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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4. 네 번째 적극적 표지 : 하나님을 아는 지식(382-413)

4. 네 번째 적극적 표지 : 하나님을 아는 지식(382-413) 
 
- 은혜로운 감정은 지성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일들을 바르게 이해할 때 생긴다(Gracious affections do arise from the mind‘s being enlightened, richly and spiritually to understand or apprehend divine things). 
 
   양낙흥 교수는 첫 번째 표지부터 네 번째 표지까지에서 에드워즈는 사실상 신앙감정의 표지를 제시하기 보다는 그 원천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고 바르게 지적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원천이 그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원천이 있으면 결과는 자연히 따르기 때문이다.1) 에드워즈에 의하면 신앙 감정은 정신이 조명되어 하나님의 일들을 바로 그리고 영적으로 이해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1. 신앙 감정은 빛 없는 열이 아니다 
 
 신앙 감정은 빛 없는 열이 아니다. 거룩한 감정은 언제나 지성을 깨우는 어떤 정보나, 사람의 마음을 깨우는 어떤 영적인 가르침이나, 어떤 빛이나 실제적인 지식에서 생겨난다. 하나님의 자녀는 은혜로운 감정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이전보다 신적인 일들을 더 많이 알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고 복음 안에 제시된 영광스러운 일들을 더 많이 알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가 은혜로운 감정을 체험하기 전보다 더 분명하고 나은 견해가 생긴다 그는 신적인 일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거나, 그에게 이전에 있던 지식을 새롭게 받아들이게 된다.2) 요일4:7, 빌1:9, 롬·10:2, 골3:10, 시43:3-4, 요6:45등의 구절들을 보라. 지식은 먼저 굳어진 마음을 열어주고 감정을 풍요롭게 해 주는 열쇠다. 그리고 지식은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눅11:52)(382-3). 
 
  사람들은 본질상,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자신이 생각지 못한 것으로는 절대 감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지론이다. 참으로 영적이고 은혜로운 감정은 지성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일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참으로 영적이고 은혜로운 감정은 하나님의 탁월한 본성과 놀라운 완전성을 새롭게 이해할 때 생기며 그리스도의 영적인 탁월함과 충만함을 새롭게 생각하고 지성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에 속한 일들을 새롭게 알 때 생긴다. 이런 조명을 통해 성도들은 과거에는 그에게 어리석게 보인 신적인 일들과 영적인 가르침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지성이 밝아지는 것은 외적 관념들이나 상상력으로 생기는 감정과는 관계가 없다. 또한 성경 본문이 갑작스럽게 마음에 떠오르는 현상과도 무관하다.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마음이 은혜로운 감정으로 불타오르게 하실 때는, 성경을 그들의 지성에 풀어주심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눅24:32)(384).    
 
2. 거룩한 신앙 감정은 영적인 지식에서 비롯된다 
 
  에드워즈는 신앙 감정은 진정 어떤 교훈이나 지성에 주어진 빛에서 생기지만, 영적인 빛이 아니라 성령의 일반적인 조명에 의해서 지성이 밝아짐으로 생겨나는 감정도 있다고 주장한다. 즉 영적인 빛이 아니라 일반적인 빛에 의해서도 사람의 마음은 크게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들만이 알 수 있는 신적인 일들에 대한 영적, 초자연적 지식(고전2:14,요일3:6,요삼11,요14:19,17:3etc.)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에드워즈는 지식을 개념적 지식과 마음의 지식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사변적인 지식으로서 마음이 사유하면서 사물들을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마음이 단지 사유하거나 바라볼 뿐만 아니라, 향유하고 느낀다는 의미에서 감각적인 지식이다(389). 에드워즈는 신앙에 속한 일들을 사변적으로 아는 지식과 영적으로 아는 지식을 구분한다(390).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된 믿음이나 감정의 합당한 토대가 되는 지식은 반드시 신적인 일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영적 지식이요, 이 지식은 신적인 일들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각과 감각 속에 더 직접적이며 본질적으로 내재한다고 말한다. 영적인 지식은 신적인 일들에 있는 거룩함이나 도덕적 완전성의 지고한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느끼는 마음의 감각에 내재한다. 더불어 믿음에 속한 일들에 대한 모든 인식과 지식은 그런 감각에 의존하고 그런 감각에서 흘러나온다(389, 390). 영적인 지식은 주로 영적인 아름다움을 아는 마음의 지식에 존재한다. 영혼이 신적인 일들 안에 있는 거룩함이나 참된 도덕적 선함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체험하게 되며, 이 아름다움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이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은 하나님의 모든 완전성과 신적인 일에 속하는 모든 것의 영광스러움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음에 대한 참된 체험적 지식은 영적 아름다움을 아는데서 비롯된다. 에드워즈는 특히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아는 영적 지식을 강조하는데,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보거나 참된 도덕적 선을 보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위대한 것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거룩함의 아름다움은 만물을 충만케 하는 것으로 그것이 없이는 모든 세계는 헛될 뿐이며, 없는 것과 같으며, 진정 무보다 더 나쁘게 되기 때문이다. “거룩함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본체의 아름다움이며, 신성 가운데 신성이며(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선의 무한한 원천이다.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 자신은 무한한 악이 될 것이다(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또한 그것이 없이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은 사실상 아무 것도 모른다“(392-3).3)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여러 은혜 중에서 어떤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즉 그에게는 영혼에 미치는 은혜의 모든 작용들과 모든 거룩한 위로와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구원에 이르도록 영향을 주는 모든 효과들에 대한 어떤 관념이나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적인 지식은 신적인 일들의 이 거룩한 아름다움 안에 가장 본질적으로 내재한다(398)는 것이 에드워즈의 지론이다. 
 
  에드워즈는 이와 같은 영적인 지식 혹은 신적인 감각은 영혼에 주시는 중생의 사건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바르게 말한다.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감각을 처음으로 주시는 회심의 사건이 얼마나 근본적인 변화를 낳고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것인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회심할 때 영적인 눈을 뜨는 사건이 주는 변화는 모든 면에서 맹인으로 태어나 오랫동안 다른 네 가지 감각만으로 살다가, 갑자기 눈이 떠져 밝은 대낮에 사물들을 보게 된 사람이 겪은 변화보다도 훨씬 더 크고 놀라울 것이다. 이는 비록 시각이 다른 외적 감각들 보다 더 고상하지만, 이 영적 감각은 시각이나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있는 다른 인식의 원리보다 한없이 더 고상하며, 이 감각의 대상은 한 없이 더 크고 중요하기 때문이다”(393-4). 영적인 지식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영혼에 없는 새로운 영적 감각을 가진 지각에 내재한다(388). 이런 지식은 신적인 일들에 대한 지식이며, 이 지식에서 모든 참된 은혜로운 감정이 흘러나오게 된다. 따라서 이런 지식으로 모든 감정들을 시험해야 한다. 전적으로 다른 지식에서 생기는 감정들이나 다른 깨달음에서 나오는 감정들은 헛된 것이다(394). 
        
3. 성경을 영적으로 이해하는 것(The spiritual understanding of the Scripture) 
 
  에드워즈는 영적인 지식이란 어떤 새로운 교리적 지식이나, 읽거나 듣지도 못했던 어떤 새로운 명제들이 마음에 떠오르는 현상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명제들을 마음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마음에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새롭게 맛보거나 느끼게 해 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에 따르면 영적인 지식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교리적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것과도 무관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교리에 대한 지식이거나 명제적인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어떤 부분을 교리적으로 해설하는 것은 그 부분에 담겨있는 명제들이 무엇인지를 이해시킬 뿐이다. 
 
  에드워즈는 성경의 비유나 예표나 풍유들 속에 있는 성경의 신비적인 의미를 가르쳐 주는 것조차도 교리적 해설에 불과하지 영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해설하는 사람 가운데도 영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예표들, 비유들, 수수께끼들과 풍유들을 해석하는 방법을 알고도 그의 마음속에 영적인 빛이라곤 한 줄기도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신적인 일들에 대해 거룩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조금도 없을 수 있으며, 성경에 나오는 예표, 비유, 수수께끼, 풍유들과 다른 부분들에 담겨 있는 영광스러움을 전혀 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도가 분명히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성경의 여러 가지 신비한 내용들을 다 이해하더라도, 구원에 이르는 은혜가 전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고전13:2)”(397-8).4)  
 
   에드워즈는 성경을 영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성경 본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본문을 영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고, 성경을 이해하기 전에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 본문에 담겨있는 본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바르게 조명될 때, 과거에는 영적으로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성경을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만일 그가 보지 못했던 이유가 영적으로 소경되었기 때문이었다면, 분명한 것은 본래의 의미가 성경 안에 이미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경의 본래 의미를 보지 못한 것이 영적인 소경 됨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 . 
 
   영적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음의 눈이 열려서 성경의 참된 의미 속에 담겨 있고 또 성경이 기록된 이래로 항상 그 안에 담겨있던 영광스러운 일들의 놀라운 영적 탁월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완전성과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충분성이 사랑스럽고 밝게 드러난 것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이 탁월하며 합당함을 아는 것이며, 성경의 계명들과 약속들이 보여 주는 영적인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 속에 항상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가 만일 영적으로 소경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말씀을 주시거나 또 그에게 새롭게 말씀하심으로 더해진 새로운 의미와 상관없이 그 전에도 볼 수 있었던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다“(400-1).5) 
   
4. 거룩한 미각과 취향(The holy taste and appetite) 
 
  에드워즈는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직접 떠올라서 자신들의 의무를 알게 되는 것은 영적인 지식이 아니라고 논박한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내면에 직접 생각이 떠오르게 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알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비판한다(398). 그러나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의 거룩하고 영적인 인도(롬8:14)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령의 은혜로운 인도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성령이 하시는 일을 성도에게 가르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이 그 가르치심을 따를 수 있도록 강력하게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성령의 은혜로운 인도가 가르치는 것에 있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참된 도덕적 아름다움을 영적이고 특별한 감각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말한다. 에드워즈는 앞 부분에서 영적인 지식이란 참으로 선하고 거룩한 것을 사랑하고 아름답다고 느끼고 즐기는 것을 포함한다고 입증해왔다(401). 
 
   에드워즈는 이 지점에서 거룩한 미각(holy taste) 혹은 거룩한 미각과 취향(holy taste and appetite)에 대해서 상술하기 시작한다. 물론 세속적인 일을 판단할 수 있고 본성적인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훌륭한 미각도 있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미각에 대한 백과사전(Chambers' Cyclopedia)적 설명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의 인용문에 따르면 “미각을 갖는다는 것은 사물의 참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며, 사물의 좋은 점에 감동을 받고, 나쁜 점에 충격을 받는 것을 뜻한다. . . 판단은 반성을 거쳐 내려지지만, . .훌륭한 미각은 이런 형식적 절차가 없다. 생각할 시간을 주면, 한쪽을 택해 버린다. 대상이 제시되자마자 인상을 받게 되고, 느껴지며, 더 이상 묻지 않는다. .  .미각은 순간적으로 알아내며, 어떤 반성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미각은 그런 논증이 필요 없다. . . 훌륭한 미각은 말하자면 원초적 자극 또는 일종의 본능적 추론이며, 빠르고 급하게 작용하고, 이성이 추론하는 것보다 더 확고하게 판단 내린다. 훌륭한 미각은 눈으로 먼저 슬쩍 보고서 우리들에게 사물의 본질과 관계들을 순간적으로 알려준다”(402-3).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께서 성도의 심령 속에 주시고 유지하시는 신적인 미각이 있다. 신적인 미각으로 성도는 진정 영적이고 거룩한 아름다움이 있는 행동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고 구별하게 된다. 그리고 성도에게 하나님의 영이 더 강력하게 내주하시면, 더 쉽게, 더 용이하게, 더 정확하게 분별하고 구별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에서 행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은혜가 강하고 활력있게 임할 때, 거룩한 성향과 영적인 미각은 영혼으로 하여금 어떤 행동들이 옳으며,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지를 판단 내리게 해준다. 아주 겸손하고, 온유하고 자애로운 성향은 기독교적 영도 없이 가장 강력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가장 근면하게 연구하고 정교하게 추론한 것보다 훨씬 더 쉽고 정확하게, 연약한 사람들을 겸손과 온유와 자애와 같은 기독교적 규범에 일치하는 행동으로 이끌어준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403-5). 
 
  심지어 에드워즈는 이렇게 주장한다. “영적인 미각으로 행동을 판단하는 성도들은 그들이 직면한 모든 말과 행동에서 그리고 그들이 판단해야 할 선과 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하고 있는 구체적인 법에 특별히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영적인 미각 자체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법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 바르게 논증된 법으로 연단받는다”(405).6) 그리고 영혼에 있는 미각은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색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법의 참된 의미를 판단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영혼에 있는 영적인 미각은 부패한 정욕에서 생기는 선입견과 편견들을 제거해 주며, 하나님의 말씀에 빛을 던져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화된 영혼의 성향과 미각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법들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 말씀의 참된 의미를 아주 자연스럽게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화가 적절히 적용되었을 경우에는 성경 본문 자체가 마음에 떠오르기도 한다(Yea, this harmony tends to bring the texts themselves to mind, on proper occasions).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가르치는 율례들을 묵상하면서 행동을 결정하며,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분별하고 적용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당신의 법도를 가르치시며, 성도들이 당신의 율례의 도를 이해하도록 만드신다. 이상이 영적인 지식이란 심령에 있는 신적인 초자연적 감각과 미각에 본질적으로 내재한다는 에드워즈의 논지의 해명이다. 
 
5. 온갖 종류와 형태의 열광주의는 사단의 작품이다 
 
  교회사를 보면 초대교회 영지주의나 몬타니즘으로부터 시작해서 종교개혁시의 재세례파등을 비롯하여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열광주의가 존재해왔었다. 그런데 이 열광주의의 특징은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께서 내면에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고 어떤 것을 생각나게 한다고 주장한다. 소위 그들은 직통계시를 좋아한다(406-9). 그러나 이들은 사단의 미혹에 이끌린 것이다. 사단은 주로 이런 신앙과 종교에서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나는데, 보통 사람은 분별하지 못하고 쉽게 미혹당하고 말게 된다. 대단한 것처럼 보이는 요란하고 화려한 신앙 현상을 본 사람들은 사단이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면, 사단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숭배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특히 위대한 영적 각성의 시기에 목사들은 사단의 역사에 대해 중하고 엄격한 경계와 감시를 소홀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에드워즈는 경고한다(409). 
 
  에드워즈에 의하면 상상이나 환영(phantasy)은 사단의 이 모든 속임수들이 자리하기 좋은 곳이다. 거짓된 신앙과 가짜 은총과 거짓된 감정의 영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상상과 환영에 도취된다. 상상과 환영은 마귀의 거대한 은신처이며, 악하고 속이는 영들의 본부이다. 에드워즈는 사단이 오직 상상으로만 영혼에 접근할 수 있고, 영혼을 유혹하고, 속일 수 있으며, 그 영혼에 어떤 것을 생각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411). 사단에 대항하여 경계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단에게 자신들을 완전히 노출시키고, 사단을 원하고, 초청하는 꼴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 성령의 조명하심과 은혜의 모조품을 만들기 때문이다. 사단은 내적인 속삭임, 사실이나 사건들을 직접 생각나게 하거나, 듣기 좋은 음성, 아름다운 이미지들 그리고 상상 속에 인상이 박히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속고, 그런 거짓된 경험을 통해 교만에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