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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12. 열두 번째 소극적 표지 : 타인에 의한 구원의 확신(271-282)

12. 열두 번째 소극적 표지 : 타인에 의한 구원의 확신(271-282) 
 
- 사람들이 밖으로 표현한 감정이 참된 성도들의 마음에 들고 호응을 얻을 만큼 크게 감화력이 있고 기쁨을 준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신앙감정의 본질이 어떠한지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Nothing can be certainly concluded concerning the nature of religious affections, that the relation persons give of them, are very affecting and pleasing to the truly godly). 
 
  참된 성도들에게는 누가 참되게 믿는 자들이고 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영이 없다. 스토다드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회심한지는 알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회심한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알 수 없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역사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느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단지 외적인 표현과 겉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확실하며 속기 쉬운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한다(삼상16:7,사11:3)(271).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사람들의 사랑을 얻고,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주 아름답고 밝아 보일 때에는, 제일 수준 높은 사람들도 속을 수 있다.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하여 탁월한 성도라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신앙에서 떨어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흔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272). 한 때는 그들도 그리스도인의 확신이 최고로 고양된 상태와 매우 비슷한 확신을 가지기 조차한 사람들이다. 에드워즈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성령의 일반적 사역이 사단의 속임수와 사람의 사악하고 기만적인 심령과 섞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외적인 표현들과 모습에서 위선자와 참된 성도가 얼마나 비슷한지, 양과 염소를 잘 구별해 낼 수 있는 것은 심령을 온전히 감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특권이다(274).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많은 개연적인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때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로서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272,278-9). 그리고 에드워즈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신실함을 판단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원리, 즉 나무를 그 열매로 알리라는 원리만큼 명백한 원리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276,281f).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시는 때에 신앙을 고백하던 사람들을 봄에 꽃들에 비유할 수 있다. 나무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어 있고,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 탐스러운 과실을 맺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 중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잠시 있다가 시들어서 떨어져 나무 밑에서 썩을 꽃들도 대부분은 잠시 동안 다른 것들과 같이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인다. 그 뿐 아니라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향기로운 냄새를 낸다. 그래서 안에 숨겨진 힘 때문에 얼마 후에 과실이 되고, 속이 튼튼하고 강해서 뜨거운 여름 태양으로 익은 열매가 될 꽃들과 말라서 비틀어질 꽃들을 우리 눈으로는 구별할 수가 없다. 우리는 꽃의 아름다운 색깔이나 향기가 아니라. 나중에 나오는 익은 열매로 판단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회심자들(스스로의 고백에 따라)이 믿음을 이야기할 때, 그들은 아름다워 보이고 매우 향기나 보일 수 있으며, 성도들은 그들이 감동적으로 이야기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성도들은 그 새로운 회심자들의 이야기를 즐길 수 있고, 그 이야기 속에서 신적인 향기와 맛을 느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끝나버릴 수도 있다”(275-6).  
 
  에드워즈 당시에 어떤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에드워즈가 보기에 이런 주장은 이성이나 성경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성경적이고 성경의 말씀들과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원리는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열매들로 판단하라고 하는 것 밖에 없다.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고전4:3-5). 그렇지 아니하고 자신의 분별력을 너무 자신만만하게 믿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아주 대답하고 성급하게 순간적으로 판단해 버리는 사람들은 참된 믿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위선자들일 뿐이다(롬2:1-20).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은 얼마나 교만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이상에서 신앙 감정이 진정으로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12개의 소극적인 표지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발제자는 양낙흥 교수의 다음과 같은 탄식에 동감하는 마음으로 옮겨 적어본다: “우리는 에드워즈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데 얼마나 엄격한지를 본다. 그리고 참 회심과 거짓 회심, 참 구원의 은혜와 거짓 은혜가 외양에 있어서 얼마나 비슷할 수 있는지를 본다. 염소들도 양들과 얼마나 비슷할 수 있는지를 본다. 한편, 한국 교회는 이런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구분에 얼마나 무관심하며 무능력한지를 느낀다. 얼마나 쉽게 번쩍이는 것은 모두 금으로 간주하는가? 어쩌면 한국 교회는 그러한 구분을 하고 싶지 않은지 모른다. 지금 한 사람이라도 교인으로 더 받아들여 교인 수를 늘이고 싶은 판에 언제 진짜와 거짓을 구분한다는 것인가? 이러한 현상은 에드워즈 식으로 옥석을 가리다가는 교회에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반발심 때문일 수도 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