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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해석과 패러다임

과학철학자였던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이 누적에 의해서 발전하지 않고 패러다임 쉬프트를 통해서 발전한다고 과학사의 탐구를 통해서 밝힙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말이죠. 천동설과 지동설처럼 과학 발전이 이처럼 혁명적 구조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 관측의 누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옮아 간다는 것이죠.

패더다임은 우리 관찰보다 더 커다란 개념인데요. 과학자들의 관찰 역시 객관적이지 않고 이론부하적(Theory-landeness)이기 때문이죠. 천동설은 과학자들의 입장에서 엄밀한 과학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관찰은 천동설의 문제를 감지하지 못하고 이 이론의 부하로서 관찰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관찰이라는 게 객관적 지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객관적이지 못한 것이죠. 예컨대, 지구보다 안쪽에 있는 행성들(수성, 금성, 화성)은 진자운동하는 천체로 관측됩니다. 이런 관측에도 불구하고 천동설의 체계는 무너지지 않고 그 체계 내에서 설명되죠. 나선궤도로 움직인다고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관찰이라는 게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관찰은 상당부분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우주를 해석할 때, 역사는 두 가지로 항상 논쟁해왔습니다. 우연에 의한 것과 필연에 의한 것이죠. 기독교는 당연히 필연에 의한 것으로 해석해왔고 그것이 진리라고 믿습니다.

이 거대한 세계관은 우리 정신의 구조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단지 개인적인 구조물일 뿐만 아니라 공통의 구조물이기도 하죠. 이런 인식의 방법론에는 믿음이 요구되지 않을 거 같지만 믿음이 요구됩니다. 과학도 믿음이 요구되는 지점이 있고 신앙도 믿음이 요구되는 지점이 있죠.

문제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일지도 모릅니다. 나를 우연의 산물로 이해할 것인지 하나님의 크신 경륜으로 이해할 것인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다. 여호수아의 후대를 향한 질문은 오늘도 유효합니다. 오늘날 너희는 섬길 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저 역시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지점 사실처럼 보이는 관찰도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무엇을 택할지 결정하십시오. 여러분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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