이라는 증거입니다. 맥아더의 Lordship Salvation은 믿음 외에 순종과 행함, 회개를 포함한다고 주장하는 구원관으로서 개혁주의에서는 비성경적인 주장으로 간주합니다. 맥아더목사가 강조하는 내용은 구원파와 같은 도덕폐기론 교리에 반박하기 위한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님이 행위구원론을 지지한다는 증거를 님이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로이드존스와 아더핑크는 개혁주의신학자입니다. [질문자가 이 두 인물이 맥아더를 지지한다고 했기 때문에 나온 말] 그들은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인정합니다. 어설픈 변명은 거짓말을 낳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다르다는 주장이 바로 lordship salvation의 주장이며 제가 삭제한 글에도 언급되어 있었습니다.4)
LS가 주장하는 것이 과연 행위구원론, 즉 그리스도의 공로에 우리의 행위라는 공로를 더하여서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일까? 참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한 LS의 입장, 혹은 개혁주의적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중생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LS에 대한 수많은 오해가 중생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중생과 믿음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지난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 다시 상기해야 할 요점은 중생시에 하나님이 새롭게 심으신 생명의 원리로 인해 영혼을 지배하는 성향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LS에서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란 곧 영혼의 성향이 변화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전과 달리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어떻게 하든지 지키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그의 행위는 (비록 자주 실패하고 넘어지긴 하지만) 이전의 그것과는 결코 같을 수 없다.
이렇듯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롬6:17). 바울은 율법주의적인 의나 기계적으로 의를 보여주려는 태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순종하여”. 은혜는 사람의 가장 깊은 곳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마음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구원 받은 것이 아니다. 은혜를 보증하는 특징은 순종하는 마음이다. 다시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순종은 구원을 낳거나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순종은 구원받은 자들의 필연적인 특징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순종하려는 열망은 참된 구원의 가장 확실한 증표 가운데 하나다.5)
야고보는 그렇지 않다고[동의만의 믿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그리고 참된 믿음은 틀림없이 의로운 행위를 낳는다고 말한다. 구원하는 믿음의 참된 특징은 믿는 자의 행위로 점검할 수 있다. 이것은 신구약의 구원론과 조화를 이룬다. 한 사람이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속에 들어간다(엡2:8-9). 믿음은 본성적으로 순종으로 향해 나아간다(행5:32;롬1:5;2:8;16:26). 그래서 선한 행위들은 진정으로 믿는 자의 삶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이 행위들은 구원을 가져오는 데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엡2:9;롬3:20,24;4:5;딛3:5). 그러나 구원이 진정으로 임했음을 보여준다(엡2:10;5:9;요일2:5).6)
LS 주의자들이 행위를 강조한다면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강조이다. 이와 같이 분명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FG 주의자들이, 특히 그들을 지도하는 학자 그룹이 LS를 행위구원론이라고 의도적인 왜곡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믿음과 행위에 관한 FG와 LS 주의자의 논쟁의 배경에는 율법에 대한 세대주의적 견해와 개혁주의의 언약신학적 견해의 차이가 자리 잡고 있다. FG 주의자들은 자기들의 모판인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율법과 복음을 철저히 배타적인 관계로 이해한다.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께 나가게 하는 몽학선생의 역할 외에 신자의 삶에서 어떤 역할도 율법에게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율법과 복음이 각각의 역할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율법도 복음도 폐하여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하심을 받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어 성도로 하여금 영화로움을 향한 탄식 속에 살아가게 한다.
율법은 명령한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구원할 수 있다...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것이 율법의 직무가 아니듯, 성화를 위한 힘을 주는 것 역시 율법의 직무는 아니다.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 생명과 능력의 유일한 원천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와 동일하다. 즉 율법이 결코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복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은혜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구원 받았고, 구원 받아가고 있으며, 구원 받게 될 자로서 율법에 대해 반응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로서의 하나님의 율법은 심판에서 “무죄 선언”을 해 주는 복음과 함께 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면서, 그 동일한 율법은 우리 길을 보여 주고, 하나님의 불변하는 뜻을 계시해 준다.7)
결국 FG 주의자들의 주장의 배후에는 중생과 율법의 용도라는 개혁주의의 가르침에 대한 반발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인 배경에 더하여 FG 주의자들의 주장이 강화된 역사적, 실용적 배경이 있다. 이전 글에서도 잠시 언급했듯 1950년대를 전후한 대중전도집회가 그것이다. FG의 구원론은 이런 집회의 이론적 배경이었고, 반대로 집회의 (외형적인) 성공은 FG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사용되었다. 빌리 그레이엄의 활동이 전성기를 누린 1950년대에 매달 6천 명의 회심자를 얻었다고 한다. 그들을 양육할 체계가 취약했기 때문에 빌리 그레이엄 전도단은 당시 일대일 양육에 집중하고 있던 네비게이토 선교회와 손을 잡았고 이는 네비게이토 선교회가 전국적 단체로 커나가는 계기가 된다. 두 팀의 동역이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집회 중 하나가 50년대 초 런던 집회이다. 1955년 런던 전도대회를 통해 하룻밤에 3400명의 사람이 회심했다고 한다. 네비게이토의 역사에는 이 집회에서 회심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스토리가 기록되어 있다.8)
그러나 이안 머리가 집필한 로이드 존스 전기에는 같은 집회에 대한 전혀 다른 평가가 실려 있다. 로이드 존스는 이 대회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매일 매일 ‘그리스도를 영접하러’ 앞으로 나온 사람들이 성경적인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며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잘못된 신학 위에 세워진 잘못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9) 빌리 그레이엄 측이 회심했다고 주장한 수천 명의 사람들 중 대부분은 삶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회심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 받지 않았다. 만일 그리한다면 사역의 뿌리가 흔들리게 된다. 빌리 그레이엄 측의 진단은 훈련 부족, 교육 부족 이었다. 네비게이토와 손을 잡은 것은 제자훈련을 통해 행위의 변화를 위한 이차적 결단을 가르치려는 의도였다.
반면 로이드 존스는 그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보고 즉각 그 회심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양육이 아니라 복음전도이다. 인위적으로 회심을 흉내 내게 하는 잘 짜여진 프로그램이 아니라 중생케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의지하는 진정한 복음전도가 필요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와 같은 목소리는 극소수였고 빌리 그레이엄 형식의 전도 캠페인과 양육 프로그램은 현대 복음주의권의 상징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다.
지지하는 사람의 머리수로 LS는 FG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듯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글과 이번 글에서 다룬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의 문제는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가 인간의 전적 타락과 무능, 하나님의 예정, 주권적 은혜라고 하는 거대한 성경 진리들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에게 복음을 듣는 이들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경을 상고할 것을 권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LS와 FG, 어느 편이 위의 말씀에 부합하는가? 당신은 어느 편에 설텐가?
1) Hodges, Absolutely Free!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9), p122.
2) 위의 책, p68.
3) http://www.freegraceresources.org/lordshipsalvation.html. 강조는 원문의 것
4) http://cafe.naver.com/anyquesti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3306" target="_blank">http://cafe.naver.com/anyquesti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3306 이 카페의 운영자는 한국장로교총연합회 협력상담위원이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단상담전문가이다. 각종 이단들에 대해 좋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신학적으로는 웨슬리주의자이기에 개혁주의에 대한 이해는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 본 답변글에서도 사실관계에 대한 혼동이 여럿 발견된다. 존 맥아더는 이미 소개한 바대로 세대주의자이지만 개혁주의적 구원론을 견지하는 독특한 인물이다. 로이드 존스와 아더 핑크는 대표적인 LS 주의자이며 구원론에 있어서는 맥아더와 동일한 견해를 가졌다.
5) 존 맥아더, 구원이란 무엇인가[The Gospel According to the Apostles], (부흥과 개혁사, 2008), p181. 강조는 필자의 것.
6) 존 맥아더, 구원이란 무엇인가[The Gospel According to the Apostles], (부흥과 개혁사, 2008), p214. 강조는 필자의 것.
7) 마이클 호튼, 언약신학, (부흥과 개혁사, 2009), p264. 번역 일부 수정.
8) 봅 포스터, 불타는 세계비전, 네비게이토, 1988, p107.
9) Iain H. Murray, D. Martyn Lloyd-Jones. The Fight of Faith 1939-1981.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0, pp339-40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구원의 초청은 때로 “믿으라”(행16:31)는 명령으로 주어지기도 하고, “회개하라”(행17:30)는 명령일 때도 있으며, 이 둘을 결합하여 “회개하고 믿으라”(막1:15)고 할 때도 있다. 여기에 대해 주재권 구원 찬성파(LS)와 반대파(FG) 사이에 다분히 소모적이며 어리석은 논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구원의 조건이 오직 믿음이냐(FG) 아니면 믿음과 더불어 회개가 구원의 조건이냐(가상의 LS)라는 질문에 관한 것이었다. 이전 두 가지 주제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소개할 때와 달리 ‘어리석은 논쟁’, ‘가상의 LS’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 논쟁이 전형적인 ‘허수아비 논쟁 (straw man argument)’ 혹은 ‘허수아비 공격하기 (to attack a straw man)’1)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참된 회심에서는 믿음과 더불어 반드시 회개가 동반된다’는 LS의 말을 FG는 ‘회개는 구원의 조건이다’라는 주장으로 변형시킨 후 이에 대해 행위구원론이라고 비판을 가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구원과 회개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FG가 말하는 회개
핫지스는 그의 책 에서 구원 얻는 믿음의 결단이 대단히 쉬운 것임을 강조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그래서 구원 얻는 믿음을 오로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그가 자기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에 대한 동의의 결단으로 한정시키고, 이외의 모든 사항을 영생의 보장을 이미 얻은 사람이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과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행위’들로 분류한다. 회개가 이 행위들 안에 포함되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회개를 요구하신다는 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 사도행전 17:30절처럼 회개의 요구가 강하게 나타난 곳도 없을 것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 선언이 ‘오직 믿음(sola fide)’과 조화될 수 있을까? 그렇다. 성경은 결코 모순이 없기 때문이다. 그 조화는 사실 매우 쉽고도 자연스럽다. 어떻게? 간단하게 말하자면 믿음으로의 초청은 영원한 구원으로의 부름이다. 회개하라는 부름은 하나님과의 조화로운 삶에 들어가도록 하는 부름이다. 문제가 단순히 “구원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 답이다(행16:31). 질문의 범위가 더 넓다면, 즉 “어떻게 하나님과 조화로운 삶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답이다(행20:21).2)
핫지스는 그의 책 전체에서 이 주장을 일관되게 유지하지만 이와 같은 입장을 관철시키는 것은 대단히 힘겨운 일이다.3) 회심의 순간에 회개를 요구하는 장면이 성경에는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라이리와 다른 많은 대중적 FG 주의자들은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한다. 회개라는 말의 정의를 바꾸는 것이다.
회개가 영생을 얻는 조건인가? 만일 회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면 답은 ‘그렇다’이다. 만일 죄를 슬퍼하거나 심지어 죄로부터 돌아서기로 결심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답은 ‘아니다’이다. 이런 일들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가 믿음의 선행조건인가? 비록 성령께서 사람을 구주와 그의 구원을 향해 이끄는 일에 죄에 대한 감각이나 그로부터 돌아서려는 욕구를 사용하실 수는 있으나 답은 ‘아니다’이다. (회개라는 말이 믿음에 대한 동의어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 한) 회개가 믿음으로 가는 길을 예비할 수는 있으나 구원하는 것은 믿음이지 회개가 아니다.4)
LS는 회개를 죄를 슬퍼하고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라고 이해하지만 (사실 FG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이해했다) 라이리는 그것이 올바른 정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영생을 얻기 위해 ‘회개하라’고 명하는 구절들은 사실은 ‘믿으라’는 말과 동의어이거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을 바꾸라’, 즉 ‘예수가 구세주이시며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핫지스나 라이리 중 어느 입장에 서 있든지 FG 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LS의 회개에 대한 가르침을 행위구원론이라고 비난한다. 여기서 허수아비, 즉 실제 LS의 견해와 무관한, FG가 규정한 LS의 회개관이 등장한다. LS가 회개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생의 조건은 회개와 믿음이 아니라 믿음뿐이다...[LS에 의해] 믿음과 회개에 관한 성경적 구분이 사라지고, 그리하여 회개가 영생의 조건이 되는 것은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이다.5)
주재권 구원의 가르침은 분명 회개와 믿음을 구원을 위한 별개의 필수불가결한 요건으로 만든다.6)
과연 LS가 회개를 믿음과 더불어 구원의 조건이라 주장하는가? 회개에 대한 LS의 가르침이 참으로 무엇인지 살펴보자.
믿음과 회개는 동전의 양면이다: LS가 말하는 회개
개혁주의적인 구원관을 가진 이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사람이 충족시켜야 하는 ‘조건’을 논의하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여긴다. 오로지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도대체 무엇으로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말인가? ‘나는 믿었다’, ‘나는 회개했다’, 그러니 구원의 컷트라인을 통과했노라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어리석은 자랑이겠는가? FG의 LS에 대한 공격을 ‘허수아비 논쟁’이라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FG는 LS가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이라 하지 않고 회개와 믿음을 조건으로 내세운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LS는 믿음조차도 구원의 조건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FG가 비판하고 있는 LS는 오직 FG 주의자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LS이다.
그렇다면 LS는 회개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 맥아더의 글을 읽어보자.
회개는 생각의 변화만이 아니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다. 회개는 영적인 돌이킴이고 얼굴을 완전히 돌리는 것이다. 거듭남의 문맥 속에서 회개는 죄에서 돌이켜 구주에게 방향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는 외적인 활동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나는 반응이다. 그러나 회개의 열매는 참된 믿는 자의 행동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눅3:8).
종종 사람들은 회개와 믿음이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동전을 회심이라고 부른다. 회개는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구원과 의의 유일한 소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회심이 의미하는 것이다.
믿음과 회개는 구별된 개념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참된 회개는 언제나 믿음의 뒷면이다. 참된 믿음은 회개를 동반한다. 그 두 가지는 따로 떨어질 수 없다.7)
회개와 믿음은 회심을 구성하는 두 가지 구분되는, 그러나 분리될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이 LS의 가르침이다. 믿음과 마찬가지로 회개 역시 우리의 결단에서 나오는 공로가 아니라 중생으로 인해 생겨난 새 생명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필연적인 반응이다.
믿음과 회개는 근본적으로 중생의 새 생명에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서 반드시 겉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 둘이 서로 분리될 수는 없으나 서로 구별될 수는 있다. 그렇게 보면 회개는 중생의 열매요, 이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역사다. 시초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사람에게 부어진 새 생명으로 인하여 나타나는바 사람의 행위로서 한 순간도 제한을 받지 않고 평생토록 지속되는 것이다.8)
김남준 목사는 회개와 믿음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를 ‘한 사람이 가진 신앙[믿음]이 진정으로 구원에 이를 만한 신앙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죄에 대한 회개가 있고, 그것이 죄에 대한 진실한 회개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 죄를 해결해 주실 유일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을 것이기 때문’9)이라고 설명한다.
믿음과 회개를 밀접히 연관시키는 LS의 가르침이 심지어는 개혁주의의 전통도 아니라는 주장을 펴기 위해 핫지스는 칼빈의 글을 인용하는 다소 뜻밖의 행동을 한다.<기독교 강요>의 다음 문구가 회개와 믿음을 별개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음을 회개 속에 포함시키는 것은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일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행20:21). 여기에서 바울은 회개와 믿음을 두 개의 다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10)
그러나<기독교 강요>의 바로 다음 문단은 칼빈의 의도가 핫지스가 원하는 그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인가? 참된 회개가 믿음이 없이도 성립될 수 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이 분리될 수는 없지만 구별이 되어야만 한다. 믿음이 소망 없이 존재하지는 않으나 믿음과 소망은 서로 다른 것과 같이, 회개와 믿음은 서로 영원한 끈으로 묶여 있지만 결합할 필요는 있어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나는 하나님께로의 회심 전체가 ‘회개’라는 용어로 이해되며 믿음은 회심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사실에 대해 알고 있다.
회개와 믿음이 이와 같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참된 회개를 알기 위해서는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아는 일이 필수적이며, 결국 다시 한 번 중생의 교리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의 회심이 중생의 결과 일어난 참된 회심이라면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동시에 한 발은 죄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생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심어진 사람은 죄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존 머레이의 다음 유명한 문구가 이를 잘 요약하였다.
구원으로 가는 믿음은 회개하는 믿음(penitent faith)이며 생명으로 가는 회개는 믿음의 회개(believing repentance)이다.11)
지금까지 세 편의 글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구원 얻는 믿음, 신자의 행위, 회개와 믿음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각각 독립적인 주제가 아니라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라고 하는 유서 깊은 논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주제들에 대한 FG의 가르침은 오늘날 한국 교회와 캠퍼스 선교단체들에 어느 틈엔가 광범위하게 유입되었다. 특히 회개와 관련해서는 구원파의 활약(?)으로 인해 많은 질문과 답이 오가고 있지만 회개의 본질을 정말로 올바르게 전하고 있는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점점 더 거세지는 생업의 압박에 시달리느라 의욕에 비해 글의 충실도가 날로 떨어지고 있어 안타깝다. 처음에 의도했던 것의 반도 풀어놓고 있지 못하지만 나의 작은 노력으로 ‘오직 믿음’이라는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구호이자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는 문구에 대한 고민이 예수가족교회 성도들 가운데 한 번 더 일어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1) 논쟁 상대의 주장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왜곡시켜 놓고, 이렇게 만들어낸 가상의 상대에 대해 장황하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논쟁 기법(?)으로서 청중이 논쟁 주제에 대해 확실한 배경 지식이 없는 경우에는 때로 큰 효과를 발휘한다.
2) Hodges ZC, Absolutely Free!,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9), pp145-6.
3) 핫지스가 예로 든 성경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마3:2, 8, 11;막1:4;눅3:3, 8;행19:4. 이 모든 구절들이 단지 하나님과 조화로운 삶을 살게 하는 의미에서의 회개를 말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지 생각해 보라.
4) Ryrie CC. So Great Salvation, (Victor Books, 1989), p99.
5) Hodges, pp144-5.
6) Ryrie, p96.
7) 존 맥아더, 구원이란 무엇인가[The Gospel According to the Apostles], (부흥과개혁사, 2008), p112-3.
8)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개요,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538-543.
9) 김남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부흥과개혁사, 2004), p195.
10) Hodges, p145, 기독교 강요 III.III.5에서 인용 (우리말 번역은 기독교문사판)
11) John Murray. Redemption-Accomplished and Applied, (Grand Rapids: Eerdmans, 1955), p140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주재권 구원 찬성파(LS)를 포함하여 개혁교회에 속한 이들은 전통적으로 ‘성도의 견인’이라는 제목 아래, 비록 사용한 용어나 강조점의 차이는 있었으나 구원의 확신 교리를 강조하였다. 주재권 구원 반대파(FG) 역시 구원의 확신을 그들의 핵심적 가르침 중 하나로 강조하였다. 그러나 똑같이 ‘구원의 확신’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LS와 FG의 구원의 확신은 전혀 다른 근거 위에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구원의 확신이라는 말이 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대학생 선교단체 운동의 중요 화두였다(이들 선교단체의 대부분은 FG 주의자들이다). 특히 80년대를 선교단체에서 보낸 이들은 공공연히 자신들이 구원의 확신에 대해 무지했던 한국교회에 최초로 구원의 확신을 소개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가 대학 신입생이던 90년대 초 선교단체 지도자들의 입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물론 구원의 확신이라는 개념을 이들이 처음 소개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개혁교회가 강조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구원의 확신을 도입했고 이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점은 사실이다.
선교단체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르치는 방식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5:11-12)을 읽은 후
-문: 영생은 누가 줍니까? 답: 하나님
-문: 영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답: 하나님의 아들 안
-문: 영생은 누가 소유하고 있습니까? 답: 그 아들이 마음에 있는 자
-문: 영생이 없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답: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2)을 읽은 후
-문: 사람은 어떻게 구원의 선물을 받습니까? 답: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여서
이어서 “당신은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질문이 이어지며, 예수님을 영접하여 마음에 계시다고 대답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제 영생을 소유한 자입니다.”라는 확언으로 마무리한다.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자(영접하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고 약속한다.
당신은 예수님을 믿었다(영접하였다).
그러므로 당신에게는 영생이 있다.
이런 삼단논법 하에서는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과 더불어 내가 믿었다는 사실이 구원의 확신의 근거가 된다. 라이리와 핫지스는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성경은 확신의 근거 두 가지를 제시한다. 객관적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믿음을 통해 구원 받았다고 천명한다는 사실이다...주관적 근거는 나의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이전에 없던 이런 경험들이 나에게 생겨났다는 사실은 나에게 새 생명이 있다는 확신을 준다. 믿었다면 나는 영원히 안전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가 내 삶에 일으키신 변화들을 고려하면 이를 확신할 수 있다.2)
영생에 관한 성경의 약속들을 믿는 것은 자신이 영생을 소유했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이 영생을 소유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은 약속들도 믿지 않는 것인데, 그것은 약속들이 신자들에게 영생의 소유를 확신시켜 주기 때문이다.3)
이들의 말은 결국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나의 믿음이며, 믿음을 자각하는 것이 구원의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하신 고후13:5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믿음은 검증의 대상이지 확신의 근거가 아니다. 위의 삼단논법 후 구원의 확신을 확고히 심어주기 위해 흔히 제시하는 성경구절은 롬8:38~39이다.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라는 말로 시작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단언한다. 그러나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전개하는 논리는 FG 주의자들의 삼단논법과는 확연히 다르다. 바울은 단 한 번도 ‘내가 믿었다는 사실’이 확신의 근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이 말하는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정하셨으며(사랑하셨으며), 정하신 그들을 부르셨으며,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셨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장차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이런 최종적인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롬8:28~30).
LS와 개혁주의가 말하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는 이외에도 다뤄야 할 더 많은 내용이 있다.4) 그러나 이 글에서는 참된 구원의 확신은 우리에게서 나온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초를 둔 것이라는 사실만 지적하고 지나가려 한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이전 글(02 주재권 논쟁의 역사와 인물들)에서 FG의 초창기 인물인 루이스 체이퍼가 20세기 초에 그리스도인을 자연인, 육적인 사람, 신령한 사람의 세 가지로 나누었으며, 20세기 후반에는 CCC가 이 가르침을 대중화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그리스도인을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으며, 육적인 그리스도인을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소위 제자훈련을 해야 한다는 개념은 오늘날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히 여김을 받게 되었다. 이 주장의 지지자들이 흔히 인용하는 구절인 고전3:1~3, 롬8:5~9 등은 일견 적절한 성경적 근거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더구나 주요 조직신학 서적들이 대부분 주재권구원 논쟁이 시작되기 전에 저술된 것들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안토니 후크마가 직접 CCC의 자료를 인용하며 이 문제를 다루어 준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기에 그의 설명5)을 요약하여 인용해 보겠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대중화 한 것은 스코필드 주석성경이고, CCC가 이를 더욱 널리 퍼뜨렸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회심 전과 똑같이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유형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가르침을 배격해야 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신약성경은 중생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요3:3,5), 예수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요3:36),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과 영을 따라 사는 사람(롬8:5), 신령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고전2:14-15)을 구분할 뿐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제삼의 무리에 대해서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2) ‘육적인 그리스도인’ 개념은 회심 이후에 또 다른 단계의 변화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회심 이후 두 번째 단계를 주장하는 구원론들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을 여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
3) ‘육적인 그리스도인’ 개념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서도 여전히 주님으로는 모시지 않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후4:5, 골2:6). 자아가 여전히 왕좌 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한 것이다.
4) CCC는 롬8:7을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수준 낮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다. 바울은 8절에서 7절에 언급된 사람들이 ‘육신에 있는 자들’이라고 지칭하였으며, 9절에서는 ‘너희’(그리스도인들)는 그들과 달리 영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갈5:16, 24도 육신을 따르는 사람과 그리스도인을 명확히 구분한다. 신자가 여전히 육신의 유혹을 받고 때로 거기에 굴복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끊임없이 육신 안에, 혹은 ‘육신을 따라’ 행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이어서 ‘육적인 그리스도인’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성경 본문인 고전3:1~3에 대해 자세한 해설을 제시한다. 바울이 수사적으로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라고 한탄한 본문을 그들이 실제로 육신에 속하였다고 진술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전2:14-15에서 언급한 ‘육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사람’ 외에 제삼의 신분이 있음을 가르친 것이 결코 아니다.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마치 육에 속한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지적했을 뿐 그들이 실제로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고린도교인들을 ‘형제’라 불렀고 6:19에서는 그들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그들이 ‘신령한 사람’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2)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신령한 사람으로서 미숙하다는 것일 뿐 그들이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3) 3절에서 ‘아직도’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현재 상태보다 성장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4)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육신에 속한 자와 같다고 말한 이유는 그들 사이에 시기와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전1:12에 나타난 것처럼 그들은 마치 중생하지 않은 자들처럼 육신의 방법대로 행동했다. 그러므로 바울의 지적은 행동의 미숙함을 질책하는 것이지 그들의 신분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5) 고린도 교인들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들을 ‘영적인’ 사람으로 여겼다는 증거는 고린도전후서의 본문에 수없이 많다.
-고전1:2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는 자들’이라고 불렀다.
-고전2:4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한다.
-고전1:30에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고도 거룩하게 되지 않을 수는 없다.
-고전3:21~23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보화는 육에 속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고전6:11에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의 시제는 3장에서 ‘육적인 사람’이라고 불렀던 이들이 이미 거룩하고 의롭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고후5:17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새 피조물’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행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사람들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다시는 육신에 속한 자와 같은 모습으로 살지 않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중생을 통해 새 피조물이 된 사람들은 그 이전의 상태와는 결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가 우리에게 어떤 실제적 의미가 있을까? 이전 글에서도 수차례 언급하였지만 FG식 가르침의 대부분은 빌리 그래엄식 전도 캠페인에서 생겨나는 실용적 필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회심을 특정 방법을 통해 유발할 수 있다고 믿는 그들에게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회심의 기준을 낮춰주어 보다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규정할 수 있게 해 주는 매우 유용한 가르침이다. ‘구원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영접기도를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 결신 카드에 서명해 제출하기만 하면 된다, 일어나 단상으로 나와 기도하기만 하면 된다. 지금 바로 결단하라. 결단은 간단하다’라고 호소하고 이렇게 한 사람들에게 ‘당신은 이제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선언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수준을 몇 단계로 구분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 막 영접기도를 따라 한 사람은 ‘육적인 그리스도인’일 뿐이므로 그에게서 중생의 표지로서의 변화된 삶의 모습을 찾으려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를 제자훈련시켜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양육의 목표이지만 이 목표점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이 가르침의 가장 심각한 위험성은 실제로는 중생하지 않고도 평생 동안 헛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 LS주의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의상 영적이라고 말한다. 중생이라는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심었다. 완전함과는 결코 거리가 멀지만 중생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자신이 육신에 속한 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을 결코 심상한 일로 여기지 않는다. 성경 말씀이 제시하는 거룩함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그들의 마음에는 탄식이 일어난다. 자신이 결코 구원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 자신 안에는 구원의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깨닫는 그런 사람에게 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사랑하심과 예정하심과 부르심을 깨닫게 하셔서 진정한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1) 그리스도인의 확신, (네비게이토, 2010), pp9-15.
2) Ryrie CC. So Great Salvation, (Victor Books, 1989), pp143-4.
3) Hodges ZC, Absolutely Free!,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9), p175.
4) 탁월한 교사임에 분명한 존 맥아더는 구원이란 무엇인가[The Gospel According to the Apostles], (부흥과 개혁사, 2008), p238-63에 구원의 확신에 관한 방대한 내용을 놀라울 만큼 압축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5) Anthony A. Hoekema, Saved by Grace (Eerdmans Publishing Co., 1994), pp20-6.
04 한국교회와 주재권 구원 논쟁
우리나라에서 주재권 구원 논쟁이 눈에 보이게 벌어진 일은 없다. 70년대 빌리 그래엄의 대규모 전도집회와 이어진 대학생 선교단체 중심의 제자훈련 운동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FG의 구원론이 별다른 저항 없이 뿌리를 내려 버렸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교회에서 사영리나 다리 예화 전도지, 영접기도 등에 대해 어떤 정서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대학부 모임에서 어떤 이가 사영리 전도법이 비성경적 구원론을 담고 있다고 말했을 때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상상해 보라.
이번 글에서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두 가지 문제만 다루려고 한다. 하나는 우리나라의 주재권 구원 관련 글에 가장 빈번히 인용되는 장두만 교수의 논문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인터넷에서 많은 화제를 몰고 다니는 폴 워셔(Paul Washer)라는 전도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장두만 교수는 FG 주의자인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주재권 구원 논쟁이 대중 출판물에 소개된 경우는 전 성서침례신학교 교수이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장두만 교수가 2005년 [목회와 신학]에 “주재권 구원,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으로 두 번에 걸쳐 기고한 글1)이 전부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글은 주재권 구원 찬성파(LS)를 비판하는 글이다. 최근 인터넷상에서 주재권 구원 논쟁이 다루어지면서 LS를 행위구원론자라고 비판하는 일이 빈번히 벌어지는데, 그 대부분은 장교수의 글을 근거로 삼고 있다. 필자는 처음에 장두만 교수가 달라스 신학교 출신이기에 찰스 라이리나 제인 핫지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인물일 것으로 예상하였으며, 그의 글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접하였다. 그러나 글을 면밀히 읽고는 두 가지 점에서 약간의 당혹감을 느꼈다.
첫째, 장두만 교수는 라이리나 핫지스와는 결코 한 배를 탈 수 없는 구원론, 오히려 많은 부분이 LS에 가까운 구원론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S에 대해 그가 가하는 비판은 FG들의 저서에 등장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내용의 것이었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모순이었다. 둘째는 그의 글이 가지고 있는 허점에 대한 것으로서, 그는 본론에서 언급하지 않은 내용을 결론에서 제시하는 학자답지 않은 실수를 범하고 있었다. 장교수가 그보다 1년 전 거의 같은 내용의 논문2)을 전문 학술지에 영문으로 기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 논문을 [목회와 신학]의 글과 비교하여 보고는 이 두 가지 의문점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하였다. (이하의 글에서는 영문 논문을 ‘논문’으로, [목회와 신학]에 기고한 글을 ‘목신’으로 약해서 지칭하겠다.)
‘논문’의 제목은 “구원하는 믿음의 본질: 주재권 구원 논쟁에 대한 또 다른 고찰”이다. ‘목신’은 ‘논문’의 번역본인데 일부는 축약되고 일부는 증보되었다. 어떤 부분이 그러한지 내용을 표로 정리하였다.
영문 논문 (2004년) 목회와 신학 (2005년)
제목: 구원하는 믿음의 본질 제목: 주재권 구원, 무엇이 문제인가
1. 서론 1. 서론
2. LS와 FG 2. LS의 주장
1) LS의 주장
2) FG의 주장
3. 두 입장에 대한 평가 3. LS에 대한 비판
1) LS에 대한 비판
2) FG에 대한 비판
4.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 4.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
1) LS가 말하는 구원 얻는 믿음 -참된 믿음이 아닌 것
2) FG가 말하는 구원 얻는 믿음 -참된 믿음의 올바른 정의
3) 참된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의 구별 방법
-참된 믿음이 아닌 것
-참된 믿음의 올바른 정의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의 구별 방법
5. 결론 5. 결론
증보는 위에서 4번 항목의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의 구별 방법’에서 한국 교회의 현실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이루어졌고 전체적으로 ‘목신’은 ‘논문’의 축소판이다. 그러나 전체 내용을 보존하면서 서술을 간략화 한 것이 아니라 위의 표가 한 눈에 보여주듯 내용을 단위별로 삭제하는 방법으로 축소가 이루어졌다. 삭제되지 않고 남은 부분에서는 ‘논문’과 ‘목신’이 완전히 똑같은 내용과 분량이다.
2004년 ‘논문’을 작성할 당시 장두만 교수의 의도는 미국 교회가 LS와 FG로 나뉘어 주재권 구원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양 진영 모두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일말의 진리와 함께 무시하지 못할 비진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론에는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LS와 FG를 넘어서는 진정한 성경적 믿음의 정의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즉 이 논문에서 LS와 FG는 모두 다 비판의 대상이다. 반면 2005년 목회와 신학에 기고한 글에서는 FG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모두 다 생략되고 LS에 대한 비판만 남았다. 글의 논지 흐름은 수정하지 않고 단지 중간 중간 한 단락씩 생략한 것이다. 4번의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과 5번의 결론 부분은 LS 및 FG의 주장을 반박하며 바른 정의를 제시하는 형태로 서술되었는데 앞부분의 내용이 이런 식으로 생략되다 보니 도대체 이 말을 왜 하는지 모를 항목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장교수가 단순히 부주의로 이런 실수를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목회와 신학 편집진의 요구가 반영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목신’을 읽은 이들은 당연히 장교수를 FG의 지지자로 이해하였는데 이는 장교수가 ‘논문’에서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또한 장교수의 LS에 대한 비판이 정확한 사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그는 FG 주의자들이 LS를 비판할 때 흔히 들고 나오는 상투적 문구들 (예: ‘LS는 주재권 인정 여부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다.’, ‘LS는 구원의 조건과 구원의 결과를 혼동하고 있다.’ 등)을 그대로 열거하고 있는데 필자는 이와 같은 비판이 오해 또는 곡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전 글들에서 설명하였다. 반면에 ‘논문’에서 장교수의 FG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판은 핵심을 정확히 짚은 것이었다. 1. FG는 회개가 구원 얻는 믿음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2. ‘주(Lord)’라는 말은 FG의 주장과 달리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동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3. FG는 믿음과 열매를 분리하지만 참된 믿음은 반드시 열매를 수반한다. 4. FG와 같이 믿음의 대상을 단순화 한다고 해서 구원의 확신이 더 확실해 지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장교수가 LS와 FG에 대해 이해도의 차이를 보이는 이유를 그가 달라스 신학교 출신이라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생각한다. 평소 상세하게 접해온 라이리나 핫지스에 대해서는 장교수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다른 저자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독창적인 비판(위의 4번 항목)을 할 수 있었다. 반면 LS에 대해서는 2차 자료를 참조해 비판을 하였기 때문에 다른 FG 주의자들의 잘못된 비판을 그대로 반복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으로 보아 FG 주의자인 데럴 복[Darrell Bock]의 견해를 거의 그대로 인용한 듯하다. 복이 LS의 견해에 일부 공감하고 있다고 밝힌 것으로 인해 장교수는 그의 비판이 균형 잡힌 것이라 생각하고 인용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장교수가 제시하는 ‘참된 믿음이 아닌 것’과 ‘참된 믿음의 올바른 정의’에 대해 필자는 거의 대부분의 내용에 동감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쉬운 점은 장교수가 자신이 역설하고자 하는 믿음이 바로 LS가 FG와 대립각을 세우며 주장하고 있는 그 믿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교수는 이번 시리즈에 언급한 세대주의자들 중 가장 개혁주의와 LS에 가까운 구원론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장교수의 글은 위와 같은 문제점들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이루어진 주재권 구원 논쟁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고 말았다.
폴 워셔와 존 맥아더는 행위구원론자인가?
수개월 전, 필자가 교제하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갑자기 폴 워셔라는 인물에 대한 질문이 증가하였다. 자신들이 보기에는 훌륭한 설교자인데 인터넷상에 그가 행위구원론자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어서 혼란스럽다는 내용이었다.
폴 워셔는 미국 내에서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는데 그가 수 년 전 어느 청소년 집회에서 행한 설교가 UCC 동영상으로 전파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설교의 번역본을 필자의 블로그3)에 올려 놓았으니 먼저 읽어보시기 바란다. “좁은 문 좁은 길”이라는 제목의 설교이다. 함께 게시된 “중생인가 결단인가”라는 설교는 폴 워셔의 성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깔끔한 번역을 발견하지 못해 게시하지는 않았지만 ‘10가지 기소장’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검색해 보면 폴 워셔가 데이빗 웰스나 마이클 호튼의 대중 설교자 버전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이끄는 선교단체의 홈페이지4)에서 그의 여러 설교와 기고글, 추천 서적들을 검토하면 그는 개혁주의에 충실한 선교사임이 분명하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를 ‘5-point 스펄전주의자’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자신이 침례교 전통에 속해 있으면서 칼빈주의 5대 강령을 모두 고백하는 개혁주의자임을 표현한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에 충실하게 진정한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는 그의 설교에 대해 우리나라의 한 이단 상담가5)가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의 설교가 당시 한국 교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던 변승우씨의 것과 마찬가지로 행위구원론이라는 것이었다. 얼마 뒤 이 상담가는 폴 워셔가 주재권 구원 논쟁의 맥락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존 맥아더를 위시한 LS 전체를 준행위구원론이라고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 때의 참고문헌은 오로지 장두만 교수의 글이었다. 그 상담가가 사이버 공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분이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이들이 폴 워셔와 존 맥아더, LS를 행위구원론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몇 가지 글들만 인용해 보겠다.
최근에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준행위구원론에 가까운 소위 lordship salvation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구원론으로 신학적 논쟁을 일으킨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맥아더 목사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부 개혁주의나 복음주의 목사들이 동의를 하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결코 전통적인 개혁주의나 복음주의적인 주장이 아니며, 전혀 다른 내용의 또 다른 신학적 견해이다.
다시 말하여 이들이 이신칭의의 기독교 복음 자체를 변질되었으며 거짓복음이라고 비난한다면, 이들의 구원론은 이신칭의 자체를 왜곡시키며 부정하는 주장이 되므로 행위구원론이 될 수밖에 없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행위구원론이 아니라는 궁색한 변명만을 늘어놓은 것이 된다.
폴 워셔는 모든 크리스쳔을 입으로만 고백하는 사람들로 왜곡, 과장하여 비판합니다. 즉 모든 크리스쳔을 입으로만 고백하는 신앙고백, 주관적인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로 왜곡시키고 축소시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모인 크리스쳔 5000명을 모두 지옥에 가는 사람들로 비난합니다. 기존의 기독교를 거짓 복음이며 속아왔다고 비난합니다. 즉 모두 입으로만 고백하는 거짓 믿음으로 과장시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행위구원론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헌신과 결단과 의지와 행함이 없으면 모두 지옥에 갈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지옥에 간다면 그런 입으로만 고백하는 형식적인 믿음으로 지옥에 가는 것이지 행함이 없어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한 믿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며 그것이 기독교가 가르치는 복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행위 구원론자가 아닙니까? 
대부분의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주재권 구원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재권 구원론은 루터와 캘빈의 개혁주의 구원론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1) [목회와 신학]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전문을 읽을 수 있다. 주소는 아래와 같다. 이어지는 글은 독자들이 아래 두 편의 글을 읽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작성하였다.
http://www.duranno.com/moksin/detail.asp?CTS_YER=2005&CTS_MON=1&CTS_ID=13714&CTS_CTG_COD=11
http://www.duranno.com/moksin/detail.asp?CTS_YER=2005&CTS_MON=2&CTS_ID=23249&CTS_CTG_COD=11
2) Chang AD, The nature of saving faith: Another look at the Lordship salvation debate. Korea Journal of Theology 2004;4:153-91.
3) http://mylog.jesusfamily.kr/mednav
4) http://www.heartcrymissionary.com/hom
5) http://cafe.naver.com/anyquestion 굳이 카페에 가입하지 않아도 naver에서 폴 워셔, 존 맥아더, 주재권 구원 등을 검색하면 이 분의 글을 읽을 수 있다.
마지막 인용문만 보아도 그가 주재권 구원 논쟁에 대해 거의 지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들에 대한 LS와 FG의 입장 차를 다시 한 번 정리하고 폴 워셔의 두 편의 설교를 읽어보면 그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의도는 이 이단상담가 개인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신천지나 안상홍 증인회, 구원파, 지방교회 등의 이단들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에 근거해 상담하는 일을 훌륭히 해 오고 있다. 다만 이분이 개혁주의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고, 주재권 구원 논쟁에 대한 자료가 장두만 교수의 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척박한 현실 때문에 폴 워셔나 LS에 대해 잘못된 주장을 유포시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05. 결론 및 요약 
주재권 구원 논쟁은 1980년대에 존 맥아더(주재권 구원 찬성파, LS)와 달라스 신학교의 교수들(주재권 구원 반대파, FG) 사이에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벌어진 논쟁이다. 처음에는 세대주의자들끼리의 논쟁이었지만 맥아더가 주장한 바는 전통 개혁주의 구원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고 결국 LS를 지지하는 개혁주의자들과 FG를 지지하는 세대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FG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시며 그가 영생을 주신다는 것을 믿기로 결단하는 것 자체가 구원 얻는 믿음이라 정의하여 인간의 결단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신자의 올바른 행위가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며 사는 풍성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 구원 자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신자를 단순히 믿기만 하는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행함이 있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두 부류로 나누고 육적인 그리스도인을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 제자훈련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구원론이 미국 교회를 휩쓸 때 LS는 구원 얻는 믿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감정과 의지의 변화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이런 믿음은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결코 나올 수 없고 오직 중생이라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사건이 선행할 때에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행위의 변화가 구원의 조건이 아닌 것은 명백하지만 중생을 경험한 사람은 이전과 같은 삶을 결코 살 수 없기 때문에 행위는 그가 고백하는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요소가 된다. 육적인 사람(불신자)과 신령한 사람(중생자, 신자)이 있을 뿐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FG의 가르침에 영향 받아 거듭나야 할 사람들을 이미 구원 얻은 자들로 간주하고 회심의 요청이 아닌 제자훈련을 시키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는 이와 같은 본모습이 왜곡된 채 LS가 마치 행위구원론인 것처럼 소개되어 왔다. 그러나 이 논쟁의 중심에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전적으로 무능한가 아니면 무언가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이 남아있는가라는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사이에서 시작된 역사적인 논쟁의 현대적 버전이 바로 주재권 구원 논쟁인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언제나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의 모든 오류에 빠져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의 주장에 많은 부분 동조한 사람들은 교회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펠라기우스의 후예들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남아 현대 복음주의 교회를 포로 삼고1) 오염시키고 있다. 인간의 무능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성경적 진리에 대적한 것은 FG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임에도 여기에 믿음의 결단이라는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에 포함시킨 FG가 오히려 행위구원론이다. 
현대 미국교회와 더불어 우리가 몸담고 경험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FG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사영리식 전도와 영접기도, 육적인 그리스도인 등의 개념에 익숙한 이들을 상대로 중생의 의미와 그 절대적 필요성을 선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싸움이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가 한 방송에서 적대적인 방송 진행자를 상대로 말했듯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2) 주께서 구원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이 땅에 회복시키시기를, 그리고 그 일에 이 글이 조금이라도 사용되기를 바라며,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1) 이 용어는 R. C. 스프로울이 Modern Reformation지에 기고한 글[The Pelagian Captivity of the Church ]의 제목에서 따왔다. 인터넷에서 전문을 볼 수 있다. (http://www.modernreformation.org/default.php?page=articledisplay&var1= ArtRead&var2=383&var3=authorbio&var4=AutRes&var5=182) 필자의 블로그에 이 글을 요약하여 게시하였다. (http://mylog.jesusfamily.kr/mednav/2960) 
2) Iain H. Murray, D. Martyn Lloyd-Jones. The Fight of Faith 1939-1981.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0, pp6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