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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강의

핵심감정에 관한 오리엔테이션

핵심감정에 관한 오리엔테이션 

노승수 목사

1. 우리의 마음은 조화로움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서적 에너지들이 끊임없이 작용합니다. 이 정서적 에너지가 어떤 결정적 시기에 부모나 정서적으로 영향을 많이 주는 사람으로부터 자극을 받게 되면 균형을 잃게 됩니다. 이 결정적 시기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어머니에게 임신했을 때부터의 시점을 시작으로 보겠습니다. 이때에 어떤 정서(거짓 자아 혹은 옛 사람)가 우리에게 형성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감정이 어떤 계기를 통하여 자리 잡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그 대상이나 비슷한 상황만 되면 자동적으로 유사한 정서적 반응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핵심감정입니다. 우리는 영적이며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핵심감정으로부터 놓여나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하고자 하는 주된 작업은 우리 안에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참된 자아(혹은 속사람)1)가 얼마나 귀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런 참된 자아(Real self)를 발견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나 존재(대상)도 나와 같이 존귀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대상들과 평등하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 자체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지를 우리가 직접 체험해 보는 과정입니다.
상담은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처럼 그 사랑의 대상인 된 자기를 사랑하는 공부이며 수련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자기 사랑을 중립적인 것으로 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랑의 방식과 대상입니다. 그것이 만약 옛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면 그것은 죄요 성경이 말하는 깨어지고 부인되어져야 할 자기이며 이것이 곧 핵심감정입니다. 반대로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자기에 대한 사랑이라면, 건강한 것이며, 성도의 마땅한 바이며, 영적 성장과 성숙의 필요조건입니다. 건강한 자기사랑의 출발점은 자기에 대한 관심입니다.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의 몸과 영혼이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는 지를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해 보는 것입니다. 나의 몸은 나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몸의 소리를 외면하지 말고 내가 나의 몸을 소중히 하고 귀하게 여겨 사랑하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영혼도 마찬가지로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소리를 외면하지 말고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있는 그대로의 너와 나를 만나는 작업과 체험을 통하여 ‘우리는 주안에서 하나다(엡2:14)’라는 느낌을 공유해 보자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만나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서의 정서(느낌, 감정, 신체적, 생리적 반응)를 주고받는 작업에 충실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편안하다, 불편하다, 좋다, 싫다, 기쁘다, 슬프다, 우습다, 반갑다, 피하고 싶다, 뿌듯하다, 허무하다, 사랑하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고맙다, 자랑하고 싶다, 수치스럽다, 재미있다, 심심하다, 흐뭇하다, 실망스럽다, 흥겹다, 신난다, 잘하는 것을 보고 기죽는다, 부럽다, 잘하고 싶다,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고 싶다, 감사하는 마음을 베풀고 싶다, 사랑을 빼앗고 싶다, 신기하다, 새롭다, 희망을 갖고 싶다, 절망스럽다, 밝고 싶다, 어두워서 싫다, 포근하다, 차가워서 다가가기 힘들다, 조심스럽다, 정이 느껴진다, 냉철하다, 믿음이 가서 든든하다, 불안하다, 믿음이 안 간다, 용기가 난다, 용기를 주고 싶다, 의기소침해진다, 잘되었으면 한다, 삐걱거려서 불안하다, 칭찬받고 싶다, 걱정된다, 염려스럽다, 격려 받고 싶다, 비웃는 것 같아 싫다, 위로받고 싶다, 야단맞을까 불안하다, 두렵다, 귀하게 대접받고 싶다, 신경질난다, 짓밟고 싶다, 안아주고 싶다, 받아들이고 싶다, 가깝게 지내고 싶다, 배척받는 것 같아서 싫다, 흥미진진하다, 지겹다, 혼내고 싶다, 보호하고 싶다, 해치고 싶다, 찐한 만남을 하고 싶다, 헤어지고 싶다, 나누고 싶다, 감싸주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 존중받고 싶다, 이해받고 싶다, 이해하고 싶다, 오해받아서 속상하다, 신선하다, 공감 받고 싶다, 잘 보이고 싶다, 쌈박하다, 깨운하다, 지저분해서 싫다, 맑아서 산뜻하다, 상쾌하다, 찝찝하다, 찬란하다, 파란만장해서 배움이 되어서 감사하다, 소담스럽다, 호기심이 일어난다, 멍하다, 똑똑(똘똘)하고 싶다, 멍청하다, 다정하다, 냉정하다, 차갑다, 말끔한, 친절하다, 딱딱하다, 자연스럽다, 어색하다, 명랑하다, 수줍다, 겸손하다, 거만하다, 오만, 경건하다, 수다스럽다, 존경스럽다, 천박하다, 박하다, 당당하다, 난처하다, 자신감, 절망감, 고맙다, 원망하다, 가뿐하다, 피곤하다, 깨어있는, 잠 오는, 기발한, 고달프다, 힘이 없다, 건강하다, 아프다, 감격스런, 쓰리다, 져민다, 유연한, 경직된, 가벼운, 뻐근한, 한스럽다, 편안한, 부담스러운, 당연하다, 이상하다, 시원하다, 답답하다, 고달프다, 저리다, 섬짓하다, 갈애, 분노, 정리되다, 혼란스러운, 순발력, 망설임, 순조로운, 갈등스러운, 메스껍다, 성욕, 다가서다, 꺼려지다, 자신만만, 머뭇거림, 즐겁다, 괴롭다, 손쉬운, 어렵다, 화나다, 짜증스런, 쓰다듬다, 때려주다, 살리고, 주이고, 도와주다, 괴롭히다, 정겹다, 외롭다, 안쓰럽다, 속상함, 좋다, 밉다, 차분하다, 미치다, 믿음직하다, 걱정되다, 고요하다, 안정되다, 소리치고 싶다, 절규, 안심되다, 곤란하다, 난처하다, 능청스럽다, 당황스럽다, 편안하다, 긴장되다, 지랄 같다, 조바심, 필요하다, 쓸모없는, 관대하다, 질투, 시기하다, 양보하다, 이기고 싶다, 즐거운, 우울하다, 화기애애, 쓸쓸한, 자애로운, 교만한, 웃고 싶다, 울고 싶다, 온정, 냉정, 가볍다, 무겁다, 열 받다, 따뜻하다, 착잡하다, 자랑하고 싶다, 숨기고 싶다, 보고 싶다, 잊고 싶다, 창피하다, 그립다, 반갑다, 무섭다, 흥겨운, 붙잡다, 내동댕이치다, 다행스러운, 힘들다, 긴장된다, 답답하다, 편하다, 시원하다, 짜증난다, 상쾌하다’라고 표현해 봅니다, 이 작업을 통하여 현재의 느낌에 충실하여 현재를 느끼고 즐겨보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정서에 초점을 두고 훈련을 하는 까닭은 엄격한 의미에서, 참된 자아(참된 영성)는 이 순간에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마6:30-33). 인간은 현재적 존재이며 시간 내의 존재입니다. 과거는 흘러갔습니다. 과거는 어떤 의미에서 가짜입니다. 과거에 얽매여 사는 것은 집착이며 후회입니다. 이런 집착을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 현재에 충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주로 표면정서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 정서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작업을 합니다. 예를 들면 현재의 감정이 ‘답답하다’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들 ‘내가 답답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그 감정의 바탕에는 이 자리에서 편해지고 스스럼없이 대하고 싶고, 자연스럽게 있고 싶은 마음이 되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답답해집니다. ‘이제는 편하고 싶다, 자유롭고 싶다’라는 더 깊은, 내면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해 보는 것입니다. 내면의 나를 만나는 작업을 통하여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는 나의 정서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는 것과 하나님이 진정으로 나에게 원하고 바라는 것이 서로 일치 되도록 믿음을 사용하여 그것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 곧 원의는 끊임없이 현재에 살고자 하는데, 미래나 과거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하여 생긴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현재를 어제의 후회와 내일의 염려로 오염시킵니다. 이런 마음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 머무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4.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만남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와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마7:1-2). 자기를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좋다, 싫다는 식으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느낌에 대해서 그냥 느껴보고 지켜보고 표현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기를 너무 미워했습니다. 자기를 이제까지 충분히 미워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작업만을 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사랑하신 것처럼 나의 죄인 됨을 알고도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롬5:8). 그것은 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죄 가운데 어찌하지 못하는(롬7:14-25) 우리의 불쌍한 영혼을 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나 자신을 대하는 것입니다. .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보통 우리가 말할 때 쓰는 자기는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된 옛 본성'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할 때는 이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통상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자신을 동일시하기보다 중생하였음에도 여전히 옛사람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자기가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죄의 경향성인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돌이키는 것이라면, 자기부인 곧, 죄 죽임(mortification)은 죄에 대한 사랑과 그 생명이나 기능 혹은 작용이 파괴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의 자기 사랑은 불신자의 자기 사랑과는 다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주님의 입장에서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저절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마25:40). 사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자기 영혼에 대한 불쌍함에 대한 깊은 인식과 그런 자신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마7:12) 이것이 구약의 핵심적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한 가지 전제가 함축되어 있는데 자기에 대한 관심만큼 남을 대접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남을 사랑하기 원하면 진정 자기에게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린 앞서 남과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습니다. 사랑이 그 비결입니다. 

5. 우리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과 감정들입니다. 이런 감정들 중에 가장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핵심감정입니다. 이 핵심감정이 아직 죽지 않고 깨어지지 않은 옛 사람으로서 '자기'를 가리킵니다. 핵심감정이 무엇인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과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곧 핵심감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 주된 목표이자 수련의 내용입니다. 핵심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면 지금 여기에 충실하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부활에 관한 논쟁으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7형제가 한 여자를 취하고 죽은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그 때 예수님은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곧 현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현재라는 시간 이외에 이곳이라는 장소 외에 주어진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상상의 나래를 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지금이 아닌 과거와 미래로 날아갑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성의 핵심은 바로 지금 여기를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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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형상은 광의와 협의의 개념으로 구분할 수 있다. 광의의 개념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현재 우리에게도 존재하는 이성, 영혼, 몸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협의의 하나님의 형상은 통상 원의(original righteousness)라고 불리는 데, 부가적 은사(donum spraditum)이라고 하기도 한다. 참 지식, 의, 거룩, 이 세 가지를 일컫는 말로 그리스도에 의해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골 3:10과 엡 4:24에 묘사되어 있다. 통상 이 세 가지는 삼위 하나님에게 있어서 사랑이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관계적 속성인 것처럼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관계적 속성이고,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재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한 사람들에게 다시 존재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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