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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예배학

한국의 경배와 찬양운동에 대한 개혁신학 입장에서의 비판과 그 대안으로서의 시편찬송

한국의 경배와 찬양운동에 대한 개혁신학 입장에서의 비판과 그 대안으로서의 시편찬송
한병수
지금까지 한국교회사를 통해 배운 내용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규정하는 정치적, 경제적, 선교적 측면에서의 근원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학적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예배의 성향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경배와 찬양운동이라 할 수 있다. 경배와 찬양운동이 예배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부곽된 현 시점에서 그 운동의 근원과 신학적 성향을 고찰하는 것은 현대 한국교회의 심장부를 진단하는 것과 진배 없다. 그래서 본 소논문은 오늘날 한국교회를 주도하고 있는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이 선두에 서고 개척교회까지 그 내용을 고스란히 카피하고 있는 경배와 찬양운동을 건설적으로 비판하여 보다 더 성격적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뱡향을 모색하기 위함임을 밝혀 둔다. 경배와 찬양운동이 현대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 보면 목회 현장에 대한 신학적 진단과 처방이 가능하리란 기대감으로 소략한 일고를 시도한 것이다. 
1. ‘경배와 찬양’ 운동
대개 한국에서의 경배와 찬양운동을 두란노 목요찬양모임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지만, 이미 그 10년 전에 예수전도단이 1977년 YMCA강당에서의 첫 찬양모임에서 그 서막을 올렸다. 1987년 2월 첫 번째 두란노 목요찬양모임의 리더였던 하용인은 학생시절 예수전도단에서 리더로 활동하였으며, 영국유학중에 이 운동을 직접 피부로 절감하고 이를 한국교회에 접목시키고자 모임을 시작했다. 서너달 후에 100명, 이듬해엔 이화여대 대강당을 메울 정도로 커졌고, [두란노 목요찬양모임]을 통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거의 같은 시기에 1987년 3월 대구에서는 최용덕이 이끄는 [찬미찬양집회]가, 같은 해 10월 충신교회에서는 [목요찬양]이 시작되었다. 1990년 찬양사역자 연합회와 한 청년기독교단체와 연합으로 행사를 갖게 되었는데, 찬양사역자연합회는 경배와 찬양 형태로, 청년기독교단체는 전통적 예배 형태를 주장하여 결렬의 위기가 있었으나 결국 1부는 찬양과 경배, 2부는 예배를 드리는 순서로 결정되었다. 이런 형태가 이후 한국교회 전체에 퍼져나가 많은 교회에 찬양과 경배 형태로 시작해서 예배로 끝내는 형태가 굳어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국의 경배와 찬양운동은 미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미국의 찬양과 경배운동은 1960년대 후반 갈보리교회 척 스미스 목사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여기서 나온 음반이 ‘마라나타’이다. 이후 1970년대 후반 존 윔버가 시작한 빈야드 교회가 이 운동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1985년부터 경배와 찬양형태의 예배를 라이브 음반으로 내기 시작한 호산나음반회사가 있다. 
호산나 예배앨범이 성공요인은, 첫째 라이브 형식으로 앨범을 제작했기 때문에 예배현장에 참여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게 한 것, 둘째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기름부음이 있는 예배인도자를 세워서 예배의 다양성과 함께 매번 신선한 예배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한 것, 셋째 일류 세션들을 녹음에 참여시켜 예배음악의 수준을 끌어 올려서 예배 인도자의 힘있는 선포와 기도, 현장감, 박수소리, 환호, 방언찬양을 음반에 담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한 점이라고 찬양 사역자들을 말한다. 여기서 경배와 찬양운동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라고 단언할 수 있다. 즉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며, 따라서 리더의 필수조건은 “기름부음”이며, 일류세션이 필요함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찬양리더는 역동적이고 생명력 있는 부분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단히 민감한 사람이어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는가? 밥 소르기는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는데 올바르거나 틀린 방법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방법만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한 이유로 워십음악에는 새롭고 역동적인 면, 생동감, 선율의 풍부함이 요청된다. 
이러한 경배찬양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게 하며 워십송을 통해서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로 예배의 회복이 열매 맺는다. 결국 예배의 회복은 하나님의 임재에 있고, 그러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경배와 찬양이 있는데 형식은 제한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음악은 하나님의 영에 더 민감하게 해 줌으로써 예언의 흐름을 더 강화시켜 주고 예언의 영이 역사하는 신령한 노래가 최고의 찬양인 셈이다. 밥 소르기는 [찬양으로 가슴 벅찬 예배] 1부 7장에서, 바울이 말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따라 찬양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시는 성구를 노래하는 것, 찬미는 사람이 작곡한 노래, 신령한 노래는 우리 영이 하나님께로 올가는 순간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노래이다. 그리고 이 신령한 노래는 두 단계가 있는데, 하나님과 개인적 즐거움을 위한 즉흥적인 노래의 단계와 회중 전체를 위해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단계이다. 둘째 단계는 다시 4가지 형태로 나뉘는데, 간단한 찬양, 여호와의 노래, 예언의 말로 노래하는 것, 하늘의 노래라고 주장을 통해 밥은 경배와 찬양운동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마련한다. 
이러한 근거 위에 경배와 찬양의 노래들은 1966년 영국에서 Youth Praise라는 노래집이 출판되면서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현재와 같은 찬양예배의 형식을 띄게 된 것은 결정적으로 60-70년대의 미국의 은사운동과 연결되면서이다. 70년대의 은사운동과 예수운동의 여파로 부흥집회와 예배갱신운동이 일어나고 청년 중심으로 합창단, 밴드들을 위한 노래가 만들어졌고 빌리그래이엄 전도단이 대중예배에서 쓰일 노래를 사용하면서 부흥집회 곡이 만들어진 것이 모태가 되었다. 
찬양운동의 뿌리는 이와 같이 은사운동이며 경배와 찬양운동의 근저에는 하나님의 임재라는 이름으로 신비주의가 은밀하게 들어와 있다. 특별히 빈야드에서 구성된 진행방법은, 1) Call to Worship(예배에의 초대), 2) Engagement(하나님께로 향함), 3) Expressing God's Love(하나님께로 향한 사랑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 4) Visitation(성령님의 임재하심), 5) Generosity(온전히 자신을 드림) 등의 순으로 되어 있다.「Media Spotlight Special Report」은 빈야드 찬양운동을 시작한 존 윔버(John Wimber)에 대해 평가하기를, 1) 성경보다 경험을 더 의존하는 것, 2) 신비적이고 뉴에이지적인 실행을 받아들인 것, 3) 영적 전쟁에 대한 신비적 관점 등이 있다는 것이다. 탐 크라우터는 만일 메마른 심령일 경우 짧은 노래들을 몇 번씩 반복할 것을 권면하는데, 이는 은사운동에서 흔히 발견되는 최면효과 때문이다. 빈야드 운동의 경우 이런 최면효과를 위해서 빈야드 찬양을 1시간 정도 부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간증이 있고, 기도가 있고, 쓰러지고, 설교가 있고, 은사체험시간 순으로 진행된다. 
카톨릭, 성공회, 루터란, 거의 모든 종파, 모든 종교의 신비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묵상이나 음악이나 댄스를 사용 못할 것을 없지만, 경배와 찬양의 뿌리는 이처럼 신비주의며 은사주의이다. 유명한 마이클 탈보트는 교회 초기음악을 영묘하면서도 신비스럽고 단순한 멜로디로 만들었는데, 카톨릭 교회의 프란시스코 수도회에 가입했다. 이와 같이 존 윔버도 퀘이커 교회와 함께 회심과 사역이 시작되었고, 카톨릭과 은사주의 아래서 함께 일하였다.
이상을 배경으로 신학적 비판을 가해 본다면, 먼저 예배의 규범으로서 성경을 최우선으로 두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예배의 규범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 하나님의 임재라는 체험 위주의 효과적 형식에 있어서 자유로움과 새로움만을 추구하는 것은 치러야 할 신학적 희생이 너무도 크다. 루터의 개혁운동, 웨슬리나 구세군의 부흥운동, 그리고 오순절 운동과 1960-70년대 미국의 은사운동으로 이어져 내려온 경배와 찬양운동의 긍정적인 면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인 것을 버리는 것이 당연시 되는 그런 경배와 찬양에 대한 강조와 수용은 기독교 100 주년이 훨씬 넘어선 한국 교계에서 깊은 신학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 주라고 한 것을 확고불변의 진리라 간주함으로써, 예수을 모해하고 자신의 불법을 가리우려 했던 율법사들의 궤계는 이미 성경에서 단호히 정죄된 바 있다. 
두 번째 지적할 것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신비적인 목적을 위해 인간 중심적인 작사 작곡이 지배적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인간 중심이라는 내용은, 자신의 앨범을 통한 상업적 목적, 스타숭배, 예수를 사랑하는가 예수음악을 사랑하는가, 공연시 감정의 흥분을 이용해 결실을 유도하는 것, 음악의 대중적 성향에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는 점 등을 말한다. 
세 번째는 왜 한국에 경배와 찬양이 유행하게 되었는가를 묻고 싶다. 물론 한국의 초기 교회사를 살펴보면, 선교사들이 신학적 검증 없이 교파를 초월해서 1905년<찬숑가>라는 이름으로 262곡이 수록된 책이 발간되었는데, 그 중 155곡이 미국장로교 찬송가에서, 84편이 미국부흥회용 노래집에서 뽑은 것이다. 한국 교회의 시작부터 우리는 오순절적인 찬양문화로 시작한 것이 하나의 이유이겠으나, 더 중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성장을 위해서다. 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교회가 급성장을 거듭한 온누리 교회였고, 수천명이 모여서 하는 그런 성장을 소망하는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빠른 속도로 휩쓸려 들어간 것이다. 한국의 고도 성장 경제가 질서와 안정보다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요청하였던 것처럼, 교회성장이라면 성경의 검증 없이도 정당화 되는 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이러한 운동은 성경이 구분하는 엄밀한 기준의 부재 때문에 쉽게 에큐메니컬의 유혹에 빠진다. 퀘이커에서 시작하여 은사주의 아래서 카톨릭과 함께 활동한 존 윔버와 개신교에 영향을 끼친 카톨릭 사제 마이클탈보트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는 진리보다 화해를 강조하게 되고, 그러한 연합을 정당화 하기 위해 진리의 엄밀성은 철저히 묵살해야 하는 연쇄적 부패에 이르게 된다. 
2. 시편찬송
그럼 개혁주의 신학자 및 개혁교회들이 현대 경배와 찬양운동의 부정적인 면의 극복을 위해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그들은 시편송을 주장한다. 개혁교회의 음악은 존 칼빈(John Calvin)의 제네바 시편송만을 고집한다. 참으로 답답하고 촌스러워 보이지만 그들의 정신은 대단히 본받을 만한 내용이기에 자세히 설명하려고 한다. 먼저 칼빈은 “실로 교만과 결탁되어 있는 허영은 비참한 인간이 마땅히 자기 수준 이상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탐구를 게을리 하며, 호기심을 따라 공허한 사색의 길을 달리고 있는 사실에서... 그후에는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 드리는 것이기 때문(기독교강요,Ⅰ, ⅳ, 1)”이라는 태도로 카톨릭의 미신적 요소를 철저히 타파하였다. 쯔빙글리의 경우 로마 카톨릭적 예배요소를 배제하고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리기 원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음악가 였음에도 불구하고 1525년 ‘독일 예배의식(Deutsche Liturgie)’에 의하면 예배에서 음악마저도 페지하였다고 한다. 
칼빈은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성에 합당치 못한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기강,Ⅰ,ⅹⅹ, 32)”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예배의 방식까지도 성경에서 찾으려 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제네바 성경(1560)에 그대로 반영되어, 마태복음 15장 9절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에는 다음과 같은 주가 붙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을 따라서 영광받지 않으실 것이고 그의 말씀에 기인하지 않은 모든 좋은 의도들도 혐오하실 것이다(God will not be honoured according to man's fantasy, but detesteth all good intentions which are not grounded on his word)." 이러한 주장의 배후에는 [적정과 절도의 원리]라는 칼빈의 사상이 숨어 있다. 이것은 예배의 방법이 하나님의 나타내신 뜻, 즉 성경에 제한되어야 한다는 개혁주의 전통과도 상통하는 원리이다. 
적정과 절도의 원리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그의 말씀밖에 어떤 다른 곳에서 찾지 않고 그의 말씀을 가지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엄격한 적정과 경외의 규범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를 말한다. 이 원리는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주의적인 원리의 실천적인 의미로서 기독교인의 엄격한 매일의 삶과 결합된 것이다. 즉 기독교인들은 성경말씀을 향하여, 그 안에서 물어야 하고, 그 말씀과 함께 생각하여야 하며, 그 말씀을 통해서 말하여야 한다는 삶의 원리 말이다. 이러한 원리가 예배에 적용될 때는 “오직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서 그의 거룩한 말씀 안에서 계시하신 것만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의 유일한 방식”이라는 적용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찬양도 하나님의 말씀, 즉 시편송만 부르는 것이 바로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따라 하나님의 정하신 틀 안에 거하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특별히 찬양과 관련하여 “의도의 순서성”을 강조해서 항변하는 분들이 있다. 성경과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의 주된 고집과 아우성은 의도가 순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도가 순수할 만큼 괜찮은 인간이 과연 존재 가능한 것이며, 또한 그런 인간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정당성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인간의 전적 타락이란 의지의 부패까지 말하는 것이며,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에게조차도 선악과 금지 명령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 아니었던가? 그래도 의도의 순수성을 주장한다면, ‘웃사(삼하6:1-8)’만큼 분통 터지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죽음은 여호와의 궤는 어깨에 메어야 한다(출25:14, 민4:15)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초래된 비극이었으며, 그러한 몰이해는 여호와의 궤를 수레에 실었던 블레셋의 방식(삼상6:8)을 답습하게 된 것이다. 
비록 그것이 순수와 정직의 제사일지라도 하나님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닌(롬10:2-3) 이상, 그것은 ‘다른 불(레10:1-2)’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순수한 의도로 작사, 작곡, 연주, 노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과 그의 뜻을 알리신 것에 견줄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이 그가 명하시고 내신 기준과 규범보다 더 부요하며 더 영화로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듬은 돌(출20:25)’이 아니라, ‘그 이름에 합당한 예배’의 단을 쌓아야 함이 마땅하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지 않는 특별한 예배, 즉 변하는 시대에 맞추고 다양한 계층에 맞추며 제 각기의 정서에 맞추는 그런 예배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는 말씀 앞에 정죄를 받게 된다. 
그럼 개혁교회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시편송이란 무엇인가? 밥 소르기가 경배와 찬양운동의 성경적 근거로 삼고 있는 말씀, 에베소서 5장 19절과 골로세서 3장 16절에서 시편찬양의 근거를 찾는다. 하나만 살펴보면, 에베소서 5장 19절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한 자태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는 것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것(λαλούντες ἑαυτοίς ἐν ψαλμοίς καὶ ὕμ νοις καὶ ᾡδαίς πνευματικαίς)”이며 “우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것(ἄδοντες ψάλλοντες τή καρδὶᾳ ὑμών τῳ κυριῳ)”을 의미한다. 문법적 구조는, 먼저 “서로 화답하다”라고 하는 분사구로 시작되고 나서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 ἐν으로 연결되어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로 뒤에 구를 이룬다. 여기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히브리 민족의 특성상 동일한 의미의 반복이다. 시편이 곧 찬미이고 그런 찬미들이 곧 신령한 노래라고 하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가사는 시편이고, 그 노래는 전례적인 노래여야 하며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찬양하는 노래이고 결론적으로는 세속적인 노래와 구별된 의미로서의 신령한 노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노래들은 사도들이 구약의 전통을 그대로 가져와서 불렀을 것으로 보이며, 사도들은 그 당시에 회당에서 불리워진 히브리인들의 노래를 신령한 노래로 간주하고 그런 히브리인들의 전통을 따라 예배의 노래를 부르라고 명한 것이다. 
필자는 12년동안 교회에서 찬양인도로 봉사하고 섬겼다. 마음 깊은 곳에 만족되지 않는 공허함이 12년 동안의 보편적인 상태였다. 흡족하고 충만한 찬양인도가 있었어도, 그 공허함과 뭔지 모를 아쉬움은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신학교에 와서 다양한 분야의 신학을 접하다가 개혁주의 신학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시편송을 접하게 되었다. 찬양인도자에겐 너무도 매력 없는 곡조였지만, 그 배후의 성경적 근거와 그 매력 없는 곡조가 주는 깊은 충만을 알게 되었을 때, 경배와 찬양 속에 뭍혀 있는 나에게 경재와 찬양운동의 문제점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12년동안 몸담고 섬겨온 것은 단순히 나의 무지와 경험 부족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는 것이기에 오랜 생각의 결과로 장점과 단점을 신실하게 구분하고 아프지만 지적할 부분에 대해서는 소략한 일필을 가해야 함을 점감하게 되었다. 
경배와 찬양이 한국교회에 준 영향과 기여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앙심을 품은 반론자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힌다. 다만 더 성숙한 교회의 예배를 위해 이제는 미국 의존적인 무비판적 수용에 반전을 시도할 때라 생각하기에, 목회를 공부하는 과목에서 예배갱신을 위한 작은 소고로 시도해 본 것이다. 갱신이란 단어가 주는 획기적인 화려함과 정반대의 요청일지라도 하나님이 받기에 합당한 예배의 모습이라면, 우리의 만족을 급감시킨다는 퇴보의 낭패감이 사방으로 우겨쌀지라도 갱신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