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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흄의 마음의 습관 데이비드 흄은 기하학과 수학은 자기 정의에 의해 지식을 만들기에 지식을 증가시키는 학문이 아니라고 했다. 이런 류를 선험 명제내지 분석 명제라고 한다. 1+1이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 같은 명제를 선험 명제라 하고 물체는 중력 가속도로 낙하한다외 같은 명제를 우연히 참이 되는 명제라 했다. 왜일까? 진리 같은데 말이다. 흄은 극단적인 회의주의자였다. 모든 물체는 항상 낙하하지만 우리는 모든 물체의 낙하를 경험하지 않았고 따라서 우연히 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인과관계를 적용하려면 필연이 필요한데 이런 인과관계는 자연을 아무리 관측해도 경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마음의 습관일 뿐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 말에 머리를 맞았다. 그의 순수이성비판은 이 마음의 습관이라는 워딩에서 얻은 아이.. 더보기
흄과 칸트 내가 동양철학 전공했다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좀 계셔서 서양철학 소개 포스팅을 좀 하고 있다. 물론 사서삼경을 읽기는 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 바가바드 기타도 읽었다. 원래 학부 철학은 동서양 가리지 않는다. 졸업 논문은 비트겐슈타인으로 썼는데 그냥 짜깁기 수준이었다. 어제 칸트가 흄이 인과율의 필연이 마음의 습관이란 주장에 자신의 독단을 깨닫고 순수이성비판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는 이 책을 통해 선험적 종합 판단과 그 명제로서 기학 물리 수학이 참된 학문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가 이성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신뿐만 아니라 영혼, 지유의지, 우주의 끝, 등도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결국 이성의 한계에 대한 선긋기인 셈이다. 우선 훔이 인과율의 필연이 경험되지 않고 마음의 습관이라 한 .. 더보기
인식론의 이유 근대는 서양철학에서 인식론의 시대이다. 동양은 인식론이 없는데 서양은 어쩌다 인식론의 시대를 열었을까? 인식론은 달리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인식론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데카르트의 어거스틴 오마쥬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가 근대 인식론을 정초한다. 이는 15세기 흑사병의 창궐 이후 르네상스가 가져온 문예부흥이 과학기술의 진보를 낳았고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으로 중세 천년의 과학 천동설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흑사병으로부터 실추되기 시작한 교회의 권위는 천동설의 붕괴와 함께 계시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해 체계화한 계시의 체계로서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 외 다른 방법론을 모색하기 시작.. 더보기
우주에 대한 소론 1930년, 에드윈 허블은 별들이 점점 멀어지는 것과 별과 별들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관측하게 됩니다. 이는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에 대한 처음 발견한 직접적인 증거입니다. 이렇게 팽창하는 것을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우주의 나이를 138억년 정도로 추정합니다. 이것 역시 추정일 뿐이죠. 그러나 팽창이라는 관측에서부터 시작된 추정임으로 상당한 신빙성을 갖게 됩니다. 흔히 빅뱅이론이 탄생하게 된 기초가 형성된 것이죠. 1980년 물리학자 엘런 거스와 헨리 타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초기 우주의 입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던 중, 중력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뉴톤의 물리학에서 중력은 천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그런데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에 에너지만 균일하게 .. 더보기
우리 민족의 기원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은나라 시조 설이 박혁거세처럼 난생 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설의 모친 간적이 알을 삼키고 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곡으로 소호금천의 아들입니다. 소호금천은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족보에 기록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산둥반도에 흩어져 있던 동이족의 조상이 바로 소호금천입니다. 산둥성 곡부에는 소호금천의 무덤이 존재합니다. 이는 동이족이 조선반도에만 산 것이 아니라 서해 건너편 산둥반도에도 살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동이족라고 할 때, 이(夷)는 활 궁(弓)에 클 대(大)를 합쳐 만들어진 글자로 흔히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고 이해하지만, 클 대는 보통 사람을 형상화한 문자로 사람을 가리키며 활은 그들이 구푸린 모양을 형.. 더보기
전택과 후택 1. WCF는 9장에 자유의지를 두고 우리가 자의로 하나님께 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자유의지의 앞에 언약과 중보자 그리스도를 7-8장으로 두고 10장에 효력있는 부르심을 두었다. 2. 중보자가 앞에 온다는 점에서 이를 전택으로 읽을 수도 있다. 동시에 자유의지를 통해서 누구라도, 곧 택자든지 불택자든지 자의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가 없음을 설명했다. 3. 그리고 10장에서 효과적인 부르심을 두는데, 이 때 부르심은 "말씀과 함께(Cum Verbo)"이뤄진다. 이는 말씀과 성령의 있음과 없음으로 4개의 경우의 수를 만든다. 4. WCF.10.1.처럼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는 통상적 경우가 있고 WCF.10.3.처럼 성령의 역사는 있으나 말씀이 없는 경우가 있고 WCF10.4.처럼 말씀.. 더보기
렘브란트, 벨사살의 연회 2007년인가 영국에 갔을 때, 내셔널 갤러리에서 본 적이 있는 램브란트의 벨사살의 연회라는 작품이다. 위 정보에서도 보듯이 이 작품을 그린 시점은 1635년이다. 1618-19년 도르트 총회를 통해 장로교 교리를 확립한 네덜란드는 장로교회가 아니면 공식적 예배도 힘든 그런 시대였다. 사회적으로 보면, 무역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던 황금시대였다. 그런데 1630년 그 유명한 튤립 파동이 벌어진다. 아마도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최초의 사건이 아닐까 싶다. 당시 노동자의 1년 연봉이 300길더 정도였는데 튤립파동 당시 튤립 한 뿌리에 3000-4200길더를 했다. 그러다가 폭락의 장세를 맞은 것이다. 지금 시점으로 보면 미쳐 돌아갔다. 역사적 근거는 못 찾았지만 튤립에 대한 이런 광적 집착은 도르트 회의가 남긴.. 더보기
생령의 의미 창세기의 "생령"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을 일컫는 용어다. 다만 문맥에 따라 생령 혹은 생물이라고 번역되었다. 그러나 생령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는 홍수를 포함해서 홍수 시기 이전과 에스겔의 성전 환상 중에만 나오는 단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타락 이전의 상태, 곧 창세기 6:3에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기 전의 상태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힌트일 수 있다. 이 범죄를 기독교 계통은 셋의 후손과 가인의 후손의 결혼으로 해석한다. 유대인들은 왕들이 초야권을 행사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대부분 천사와의 인간이 창조의 범주를 흐리는 범죄로 해석한다. 현대의 주석가들도 여기에 거의 동의한다. 이는 창세기 3장의 범죄와 일종의 평행을 이룬다. 12장.. 더보기
거룩한 교환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기준은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은 내밀한 것이라서 우리는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신앙고백을 통해 확인하고 그의 입술의 고백과 삶의 열매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우리 판단은 그 고백에 정초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우리가 짐작할 만한 증거는 있기 마련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가 말하듯이 보화인 복음을 발견한 자는 자기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기 마련이다. 내것을 팔지 못하는 이유는 보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룩한 교환(divine exchange)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내 죄와 그리스도의 의가 교환되었다. 신자의 긍정과 자신감은 그리스도의 의에서 나온다. 신자의 자존감은 그리스도 그 자체다. 허나 이는 거룩한 교환에 앞서 자기 죄를 대.. 더보기
우울증의 원인 최근 연구들에 의하면 우울증은 호르몬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에 의한 무의식적 기억 재생이 그 원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상처들을 곱씹는다. 해결되지 않는 과제라서 그럴 수밖에 없다. 해결을 위해 곱씹는 과정은 부정적 감정을 생산하고 그게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하는 원인이 된다. 사실 살고자 하는 몸과 뇌의 이 기전은 여러 가지 감정을 부른다. 공허, 우울, 비참, 죄책, 수치, 슬픔 등등. 예수께 오라. 그것이 해답이다. 비참을 안고 오라. 슬픔을 지고 오라. 죄책을 대면하고 오라. 혼자 헌 데를 핥지 말고 있는 그대로 오라. 자기를 구제해보려 여러 가지로 스스로를 기망하지 말고 주께 오라.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만 우리가 온전할 수 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