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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5. 다섯 번째 적극적 표지 :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414-439)

5. 다섯 번째 적극적 표지 :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414-439) 
 
- 은혜로운 감정은 신적인 일들에 대한 실재성과 확실성을 합리적이고도 영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해준다(Truly gracious affections are attended with a reasonable and spiritual conviction of the judgment, of the reality and certainty of divine things). 
 
  앞서 살펴 본 넷째 표지가 새로운 감각(new sense)의 지적인 또는 이해의 측면을 강조했다면, 다섯째 표지는 확신의 요소를 강조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확신이 있는 영혼으로부터 거룩한 신앙감정이 우러나온다. 그는 은혜 받은 사람들은 모두 복음의 진리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확신이 있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들은 복음에 있는 위대한 진리를 견고하고, 온전하고, 철저하고, 효과적으로 확신한다”(414).1) 이러한 사람에게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나 논란의 여지가 사라진다. 그것이 단지 여러 견해들 가운데 하나, 혹은 그럴 수도 있는 일 정도의 차원을 넘는다. 그들은 더 이상 두 견해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는다. 복음의 위대한 교리들이 더 이상 의심스러운 일들이나 견해가 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지만 논란의 소지가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참으로 은혜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이나, 그가 자신에 대해 계시한 위대한 일들이나, 하나님, 내세에 대한 성경의 계시들이 거짓이라는 쪽보다는 진실이라는 쪽이 우세한 견해이므로 거기에 동의한다는 차원을 넘는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에 대해 눈이 열려 그것이 정말 그러하다는 것을 본다. 이 복음의 진리가 전 생애 동안 그들의 감정을 통치하고 지배한다.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은 복음의 진리성을 확신하고 성경의 증거를 사실로 믿을 때 생긴다. 에드워즈는 믿음과 확신을 거의 구분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2) 즉 참된 믿음이 있는 자 속에는 확신이 있다. 
 
1. 이성적이면서 영적인 확신(reasonable and spiritual conviction)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신앙 감정들이 진정 기독교의 진리를 강하에 확신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할지라도 두 가지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그것이 이성적 확신(reasonable persuasion or conviction)에 근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단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참된 증거에 기초한 확신이며, 확신할만한 좋은 이유나 정당한 근거를 기초한 확신이다(418).3) 
 
  (2) 그것은 영적 믿음 또는 확신(spiritual conviction)이어야 한다. 자연인들도 가끔 기독교 진리에 대해 일종의 동의를 표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제시되는 합리적 논증이나 증거들에 근거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가룟 유다는 그가 보고 들은 것들로 인해 예수가 메시야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복음의 일들에 대한 영적 신념내지 확신이 있어야 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러한 영적 확신은 중생자들 혹은 영적인 사람들 즉 자기들 속에 생명의 원리(a vital principle)로 내주하시는 성령을 가진 자들에게 고유한 것이다. 즉 복음의 사실성에 대한 확신은 이해력에 대한 성령의 조명으로부터 온다고 그는 믿는다. 이 점에서 그는 성령의 조명에 대한 칼빈의 견해와 전적으로 일치한다(Inst.III.ii.).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제안되고 전시된 일들의 사실성과 신성에 대한 구원 얻는 믿음은 그러한 일들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마음을 조명하시는 성령으로부터 온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즉 확신은 영적 시각 혹은 이해를 가짐으로 가능하다.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바라볼 때 생긴다.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에 나타난 것들의 비길 데 없는 아름다움을 보거나 감지하게 된 사람은 그 신성을 확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신적 영광과 신적인 일들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그것들의 신성의 실재적 증거이며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고후4:3-6,3:18).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에 있는 비교할 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느끼게 되면 두 가지 방식으로 복음에 드러난 신성을 우리가 확신하게 된다. 하나는 직접적으로이고, 다른 하나는 간적적으로이다. 
 
2. 직접적 방법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면(cf. 고후4:3-6,3:18) 복음에 있는 내용이 거룩하다는 확신이 직접 마음에 생긴다. 왜냐하면 이 영광 자체가 복음의 신성함을 직접적이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거하기 때문이다.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복음의 신성을 직접적으로 확신하고, 그 확신에 기초하여 판단하는 사람은 이성적으로도 확신하게 된다. 그의 믿음과 확신은 전적으로 이성에 합치한다. 왜냐하면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복음이 거룩하다는 참된 증거이며,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이 다른 모든 존재들과 구별되고 그것들 위에 높이 들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그의 신성한 아름다움에 의해서다. 그 아름다움은 모든 다른 아름다움들과 무한한 차이가 있다. 그 속에는 하나님 같고, 숭고하며, 영광스러운 탁월성이 있어 인간적인 것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 때문에 그것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그 신성을 확신하고 만족하게 된다. 마음의 눈이 열려 신적인 것들의 거룩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보게 되면, 자연인에게는 그처럼 이상해 보이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많은 교리들이 진실임을 즉각 알게 된다. 즉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어던 길고 연속적인 추론의 과정이 없이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논증은 한 번으로 충분하며, 그 증거는 직접적이다. 사람의 지성은 단지 한 걸음만 내딛어도 복음의 진리에 다다른다. 그것은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에드워즈는 보통 인간의 심리 상태를 현실적으로 이해했다. 그는 복음에 대한 역사적 증거만 가지고 복음의 교리들을 확신하기에는 미흡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외적 증거들도 아주 귀중함을 그는 인정했다. 그것은 불신자들을 각성시켜 심각한 사고를 하게 하고, 참된 신자의 신앙을 굳혀준다. 그리고 나아가 어떤 면에서는 구원 얻는 신앙의 산출에 기여할 수도 있다(yea, they may be in some respects subservient to the begetting of a saving faith in men).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무수한 의심이 남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박식한 사람들이 복음의 진실성에 대해 들려주는 모든 말을 들은 후에라도 어떤 커다란 시험을 만나면 이게 진실임을 내가 어떻게 알수 있나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4) 그러므로 모든 소유를 팔고, 모든 것을 겁 없이 버리는 모험을 무릅쓰며, 가장 지독하고 심한 고문까지 견디며, 세상을 초개처럼 여기고,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에게 소중한 전부를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으려면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증거 이상의 다른 증거가 있어야 한다. 단지 그럴 듯 하다는 정도나 그럴 수도 있다는 개연성의 증거를 넘어 이 언약과 약속들이 분명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모종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증거, 즉 내적 증거(internal evidence)이다.       
 
  에드워즈의 내적 증거는 개신교가 전통적으로 성경의 특성으로 주장하는 성경의 자증성이라는 입장과 일치한다. 이 내적 증거가 있어야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는 것이다. 모든 참된 구원얻는 믿음, 혹은 영적 확신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내적 증거가 다소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에드워즈의 지론이다. 복음의 신적 영광을 보는 영적 시각이라는 것이 있다. 영적 시각이 있는 사람은 성경 계시 안에 있는 내적 증거를 본다. 하나님의 복음은 증거를 구걸하러 다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자체 안에 최고의, 그리고 가장 적합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433). 양낙흥 교수는 오늘날 성경과 복음에 대한 자유주의적 견해를 가진 신학자들에 대항하여 에드워즈의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복음의 진실성과 사실성을 확신하는 것은 말만 가지고 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와 같이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과 신적 사물들의 아름다움을 보아야 한다. 바울의 표현을 빌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 정통적 고백주의자들의 문제는 머리로는 정통 신학을 고백하나 마음과 체험에 그것이 부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독단적 주장으로 끝나 버리고 아무 호소력이 없다. 감정도 의지도 행함도 따르지 않는 정통주의는 경건주의와 합리주의 반발을 받을 수 밖에 없고, 소수의 세력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3. 간접적 방법 
 
  다음으로 에드워즈는 신적 영광을 보는 시각이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시켜 주는 간접적 방식을 설명한다. 첫째는 신적 영광에 대한 시각은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에 대립하는 마음의 선입견을 제거하고, 증거되는 마음이 녹아지게 함으로써 그런 확신을 심어준다. 둘째는 신적인 영광에 대한 시각은 이성의 장애물을 제거해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성을 도와 사변적인 개념들을 더 생생하게 만들어준다(434). 
 
  그리고 에드워즈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영적인 믿음이 아닌데 사람들이 가끔 그것으로 착각하는 몇 가지 경우들을 소개한다. (1) 성령의 일반적 조명 아래에서도 기독교의 위대한 일들이 진리임을 어느 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도 일반적인 깨달음과 깨우침으로도 신앙에 속한 일들의 본질을 더 생생하고 감각적으로 이해할수도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광대하심, 능력, 위엄 같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완전성(natural perfections)을 볼 수 있어 그러한 하나님을 거스르고 범죄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이며 그러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두려운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확신이 아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신앙적인 일들에 속한 도덕적이고 거룩하고 탁월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일들이 진리라는 것을영적으로 확신할 수 없다. 
 
  (2) 에드워즈는 환상을 보거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신비적 체험에 대해서는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 상상력에 가해진 비상한 인상들을 체험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일들의 진실성에 대한 강한 확신을 종종 가진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대개 하나님의 말씀에서 떨어지고 복음을 거부하며 불신과 무신론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요, 아주 좋지 못한 것들이라고 에드워즈는 단정한다. 
 
  (3) 성령의 일반적 조명 아래에서 사람들은 흔히 종교로부터 얻게 되는 여러 자연적 이익에 매력을 느끼고 기독교를 믿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의 교리들 속에 있는 도덕적 탁월성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에 대한 감각은 전혀 없어 그것들의 진실성에 대한 영적 확신을 결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은, 에드워즈에 의하면, 구원얻게 하는 확신이 아니다. 예를 들면 예수 믿는 나라들은 다 복을 받아 선진국으로 잘 살더라 하는 생각이나, 예수 믿는 가정이 다 복을 받더라 하는 생각에서 기독교를 믿는 것 등이 이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