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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성경해석과 주해

마태의 이사야 7:14 인용의 의미

마태의 이사야 7:14 인용의 의미


글: 노승수 목사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는 그리스도의 나심이 이사야가 예언한 7:14의 내용 곧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나심은 신약 중 유일하게 마태만이 동정녀인 마리아에게서 나시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동정녀로부터 출생하는 사건의 성취로서 이사야가 인용됐다. 실제로 마태복음은 상당한 정도 이 내용을 담고 있다. 요셉은 정혼자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서 이것을 가만히 끊고자 했다. 이것을 천사가 막고 나서면서 이사야를 인용한다. 인용의 변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말이었다. 따라서 이사야 7:14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역시 논란은 ‘처녀’라 번역된 단어 알마(עַלְמָה)다. 이 단어는 넓게는 젊은 여자를 좁게는 처녀를 의미한다. 한글 역본 성경들도 보수적 번역들은 ‘처녀’로 진보적 번역들은 ‘젊은 여자’로 옮긴다. 이 논란은 이사야 본문의 문맥 때문이다. 점차 강성해지고 막강해지는 앗수르의 견제를 위해 이스라엘과 아람이 유다에 연대를 청했는데, 유다는 이를 거절한 것이다. 이 일로 이스라엘과 아람의 공격의 표적이 된다. 이에, 유다 왕 아하스에게 이사야가 준 표적이 바로 이 말씀이다.

아주 구체적인 정황에서 나온 말씀이다. 7:14의 이 예언은 7:16절의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아이가 태어나서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나이가 되면 이 두 왕이 황폐케 된다는 의미로 쓰였고 15절에 ‘젖과 꿀을 먹겠다’는 표현은 이들이 패망함으로 예루살렘 포위가 풀려서 들에서 젖과 꿀을 먹게 되라는 의미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마태의 인용이 이사야의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하는 해석과 유사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과연 그럴까? 게다가 이것은 마태의 해석이 아니라 주의 사자가 직접 계시로 준 것이다. 그러므로 뭔가 합리적이고 이해할만한 설명이 요구된다.

이사야 7-8장은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8장에서 실제로 아이가 표적으로 출생했다. 쉽게 말하자면, 7장의 임마누엘과 8장의 마할살랄하스바스는 동일 인물이다. ‘약탈이 빠르고 전리품을 서두르는’이라고 번역된다. 8:8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과 이스라엘을 기뻐함으로 미치는 하나님의 진노의 하수가 앗수르의 창일하는 강물로 묘사되는데, 그가 바로 임마누엘이다. 그리고 이들의 출생은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사 8;18)에 의하면 예표다.  

이사야 7장과 8장의 문맥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마태의 인용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는 해석은 무엇이 있을까? 마태복음 1장에 ‘임마누엘’은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해 있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지점이 있다. 비슷한 예로, 구약의 여호와의 날 개념이 있다. 원래 이 날은 절기의 날들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모스에 의해서,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암 5:18)이라고 명명된 이후, 여호와의 날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즉, 그 백성이 사모할 절기의 날들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의 날로 묘사된 것이다. 요한복음이 이 절기들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마태가 이사야의 임마누엘을 인용할 때, 이 두 국면을 모두 고려한 것으로 해석해야 하고 마태복음 1장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은 두 가지로 묘사한다. 하나는 예수이고, 다른 하나는 임마누엘인데, 우리가 이미 살핀 대로 그 의미가 임재와 평안을 의미하기보다 심판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두 가지 국면을 가진다. 마치 오순절 성령 강림이 여호와의 날로 해석되어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소식이요. 불신자들에게는 심판과 회개를 요청하는 소식이었듯이, 그리스도의 오심은 심판과 구원의 의미를 가지고 그것을 마태는 예수와 임마누엘이라는 두 이름에 담았다.

다시 말해서, 마태의 이사야 인용은 단지 동정녀 탄생이라는 의미만을 부각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가 여인에게서 남이 특히나 임신할 수 없는 여인에게서 태어나는 이 사건이 하나님이 언약 백성을 건지시는 표지요, 동시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외세를 의지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강한 심판의 표지로 제시된 것처럼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이들에 대해 심판의 표지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임마누엘로 제시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어떤지 제안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