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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계명과 자녀교육

5계명과 자녀교육 
김헌수 목사 
한국 사회에서 ‘자녀 교육’처럼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끄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아파트 가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학군이고, 사교육비로 지출되는 돈이 공교육비보다 더 많은 것을 보면 자녀 교육이 모든 사람의 초미의 관심사임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자녀 교육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대부분의 경우, 자녀에게 좋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여 좋은 직장을 갖도록 하는 것이 좋은 자녀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교육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 그 자체로서는 나쁜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이지만, 다른 요소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학벌 위주의 한국 사회에서는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이것에 대한 반발로 ‘대안 교육’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에 대한 이해 역시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러한 물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자녀 교육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제5계명의 위치’를 생각하면서 ‘부모의 위치’와 ‘자녀 교육의 위치’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제5계명의 위치 
1) 제5계명의 독특성: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 
보통 제5계명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줄여서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새겨서 주신 돌판에는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약속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출 20:12. 참조. 신 5:16). 이 약속의 말씀에서 우리는 5계명의 위치와 독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약속과 함께 이 명령을 읽으면 제5계명은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을 전제로 한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낸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부모를 공경하면 앞으로 주실 새로운 땅에서 ‘그들의 생명이 길리라’고 약속하셨다. 부모를 공경하면 가나안 땅에서 생명이 길 것을 약속하셨는데, 이 약속은 일차적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어떤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개인이 장수하기 위해서 반드시 가나안 땅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5계명에서 ‘너’는 단수인데,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한 단위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에서 오래 살고 다른 나라의 종이 되지 않을 것을 뜻한다. 
5계명에는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이 붙어 있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독특성은 부모가 언약의 말씀의 기관(機關)이라는 사실과 연결된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통해 그의 언약의 자녀를 세상에 보내셨을 뿐 아니라 그 부모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칠 책임을 부여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신명기 5장에서 십계명을 반복하여 선포한 다음, 6장에서는 그 율법을 새로 얻을 땅에 들어가서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하였다(신 6:1). 이러한 말씀을 가르쳐야 그들의 “날이 장구케” 될 것이다(신 6:2).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로서 지속적으로 열매를 맺으며 살기 위해서는 부모가 언약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했다. 부모는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의무가 있었다(신 6:6-7).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기관인 부모에게 순종하면 약속의 땅에서 오래 존재하면서 민족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것이고,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약속의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후자의 모습을 읽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당하는 어려움의 책임을 부모에게 돌리고 회개하지 않았고(겔 18:2)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그 민족을 바벨론의 손에 넘기셨다. 부모를 통해 주시는 계명에 순종할 때에는 약속의 땅에서 자유를 누렸지만,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자기의 책임도 부모에게 돌렸을 때에는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이방 땅에서 억압과 부자유를 당하였다(겔 18:4). 
계명에 붙어 있는 약속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실현된 징계를 놓고 보면 제5계명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매우 중요하고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하나님의 다른 언약의 말씀의 ‘도입부’처럼 생각된다. 신약의 표현을 빌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다(엡 6:2-3).1) 
2) 독특한 위치의 한 예: 레위기 19장에서의 부모에 대한 순종 
제5계명의 독특한 위치는 제5계명이 1, 2, 4계명보다 먼저 나오는 레위기 19장의 순서에 의해서도 확정된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거룩하심같이 그의 백성들도 거룩하라고 선언하시고(19:2) 구체적인 계명들을 주셨다. 그 첫째로 말씀하신 것은 부모에 대한 경외이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19:3).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였는데(신 6:2) 여기에서는 ‘경외’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해서 부모를 경외하라고 하였다.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는 것처럼 부모에 대해서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안식일에 대한 계명(19:3)과 우상을 섬기거나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19:4)을 주셨다. 
레위기 19장에서는 5계명이 1계명, 2계명이나 4계명보다 먼저 나온다. 다소 의외의 순서이지만, 이것은 5계명의 독특한 위치로 설명될 수 있다. 즉 부모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안식일과 우상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으면 다른 계명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실용적인 이유’에서 5계명을 첫째로 말씀하신 것이다. 
2. 부모의 위치 
1) 제5계명에서의 부모의 위치: 언약의 말씀의 기관 
제5계명의 위치에 대한 고찰에서 부모의 위치와 역할이 분명히 드러났다. 제5계명은 언약의 맥락에서 가나안 땅을 두고서 말씀하신 것이며 부모는 언약의 말씀으로 후대를 가르치고 전수할 책임을 맡은 기관이다. 부모는 단순한 연장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칠 책무를 맡은 자이다. 
잠언에서 이 사실을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잠언에서 부모에 대한 표현을 살펴보면 부모의 주도적인 역할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말은 “훈계”(1:8; 4:1; 13:1; 15:5), “명령”(6:20), “징계”(3:22) 등의 말과 함께 사용되었고, 어머니 역시 “법”(1:8; 6:20)으로 자녀를 가르치며 자녀가 그 교훈을 받지 않을 때에는 근심하고 고통한다(10:1; 15:20; 17:25; 29:15).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식을 가르치고, 둘이 한 몸으로서 하나님의 엄위와 사랑을 보완하면서 가르친다. 
잠언 5:13에서 어떤 ‘아들’이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하고 후회하는 말이 기록되었다. 그 문맥에서 ‘아들’이 ‘내 선생’이라고 부른 사람은 ‘그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를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모가 언약의 말씀의 기관이고 부모의 중요한 사명이 자녀를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2) 
2) 징계의 말씀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맥락에서 부모에게 독특한 권위를 주셨는데 그것은 5계명에 대한 징계의 말씀에서도 잘 나타난다. 구약에서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하였다(출 21:17; 레 20:9; 잠 20:20; 30:11).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저주가 빈말이 아니라 실제로 효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였다. 부모를 저주하는 것은 부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부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저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라고 하셨다. 
또한 부모를 치는 자도 죽이라고 하였다(출 21:15). 부모의 자리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직분인데 그에 대해서 행동으로 대항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욕을 당한 것처럼 여기고 그러한 자를 죽이라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부모가 징계하여도 듣지 않고 방탕하여 술에 잠긴 자식은 성읍의 모든 사람이 “그를 돌로 쳐 죽일찌니”라고 말씀하셨다(신 21:18-21). 부모의 징계는 하나님의 징계와 동일한 것인데 그것을 받지 않는 자는 그 사회에서 제거하도록 하셨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꾀어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를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도록 한다면 그를 죽이되 부모가 먼저 손을 대도록 하였다(신 13:6-11).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세운 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부모 자식 관계의 근본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에 대해서는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죽이라고 말씀하셨다(신 13:8-9). 
자녀 징계에 대한 이러한 무서운 말씀에서 우리가 더 발전시켜 생각할 것이 있다. 
첫째, 부모의 가르침과 징계는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조그마한 습관이나 사소한 것 때문에 문제를 만들어서 징계하도록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언약을 훼손할 때 중하게 징계하게 하셨다. 따라서 부모의 가르침도 언약을 핵심으로 가르칠 것이고 징계에 있어서도 언약의 입장에서 경중을 따라 행하고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아야 한다(엡 6:4). 물론 우리는 조그마한 습관의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에 놓고서 포괄적으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둘째, 국가와 교회가 분리된 신약에서는 사형에 처하지 않지만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생명의 길을 거역하고 나아간 자에 대해서 교회는 ‘출교’라는 징계를 내린다. 오늘날도 불순종하는 자녀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은 구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사실을 모르고 구약을 문자적으로만 읽는 것이다. 
3) 부모의 책임 
우리는 5계명의 위치와 부모의 역할을 하나님의 언약의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이 계명은 단순히 사회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부모에 대한 순종은 곧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의미를 지닌다. 
이 사실은 자녀에게 순종할 것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도 막중한 책임을 요구한다. 바울 사도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고 가르쳤다. 
3. 자녀 교육의 위치: 유아세례에서 성찬의 상(床)으로 
1) 교회의 사명 안에 있는 자녀 교육 
5계명의 위치와 부모의 위치에 대한 고찰에서 자녀 교육의 위치도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다. 제5계명이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하여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므로 자녀 교육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자녀 교육의 핵심은 언약의 말씀을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하는 일이다. 이것은 “역사를 통하여 흐르는 주류(主流)의 신앙과 신학을 이어받고 전파하고 물려주는 것”을 우리의 사명으로 천명하는 독립개신교회의 헌장에서도 분명하게 천명되었다. 자녀 교육의 위치는 교회의 사명 안에 있지 교회 밖에 있지 않다. 
교회의 사명 안에 자녀 교육이 있다고 천명하는 것은 세상을 그 자체로서 속된 것으로 여기고 세상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재세례파적인 주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개혁 교회는 결코 재세례파를 신앙의 동지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암암리에 분리하고 하나님 나라라는 이름으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한다. 자녀 교육의 핵심은 그 자녀가 세상에서 얼마나 유명한 사람이 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참조. 창 6:4) 언약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것에 순종하며 사는가에 달려 있다. 
2) 유아세례에서 성찬의 상까지 
우리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전진하기 위해서는 성경적인 원칙을 잘 붙잡아야 한다. 우리의 자녀는 언약의 자녀이고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은 자이다. 삼위 하나님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삼위의 이름이 표현하는 실체에 들어간 것이다. 아이가 삼위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을 때 삼위 하나님의 약속이 그 아이에게 선포된다. 성부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부께서는 그 아이를 자녀와 상속자로 삼으셨고 모든 좋은 것을 내려 주시며 모든 악을 피하게 하거나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선언하신다. 또한 성자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로 그 아이의 모든 죄를 씻어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고 약속하신다. 또한 성신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신 하나님께서는 이 성례를 통해 그가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시킬 것을 약속하신다(참조. 도르트 대회의 “세례 예식문”). 
언약의 자녀에게는 삼위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이 있다. 따라서 부모는 불신자의 자녀와 달리 하나님의 언약과 교회에 속한 언약의 자녀에게 그 약속의 의미를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을 걸어갈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그 아이가 이 약속의 의미를 깨닫고 자기의 입으로 공적(公的) 신앙 고백(public profession of faith)을 하고 성찬의 상에 참여할 때까지 부모는 부지런히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유아세례 때에 선포된 삼위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하지 못했다는 책망을 면할 길이 없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의 핵심을 가르친다. 세상에서는 혼인이나 죽음을 큰일로 여기며, 이러한 사조가 로마 교회에 들어와서 혼배 성사(婚配聖事)나 종부 성사(終傅聖事)라는 것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뿐이다. 이것은 자녀 교육의 핵심도 가르쳐 준다. 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대학도 직장도 혼인도 큰일이 아니며, 자녀 교육은 그것을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유아세례를 받은 자에 대한 언약 교육의 목적은 그 아이가 공적 신앙 고백을 하고 성찬의 상에 참여하는 것이다. 
3) 핵심적인 가르침과 포괄적인 가르침 
유아세례에서 성찬의 상까지 부지런히 가르칠 때 우리는 핵심적이면서도 포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5계명을 주신 것은 그들을 통해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기 위함이었다. 부모의 가르침은 이 핵심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동시에 핵심적인 가르침은 포괄적인 데서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핵심이 없는 자녀 교육은 세상적이 되며 핵심만 강조하는 자녀 교육은 교조적인 것이 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아이가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부모가 그것을 들어주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의 영어 교육을 강조하면서 “I don"t want it.”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서구의 가치관도 여과 없이 받아들인 듯하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게 하자’고 하면 상당히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부모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아이들이 책임 있게 선택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좀 더 분명하게 보아야 할 현실은 아이의 선택이 이미 많은 것들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는 자기가 노출되어 있고 영향 받는 쪽을 택하게 되어 있다. 동쪽으로 가는 배를 타고서 서쪽으로 걸어도 그가 도달하는 곳은 동쪽의 항구인 것처럼, 아이가 노출되어서 결정을 강요당하면서 살고 있는 방향을 깊이 재검토하는 일이 없이 아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게 하자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이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게 하자’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뿐 아니라 자신의 생활이 바쁘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는 부모들의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시대사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부모는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 뿐 아니라 자녀의 환경을 포괄적으로 파악하면서 아이를 진리로 가르치고 인도하며, 포괄적인 이해 가운데서 인생의 길을 선택하도록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비교적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서 자란 요즈음의 청소년을 보면 덩치는 크고 정보와 지식은 많이 가지고 있으나 생각이나 감정이나 사회적 관계에서는 가난을 겪었던 이전 세대에 비해서 훨씬 미숙함을 본다. 요즈음은 중앙 일간지에 다이어트 식품이나 키 크는 약 선전이 전면 광고로 나올 만큼 외모에 관심이 많은 시대이다. 키 크는 약을 선전하면서 아버지나 어머니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큰 자녀가 나오고 그 옆에 “잘 커 줘서 고맙구나” 하는 문구가 나온다. 키만 커도 잘 커 준 것이고 이른바 좋은 대학에 가면 자녀 교육을 잘 시킨 것이라고들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에서 언약의 자녀를 정신적 혹은 사회적 미숙아로 키우지 않고 생각이 깊고 행동이 민첩한 사람으로 키워야 할 것이다. 이른바 ‘일류 대학’에 보내려고 공부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 말씀에 근거하여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신자’로 키우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부모는 자녀와 함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른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동일한 인격이다. 단지 자녀가 어릴 때에 믿음의 선배인 부모에게서 언약의 말씀으로 길림을 받게 하셨다. 잘 배운 자녀는 자기의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 성찬의 상에 참여할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서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 것이다(엡 5:31; 창 2:24). 우리는 자녀가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독립된 가정을 이룰 날을 바라보면서 그 아이가 사람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정당한 배우자를 택할 능력을 갖추도록 가르쳐야 한다. 부모의 그늘에 가려서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경험을 별로 갖지 못한 채, 중요한 데서는 의존적이고 사소한 데서는 반발하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놔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독립한 신자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4. 부모의 약점과 결점은? 
우리는 5계명과 부모와 자녀 교육의 위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자녀 교육이 하나님의 언약에서 매우 중요한 일임을 배웠고 언약의 말씀의 계승자로서 부모의 위치가 매우 중요함도 실감하였다. 여기에서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부모가 그러한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어떤 부모가 이러한 일을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오늘날만의 문제는 아니었음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4문에서 발견한다. 104문은 5계명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것은 “나의 부모님, 그리고 내 위에 있는 모든 권위에 모든 공경과 사랑과 신실함을 나타내고 그들의 모든 좋은 가르침과 징계에 대해 합당한 순종을 하며, 또한 ‘그들의 약점과 부족’에 관해서는 인내해야 합니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부모의 약점과 부족이라는 말은 포괄적인 말이다. 부모의 약점과 부족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에 비교할 때 드러난다. 다윗과 솔로몬은 이방 나라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비교할 때에는 부족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말은 매우 실제적인 말이다. 부모의 정신적 물질적 영적 약점과 부족 때문에 자녀들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들이 우리 주위에는 매우 많다. 
제5계명을 해설하면서 부모의 약점과 부족을 실제적으로 언급한 것은 5계명의 뜻을 생각할 때 적절한 해설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부모의 직분의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부모의 부족과 연약함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완전함이 나타난다면 부모는 이것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고 숨기려고 할 필요가 없다. 부모가 가르치는 것의 핵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기의 부족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면서 자녀들에게 하나님만을 경외하라고 가르친다면 이것 또한 좋은 교육이 될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다양한 환경에서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특히 경제적인 부족이 있을 때 자녀에게 이 사실을 잘 설명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만한 경제적 여유를 주시지 않았지만 맹목적인 사랑 때문에 자녀에게 무제한으로 잘해 주는 것은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가 파출부를 하면서 자녀를 가르치는 일이 미화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경우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성부께서는 우리를 자녀와 상속자로 삼으셨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내려 주시며 모든 악을 피하게 하시거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 자녀를 더 바르게 가르치는 일이 될 것이다(도르트 대회의 “세례 예식문”). 
물론 자녀로서 부모의 약점과 부족에 대해서 인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어려움에서 우리는 어려움 자체만을 볼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약점과 부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제한이 있는 부모를 통해 그의 자녀들을 다스리신다. 자녀가 부모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도 인생으로서 여러 가지 한계와 제한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것을 배운다면 그는 왕자나 공주처럼 길러지는 요즈음의 세상 자녀들보다 훨씬 더 요긴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각 주 
1)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다”고 하였는데, ‘첫 계명’이라는 말이 십계명의 순서에서 첫째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논의의 맥락에서 보면, ‘실용적인 이유’에서 첫째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첫째’라는 말은 ‘가장 중요한, 매우 중요한’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에베소서에서도 약속의 내용은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의 뜻도 단순히 물질적으로 잘되고 오래 산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것인데, 그 일에 순종하고 나아가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계속하도록 필요한 것을 계속 공급하고 주님의 나라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의미이다 
2) 이 구절은, 선생과 학생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이해하는 고대 근동의 배경에서 선생이 학생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부모라는 말을 포괄적으로 사용한 이러한 경우에도, 부모의 근본적인 역할, 즉 언약의 말씀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자로서의 위치와 역할은 더 분명히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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