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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기타미분류

Wilhelmus a Brakel의 The Christian's Reasonable Service(4 Vols)

조엘비키 목사님께서 무인도에 갇힌다면 성경 다음으로 가져갈 한권의 책이라고 했던 Wilhelmus a Brakel의 The Christian's Reasonable Service(4 Vols) 이 몇년전 영어로 번역되어서 은근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얼마전 이 책의 pdf 파일을 번역자이신 Bart Elshout 께서 공개하셨다. 
http://www.abrakel.com/p/christians-reasonable-service.html
특징은 매우 따뜻하고, 실질적이며, 영성적이라는 것이다.
브라켈은 17세기 화란(네덜란드)의 2차 개혁 시대의 사람이다.
4권의 하드커버 책은 http://www.heritagebooks.org/products/The-Christian's-Reasonable-Service.html 에서 살 수 있다.
바빙크의 하나님의 큰일(개혁교의학개요),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더불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책!!
다음은 조엘 비키 목사님(교수님)의 평 중에서:
The uniqueness of a Brakel's work lies in the fact that it is more than a systematic theology ... a Brakel's intent in writing is inescapabale. He intensely wishes that the truths expounded may become an experiential reality in the hearts of those who read. In a masterful way he establishes the crucial relationship between objective truth and the subjective experience of that truth.
이 부르심은 성경의 도덕법으로 일어나는 것 역시 아니다. 도덕법은 반드시 이중의 의미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의 요구들, 행위 언약의 완전한 조건이 계시된다,로 보아지거나, 그 목적, 교회에 주어진 삶의 기준과 참된 거룩함의 기준으로써, 보아져야 한다. 첫번째 의미에서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확신하도록 하기 위해서 설교된다(롬 3:20),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 절망하도록 인도한다. 여기서 율법의 역할은 끝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가 복음을 방편으로 하여서 설교된다면 율법에 의해서는 거절당한 사람은 복음으로 인해 마음이 매혹되어 이끌린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설교되는 곳에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학을 한다(갈 3:24). 하지만, 율법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쳐 주지 않으며 그분께로 부르지도 않는다. 따라서 도덕법은 부르심에 있어서 작용하는 요소는 아니다. 이것은 복음에 속해있는 의식법에 대해서는 다르다.
어찌하였든, 우리가 부르심을 받는 참된 방편은 복음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살후 2:14). "복음"이란 말은 좋은 물결(소식)인데 그것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쌍하고 가난한 자여, 너는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다. 너는 영원한 멸망으로 향하는 길 위를 걷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증(법적 대리인)으로 보내셨다; 그분의 고난과 죽음에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완전한 만족이 있고 따라서 죄책과 형벌로 부터의 사면이 있다. 율법에 대한 그분의 순종에 완전한 거룩이 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로 가는 모든 사람들을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너에게 그분의모든 공로들을 제시하시며, 따라서 영생을 제시하신다."...
Wilhelmus a Brakel, Our Reasonable Service 2권 192페이지 중에서:
율법과 복음 사이의 차이
율법과 복음은 종종 서로 대조구별되는 위치에 놓여진다. 만약 그러한 대조구별이 의식법에 대한 것이라면, 그것의 목적은 의식들로 그분의 오심이 예표되었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를 주목하게 하는 것이다. 성취의 복음은 반면에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선포한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조구별도 없다. 왜냐하면 복음은 의식들 안에서 이해되었었고 그것들에 의해 선포되었었다.
하지만, 도덕법과 복음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율법은 무엇보다 먼저 주권적이시고, 위엄있으시며, 오직 유일하신 율법의 제정자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모든 인류에게 적용된다. 반면에 복음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오래참으시고, 선하심과 진리에 풍성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을 계시하며(출 34:6)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고 오직 일부에게만 해당된다. 두번째로, 율법은 본성적으로 일부분 알 수 있다(롬 2:15), 하지만 복음은 오직 계시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엡 3:5). 세번째로, 율법은 행위 언약의 조건인데 율법을 완전히 지켰을 때에 구원을 약속하며, 어떠한 죄용서도 알지 못한다(롬 10:8; 마 19:17). 반면에 복음은 은혜 언약의 선포인데,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용서와 구원을 약속한다(롬 10:8-9). 네번째로, 율법은 죄인들 안에서 죄에 대한 지식을 낳고(롬 3:20) 진노로 그를 대한다(롬 4:15), 그리고 따라서 공포와 떨림을 가져다 준다(사 33:14). 반면에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의 값진 집행이다(롬 1:16).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시는 방편이다.
Wilhelmus a Brakel, Our Reasonable Service 2권 193쪽에서
믿음과 확신
Cornelis Pronk 목사님의 돌트 신조 설교 중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께서 너를 대신하여(위하여) 죽으셨다"라고 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대신, "네가 구원받도록 그리스도를 믿어라"라는 식으로 말해야 한다고 말하신다. 위해서(for)라는 단어가 말하는 바가 그리스도께서 대리인으로서 그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기 때문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때 그런 용어를 쓰면 안되고, 믿는 사람에게는 그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는 이야기이다.
비슷한 부분이 Brakel의 글에도 있다.
복음설교(목회)아래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제의(offer)되기에,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올 수 있고, 어떤 이도 그가 부르심을 받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 뒤에 남겨질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은 칭의, 성화, 견인, 영화를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그분을 받아들여야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서 죽으셨으며 따라서 그의 구원자이신 것을 믿어야할 의무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이것이 믿음의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확신이 아니다. 확신은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영혼이-그의 비참한 상황에 놀라서 화목과 평화 거룩과 영광에 대한 갈망으로- 자기 자신으로 부터 그리스도께로 옮아가는 것이다. 믿음은 그분 자신을 제의(offer)하시고 모든 죄인을 그분에게로 부르시고 초청하시는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 그분께로 오는 사람은 결코 내어 쫒지 않으실것이라는 약속, 이 그 주된 특성이다. 그것의 마지막 특성은 전능하시고, 참되시고, 신실하신 구주로써 그분께 영혼을 의탁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한 행위들의 생생한 훈련 가운에 있고 진실로 그 안에서 이러하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대신하여) 죽으셨다는 확신이 따라온다. 복음 사역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도록 의무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믿고 그것을 확신하도록 의무를 받지는 않는다.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과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은 거짓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오직 진리 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
Wilhelmus a Brakel, Our Reasonable Service, Book 2, pp204-205
브라켈의 이 책을 읽으면서 참 재미있는 부분은, 전체적인 내용이 신앙고백서들을 쭈욱 따라가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특히 이 구원론 앞부분은 돌트신조를 떠올리게 한다. 칼빈의 에베소서 설교 앞부분이 돌트신조의 해설설교 같은 느낌을 주는 것과도 비슷하다. 바빙크의 Our Reasonable Faith(하나님의 큰일, 개혁교의학개요)를 읽다가도 바빙크가 신앙고백서를 풀어서 설명하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때때로 신앙고백서의 문구를 그대로 사용하는 부분들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고백서를 잘 익히는 것은 매우 유익함이 드러난다고 본다.
N.B. 본인이 offer을 제의라는 조금 어색한 용어를 써서 번역한 이유는 복음의 부르심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진실한 제안, 제의이기 때문이다. 제공이라고 번역하지 않는 이유는, 제공이란 한글말은 실제적으로 그 대상이 주어진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복음의 부르심은 진실하시다. 즉 택자이든 비택자이든 복음이 전해질때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부르신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다. 하지만 부르심을 받는 모든 이가 다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화답하여 실제적인 구원의 유익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오직 택자만이 성령님을 받아서 그분의 중생케하시는 권능의 사역으로 전 존재가 거듭나서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적 부르심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와 완악함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스스로 죄와 비참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 가운데 머물러 있는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두가지 반응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모두가 환히 드러나서 하나님께서 찬송을 받으신다.
중생하는 영혼의 과정,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31장 중생.
택자의 영혼의 활동
(4) 더나아가 그들은(택자) 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을 분더러 그분의 호의안에서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는 명맥하게 깨닫는다. 그들은 그들의 죄에 합당한 현세에서와 영원에서의 형벌을 받음으로써 그분의 공의가 완벽하게 만족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또한 완전한 거룩이 구원의 구성요소라는 것을 또한 깨닫는다. 그들은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들 편에서는 어떠한 소망도 없음을 그들 마음가운데 확신하게 된다. 이것은 새로운 경황(당황)을 그들에게 불러일으킨다.
(5) 그러함으로 그들은 보증인(Surety)의 필요를 보게되며 또한 그리스도의 본성, 직분, 낮아지심, 높아지심 안에서 그분(이전에는 단지 이름으로만 그들에게 알려졌던)에 대해서 보다 주의 깊게 주목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고난의 죽음으로 사람(단지 죄 뿐 아무것도 아닌)을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진실에 동의하며 그분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속과 영원한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들은 이 주 예수님을 그들의 구원자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기쁨이 극도로 크다는 것을 고려한다. 오, 그분께서 그들에게 그러한 구원자가 되시려는 마음만 있으시다면! 한편 그들은 그 반대상황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만약 예수님께서 그들이 그분을 구원자로 소유하려는 그 의지만큼 그들을 기꺼이 받아주시려 하신다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6) 이따금 그들은 어떠한 소망을 받게 되고, 때때로 설교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기도나 대화 경건서적을 읽을 때나 어떠한 상황이든 어떠한 북돋음을 받기 시작한다. 이러한 소망으로 그들은 활동적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그릇된 목적으로 그런 일을 한다. 그 잘못된 목적이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다짐들을 한다: 그들은 죄에 대해서 주의깊게 경계할 것이며, 그들은 끈기있게 기도할 것이고...등등.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을 받아주시도록 그분을 감동시키려는 소망을 가진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전적인 무능력을 그들에게 드러내주신다. 그리고 어느때보다도 많이 율법의 영적인 면(이전에는 그들이 몰랐던)을 보여주시며 그들 자신에게는 그러한 영적인 면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주신다. 어느때 보다도 많이 그들은 모든 영적인 일에서 그들 자신의 어두움을 인식하게 된다. 죄의 혐오스러움과, 그들 자신의 견딜수 없는 매스꺼움과, 가증스러움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전적으로 무능력하며 견딜만한 존재가 아님을 그들이 보게되어 그리하여 벌레와 같이 무가치하게되며 탕자 아들과 같은 상태가 되기까지 그들의 길을 걷도록 내버려 두신다. 그러함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에 대해서는 모든 용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7) 그러한 나락으로 인도된 이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개입만을 오직 바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모든 선한 생각, 그리스도를 향한 모든 발걸음, 하늘로 눈을 들어 올려 은혜를 구하는 모든 때, 그들이 흘리는 한방울의 눈물, 한숨의 탄식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라는 것을 그들이 인정하게된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이 이것들에 대해서 매우 조금만 인식할 뿐이라는 사실이 그들을 슬프게 한다.
(8) 더나아가, 주 예수께서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나에게로 오라" 라는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을 부르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들은 점차 알고 믿게 된다. 그는 그분께로 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내어쫒지 않으시리라는 약속과 함께 주 예수님으로 부터 부르심을 자신이 개인적으로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소망을 다시금 새롭게 하며 그것의 초점을 보다 순수하게 한다. 그들은 그분께로 돌아서며,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을 기대하며, 그분을 갈망한다.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은혜이며 그들은 무능하기 때문에 그들은 잠잠히 그분만을 바라며 기다린다. 어떤때는 소망으로 어떤때는 분투와 슬픔으로 그들이 보다 자유함을 얻고, 믿음으로 그분을 받고, 어떠한 보류도 없이 그분께 완전히 굴복하고, 그러함으로 그분을 그들의 완전한 의탁으로 만들게 될 때 까지 그들은 그러한다. 그러함으로 그들이 믿음으로 받은 그들의 보증(Surety, 법적 대리인)의 거룩함과 만족(죄에 대한 보속)을 가지고 그들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간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터 부활하신 것을 근거로 해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저의 보증이 아니신가요? 그분께서 저의 죄를 값지 않으셨나요? 저는 이제 당신과 화목하게 되지 않았나요? 그리하여 지금 당신께서 저를 은혜안에서 받으시지 않으시려나요?"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러함으로 하늘로 부터 온 목소리인 그분의 말씀안에서 그분의 약속으로 돌아서서 그들은 일반적인 복음의 모든 약속들을 껴안거나 성경의 특정한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강력하게 적용된다. 그러함으로 그들은 그 약속들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듣고 그 약속이 그들에게 맺어졌다는 것을 그 마음에 믿음으로 적용한다. 여기에서 언급된 영혼의 틀을 그들 안에서 찾기에 그러하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하게 됨으로, 그들은 그들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의 양심에서 죽은 행위들이 씻겨나간다. 그들은 이러한 것을 어느정도의 명확함이나 또는 어두움 가운데서, 크거나 또는 작은 분투 가운데서, 그리고 크거나 또는 작은 평화와 위로가운데서 경험한다. 그들은 이것들이 결코 환상도 아니고 자기속임의 결과도 아니며, 이모든 것이 정말로 진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며 그들의 영혼의 틀은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한다. 이 모든 것들이 때때로 성령님의 인치시는 권능이 그들의 영혼에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과 함께 따라오기도 한다. 이것으로 부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흘러나오며 이 사랑은 그 결과로 참된 거룩, 죄를 피하려는 고통스러운 분투, 세상과 그들의 정욕과 그들의 의지를 부인하는것, 모든 것 가운데 화목하게 된 아버지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각양의 덕(율법)을 주의깊게 지키려는 마음을 낳는다.
Wilhelmus a Brakel, Our Reasonable Service, Book II, 253-255
회심하지 않은 자를 향한 권고 중에서..
질문: 구원 받기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
답: 진심입니까? 진정으로 그리고 열렬함으로 물어보신 것입니까? 이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기꺼이 버리시겠습니까? 당신이 그토록 즐겁고, 좋은 의도이고, 유익이 되고, 기쁨을 준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죄로 부터 떠나려는 기꺼운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모든 경건함 가운데 그분을 섬기려는 마음을 무엇보다 당신에게 바람직한 것입니까? 그분과 사귐을 나누고 싶으십니까? 그것을 무엇보다도 갈망합니까? 만약 당신이 "예, 나는 참으로 진심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라고 답합니다. 그 답으로 당신이 정말로 구원 받을 것을 잘 안다고 답한다면 믿음과 회개로 당신이 구원받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비와 특권이라는 것을 주목하십시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그런 방법으로 구원하실 아무런 의무가 없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심 만으로 그분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당신에게 구원을 약속하시고 부여하십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십시요!
질문: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내 능력 안에 있습니까?
답 (1) 그것은 당신의 의무임을 확신하세요. 그것은 당신이 승인하는 것입니다.
(2) 한번 더 시도하세요, 시작하자 마자 당신은 먼저 당신이 눈먼 자임을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스도로 가는 길, 중생한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알지 못할 뿐더러 참된 거룩의 본질적 본성에 대해서도 무지하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어떻게 응답하겠습니까? 더욱이, 당신은 시작하려 할때, 당신 자신이 전혀 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그 하려하지 않는 마음은 무관심으로 향하는 첫 발걸음입니다. 더욱이 당신 본성의 사악함은 너무나 크고, 죄는 너무나 강하며, 그 일은 너무나 어렵기에 당신은 정말로 무능할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 자신에 관한 한 당신의 비참과 무능력 가운데서 당신은 가라앉을 것이며 아무런 소망도 없고 절망가운데 있습니다.
질문: 제게 주실 조언이 없나요? 저에겐 정말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까?
답: 당신 안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희망이 있습니다. 당신이 복음 사역 아래에 살고 있기때문에, 비록 복음 사역은 단지 하나님께서 영혼을 회심시키시는 방편일 뿐이지만, 당신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방편 아래에 살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죄에 대한 자각을 주시고 회개와 구원에 대한 갈망을 주신것에 대해서 기뻐하십시요. 설교를 듣고, 요리문답 수업에 참석함으로 이 방편을 이용하는 것에 열심을 내십시요.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그리고 주의깊게 읽으십시요. 아니며는 다른 분에게 읽어달라고 하십시요. 경건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모임에 끼워달라고 부탁하십시요. 기도하려는 마음 경건하고자 하는 마음에 순종하세요.
질문: 내가 이 모든 것을 행하면 구원받을 수 있나요?
답: 당신의 노력이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그분으로 하여금 당신에게 회개를 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을 제외시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제외시키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당신을 죄의 자각 아래로 이끌어 주셨기에 당신은 희망을 가질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마지막으로 행하시기를 기다리세요. 그리고 그것에 응답하세요.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이 방편들을 계속해서 사용하시고 게으르지 마시고 욕망에 다시금 이끌릴 때 약해지지 마세요
회심한 자들에게 주는 말
이제 나는 참으로 회심한 사람들에게 말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 챕터의 앞부분에서 분별력으로 중생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중생을 일으키시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 안 당신은 따라서 전지하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당신 자신을 비교해보시고, 그리고 당신이 이 생명의 참된 수여자임을 생각해보세요(나는 여기서 그 부여받은 생명의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안에서 판단하시고 주목하시며 그것을 부인하지 마세요. 당신이 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마치 당신이 그것을 이루어 냈고 그리하여 당신 자신의 일을 낮추듯이 겸손한 척하며 그것을 과소평가하시 마세요.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이 해낸 일이 아니라 오히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도 않는 은혜에 대해서 자랑하는 것보다 우리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하는 것이 훨씬 큰 죄입니다. 따라서 "나는 중생이 그러함을 확신하였다. 나는 그것에 참여자이다. 나는 내 안에서 그것을 보며 내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증거한다. 따라서 나는 중생자라는 결론이 뒤따른다"라고 말하며 결론을 내리세요.
그러한 결론 뿐 아니라 에디오피아 사람, 감옥수, 리디아와 같이 이것 안에서 기뻐하시고 그리하여 그것으로 부터 무엇보다 확실한 위로를 얻도록 하세요.
(1) 중생이 뿜어져 나오는 그 샘물인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선택을 향하여 올라가세요.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렘 31:3);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롬 8:30); 따라서 중생하였으므로 당신은 하나님으로 부터 영원히 사랑받고 선택받았습니다.
(2) 지금 이 시점에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하심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당신을 낳으셨기 때문입니다(약 1:18). 당신을 하나님으로 부터 났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 1:12-13). 하나님께서는 그러함으로 당신의 아버지이시며 당신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다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로서 당신은 모든 것을 그분께 청할 수 있으며 그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3) 당신의 영적 상태는 확실하며 불변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따라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그] 착한 일이 철회될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4) 중생으로 영원한 복락을 당신의 확실한 유업으로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이 기대와 소망 속에서 살고 기뻐하시기를 분투하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만약 당신이 중생하였다면, 죽은 자들, 비 회심자들, 로 부터 완전히 떠나십시오. 왜냐하면 그들은 썩어가는 시체처럼 나쁘기 때문입니다. 그대신 당신 자신을 산자들과 연합시키십시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시 119:63). 당신의 즐거움이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시 16:3)에게 있게 하십시오. 당신 자신을 교회로 부터 고립시키거나 분리시키지 마십시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빛은 희미해질 것이고 당신의 발걸음은 중생의 본성과 반대로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다만 중생했고 영생의 참여자가 된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자라가고 증가해 나가기를 분투하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이 생명을 소유한 모든 사람들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살아있는 영으로(처럼) 사십시오; 당신의 행위로 모든 덕을 행하며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십시오. 그리하여 산자와 죽은 자 사이의 차이가 명백히 드러나도록 하십시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3). 아멘.
Wilhelmus a Brakel, Our Reasonable Service, Book II, 259-260
믿음의 본질이 아닌 것들(1)
첫번째로, 믿음은 사랑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교황주의자들과 알미니안들은 사랑이 믿음을 형성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사랑은 믿음의 본질이 아닌데 그 이유는 1) 사랑과 믿음은 두개의 다른 덕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한 덕이 다른 덕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2) 사랑은 믿음의 열매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따라서 믿음은 그 효력을 사랑으로 부터 끌어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믿음은 사랑과 사랑을 통한 모든 덕성들의 발휘를 향하여 효과를 낸다. (energo)[역사하다]라는 단어의 thrust를 생각하라(롬 7:5, 골 1:29). 어떤 것의 결과는 그것의 본질이 될 수 없다. 
두번째로, 믿음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거나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역시 교황주의자들과 알미니안의 주장이다. 믿음은 행위와 명시적으로 잘 구별되기 때문이다.(고전 13:13). "경계(commandment)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딤전 1:5). 그렇다, 칭의에 있어서 행위와 믿음은 서로 대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약 2:18)
참된 믿음은 선행의 원천이다. 선행은 믿음의 열매이며 그 특성이다. 따라서 선행이 없으면 참된 믿음 역시 없다는 것 또한 명백하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숨이 멎을 때 그 몸이 죽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와 비슷하게 믿음이 그 자신을 드러내지 못할 때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걸, 다시 말하면 참된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과 계명을 지키는 것이 믿음의 형태나 본질은 아니란 것을 우리가 주장하지만 이는 결코 믿음이 사랑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신자가 되었을 때, 그는 이해할 수 있는 조명받은 눈을 부여 받아 중보자와 언약의 혜택들을 어느 정도 알게 될 뿐더러 또한 그것에 매혹된다. 그는 구원, 죄 사함, 그리고 그를 성화시키는 성령께서 계시다는 것에 기뻐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계시며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에 기뻐한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다(살후 2:10).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고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사랑이 불붙으며 모든 기꺼운 마음으로 그는 순종하기를 갈망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Wilhelmus a Brakel, Our Reasonable Service,
Book II, 275-276
구원얻는 믿음에 대한 종합적 서술
첫번째로, 믿기에 
앞서서,그의 죄악됨과 그의 죄책 모두에 대한 그의 상태에 대하여 불만족과 경황함 그리고 그 자신안에 있는 비참한 상태에 대한 확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통하여 생겨난다. 이것은 다소간의 감정을 율법적이거나 복음적인 방법으로 낳는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자신의 구원은 그와 다시 연합하여 그분의 호의를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그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완전한 
의로움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는 그 자신 안에서나 다른 피조물에게서는 어떠한 해답도 찾지 않는다. 그는 보증(대리인)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을 듣고 그분의 본성들, 직무들, 낮아지심, 높아지심 안에서 그분에 대해서 알게 되며 자신의 보증(대리인)으로서 그분을 소유하기를 
갈망한다.
두번째로, 그는 일반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제시(offer)를 알게되고 또한 특별한 의미로서도 알게 되는데, 후자는 그가 듣는 복음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그분이 
제시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에게도 제시되셨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예외되지 않는데, 그에게로 오는 자는 어느 누구도 내어 쫒기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덧붙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틀림없는 진리라는 믿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구원의 길이 계획하셨다는 것과 그 
길이 그에게도 알려졌다는 것에 기뻐한다. 그는 그의 온 마음으로 이 길(방법)을 동의하며 그 길(방법)으로 구원받기를 바라고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받기를 원치 않는다. 다른 길은 없다. 베드로가 그러했듯이 그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69).
세번째로, 그는 
굶주리고 목마르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은택에 참여하고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화평과 사랑, 겸손, 순종안에서 
그분과 함께 걷기를 매우 갈망하게 된다. 그의 바램은 이와 같다: 오, 그리스도를 내가 소유하는 것, 하나님과의 화목을 내가 소유하는 것, 내가 
성령과 생명을 가지는 것!.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그에게 보배이다(벧전 2:7). 그는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라는 약속에 큰 힘을 얻는다.
네번째로, 그는 세리가 
그러하였듯이 (눅 18:13)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며 그분께로 피하여 안위을 얻는다. 어떤 때 그는 감히 그러하지 못하고, 어둠 가운데 있거나 
자신의 죄들을 바라봄에 낙담하지만,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잠잠히 그분께로 돌아선다. 어떤 때는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때도 있고, 다른 때는 그는 "나는 그분을 소유하기를 너무나 원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이 그의 상태이고 그는 어디를 향하여 
돌아서야 할지 모른다. 그는 갈망하고, 그는 기다리고, 그는 빛, 은혜, 성령, 힘을 갈망하며, 종종 그의 눈에 눈물과 함께 잠잠히 그렇게 
한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미7:7); 그래서 그는 주님을 
기다린다 (합 2:3); "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사 45:22);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시 36:7).
다섯번째로, 그러함으로 
그가 씨름하며, 그는 그분을 믿음으로 받는 자유를 얻는다. 그는 자신이 황폐하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께서 적합하시며, 완전히 충분하시며, 
그러하실 의지가 있으시고, 참되시며, 자신을 우리에게 주려고 제안(offer)하시며, 그분께로 오는 어느 누구도 내어 쫓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제안(offer)과 초청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께 자신의 손과 마음-그렇다 모든 
것을 드린다. 그는 때때로 그가 그분을 소유하려는 의지만큼 그분께서 자신을 받아주시려는 의지가 있으신지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구원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서 "예, 예수님께서는 그러하실 의지가 있으십니다, 예, 내가 그러한 것보다 더 그러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주도권을 가지시고, 자신을 보여 주시고, 나를 초청하셨으면 그분 자신께서 나를 이끄십니다." 따라서 씨름하는 동안 그는 자신을 
굴복시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여호와께 귀순하여"(역하 30:8).
여섯번째로, 그는 그의 
몸과 영혼과 구원을 그리스도께 의탁한다. 그는 그분을 의지하며,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낳으시도록 허락하며, 그분께 기대고 그분안에서 쉼을 누린다. 
그리고 그가 아직 아무런 평안이나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두려움으로 이리 저리로 흔들리고, 분투에 직면할 때 그는 자신을 그분에게로 
데려간다. 그는 그분께 의지하며 그분께 둔 믿음을(그분에 대한 믿음을) 발휘하며, 자신을 그분께 의탁한다.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사 10:20); 
"[그들 자신을]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사 48:2);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찌어다"(사 50:10);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 
2:12)
일곱번째로, 이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구원자라는 확신을 가져다 준다. 그가 믿음을 발휘하고 기도하고 씨름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어떤 때는 그의 영혼이 의식하는 믿음의 행위들을 바라봄으로 그러하거나, 예수님의 충만함을 바라봄으로 그러하거나, 다시 약속들과 그들의 
확실함을 바라봄으로 그러하다. 이것을 바탕으로 그는 예수님은 내게 속하였으며 나는 그분에게 속하였다(아 2:16)고 결론 내립니다. 때로 
성령께서 매우 강력하게 이것들 위에 인치십니다(엡 4:30). 이것은 그 결과로 고요함과 화평, 기쁨, 그리고 즐거움을 낳는데 우리는 그것들을 
다음번에 믿음의 열매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논할 것입니다. 하지만, 확신과 평안등과 같은 것들의 열매들은 영혼이 늘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종종 이런 것들을 방해받는데 어떤 때는 그의 믿음이 약해서 그렇고, 어떤 때는 분투함 때문입니다.
여덟번째로, 이것은 
거룩함을 낳습니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행 15:9);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 야고보서 
2:17절도 살펴 보십시요.
우리는 
이러한 행동들을 순서에 따라 기술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믿음을 발휘할 때 이 행동들이 항상 이런 방법을 따르며 식별가능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서로 섞여 있으며 어떤 때는 영혼이 하나의 면에서, 다른 때는 다른 면에서 더 강하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시에 
모든 것을 기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명확한 방법으로 명확하게 이해되도록 하기 위해서 각각을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Wilhelmus a Brakel, Our Reasonable Service,
Book II, 286-288
믿음의 
목표
우리는 
이제 믿음의 목표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믿음을 발휘할 때에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는 그분의 모든 완전하심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고후 
3:18);"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믿음을 발휘할 때 사람이 높이게 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공의, 그것은 너무나 순수하여 어떠한 
죄도 벌하지 않은 채로 남겨질 수 없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롬 3:26);
(2) 사람을 향한 그분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 그분의 은혜,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4) 그분의 지혜, 그것으로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고 동시에 사람이 구원받는 그러한 방법을 
계획하심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고전 1:23-24), "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엡 3:10)
(5) 그분의 전능하심, 
"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 4:20-21);
(6) 그분의 진리(참되심), 
"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요 3:33). 요한일서 5:9-11도 보라[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10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11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7) 그분의 신실하심, 
"...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롬 4:16);
(8) 그분의 모든 충만, "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 1:19); "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6; 히 
7:25비교[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신자들로 
부터 영광받으신다. 따라서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려드리려는 모든 이들은 그분의 아들을 믿도록 하자.
사람의 편에서 본다면, 믿음의 목표는 의롭다하심, 
화평, 양자됨, 성화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믿음의 열매를 논할 때 다룰 것이다)와 결국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9). 이러한 것들을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발휘하자.
Wilhelmus a Brakel, Our Reasonable Service,
Book II, 290-291
믿음의 효과들과 열매들
참되고 구원하는 믿음의 효과들과 열매들은 매우 영광스러우며 바람직하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칭의, 이것은 죄책과 형벌과 관련되며 영생을 얻을 권리와도 관련되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1-22,28);
(2) 하나님과 화평함,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3) 하나님께 나아갈 담대함,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4)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그분을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 3:17);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 17:21)
(5) 자녀로 입양됨,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6) 마음의 성결,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행 15:9);
(7) 마귀를 이김,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9);
지금까지 우리는 모든 면에서 믿음을 다루었습니다. 우리가 말한 모든 것으로 부터 우린 믿음에 대한 다음의 정의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의롭다함을 얻고, 성화되고, 영화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자발적으로 [제물로]드리신 것에 의지하고 또한 그 목적으로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의지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를 행하시리라고 하신 그 약속에 의지하는, 그리스도께 대한-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전심을 다한 신뢰이다.
따라서 당신이 누구이든지 간에, 잠시 멈춰서서 내가 당신을 믿도록 설득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다양한 독자와 청자를 다룰 것이며, 나는 그들이 자신들을 알게 하며 그리고는 그리스도께로 그들을 데려가기 위해 애쓸것입니다.
(1)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나, 그리스도, 영적인 삶, 천국이나 지옥에 대하여 아무런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영원에 대하여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러한 인식마저도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므로 죽여버립니다. 그러하므로 영적인 것에 대하여 그들은 마치 이성이 없는 동물과도 같이 삽니다. 만약 그들이 듣는다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며 적나라한 죄들이 꾸짖음을 받을 때나 잘 알려지거나 공통적인 덕성들이 추천될 때만 겨우 이해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나 믿음의 삶과 같은 것들은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지 가운데 멸망합니다. "이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자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자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사 27:11). 당신이 믿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아십시요. 믿음 없이는 당신은 구원 받을 수 없으며 영원히 정죄받을 것입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 10:14). 그러함으로 지금부터 지식을 얻도록 애쓰고 내 권고가 당신을 믿도록 설득하도록 할수 있는 마음을 가지십시요.
(2) 어떤 이들은 같은 무지의 상태에 있다. 비록 그들은 문자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세상의 것들- 부, 명예, 육신의 정욕-에 너무도 붙어 있어서 영적인 일들에 생각을 집중할 수 없다. 만약 그러하더라도 그들은 그것들을 거부하는데 이는 그들이 "나는 그것들을 바라지 않소"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그리고 알면서도 자신들을 그리스도로 부터 돌아세우며 그분을 떠나 자신들의 정욕들로 돌아간다. 그들에게는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의 말씀이 적용될 수 있다. 다음 구절을 반복적으로 묵상하라: "내가 부를찌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찌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잠 1:24, 28-29). 어떤이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매우 잘 압니다.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하여 내 길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다른 길이 없다면 뭐 그렇게 하십시요." 오 사람아, 당신이 하는 이말이 무슨 뜻인지 참되게 안다면 당신은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주님의 공포가 당신을 믿도록 설득하도록 하십시요.
(3) 어떤 이들은 노동이나, 어려움들, 슬픔에 너무나 눌려 있어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남편은 돈을 벌어야 하고 부인은 자녀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들을 묵상할 시간이 없습니다. 때때로 그들이 어떠한 확신가운데 도달한다해도 그들의 일들이 그러한 내적 움직임을 꺼버릴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참 유감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영적인 일들에 참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당신은 분명 시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당신이 이땅의 것들을 영원한 것들보다 더 높이 생각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핑계를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이는 당신이 구원 받을 수 없기에, 반드시 당신 자신을 믿도록 설득당하도록 하여야 허락해야 합니다.
(4) 어떤 이들은 그들이 믿음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기에 이미 신자라고 상상합니다. 그들은 세례받았고 성찬에 참여하며,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를 드리며, 헌금을 하고, 나무랄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죄에 대해서 슬퍼합니다. 하지만 불쌍한 이여, 이것은 (앞에서 말한바대로 명백히) 믿음이 아니며, 이 길을 걷는 당신은 거의 확실히 멸망할 것입니다. 오히려 당신은 "이문제로 상관하지 마세요, 이건 제 문제에요"라고 말할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한다고 지금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함으로 당신 마음을 걍팍하게 하지 마시고 오히려 그길 위에서 당신이 멸망할 것이므로 당신 자신을 믿도록 설득되도록 허락하십시요.
(5) 어떤 이들은 하늘나라로 부터 멀리 있지 않습니다만 그들은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많은 해가 지나도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으며 영원이 때때로 매우 크게 그들의 마음을 채웁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그들 소유하려는 바램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부터는 아무것도 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불신앙으로 자기 자신에 초점을 맞춘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큰 죄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가지려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평가에 대해서 충분히 마음이 깨뜨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실로 그것을 원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죄로 망가뜨립니다. 진짜 이유는 그들에게 주의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게으르며, 나눠진 마음을 가지고 있고, 꾸준하지 못합니다. 오, 주의를 기울여서 당신들이 믿도록 설득되기를 허락하십시요! 그렇게 멸망할 것이기에 그러한 어정쩡한 상태에 계속 남아있지 마십시요.
(6) 어떤이들은 영적인 것들에 대하여 듣고 말하는 것에 익숙하며 따라서 모든 인상은 완전히 잃어버린 바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일들을 다루는 의무를 받은 학자들이 왜 그토록 회심하지 않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그들은 대장장이들이 자신들의 일을 다루듯이 이 일들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당신 자신을 시험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십시요. 이것을 소홀이 넘기지 마시고 당신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당신이 남 앞에서 말하는 그것들이 참으로 당신 안에 있는지, 당신이 참으로 그것들로 무장되어 있는지 당신을 시험하십시요. 다른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면서 당신 자신은 잃어버린바 되지 않도록 당신 자신을 살피도록 각성하십시요.
내가 말한 모든 사람들과 내가 시사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 오십시요; 살인자들, 음란한 자들, 간음자들, 의롭지 않은 자들, 거짓말 장이들, 도둑들, 술주정뱅이들, 죄 가운데 흥청대며, 도박하며, 춤추고, 범죄하며, 스스로를 내어주고, 거짓말하며, 남을 헐뜯고, 위증하는 사람들 모두;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당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 예수께로 오십시요; 그분을 믿으십시요 그리하면 당신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만약 어떤 이들이 내가 길을 너무 넓게 만든다고 나를 반대한다면 나는 그들이 이미 구원 받았거나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그러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도 역시 그리스도에 참예자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고전 6:11[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그리스도안에 그러한 충만함이 있으므로 아무도 낙담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즐은 죄에 지치고, 그들이 전해 행한 가증스러움들에 애통해하며,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갈망하고 거룩한 삶을 갈망하는 자들입니다. 사람이 그러한 틀을 가지지 않고서는 그는 [그리스도께로] 오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8) 세상을 이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9) 사랑,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 5:6);
(10) 모든 선행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8). 
한마디로 믿음은 그것으로 인해 영혼이 사는 것이며 (한시적이나 영적인) 모든 것에 다 적합하며, 사람이 자신의 길을 복되고 기쁘게 걷고자 한다면 늘 믿음을 발휘해야 한다.
두번째로, 그리스도안에는 당신의 모든 필요를 만족하고 당신의 모든 바람을 충족시킬 모든 충만함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 그분안에는 다음과 같은 충만함이 있습니다:
(1) 당신의 모든 죄를 제거하심.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2)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롬 5:10);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히 9:12);
(3)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정죄로 부터 구속하심.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4) 그분 안에는 성경의 충만함이 있음.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5) 빚,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눅 2:32);
(6) 생명,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7) 평강,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 2:14);
(8) 구원의 충만함,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요 10:28),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시 68:20).
(9) 이 모든 것은 오직 그분 안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그분 밖에는 이런 것들이 결코 찾아질 수 도 발견될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 4:12).
(10)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거나 바라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됩니다. 왜 당신은 계속해서 부페함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당신 자신에게 초점을 맞춥니까? 왜 당신은 구원을 전혀 찾을 수 없으며 익한 날에 당신을 저버릴 땅으로 부터 나온 사람들이나 사물을 바라봅니까? 모든 것으로 부터 돌아서서 그분의 충만함으로 부터 은혜위에 은혜를 받기 위하여 구원자께로 돌아서기를 간청합니다.
(11)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은택에 당신이 참예하도록 만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권세가 그분께 주어지셔서 가장 완고한 마음도 부드럽게 하실 수 있고, 가장 사악한 마음도 굽히실 수 있고, 가장 죄악된 마음도 거룩하게 하실 수 있으시며, 가장 믿지않는 마음도 믿게 만드실 수 있으시며, 그분께로 오는 사람들을 믿음안에서 인내하도록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분의 뜻이 아니고서는 어느 피조물도 움직일 수 없고 흔들거릴 수도 없습니다. 그분의 허락 없이는 마귀들도 돼지떼에게 들어갈수 없었습니다. 에서는 그가 죽이려고 다가갔던 사람에게 입맞춰야 했습니다; 진노에 가득찬 라반은 오직 친절한 말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까마귀들은 떡과 고기를 가져다 주어야 했습니다, 밀가루와 기름이 결코 소모되지도 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기름은 과부가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때 까지 늘어났습니다. 죽은자가 살아났으며, 눈먼자가 보게되었고, 귀머거리가 듣게되었으며, 벙어리가 말하였으며, 절름발이가 걸을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어느것도 그분께는 놀라운 일이 없습니다. 살아있는 방법으로 이 진리를 믿으시고 그분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으십시요.
(12) 주 예수님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선하십니다. 비록 그분께서 영원히 계신 지극히 높으시며 고귀하신 분이시지만 그분께서는 자신을 그분께 의탁하는 모든이를 기억하시며 불쌍한 자들에게 부드러운 자비를 배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그를 찾는 영혼에게는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비를 기뻐하시며, 그분은 애통해하는 자를 위로하시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들에게 지혜를 주시며, 무지한 자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권력자의 손에 폭행당하는 자를 건지시며, 길을 잃은 자를 다시금 찾아오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없이 친절하시며 오래참으심으로 행하십니다. 그분의 권능과 선하심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두려움 없이 신뢰할 수 있는 완전한 기초를 제공합니다.
(13) 주 예수님은 신실하시며 그분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그누구 안에 시작하신 그 선하신 일을 완성시키실 것입니다, 그분은 넘어진 이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의 손을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길 잃은 자가 계속 헤메이게 하지 않으실 것이며, 오히려 그들을 다시금 돌려놓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선하신 목자이시며 신실하신 대 제사장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분께 의탁할 수 있으며 마치 안전한 피난처에 있듯이 그분 안에서 평화로이 머물 수 있고, "주께서 나를 위해 다 이루실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Wilhelmus a Brakel, Our Reasonable Service,
Book II, 298-300


빌헬무스 아 브라켈(Wilhelmus à Brakel, 1635-1711)은 17세기 네덜란드의 “더 진전된 종교개혁”(Nadere Reformatie, The Further Reformation, The Dutch Second Reformation)의대표 주자 중에 한 분입니다.
“더 진전된 종교 개혁”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라는 모토로 간단히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보통 오해 받기를 “개혁주의 교회는 개혁을 거듭 거듭해야 한다.”라고 설명합니다만, 사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멀러 교수님에 따르면, 적어도 네덜란드의 “더 진전된 종교개혁”에서 사용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모토는, “종교 개혁을 통해서 ‘교리적 순수성’이 회복되었으니, 이제는‘삶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더 진전된 종교개혁”의 대표 주자 중 한 사람답게, 아 브라켈의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예배』(The Christian's Reasonable Service, 4 vols.)를 보면, 교리가 잘 설명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교리를 어떻게 실천적으로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상세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경건주의 개혁파의 정수가 담긴 아 브라켈의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예배』는 교리와 삶의 불일치가 만연한 한국 교회에 정말 필요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하게도, 영역 번역자, 바르텔 엘사우트(Bartel Elshout) 씨가 이 책 전 4권을 공유하였습니다.
우병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