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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6.여섯번째 적극적표지: 참된 겸손(440-479)- 은혜로운 감정은 복음적인 겸손을 동반한다(Gracious affections are attended with evangelical humiliation).1)

6.여섯번째 적극적표지: 참된 겸손(440-479)- 은혜로운 감정은 복음적인 겸손을 동반한다(Gracious affections are attended with evangelical humiliation).1) 
 
  앞서 살펴 본 다섯 가지 표지는 표지라기 보다는 그것의 원천이라고 봄이 합당할 것이다. 이제여기서부터 본격적인 표지론이 시작된다. 에드워즈는 겸손과 교만에 대해서 상당히 심원하고 풍성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겸손이라는 덕목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겸손은 사실상 그리스도인다운 여러 성품들 중 하나다. 성경은 중생하고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한 성품들을 여러 가지 언급한다. 온유, 유순, 자비, 긍휼, 동정심, 용서, 관용, 인내, 화평등이 그것이다. 에드워즈는 바로 다음 장에서 참된 신앙 감정의 표지들 가운데 일부로 그러한 성품적 변화를 열거하면서 설명한다. 그것도 다른 모든 기독교적 성품들을 다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분량을 그 한 덕목의 설명에 할애한다. 그가 겸손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복음적 겸손은 그리스도인 자신이 전적인 무능함, 혐오할만함, 그리고 추악함과 같은 심령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감각이다고 정의내린다.2)     
 
1. 율법적 겸손과 복음적 겸손의 구별(The distinction between a legal and evangelical humiliation) 
 
  에드워즈는 겸손을 율법적 겸손과 복음적 겸손으로 나눈다. 전자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아직 은혜로운 정서가 없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후자는 오직 성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전자는 자연적 원리들을 돕는, 특히 자연 양심을 돕는 성령의 일반적 영향에서 비롯된다. 후자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원리들을 심고 적용하는 성령의 특별한 영향에서 나오는 것이다. 전자는 우리 정신이 특히 하나님의 자연적 완전, 즉 그의 위대하심, 무거운 위엄등에 대한 보다 큰 감각을 가지게 될 때 생기는 것으로, 이를 테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그러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위엄을 보았다. 후자는 하나님의 일들의 초월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외로운 위대함, 자연적 완전, 그의 율법의 엄격함에 대한 감각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극히 죄악되며 죄책이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에 노출되어 있음을 확신시켜 준다. 마지막 심판날, 사악한 자들과 마귀들도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죄로 인한 그들 자신의 가증스러움은 보지 못한다. 이 감각은 에드워즈에 의하면 복음적 겸손 안에서만 주어진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도덕적 완전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결과라는 것이다. 율법적 겸손하에서 인간은 위대하시고 무서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미미하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망했으며 도무지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존재임을 감지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만을 높이려는 성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오직 복음적 겸손 안에서만 주어진다. 하나님의 거룩한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그 성향을 변화시킴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율법적 겸손하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절망하게 된다. 복음적 겸손하에서 인간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버리게 된다. 전자 아래서 인간이 제압당해 강제로 땅바닥까지 낮아지게 된다. 후자 아래서 인간은 달콤하게 굴복하게 된다.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그리고 기꺼이 하나님의 발 앞에 부복한다는 것이다. 전자에는 아무런 영적 선이 없다. 참된 미의 속성이 전혀 없다. 반면 기독교적 은혜의 탁월한 아름다움의 많은 부분이 후자 안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적 겸손은 복음적 겸손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유용하다. 사람이 율법으로 낮아져 있으면서도 전혀 겸손하지 못할 수 있다. 사악한 자들은 마지막 심판날 자기들에게 전혀 의가 없으며, 온전히 죄악되며, 지극한 죄책을 가지고 있으며, 영원한 저주를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될 것이며 자신들의 무력함을 온전히 감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 마음의 교만을 전혀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2. 복음적인 겸손의 본질(The essence of evangelical humiliation) 
 
  복음적인 겸손의 본질은 자신이 엄청나게 죄로 가득차 있지만 은혜의 경륜 아래에 있는 피조물임을 아는 겸손,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며 전적으로 경멸스럽고 추악한 존재라고 여기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겸손이다. 그것은 자신을 높이려는 성향을 죽이고 자기 자신의 영광을 자발적으로 부인한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믿음에 있는 위대하고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복음의 전체 구조와 새 언약에 속한 모든 것들과 타락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사람들의 심령이 겸손케 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신앙 고백을 하든 그들의 신앙 감정이 얼마나 높게 고양되었든지 간에,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442).3) 에드워즈에 의하면 영적 이해는 필연적으로 의지, 혹은 성향의 변화가 뒤따르기 때문이고, 영적 이해치고 의지가 굽혀지지 않거나 성향이 바뀌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신령한 지식이 있으면 틀림없이 의지가 변화되게된다. 즉 성품내지 삶의 변화가 뒤따른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에드워즈는 겸손을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변화의 내용으로 본다. 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겸손은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들 중 하나이다. 먼저 복음적 겸손은 기독교인의 커다란 임무인 자기 부인의 주된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의무인 자기 부인(self-denial)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사람이 자신의 세상적인 성향들을 부인하고, 모든 세속적인 대상들과 쾌락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둘째는 스스로를 높이려는 본능을 부인하고, 자존심과 영광을 거부하고,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버리게 된다. 복음적인 겸손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행한다. 후자는 자기를 부인할 때 가장 위대하고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비록 두 가지 측면이 항상 함께 있어야 하고,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도 결코 참될 수 없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후자보다는 전자에 훨씬 더 근접하게 행할 수 있다. 많은 은자들과 수도자들은 부와 쾌락과 세상의 일반적인 즐거움들을 포기하였지만(비록 참된 자기 부정은 없었지만), 자존심과 의로움은 전혀 부정하지 못했다. 그들을 결코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의 탐욕을 팔아 버리고, 다른 탐욕을 만족시키고자 했고, 동물적인 탐욕을 팔아서 마귀적인 탐욕을 만족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그들은 결국 처음보다 더 나쁜 상황이 되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경향이 자연인에게 얼마나 강한가는 상상하기도 어렵다(445-6). 
 
3. 영적 교만 
 
  에드워즈는 위선자들이 겸손한 척 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고 지적한다. 말과 행실에 있어 겸손을 가장하려고 무척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한 말이나.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 달콤한 겸손의 태도와 모양은 그들이 모방할 수 없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율법적 영이란 무엇이든 자만하는 영이었다. 역으로 자기의 의로움, 도덕성, 거룩성, 감정, 체험, 신앙, 겸손등 어떤 좋은 것이든 자부하는 영적 교만이야말로 율법적 영이었다. 
 
  한편 에드워즈는 영적 교만의 특징이 자신의 겸손에 대해 과대평가하거나 과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자신을 아주 많이 비웠으며, 자신들이 진토에까지 낮아졌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낮아짐에 대한 높은 평가로 마음이 하늘까지 올라가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런데 그들의 겸손은 자신있고 과시적이며 시끄럽고 주제넘고 마음이 부풀고 자만에 찬 겸손이다. 에드워즈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아주 교만하고 행동이 거만한대도 자신은 아주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실에 놀란다. 인간 마음의 교활함이 이 영적 교만과 자기 의의 영역에서처럼 많이 드러나는 곳은 없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사람을 다루는 데서 사탄의 교묘함은 그 절정에 달한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했다. 사단은 이 부분에서 가장 많이 경험이 있다. 그는 영적 교만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알고 있으며, 영적 교만의 비밀스러운 원천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죄이기 때문이다. 
 
4. 영적 교만을 발견하고 구별하게 해 주는 첫번째 표지(452-468) 
 
 영적 교만이란 대개 커다란 겸손을 가장하고 나타나지만 두 가지 방식에 의해 그것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영적 교만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신앙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아주 대단하고 비상한 것으로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정도의 구원의 은혜는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체험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대단한 성도이며 보통 사람들보다 더 큰 은혜를 가졌다고 말하는 셈이라고 에드워즈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 체험을 진술할 때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던 바리새인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눅18:11)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입으로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거룩하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해서 자신의 거룩함을 그처럼 높이 평가하는 것이 그들의 교만과 허영의 증거임을 반증하지는 못한다고 에드워즈는 비판한다. 만일 그들이 겸손한 영의 영향 아래 있었더라면, 자신의 종교적 성취가 자기에게 그처럼 찬란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자신을 내세우며 상석을 차지하려 한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것임에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정죄하는 그 일(눅14:7)을 아주 자연스럽게 한다. 안내하고 가르치고 지도하고 경영하는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고 그런 노릇을 하는 데는 아주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또 종교문제에 있어서도 자기가 지도자와 교사의 노릇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랍비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23:6-7). 
 
   그러나 겸손한 자는 자신을 성도 중에 낮은 자, 모든 성도들 중 가장 낮은 자들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긴다.  자기에게 합당한 자리는 가장 낮은 자리라고 생각한다. 가르치는 일에 관해서도 이들은 큰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나 예레미야처럼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적임자라고 여긴다(출3:11,렘1:6). 가르치는 것보다는 배우는 것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그들은 듣는 것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데 열심이다. 이들에게는 대담한 상전투의 말씨가 자연스럽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떨면서 말한다(호13:1).4) 그들은 권위를 지닌 총감독이나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 “많이 선생 되지 말라”(약3:1-2).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벧전5:5). 정말 뛰어난 성도들, 즉 가장 탁월한 체험을 가지고 있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춘다(마18:4).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보기에 은혜에 있어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과 감사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처럼 작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참으로 은혜로운 성도는 자신의 의무에 규칙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그 규칙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가 자신이 가진 것이나 자신이 행하는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참으로 은혜로운 영혼에게 자신의 거룩함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성도 속에 있는 은혜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조차도 그가 마땅히 도달해야 하는 수준에 비추어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그것을 자기 속에 있는 아름다움이나 사랑스러움이라고 말할 가치가 없다고 본다. 탁월한 성도는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마땅한 정도에 대한 그러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자기 은혜의 미미함뿐 아니라 자신에게 남아있는 죄와 부패가 얼마나 큰 지를 본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부패가 어느 정도인가를 측정하려면 우리의 의무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은혜 안에서 자라게 되면 자신의 선함보다 결함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서 최소한의 죄 속에 있는 결함이나 최소한의 부패조차도 너무나 커 보여 그들의 최대의 거룩함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무색케 하고도 남는다. 왜냐하면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한 최소한의 죄조차 그 안에 무한한 가증스러움, 혹은 결함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피조물 속에 있는 최고의 거룩함은 그 안에 무한한 사랑스러움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 사랑스러움은 최소한의 자기 결함에 비교해볼 때 아무 것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에드워즈의 죄론이 등장한다. 죄라는 것이 왜 그렇게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에 대한 청교도적 이해는 기독교의 가장 심오한 차원에 관련된 주제이다. 에드워즈를 비롯한 청교도들은 아마 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교회사에서 가장 깊은 경지에 도달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모든 죄는 그 안에 무한한 결함과 가증스러움을 안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분명하게 증명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죄의 악, 혹은 부정, 혹은 가증함의 본질은 의무의 침해, 혹은 마땅히 하거나 되어야 하는 것에 반하는 행위나 성품이다. 그러므로 침해되는 의무가 얼마나 더 큰 것이냐에 의해 침해의 가증함이나 불법성이 그만큼 더 커진다. 그런데 어떤 존재를 사랑하고 공경할 우리의 의무는 그의 사랑스러움이나 명예로움에 어느 정도 비례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한히 사랑스러운 분이다. 그러므로 그를 사랑할 우리의 의무도 무한하다. 그러므로 그 사랑에 반하는 어떤 것도 무한한 불의, 결함 및 무가치함을 지닌다.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죄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거리에 비례하여 가증스럽다. 대상의 위대함과 주체의 비천함 및 열등함은 그것을 악화시킨다. 
 
  역으로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사랑이나 공경은 무한한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 주체가 비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공경이 주목과 존중을 받을 가치가 그만큼 더 줄어든다. 대상의 우월성이 크면 클수록 열등한 자가 그 우월한 자를 공경할 의무는 그만큼 더 커지는 반면, 열등한 자가 우월한 자를 공경하지 않는 죄는 더 가증스러워진다. 그러나 열등한 자의 그 열등성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 열등한 자의 공경의 가치가 줄어든다. 열등하면 할수록 그는 주목받을 가치가 더 적어지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사람이 참된 은혜와 영적 빛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만큼 더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무한의 개념을 즐겨 활용하고 있다. 유한한 것은 무한한 것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람이 영적 빛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사물들이 더욱 더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참된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자신의 선함과 거룩함이 그만큼 더 작아 보인다. 인간의 오염과 일탈을 감추어주는 것은 어두움이다. 그러나 마음에 흘러 들어온 빛은 그것을 드러내고 가장 은밀한 구석에서 그것을 찾아내어 그것이 선명히 나타나게 한다. 특별히 만물을 꿰뚫어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의 빛은 그러하다. 가장 탁월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은 자신에게 더 많은 사랑, 더 많은 겸손, 더 많은 감사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 가증한 교만과 배은망덕으로 인해 울부짖는다. 
 
  에드워즈는 하나의 법칙을 확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자신이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아주 뛰어난 성도이며, 기독교적 체험에 있어 아주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은 아주 잘못되어 있으며 전혀 탁월한 성도가 아닐뿐더러 교만과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그를 계속 지배하는 기질이라면, 그는 전혀 성도가 아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적 체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다. 체험의 주체로 하여금 그 체험을 대단하게 평가하게 하여 그를 자고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체험은 헛된 망상이라고 에드워즈는 단정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영적 발견으로 인해 마음이 부풀어 올라 그 발견의 탁월성에 대한 감탄으로 가득하게 하며 이제 자기는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많이 보았으며 더 많이 안다고 자부하게 하는 것은 전혀 참된 영적 빛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참된 영적 지식은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의 무지를 더 많이 자각하게 한다. 
 
5. 영적 교만을 발견하고 구별하게 해 주는 두 번째 표지(468-479) 
 
   영적 교만의 또 하나의 틀림없는 표시는 자신의 겸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가짜 체험들은 대개 가짜 겸손을 동반한다. 그리고 가짜 겸손의 속성은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뛰어나게 은혜로운 정서의 소유자들은 그들이 깊이 겸손해야 하는 이유를 아주 잘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미 획득한 겸손을 아주 작은 것으로 본다. 반면 자신에게 아직 남아있는 교만은 크고 아주 혐오스럽다고 여긴다. 참으로 겸손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열함과 혐오스러움을 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낮아져도 자신이 마땅한 처해야 할 위치보다 더 낮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리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마땅히 처해야 하는 더 낮은 위치로 내려가고 싶어한다. 결국 겸손의 원천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자기가 겸손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체가 교만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아주 적다고 여기고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아주 크게 여긴다. 그것은 본래 자기의 위상(proper height)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자신의 존엄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는 자기를 약간 낮추어도 그것을 아주 큰 겸비라 여긴다. 그러나 본래 자기의 위상이 아주 낮다고 생각하는 자는 자기를 아주 낮추더라도 그것이 당연한 처신이지 특별한 겸비라 생각지 않는다. 참으로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의 존엄이 아주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자기 비하가 스스로에게 아주 작아 보인다. 진흙속의 무가치하고 악하며 혐오스러운 벌레가 무한히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는 그것을 커다란 겸손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이 커다란 자기 비하로 보이는 이유는 그가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자신을 보다 정확하게 보았다면, 그는 그처럼 무한히 경멸할 만하며 비열한 자가 하나님 앞에 더 낮아지지 않는 그 교만에 놀라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들의 행동에 나타나는 겸손을 평가함에 있어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하나는 그들이 실제로 소유한 존귀함의 정도요, 다른 하나는 자기를 낮추는 정도이다(470). 그리하여 똑같이 낮은 자리에 처하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한 사람에게는 커다란 겸손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겸손이 아닐 수 있다. 참으로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의 존귀함에 대해 아주 낮은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낮추는 모든 행위들이 아주 작은 것으로 보인다. 자기처럼 비열하고 가난하고 비참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발 아래 엎드리는 것이 전혀 대단한 겸손이나 자기 비하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겸손의 정도는 자기를 낮추어야 하는 이유의 정도에 의해 평가될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참으로 겸손한 성도가 결코 자신의 겸손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낮아져야 하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너무 커 보이는데 반해 자기 마음가짐은 도무지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471). 즉, 자신의 겸손보다 교만이 훨씬 더 많이 발견된다. 이것은 죄에 대한 깨달음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자신의 죄를 크게 깨달은 사람들은 좀체 자신이 죄를 크게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람이 죄에 대한 자기의 깨달음의 정도를 평가하는 요소가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죄책과 오염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감각의 정도요, 다른 하나는 그들의 실재 죄성의 정도 안에서 그러한 감각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유의 정도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비천함과 비열함, 눈멂, 무능함 등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감각에 대한 깨달음에도 그 원리는 적용된다. 그 이유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에 대해 비천하고 추하고 무능하다고 느끼는 느낌이 결코 크다고 생각지 않는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탁월한 성도들은 어떤 점에 있어서도 자신들이 탁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은혜와 체험들은 그에게 비교적 작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자신의 겸손이 그러하다. 기독교적 체험과 진정한 경건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있어 겸손만큼 자기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없다. 참으로 경건한 자들은 자신의 겸손보다는 교만을 분별하는 데 천배나 민첩하다. 그는 남의 교만보다는 자신의 교만을 보다 쉽게 탓한다. 참회하는 자는 참된 겸비를 보일때 잠잠하고 고요한 것으로 묘사된다(애3:28). 성경은 침묵이 겸손에 동반되는 것으로 가르친다(잠30:20). 정말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의와 거룩함을 아주 낫게 평가하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하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면에서 가난한 자로 처신한다. 
 
  “자신의 의로움과 거룩이 너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 속에 있는 것이라고는 가난뿐임을 스스로 인식하며, 그에 맞게 행동한다. 따라서 참으로 겸손한 사람, 특별히 탁월하게 겸손한 사람은 여러 면에서 당연하게 가난한 사람으로 행한다. 가난한 사람은 간청과 애원에 익숙하지만, 부유한 사람은 거칠게 대답한다. 가난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성급하고 크게 분개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양보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완고하지 않고, 방자하지도 않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잘 참는다. 그는 경멸받지 않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경멸을 참아낸다. 그는 자신이 무시되고 존중되지 않는 것을 가증스러운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낮은 곳에 처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상사들을 기꺼이 존경하며, 그들의 책망을 조용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나은 사람으로 기꺼이 존경한다. 그는 쉽게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지식과 판단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지나치게 까다롭지 않으며 변덕스럽지도 않다. 그리고 어렵고 힘든 일을 잘 견딘다. 그는 잘난 체하지 않으며, 자기에게 주목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순복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런 사람이 겸손한 그리스도인이다. 겸손은 (위대한 Mastricht가 표현하는 것처럼), 일종의 거룩한 무기력(holy pusillanimity)이다.5)  매우 가난한 사람은 거지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 역시 거지다. 은혜로운 감정과 거짓된 감정 사이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은혜로운 감정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집 문 앞에서 여전히 가련한 거지로 계속 남아있다. 그것도 아주 가난하고 궁핍한 거지로 말이다. 거짓된 감정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부유하다고 생각하고, 필수품이 아닌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이 먹고 살기에 충분한 것이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475-6). 
 
  에드워즈는 정말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교만보다 자기의 교만을 먼저 본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보다 더 교만한 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타인의 언행을 가장 선하게 해석한다. 또한 죄를 크게 깨들은 자는 자기가 죄를 크게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은혜가 깊을수록 죄를 더 깊이 깨닫는다.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진리들을 더 많이 이해하면 할수록 자신의 은혜와 사랑의 작음과 더욱더 이상하고 놀라운 일로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은 자기보다 훨씬 낫다고 더 쉽게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은혜의 미미함에 의아해 하는 성도는 그처럼 이상한 일이 다른 성도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좀체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외면만을 보지만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본다. 영적 지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참된 신령한 지식의 특징은 사람이 그것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자기 자신의 무지를 더 많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인간이 겸손해야 할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거리 때문이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나 인간은 열등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다. 인간은 벌레와 같다. 먼지 속의 벌레가 최고의 존경과 겸손으로 무한하신 위엄과 존재에게 접근하는 것은 특별한 겸손의 행위가 아니다. 성도의 최고의 성취조차도 자기들 눈에 미미해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안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겸손은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다. “뭇사람을 공경하며”(벧전2:17). 그것은 교회 밖에 있는 사악한 사람들 뿐 아니라 교회내에 있는 거짓 형제들과 박해자들까지 공경한다. 
 
  에드워즈는 신앙감정을 마리야의 향유에 비유한다. 그녀가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은 그 향유는 온 집을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웠다. 그것은 옥합에서 흘러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옥합이 깨어질 때까지는 향유가 흘러나올 수 없었으며 그 향기를 발할 수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은혜로운 감정들도 상한 심령(broken heart)에서 흘러나온다. 그리스도에게 달콤한 향기이며 기독교인의 영혼을 하늘의 달콤함과 향내로 가득 채우는 모든 은혜로운 감정들은 상한 심령의 감정들이다. 모든 은혜로운 감정은 겸손으로 채색된 것이다. 참된 기독교적 사랑은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것이든 사람에 대한 것이든 겸손하고 상한 마음의 사랑이다. 성도의 욕망도 그것이 얼마나 열렬한 것이든 겸손한 욕망이다. 그들의 소망은 겸손한 소망이다. 그들의 기쁨은 심지어 그것을 형언할 수없으며 영광에 가득한 것일 때라도 겸손한 상한 심령의 기쁨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심령을 더 가난하게 만들며 더 어린아리처럼 만들며 더 겸비한 처신으로 인도하는 경향을 가진다(478-9).      
 
  우리는 겸손에 대한 에드워즈의 논의를 진지하게 따라왔다면 자신에게 적용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성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나쁜 신호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아주 엄격히 자신을 검토해보라. 그러한 점검후 나보다 더 나쁜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결론이 나왔다면 다시 점검해 보라. 당신이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스스로를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자신의 겸손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만일 다시 내 자신의 겸손을 높이 평가하지 않아, 나는 마귀만큼이나 교만해라는 결론이 나온다면 다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스스로를 겸손하다고 생각지 않는지 검토해 보라. 성도들이 스스로를 겸손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에드워즈가 얼마나 철저히 경계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또 자기가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을 얼마나 악한 것으로 강조하는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