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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성경해석과 주해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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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의 해석



글: 노승수 목사

(마 2:13-15, 개정)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번에는 성탄절도 가깝고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비화를 다뤄보려 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구약의 성취라고 여러 구절을 소개하는 데, 위의 구절이 대표적입니다. 근데 사실 이게 좀 그렇습니다. 그냥 순진하게 읽으면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걸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게 되어버리니까요. 그리고 그게 도대체 뭐가 성취인 것인지도 사실 모호합니다. 저도 고등부 시절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거 너무 시시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실 마태가 인용하는 이 구절은 호세아서 11:1의 인용으로 바알로 배도하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애굽에서 구속해서 현재 너희가 여기 있는지를 돌이켜보도록 하는 본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 불러내었다는 ‘출애굽’이라는 구속사건을 의미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애굽의 압제에서 건져내신 모세를 보내셔서 그 백성을 건져내신 사건을 의미하고 신학적으로는 이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를 해석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예컨대,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는 사건을 출애굽에 비견하여서 해석하곤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거의 애굽에 포로가 된 상황과 흡사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해방된 상태라 여기지 않았고 메시야가 오시게 되면 이 압제에서 해방할 것이라는 의식이 강했고 이것은 역사적 출애굽으로부터 그들이 얻은 일종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은 생뚱맞게 애굽에 어린 시절 갔다 오기 위해서 수많은 어린이를 희생한 사건이 아니라 바로 이 출애굽이라는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은 공교롭게도 이 사건 후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을 줄 알고 그 지경에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알아본 시점을 기준으로 모두 죽이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뭐 떠오르는 장면이 없나요? 그렇죠. 모세의 출생 때 애굽의 바로가 사내가 태어나면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떠오르죠. 본문에서는 헤롯이 애굽의 바로처럼 예수가 모세처럼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생에 출애굽 신학이 적용되는 증거는 다른 본문들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눅 9:31)라는 본문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눈 대화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별세에 사용된 단언가 바로 ‘엑소더스’입니다. 물론 이 단어는 단순히 떠난다는 뜻이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떠나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이야기를 모세와 또 남은 자 곧 참 이스라엘을 보여준 첫 선지자 엘리야와 나누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약이 가진 출애굽에 관한 분명한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본문은 하나 더 살펴볼까 합니다.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계 11:8)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예루살렘을 애굽으로 소돔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곳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그들이 가진 오해를 교정하시곤 했습니다. 특히나 예수께서 세우실 나라는 세상 나라와 같지 않음을 역설하셨고 주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낸 이 사건은 예수께서 실현하시는데 물리적 방법으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실현이 이뤄집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럼 다시 마태복음의 이 본문으로 돌아와서 마태는 지금 그저 예수님이 애굽에서 나와야 한다는 물리적 사건, 사실의 성취를 말하고자 이 호세아서의 본문을 언급하신 걸까요? 아님 초기 복음 공동체에게 분명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적 출애굽을 설명하려고 했을까요? 당연히 후자겠지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스라엘은 애굽처럼 여겨지고 이스라엘의 압제자 헤롯은 바로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이 에피소드는 단순히 로케이션의 성취 즉, 애굽이라는 지리적 지역에서부터 예수님이 올라와야 하는 상황의 성취라고 보는 것은 성경을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게 뭐 어쨌다고 하는 조롱을 부르기에 십상이죠.

 

오히려 마태가 의도한 것은 예수께서는 마치 압제 받는 참 이스라엘에게 모세와 같은 분이어서 모세가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었듯이 이제 우리의 참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는 애굽과 같은 로마의 압제와 헤롯의 압제, 더 직접적으로는 마귀와 죄악의 사슬로부터 당신의 언약 백성을 해방할 분으로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호세아서(“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호 11:1)에서 내 아들은 어린 이스라엘 공동체를 의미하는 은유입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본문의 성취라는 것은 엘리야 때의 바알과 아세라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과 같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 바울의 설명으로 하자면, 육신으로 나지 않고 성령으로 난 이삭과 같은 자가 바로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며 그들을 그리스도와 맺는 참 언약을 통해서 세상 권세 잡은 자 마귀와 죄악의 사슬에 묶인 이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해서 건져내시는 것이 바로 출애굽의 진정한 실체가 아닐까요?

 

게다가 잘 아시는 대로 헤롯은 유대인도 아니었죠. 에돔인으로 로마의 통치의 앞잡이와 같은, 애굽의 압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바로에 비견이 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죽이는 행동 말입니다. 게다가 모세가 바로를 피해 피신한 것처럼 예수께서도 바로에 비견되는 헤롯을 피해 아이러니하게도 애굽으로 피신하고 있습니다. 이 미묘한 아이러니가 사실은 본문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해줍니다. 마태는 처음부터 이 언약 공동체가 혈통적 유대인 공동체가 아니라는 점을 이 미묘한 아이러니를 통해서 드러냅니다. 따라서 본문에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그저 예수님이 지리적으로 애굽에 갔다가 와야 하는 것의 성취로만 본다면 본문이 가진 그 풍성한 의미들은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오히려 영적 애굽으로 여겨질 만큼 어두워져 버린 예루살렘 공동체가 어떻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지를 암시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처음부터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와 같은 혈통적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의 공동체였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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