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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강의

핵심감정 지우기

핵심감정 지우기 


노승수 목사

핵심감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힘들어 한다. 핵심감정을 지켜보는 것도 너무 고통스럽다. 거기에 휘둘리는 나를 보면서 절망감도 느낀다. 반복적인 실수를 보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지만 가족관계나 그의 대인관계의 여러 갈등은 늘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된다. 그러고 있는 자신이 답답하고 지긋지긋하기도 하다. 과연 핵심감정으로부터 나는 놓여날 수 없는 것인가? 자문하기도 한다. 


핵심감정을 녹인다고 하면서 자기가 이전에 하던 방식대로(핵심감정으로) 작업을 하고 있으니 잘 안 될 수밖에 없다. 지우는 방법을 제시하였지만 모두들 자기식대로 한다. 치료개입은 4단계로 전개된다. 핵심감정 찾기, 핵심감정 보기, 핵심감정 지우기, 상호의존적 주체 세우기로 이뤄지는데 핵심감정 보기에서 고집들이 대단하다. 결국에는 자기식대로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각자의 공부수준이 너무 달라서 힘들어하는 방식도 너무 다양하다. 핵심감정에 휘둘리게 되면 핵심감정을 지켜보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면 핵심감정을 어떻게 지켜볼 것인가? 


핵심감정 작업을 할 때에 핵심감정으로서 핵심감정을 잡을 수 없다. 도둑에게 도둑을 잡으라고 하면 도둑을 잡을 수 없다. 도둑은 경찰이 잡도록 해야 안전하다. 경찰도 도둑보다 수준이 높아야 도둑을 잡을 수 있다. 그러면 핵심감정보다 높은 차원에 무엇을 가지고 핵심감정을 지워야 한다. 지운다는 것은 핵심감정을 지켜볼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이디푸스적 갈등, 곧 내사된 부모의 원상과 하나님 표상이 자리하고 있다. 제대로 지켜보려면 하나님 표상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 표상의 수정이 없이는 지우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지켜본다는 것은 핵심감정에 끌려 다니지 않고 응시하는 것이다. 보통은 핵심감정이 일어나면 내가 핵심감정의 그 자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감정과의 동일시이다. ‘감정이 바로 나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육의 감정(갈 5:14-24, 롬 7장 14-25))이다. 육체의 감정은 ‘내가 마음이다’라고 나를 감정에다 붙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말하는 육의 개념(롬 8:5-7)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핵심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핵심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까? 


성경은 이것이 오로지 성령의 사역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부모상의 내사로 만들어진 체계이므로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부모상으로서 하나님표상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믿음을 따라 수정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핵심감정 다시 말해서 육 혹은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께 집중해야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인 이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외적 수단으로써 기도와 말씀을 이야기 한다. 진부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은혜 없이 죄의 능력 곧 육신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기본적인 경건훈련이 되어야 지켜보는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지켜보는 힘이 내공이다. 내공은 경건훈련을 통해서 길러지는 것이다. 로마서 7:14-25에 나타나는 깊은 자기 인식이 있어야 한다. 시편 22편에서 보는 개인의 고백과 제사장의 공동의 신앙고백이 서로 화답하듯이 로마서 7:14-25에서 '나'는 단지 분할 불가능한 개인으로서 '나'만이 아니라 내 안에는 하나님 표상과 기준이 내사되어 있고 이런 특성을 로마서가 잘 보여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중심으로 성령과 동행하는 자리로 돌아온다. 그게 로마서 8장의 선언이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핵심감정을 녹여나가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된다. 


신학과 조화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믿음은 우리를 의롭다 함에 이르게 하는데, 이것은 우리를 죄책에서부터 자유하게 한다. 하나님의 긍휼은 구약에서 자궁과 어원을 같이 한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생성되고 돌봄을 입듯이 하나님의 긍휼은 거듭난 신자가 돌봄받는 긍휼의 자궁이다. 하나님의 긍휼의 자궁은 곧 완전한 인정과 돌봄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을 내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 곧 믿음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한 자신을 돌보게 하는 성경적 근거가 된다. 하나님의 긍휼의 자궁에서 태어난 나는 이제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온전한 돌봄과 격려를 받는다. 이것이 나의 자아상(Self Image)이 되도록 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거기에 중생한 참나(Real Self)가 있다. 이 참나는 어린 영혼으로 우리 내면의 목소리로 존재한다. 이 목소리를 성경의 계시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긍휼과 자비로 재 양육하는 과정이 핵심감정 녹이기의 한 단면이다.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끊임없이 외치는 참소(讒訴) 소리는 여전하다. 그것은 죄책 외에 오염이란 실제적 죄의 결과물이 여전히 우리의 본성 내에 상존하기 때문이다. 오염은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인 성화에 의해서만 제거된다. 인간이 모태에서 잉태될 때, 하나님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 순결한 영을 주입(Infused)하신다. 그럼에도 부모로부터 유전된 순결치 못한 씨(impure seed)가 사람의 본성 안에 죄성을 깃들게 한다. 뿐만 아니라 부모의 돌봄은 하나님의 돌봄처럼 완전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인간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하게 되는데, 이 때 형성되는 것이 거짓 나(False Self)이다. 이 과정 이면에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우리의 존재를 불쌍한 영혼이라고 한다. 세상을 살면서 겪었던 실제적 고통을 고스란히 가진 이 영혼의 아픔이 곧 핵심감정이다. 이 영혼의 아픔을 상담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다. 성령은 우리의 영혼의 죄의 흔적들을 지우신다. 그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인정하시며 동시에 그것을 치유하신다. 이런 치유의 과정이 핵심감정 녹이기의 다른 한 단면이다. 


핵심감정 지우기 Sample(나의 불쌍한 영혼을 위해 편지 쓰기) 


자신의 핵심감정이 무엇인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조건들로 인하여 형성이 되었는지를 세세하게 파악하고 난 후, 그것으로부터 놓여나 자유로워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작업이 핵심감정 지우기다. 여기서 “핵심감정을 지운다.”는 표현은 과거에 자신은 어리고 힘없이 나약하여 누군가에게 의지하여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했으나 그러한 바람이 충족되지 못하고, 좌절된 불쌍한 영혼을 달래주고 보듬어 주는 과정을 말한다. 이 돌봄의 과정에는 하나님 표상이 존재하고 이 표상의 성경의 말하는 하나님의 표상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자신의 핵심감정을 지켜보고, 그것으로부터 놓여나기 위해 핵심감정을 지우는 작업은 그 어느 과정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