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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가정 예배

두 가지 가정 예배

김헌수 목사

이 글은 2010년 12월 18일 주님의 보배교회(고신)의 초청으로 부모 모임에서 강의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얼마 전에 중앙 일간지 하단에 실린 어떤 시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2010년 10월에 출간된 『아버지 리더쉽』이라는 책을 광고하면서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의 시를 인용하였습니다. 


엄마가 있어서 좋다. 
나를 이뻐해 주어서
냉장고가 있어서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서 좋다. 
나랑 놀아 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의 시


아이의 공간, 먹고 놀고 사랑을 주고받는 공간에 아버지가 없는 요즈음의 세태를 보는 것 같아서 읽는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시입니다. 『아버지 리더쉽』이라는 책이 그 공간을 얼마나 메울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지만, 저의생각은 다른 방향으로도 향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서 함께 호흡하는 교우들도 여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최초로 만드신 사회가 가정인데, 죄가 들어와서 가정이 파괴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부부 사이도 갈라졌고 가인과 아벨의 사이도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서 우리의 가정도 회복되는데, 특히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두 가지 가정 예배에 대하여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있었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에서 부르던 찬송입니다. 


우상적 가정예배


예레미야 7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가운데 여호와의 성전이 있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면서도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서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고 말한다고 하나님께서 지적하셨습니다(렘7:9-10).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헐겠다고 하셨고, 그들을 위하여서 중보의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렘7:12-16).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예를 그 다음 구절에서 들고 있습니다.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였느냐?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비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루 황후를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느니라.(7:17-18)


유다 성읍들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거리에서도 온 가족이 동원되어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나무를 주어오고 아버지는 불을 피우고 어머니와 딸은 가루를 반죽하여서 하늘의 여신을 위하여서 과자를 만들고, 다른 신들에게 술을 부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물론 신에게 바쳤던 그 과자나 음료는 그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먹고 마셨습니다. 가정의 활동과 식사가 우상 숭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가정들과 사회를 불로 심판하겠다고 하셨습니다(렘7:19-20). 


그런데 이스라엘의 완고한 죄는 심판 후에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로 내려간 그들이 같은 죄를 더 완악하게 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44장에서는 그것을 그들의 마을 들어서 지적해 냅니다. 


15 때에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줄을 아는 모든 남자와 곁에 섰던 모든 여인 곧 애굽 땅 바드로스에 거하는 모든 백성의 큰 무리가 예레미야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16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17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여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18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19 여인들은 가로되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 때에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그에게 경배하는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


44장의 앞부분에서 예레미야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스스로를 해하는 것이고 멸절하는 것’이며, 그것을 유다의 멸망을 통하여서 생생하게 배웠지만 그 사실을 망각하고 이지브에서도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자들을 책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서도 배우지 못한 그들에게 여호와의 심판이 임할 것을 분명히 선언하였습니다(44:1-14).


그러나 예레미야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회개하는 대신에 예레미야에게 나름의 논리로 대들었습니다. 므낫세 시절에 우상숭배적인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자랐던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도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늘 여신을 섬기던 때, 곧 므낫세 시애에는 나라가 평안하였지만 요시야가 성전을 정결케 하고 우상숭배를 패하던 때부터 유다가 어려움에 빠졌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도 우상숭배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더욱 강퍅하여진 것은 여인들이 나서서 남편의 허락 없이 경배하는 과자를 만들이 않았다고 하는데서도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숨어서 하던 우상 숭배를 이제는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을 불러서 주님의 보배(세굴라)가 되고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셨지만 그들은 그 영광스러운 소명을 버렸습니다. 우상숭배적인 가정예배의 자리에서 그들은 그 사명을 버렸던 것입니다. 


참된 가정 예배


여호와께서 주님의 보배로 삼으신 이스라엘에게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시편 128편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시온에서 복을 받은 사람의 가정 생활과 직장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여기에서 가르쳐 줍니다. 


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게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3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신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5 여호와께서는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6 네 자식의 자식을 볼 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 지로다 


시편 128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알려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없는 이 세대에서는 ‘경외’와 ‘복’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세 가지 복이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복된 개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말씀대로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는데, 그 복은 그의 손이 수고한 대로 먹습니다. 자기의 손으로 일한 것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는 것은 언약의 저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주를 경외하면서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사는 자에게 그가 근실히 행한 대로 돌려주십니다. 그의 손으로 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그는 주님의 보호하심 아래에서 형통함을 누립니다. 


둘째는 ‘복된 가정’입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는 만족할 만한 생활을 하지만 가정에서는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포도나무와 같은 아내와 감람나무와 같은 자녀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아내에게는 결실한 포도나무와 같은 넉넉함이 있고, 남편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내실에 있는 네 아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내실(內室)은 다른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 내실에 있는 그의 아내는 아가서 4:12의 말씀처럼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입니다. 에덴동산과 같은 그의 아내는 밖에서 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넉넉한 쉼을 주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시원한 생수로 그의 갈증을 채워줄 것입니다. 


또한 네 상에 둘린 자녀는 어린 감람나무 같다고 하였습니다. 감람나무는 잘라내면 그 가를 빙 둘러서 새 줄기들이 나온다고 합니다. 저녁에 식탁에 모인 자녀들이 그러한 감람나무 새싹처럼 아버지를 중심으로 모여 앉아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버지의 하루 이야기를 들을 뿐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지금은 새싹인 그들이 앞으로는 감람나무처럼 크게 자라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동량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아내와 자녀가 있는 그 가정은 참 복된 가정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복은 세 번째 복인 ‘복된 교회’에 포함됩니다. 시편 128편은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복을 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자기의 자식의 자식을 볼 것이라는 선언으로 마무리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사업과 가정에 복이 임한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 사람이 두 가지 복을 받은 것은 그와 그의 가족이 시온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시온에 속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어둠 가운데서 방황할 것이지만, 이제 죽음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사업과 가정에서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밥상머리 교육과 가정 예배 


우리 선조들은 밥상머리에서부터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밥상에서 부모님이 숟가락을 들기 전에는 숟가락을 들어서는 안 되었고, 부모님이 식사를 다 마치기 전에 먼저 수저를 놓아서도 안 되었습니다. 반찬은 젓가락에 잡힌 대로 먹어야지 두 번 젓가락질하는 것도 금기사항이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 거기서 윗사람을 존중하는 것과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는 것, 또한 맛있는 음식을 절제하면서 먹는 것을 배웠습니다. 밥상머리가 가정교육의 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 선생은 신자가 하루에 여덟 번은 기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다섯 번은 기도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와 잠을 가러 갈 때, 그리고 세 번 밥먹을 때인데, 여기에 세 번을 더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밥을 먹고 나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일용할 양식을 받아서 먹은 후에 바로 신령한 양식을 읽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식사를 마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도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잘 지켜지고 있는데, 거기에서 진정한 밥상머리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단순한 예절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늘 친숙하게 읽고 시편 찬송을 부르고 함께 기도하는 데에서 주님의 복주심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정 예배는 ‘예배’이기 때문에 교회의 공적인 예배와 함께 갑니다. 교회의 예배가 가정 예배를 이끌고 가고, 또한 가정 예배가 공적 예배를 더 풍성하게 합니다. 서로 보완이 되면서 우리는 주님을 더 알아 갑니다. 교회의 목사님을 위하여서 기도하는 그 가정은 복된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살아가는 집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가족과 함께 나눕니다. 그 자리에서 ‘이 소박한 음식은 여호와께서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손으로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을 주신 것이다’ 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는 가족은 시편 128편의 복을 맛볼 것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음식만을 추구하고 더 안정된 직방만을 추구하면서 마음을 거기에 빼앗긴 가족은 므낫세 시대에 살던 우상숭배자의 식탁과 매우 비슷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는 지나간 역사도 우상숭배의 관점에서 재해석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식탁은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이 나뉘는 곳입니다. 가정예배를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복과 생명을 누리지 못하면, 반대의 사실이 현실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출처 : 성약출판소식 20111. 12 제 8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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