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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설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 자(딤후2:1-26)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 자(딤후2:1-26)
김홍전 목사
하나님의 뜻이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생각할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들의 생활을 이 여섯 가지의 면에서 볼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그릇으로, 혹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농부와 같이, 또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혹은 경기하는 사람으로 각각 그 특성 있는 면을 가지고 활동하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너는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네가 수고하는 농부 노릇하기를 원한다.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은 법대로 잘 경기하는 경기자, 훌륭한 체육인이 되는 것이다. 또 내가 원하는 것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노릇을 하는 것이다.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은 귀히 쓰는 좋은 그릇이 되는 것이다.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은 내 종으로서 나를 주인이요 상전으로 삼고 나와의 주종 관계가 명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주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른 데서 자꾸 찾으려고 하지 말고 이런 점에서 자신을 살펴보면서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성격을 구비하고 있고 원하시는 그 임무를 제대로 행하며 원하시는 그 자리에서 지금 일하고 활동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이 너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합당한 그릇으로 준비된 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지 무작정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충분하게 준비되어 있지도 아니하였고, 또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대한 명확한 확정된 인식도 없는데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한다고 한들 과연 하나님의 뜻이냐 할 때 그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도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자기신앙에 잘못된 모습에 대해서 반성도 없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저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하게 준비되어 맡겨 주신 일을 행하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함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행하면서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게 쓰이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발견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게 쓰이기를 일은 세상에 살면서 그 사실을 자기가 바로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이 나를 만드신 목적에 따라 쓰시기를 기대하고 나가는 데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요히 생각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제멋대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건설하고 나갈 때에는 자기가 무엇을 한번 해보려고 하는 것이고, 이러한 생각이나 모습이 발생하는 것이 이 세상에 흔히 있는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라는 그릇은 기묘하게 만들어져서 영혼의 기능이 있고 그것이 작용되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알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찾아보려는 의욕을 가지고 가서 가르쳐 주시는 것을 알아서 자원해서 기쁨으로 수행하고 나가려는 의욕과 의사도 준비입니다. 사람은 이러한 기묘한 그릇이요 기구인 까닭에 기묘한 기구로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늘 주의해서 찾아본다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고귀한 기계 혹은 기구’라는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아주 묘하고 진귀한 상태에 있는 이 사실을 악용합니다. 생각하는 능력을 안 주셨다면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법칙에 의해서 동물과 같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을 반역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을 주고 자원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만들었더니 자원해서 하나님을 반대하고 자원해서 마귀를 섬기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악입니다.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게 만들었더니 도덕적으로 향상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해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나가는 것이 사람이라는 기구입니다. 하나님께서 고귀하게 만든 까닭에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셔서 어디에 쓰시려고 하셨느냐 하면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계획과 경영의 땅 위에서 역사 위에서 항상 전승되어 나갈 때에 따라서 필요한 일들에 가담시키려고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능히 해낼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은 줄로 알았다면 그 다름부터는 그냥 막연히 있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나를 어떤 목적을 위해서 거기에 합당하게 만드신 까닭에 꼭 그 일에 잘 쓰임을 받아야겠다’ 하고 ‘그 일이 무엇이며 그 일에 쓰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그날 그때에 배울 수 있고 알 수 있는 한계 안에서 가르쳐 주시는 바를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에 쓰시려고 한다는 것은 내가 스무 살쯤 먹으면 전부 다 알 수 잇느냐 하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에 쓰겠다고 설명한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70년이나 80년을 산다고 할 때 스무 살이면 앞으로 50년이나 50년을 더 살아야 할 것인데 앞으로 30년이나 40년이나 혹은 50년, 60년 뒤에 세상은 어떻게 되고 그때 너는 어디에 있고 그때 너는 얼마만한 능력이 있고 얼마만한 지식을 축적하고 있고 얼마만큼 활동할 수 있으며 네 환경은 어떻게 네 주위와 네 원조자들은 어떻다는 것을 일러주면 알겠습니까? 스무 살 먹은 사람에게 너는 쉰 살 되면 이러이러한 위치에서 이렇게 되고 요렇게 되고 이렇게 되리라고 일러두면 알 수 있겠는가 할 때 모르는 것입니다. 
스무 살 먹은 사람한데 30년 후의 역사와 세계 정국의 큰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봐야 알 길이 없습니다. 알 길이 없는 까닭에 그때에 ‘하나님이여 나를 어디에 쓰시려고 만들었습니까?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일러 주신들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알려 주시는 것이고 그렇게 알려 주실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알려 주어서 특별히 효과가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네가 내 뜻대로 일생을 살기 원하다면 장래 일이라는 것은 사람이 원래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내게 딱 맡겨 놓고 지금 내가 네게 한 발씩 가라고 하는 대로 가면 그만 아니냐. 그럼 그 다름 문제는 내가 다 정돈을 해서 내가 경영하고 계획한 일을 그때의 형편에서 잘 이루어 나가도록 내가 길을 열어 주고 문을 열어 주고 탁 마련해 줄 것이 아니냐’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치시는 것이지 덮어놓고 앞으로 될 일에 대해서 다 가르쳐 주신다고 해서 알 수 잇느냐 하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사회나 시세가 격변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10년 앞을 얼른 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10년 뒤에는 세계의 정국이 어떻게 되리라고 얼른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의 의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한 가지이고, 그러한 까닭에 전능하신 하나님께 전부를 맡기고 그분께서 한 발씩 인도하시는 대로 충실하게 순종하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성 즉 영혼의 기능을 발휘하는 고귀한 이성적인 피조물인 까닭에 짐승과 같이 억지로 질질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생각을 늘 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는 한도 안에서 그 아는 지식의 터 위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가는 것”입니다.
2. 꿈이나 환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는 안 됨
꿈이나 환상이란 이상한 종교 현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주여 어떻게 하오리이까? 제가 주님의 종이니 가르쳐 주시옵소서. 꿈으로나 환상이로나 비몽사몽간에 나타내 보여 줍소서’ 하고 함부로 말들을 하는데 꿈이나 환상이 나타났다고 가정하십시다.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꿈에 어떤 하얀 사람이 ‘내가 예수다’ 하고 나타나서 ‘너 그러면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라’ 하면 신기하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그 말을 믿을 증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믿을 증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꿈에 그렇게 나타났으니 믿는다’ 한다면 보통 자기가 보고 듣고 살고 있는 이 세상일이 아닌 이상한 현상만 나타나면 ‘이것은 초연한 일이니까 믿어야겠다’고 덮어놓고 믿습니다. 그러면 아무 것이라도 초자연적인 것은 다 믿어야겠다는 이야기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11:14)라고 했습니다. 사단이 변해서 광명한 천사인 체하고 나와서는 ‘내가 예수인데 네가 간절히 이것을 구하니까 너를 인도하려고 왔다. 너는 이렇게 이렇게 해라’ 한다면 좇아가는 것이 정당한 일입니까? 그것은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정신을 똑똑히 차려서 정상적인 이성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해 나가도 실수가 있기 마련이고 가다가 넘어지기도 쉽고 그런 것인데, 정신이 혼몽한 상태에서 꿈을 꾸어서 가운데가 떨어지고 저 머리하고 꼬리가 붙어서 아예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 가지고 돌아다니는 이런 꿈의 괴이한 현상에서 나타나는 무엇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할 때는 참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에 요셉에게도 꿈으로써 지시하시지 않았는가?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도 꿈으로 지시해야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 아닌가? 옛날 야곱의 아들 가운데에서 요셉은 꿈을 꾸어서 그 꿈이 나중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꿈이 이루어지고 꿈이 한 계시가 되어서 그에게 작용한 예들을 자꾸 들어서 자기도 그러한 특권을 충분히 향유할 수 있는 고도의 신앙에 이른 것같이 망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셉같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특수한 위치에 있거나 또한 마리아의 남편 요셉과 같이 하나님께서 특별한 그릇으로 쓰시려고 하는 의인일 때에, 또한 그런 정형이나 환경이나 그런 위기 앞에 딱 섰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자기에게 그런 환경이나 여건도 없고 또 그럴 만한 이유도 없는데 ‘꿈을 꾸니까 서울이 불바다가 되더라’ 한다면 서울이 불바다가 될 것을 왜 무명 무색해서 아무 것도 아닌 그런 사람한테 보여 주신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보여 주신다면 좀 큰 선지자에게 보여 주셔서 다른 사람이 그의 말을 듣거나 안 듣는 것이 본인의 책임이 되어서 피신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지 기독교 신자라고 혼자 야단 내고 돌아다니는 그런 무명 무색한 사람에게 보여 주실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소위 신앙상 돈키호테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이렇게 괴상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기 이상으로 아주 공중에 올려놓고 스스로 큰 선지자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이런 괴상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꿈을 꾸어서 무엇을 보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떠드는 이야기치고 지금까지 이루어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그런 짓을 많이 따라 해서 꼭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과 같은 상태에 빠졌던 예가 얼마든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라고 생각하고 혹은 ‘나는 다른 사람에게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는 아닌데 그런 아주 신기하고 이상한 꿈을 꾸었으니 그것을 따라가겠다’ 하는 것은 부당한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다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려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 선지자들에게와 복술에게 혹하지 말며 너희가 꾼 바 꿈도 신청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9:8-9).
옛날 이스라엘의 망국의 시대인 예레미야 시대에도 그렇게 꿈꾸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예레미야가 분연코 일어나 그렇게 예언한 것입니다. ‘스스로 꾼 꿈, 그런 것 듣지 말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지 아니하셨는데도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거짓으로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때도 꿈꾸고 나서 ‘내가 꿈에 보니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시고 주위에 천만 천사가 둘러앉고 스랍도 있고 모두 찬송을 하는데 거기서 한 영이 나와서 무엇이라고 하더라’ 하고 괴상하게 묵시 문학이나 쓰는 사람같이 말했을 것인데 그런 것이 이스라엘 사람에게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특히 바빌로니아의 포로가 되는 망국의 시기나 특별히 세기말적이고 아주 퇴폐적인 현상이 나타날 때 그런 묘하고 말초적인 신비주의 가운데 탐닉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후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그들이 기록해 놓은 것이 이상한 위경이나 묵시 문학이라고 해서 돌아다닙니다. 
사해 축서를 보면 거기에도 역시 그런 것이 있습니다. 직접 말하기는 어려우니까 무슨 꿈을 꾼 듯이 그렇지 아니하면 이렇게 된다고 환상을 본 것같이 하박국을 가지고 주석해 놓은 글이 있는데 그 주석을 다 읽어보면 기묘한 이야기를 썼는데 완곡하게 자기네 주위에 있는 무엇을 가지고 풍자해 가면서 썼습니다. 차라리 그런 것은 그럴 만한 가치나 있지만 꿈을 함부로 쓴다는 것은 안 되는 일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어야 함
1) 개인의 뜻이나 도덕적인 뜻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2)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 때 자기에게 맡겨 주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행할 수 있습니다. 
4. 자신의 은사에 맞게 충성해야 함
1) 믿음의 분량 안에서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이상의 마음을 품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통해 교회의 거룩성과 믿음의 순전성을 보존하고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4)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으면 그 은사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은혜를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5)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심정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6)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고전4:2).
7) 충성은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신실한 행위를 가지고 있을 때 행할 수 있습니다.
5.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맞게 합당하게 쓰임 받을 수 있어야
1)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려야 합니다(딤후2:16절).
(1) 경건치 아니함에 빠져 점점 나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딤후2:16절).
(2) 이러한 자들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 자로서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 레도가 있습니다(딤후2:17절).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부활의 교리가 단지 우의적이 거나 영적인 뜻만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2)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딤후2:19절).
3)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아야 합니다 된 행위를 버려야 합니다(딤후2:22절).
4)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려야 합니다(딤후2:23절).
어리석음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면에서 악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복음적 은혜 순전하고 주도적인 고유성을 거스르고 파손한다. 
(2) 복음적인 약속들에 위배한다. 
(3) 복음의 은혜의 존귀함과는 모순이 된다. 
(4) 복음으로 드러나는 영광을 상실한다. 
(5) 양심의 견고한 평안을 가져오지 못한다.
6.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함에 있어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7.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만이 합당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다. 
8. 그런다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 자의 삶이란? 어떠한 삶을 사는 자를 말하는지 우리가 다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 자의 삶이란? 첫 번째로 “그리스도의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 준비되어야 합니다(4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인 너 디모데는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 인내와 봉사를 해야겠다.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에게는 그러한 특성이 있어서 그와 같이 잘 감내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다”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 생활이 집이 되어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고 항상 준비된 자로서 신령한 전투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엡6:10-18).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느 사람을 취하사 쓸 만한 그릇으로 닦아서 사명을 주셨으면 주인의 원하는 바에 따라서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형편이나 사정에 얽매여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그 사랑 속에서 우러나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인식과 깨달음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경지로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알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가 할 때 성경을 보면 각각 그 사람의 자격에 따라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면 그리스도는 너를 군사로 뽑고 지휘하고 명령하시는 분이니까 군인답게 그 명령에 복종하고 어려운 일도 참고 견뎌라”는 것입니다. 군인은 편안한 데서 지내라고 뽑혀 나온 것이 아니라 무서운 전쟁터에서 고난을 견디고 승리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노력해 나가는 데 그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그리스도예수의 좋은 군사라면 네 생활이 누구를 기쁘게 해야 하는가 하면 너를 군사로 뽑은 그분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라야겠다. 그런고로 그와 같이 되려면 나와 함께 공동의 전선에 서서 고난을 받자. 고난을 개의치 말고 견디어 가자” 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어서 우리 앞에 있는 적을 분명히 잘 식별하고 또한 신령한 무장을 하고 주님께서 주신 적극적인 공격의 무기를 가지고 나가서 적을 무찌르고 하는 이 큰 전투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야 할 것을 주님께서 요구하십니다. 꼭 디모데만이 군사인 것이 아니라 디모데같이 일을 맡은 자는 필연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신령하고 거대한 역사를 자기가 담당하고 나아가는 길에서 부딪친 적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 적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대로 이 세상의 혈육이 아니고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공중에 있는 악한 신들입니다(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군사된 자는 이런 적과 더불어 싸우기 위해서 신령한 무장을 늘 해야 하는 까닭에 진실 혹은 참됨이라는 것으로 허리띠를 띠어서 먼저 옷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꽉 붙들어 매고, 그 다음에는 의라는 흉배를 붙이고, 또 화평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또한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그 다음에는 적극적인 공격의 무기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은 여러분들이 다 에베소서 6:14-17절에서 배운 것입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와 같이 성경은 우리에게 교회는 본질상 이 세상과 더불어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늘 전투해 나갈 때 자체가 교회인 것을 비로소 정당하게 드러내는 까닭에 ‘전투의 교회’라는 속성을 언제든지 중요하게 파악해야 할 것이라고 늘 가르쳤습니다.
그런즉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 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확호한 전투의 행동을 늘 취해 나가는 사실이 있어야 하고, 또한 목표를 향해서 행진하는 데서 일어나는 이 영적인 전투 때문에 필연적으로 받는 고난을 그대로 견디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 자의 삶}이란 두 번째로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법대로 경기함으로서 면류관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5절).
가령 무슨 운동회든지 경주가 있으면 어떤 일정한 법이 있어서 그 법대로 경기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법 하게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확호하게 세워 놓은 법칙에 의해서 목표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지 그 법칙을 무시해 버리고 제멋대로 그냥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태도는 부정당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경기가 일정한 트랙에서 일정한 시간에 다 같은 규율과 법칙 하에서 움직입니다. 경기 장소처럼 법칙이 일호도 틀림없이 준수되어야 할 자리가 없습니다. 만일 경기장에서 법칙을 무시한다면 경기의 정신이 금방 달아나 버립니다. 그만큼 경기장은 법이 중요하게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선수들이 한 줄로 죽 서 있을 때 신호를 ‘땅’ 쏘면 그 쏘는 신호 소리에 따라 모두 다 같이 뛰기 시작해야지 신호를 하려고 준비할 때 어느 한 사람이 먼저 뛰고 어느 사람은 ‘땅’ 소리 난 다음에 뛰고 어느 사람은 멀거니 있다가 그 다음에 뛰고 그래도 괜찮다는 법이 있다면 그것은 안 됩니다. 적어도 땅 소리가 난 다음에 각각 자기가 책임지고 뛰어야 합니다. 뛸 때는 또 자기의 트랙 위를 가야지 가다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앞지를 듯 하니까 앞지르지 못하게 하려고 그 트랙으로 픽 들어가서 슬쩍 다리를 걸어서 그 사람을 넘어뜨리고 그냥 달린다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경기장에는 까다로운 많은 법칙이 없을지라도 명확한 법칙이 서 있어서 그 중의 하나라도 유린해 버리면 전체가 통제가 안 되고 모두가 그 일에 대해 승인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 사람은 마치 경기장에서 경주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경주하는 자라고 한 것은 많은 적수들이 있다든지 같이 뛰는 사람이 있다든지 하는 것을 강조해서가 아니라 경주장에서 경주하는 때처럼 명확하게 법칙을 지켜야 할 때가 있지 않으냐 그러니 법대로 해야 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법칙대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하지 다른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법칙대로 해야만 면류관을 얻는 것이지 법칙을 무시하고 편법을 쓰든지 속임수를 써서 그 목적지에 도달한다면 그것은 스포츠 경기가 아니고 노름이나 도박에 불과한 것이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경주의 법칙을 준수해서 스포츠 정신을 발휘해야 합니다. 목적지에 제일 먼저 도달한다는 것이 항상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전제로는 ‘법칙을 준수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 한다는 데 첫째의 의미’가 있고, 둘째는 ‘물론 그렇게 법칙을 준수하고 최선을 다 한 결과로 우열이 드러날 때 우승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의 의미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하고 5절에서 말씀하셨는데, 면류관을 얻는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고 법대로 경기한다는 것은 그 이전의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들의 삶에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칙(법)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신앙생활은 고난이나 어려움이 발생하면 주님을 떠날 준비를 항상 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기에게 이익이 없다면 주님을 배반할 준비를 항상 하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면서 인정받으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로서 가는 길을 경기하는 자는 법대로 경기하여야 한다는 비유로써 가르치는데, 첫째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가라’ 하면 가고 ‘저기에 도달해라’ 하면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목적지에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서 바르게 순리대로 도달해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법칙을 어기더라도 목적지에만 도달하면 그만이다’ 해서는 안 됩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일꾼의 일이 아닙니다. 둘째는 {만일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이 내신 방법대로 정당하게 목적지에 도달하기로 했다면 최선을 다해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이신 목적지에 도달해야지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이 없이 중도에 포기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준수하려고 하거나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편법을 쓴다면 하나님의 법칙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정한 소기의 결과를 내지 못하고 가령 어느 기간 안에 어디까지 도달 해야겠다 하셨는데 불구하고 자기가 게으르고 느려 빠져서 결국은 도달했다고 하지만 그 안에 여러 번 나태가 있고 잘못이 있고 좌절이 있고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말하자면 우승을 하는 경기자가 아닙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경기하는 사람이 트랙에서 100미터든지 200미터든지 500미터든지 1000미터든지 꼭 그 법칙대로 경주를 늘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도 꼭 법칙대로 하나님이 내신 방법에 의해서만 목적에 도달할 것이고 그 방법을 자신에게 적용할 때는 최선을 다하고 성의를 다해서 마치 다른 사람과 경주하는 것같이 우승을 하려고 부지런히 해야지 해이하고 나태하고 도중에 그냥 마음대로 쉬고 좌절하고 하는 것은 부정당하다는 것을 여기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트랙 앞에 서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경기자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에 임해서 성의를 다하고 또 하나님의 정당한 법칙을 따라가야 하고 자기의 트랙을 밟지 않고 도중에서 다른 데로 빗겨나가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좌절하거나 게으르거나 마음대로 천연하거나 해이하거나 하는 모든 것은 부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경기자에 관한 말씀에서 우리가 그런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맡은 자들에게 요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충성해야 하느냐 하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고 말씀하십니다. 
그런고로 ‘첫째는 {일을 맡기시는 것}이고 그래서 일단 일을 맡았으면 둘째는 {그 일에 충성해야 할 것}이고 그때의 충성은 하나님이 내신 거룩한 법칙대로 성의를 다해서 해 나가는 그것입니다.’
그런즉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법칙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 자로서 주어진 일을 감당해가야 하지 자꾸 세상과 타협하고 자기와 타협하여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 자의 삶}이란 세 번째로 “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듯 우리도 수고하는 농부처럼 곡식을 먼저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6절).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은 농부가 수고한 결과를 얻지만 농부야말로 자기가 수고해서 직접 거둔 사람이니까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우선적으로 자기의 수고의 결과인 ‘좋은 열매’를 먹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수고하는 농부의 비유에서 농사짓는 모든 것과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이 다 같다는 말씀이 아닌 줄을 여러분이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런 것을 표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의 논리는 ‘농부가 수고하면 그 결과가 난 것이 아니냐? 곡식을 거두었는데 그 거둔 곡식을 자기는 한 톨도 맛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먼저 다 먹고 맨 마지막에 자기 차례가 돌아오면 그때야 조금 먹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가 직접 농사 짓는 수고를 했으니까 최후에 자기가 먼저 맛봄으로써 결산이나 결론에 이를 때까지 자기가 책임을 진다는 것도 표시하고 또한 자기가 심어 놓은 원인과 가꾸어 나간 이 과정이 이런 결과를 냈으므로 자기가 친히 맛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나님 나라의 일꾼에게 적용되는 중요한 법칙인 것을 여기서 가르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하기 싫다고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는 농부처럼 최후에 자기가 먼저 수확한 열매를 맛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충분히 감당할 만 한 자에게 너는 이것을 해라 너는 이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니 뒤도 바라보지 말고 나만 의지하여 최선을 다해라. 그러면 내가 너를 인정하여 주겠다.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까지 자기가 책임을 진다는 각오로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함을 받을 때까지 맡겨 주신 일에 대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런즉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나하고는 맞지 않는다고 중도에 포기하거나 다른 길로 걸어가거나 무엇보다도 수고도 안 하고 결과에 이루어 열매를 맺으려고 할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함을 받으려는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 자의 삶}이란 네 번째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는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15절).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히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해야겠다. 그러한 데서 너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늘 바르게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 성경은 크게 두 가지의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새로 지으셔서 재창조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어떻게 함양되고 장성하는가 하는 문제”를 주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 품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의 품성 형성에 있음을 가르칩니다. 즉 그 사람의 마음에는 사람을 증오하는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 있어야 하고, 또 항상 비감과 절망과 슬픔 가운데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성령님으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가져야 할 것이고 마음에 항상 불안과 응애와 들끓는 것과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평강과 안위가 늘 고요히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무슨 일을 행하면 의로운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그런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늘 보유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라는 말을 볼 때에도 성령의 열매의 여러 가지 면으로서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것들이 다 품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답고 그리스도의 지체다운 열매를 표시하는 것인데(갈5:22-23), 이러한 품성을 함양하고 가지고 있어서 발휘한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늘 요구하시는 것이고 명확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떠한 방법으로 그런 것을 우리가 얻을 수 잇느냐 하는 문제가 거기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 성경이 또 다른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도록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일생 동안 무엇을 하며 어떠한 사명을 받아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심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루두루 돌아다니면서 다른 데 가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도 아니고 혹은 기도하다 갑자기 생각나는 대로하는 것도 아니고 묘하게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명백하게 이 면 저 면에서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겠다. 저렇게 해야겠다. 해라’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꾸 자기가 알고자 하는 일면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것은 부정당}합니다.
그런즉 오늘 우리들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정당하게 수용하여 아무 것도 부끄러울 일이 없이 아주 훌륭하고 선량하고 무고한 좋은 일꾼으로 인정을 받은 자답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 늘 드리기를 힘쓰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 자의 삶}이란 다섯 번째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여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을 예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20-21절).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여 주시지 않는 불결한 데서, 그리고 진리에 관해서 그릇되고 썩은 생각을 하는 후메내오와 빌레도와 같이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 그런 불결한 도리와 잘못된 사상을 버리고 늘 건실하고 신선하고 깨끗한 도리 가운데 서 있으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합당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말이나 행위 모두가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9.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먹을 수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할 수 있음
1)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먹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할 수 없습니다. 
2) 자기의 유익이나, 행복을 얻기 위한 목적이나 자기의 기분을 즐겁게 하기 위한 말씀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영적 결핍 가운데 삽니다.
3) 자기를 반성케 하여 하나님의 합당한 자로 서 가는데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10.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먹어야만 장성한 사람임
11. 새 사람의 신앙이 정상적으로 장성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서 그 사람 속에 역사 하여 점진적으로 장성하는 사실이 있어야 
{장성}이라는 것은 “의롭다 하심을 이미 얻은 터 위에 서서 날마다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더 깨닫고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시는 것이 뭔가를 더 분명히 알고 또 하나님 나라의 큰 배포는 어떻게 생겼으며 나는 거기에 대해서 어떤 의무를 짊어지고 있는가를 각성해서 깨닫고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12. 장성한 분량에 따라 말씀이 다양하게 역사함 ⇒씨 뿌리는 비유
하나님의 말씀이 각 사람에게 들어가서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 하는 것은 그 밭의 성질과 관계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옥토라고 할지라도 30배 결실하고, 어떤 사람은 60배 결실하고, 어떤 사람은 100배 결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크고 굵고 단단한 것이라고 잘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그것을 자기가 소화할 뿐 아니라 먹었으니까 양분이 되어서 충분히 그 말씀과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따라서 나갈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렇지 못하고 채소만 약간 먹을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채소를 먹든지 혹은 좋은 고기를 잘 먹든지 그렇지 않으면 궤휼이 없는 신령한 도의 젖을 사모해서 그것만 먹고살든지(벧전2:1-2), 그 사람의 자격대로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런고로 자기의 힘에 겨운 것을 함부로 억지로 풀려고 하다가는 멸망을 자취하는 일이 있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 늘 주의해야 할 점입니다(벧후1:20-21/3:15-16).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의 모든 어려운 요구를 그 자리에서 다 감당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자격에 따라서, 그 사람의 장성의 분량에 따라서, 하나님 말씀이 그 사람에게 무엇으로 작용하고 있는가에 의해서 그 작용하는 일에 대해서만 ‘나는 정당하게 제 위치에 있는가’를 찾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하나님 말씀이 복음의 기초로만 그에게 의미를 가지지 그 이상의 의미를 못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믿고 천국 가려고만 밤낮 생각하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이상의 여러 가지 것에 대해서는 우매하고 귀머거리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 주시기만 조르고 앉아 있지 하나님이 자기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런 유치하고 항상 저회적일 뿐 아니라 오히려 사욕 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욕에 속한 사람, 혹은 육신에 속한 사람은 마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좋은 음식을 먹을 줄 모르고 겨우 채소나 먹는 것이라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쳤습니다(히5:12-14). 그러나 어린아이면 어린아이답게 궤휼이 없고 순수한 신령한 도의 젖을 사모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젖을 먹고라도 잘 커야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지런히 장성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일꾼으로 쓰실 때 어떤 면에서 어떻게 쓰시는 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이 메스와 같이 좌우에 날이 선 검과 같이 깊게 들어가서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고 영과 혼의 모든 생각을 다 드러내서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도록 하는 바, 말씀의 작용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늘 나타나도록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히4:12-13). 그러니까 말씀을 통해 자기를 반성하고 검증하여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비로소 깨닫고 알고 마음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힘을 더 구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의 그릇된 것을 고쳐 나가는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발에 등불이 되고 자기의 길에 빛이 되어서 매일 매일 나가는 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에게 비춰 주는 빛과 같아서 항상 ‘이것이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이다’ 하는 것을 알고 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시119:105). 이런 사람은 아주 “고도 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큰 검이 되어서 자기의 적인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공중에 있는 악한 신들, 말하자면 마귀와 그 국권 조직을 눈으로 볼 수 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것을 파쇄 해야 할 것인지를 알고 나가서 검을 지혜롭게 잘 써서 승리를 거두는 사람도 있습니다(엡6:12-17). 그와 같이 그 사람의 자격과 장성의 분량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작용했는가, 어떻게 낭비하지 않고 그것을 잘 썼는가에 따라서 말씀이 역사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각 사람의 속에서 역사 하는 대로 그 말씀에 의해서 장성해 나가야 합니다.
13.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자기가 맡은 부분과 자기의 직분을 충실히 행하는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