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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묵상

레위기 26장 묵상

1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2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역사에서 거짓 종교의 패턴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 거 같다. 첫째는 지젝이 지적하는 법과 죄의 변증법으로 규범은 위반의 욕망을 일으키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바울이 말한 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 6:1)라는 기만이 사실이 되는 기독교를 지적한 것이다. 지젝은 이런 기독교를 ‘비뚤어진(perverse) 기독교', 또는 '가장한 쾌락주의'라고 비판했는데 지젝은 “기독교가 도착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때, 우리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종교가 처벌받지 않고 삶을 즐기게 해주는 안전장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레위기 26장 1절에서 지적하는 2계명에 따라 붙은 수식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은 바로 지젝의 이런 지적을 말한다. 사람은 자기 욕망대로 살 때, 내면의 은밀한 죄의식을 갖게 된다. 도스도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도끼로 전당포 노파를 죽이기까지 라스콜리니코프의 내면은 적개와 미움으로 정당화되고 있었다. 그런 욕망의 분출로서 살인은 라스콜리니코프를 죄의식에 갇히게 만들었다. ‘단절’(Raskol)이란 뜻을 가진 그의 이름처럼 자기 안에 갇힌 라스콜리니코프는 창녀 소냐의 조언을 따라 자기 죄의식을 해방한다. 그럼으로 자유를 얻는다.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일어나세요. 지금 즉시 나가서 네거리에 서서 먼저 당신이 더럽힌 대지에 절을 하고 입을 맞추세요. 그다음, 온 세상을 향해 절을 하고 소리를 내어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세요.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또다시 당신에게 생명을 보내주실 거예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로마 가톨릭 교회가 면죄부, 혹은 면벌부를 파는 종교적 행위와 흡사 닮아 있다.

 

죄를 고하기만 함으로 그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죄의식은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것에 대한 깊은 불안이며 이 불안은 하나님과의 분리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고 자기 욕망대로 살기는 해야 겠고 욕망대로 살면 자기 내면을 잠식해오는 죄의식을 감당할 수가 없다. 마치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후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 들 것이라고 두려워 떨며 성을 쌓고 거기 안에 사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하나님께 받은 표나 고해 같은 것은 우리의 죄의식을 방출하는 종교적 기능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종교성을 지니고 하나님 앞에 나와 있더라도 자기 욕망의 실현과 죄의식, 그것을 해결하는 기제로서 우상은 교회 안에서 버젓이 활개를 친다.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지적한다고 해서 우리 삶에서 이런 종교적 기능이 잘 못 되었고 옳지 않음으로 그것을 제거한다고 해서 곧바로 우리 내면이 삼위하나님께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아니다. 죄의식을 방출하는 우상이 제거된 종교는 뜻밖의 암초를 만나게 된다. 그것이 역사에서 만나는 종교의 두 번째 패턴인데, 마녀 사냥이다. 중세 유럽은 14세기부터 마녀 사냥이 있어왔다. 주로 프랑스 남부 스위 스 등에서 넓게 퍼저 살았던 정통 신앙을 가졌던 왈도파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이단 재판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왈도파의 정신적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청교도들에게서도 빗겨갈 수 없는 현상이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종교적 이상을 따라서 영국을 떠나 아메리카에 정착을 했고 17세기 후반 미국 메사추세스의 세이럼에서 몇몇 소녀가 발작을 일으킨 사건을 계기로 마녀 사냥이 일어난다. 엄격하고 보수적이고 강압적 분위기의 사회는 금방 광기에 휩쌓였다. 200명 이상의 사람이 투옥되고 20명이 넘는 사람이 마녀사냥의 재판에서 사형을 받았다. 제대로 방출될 수 없었던 죄의식은 내면에서 적개와 광기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몇몇 신화들에게 흥미로운 은유들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집트 창조 신화의 창조신 아툼-라는 자신의 눈을 빼서 만든 사랑의 여신 하토르를 보내 자신을 섬기기를 게을리 하는 사람들을 심판할 것을 명했는데, 하토르는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죽음의 신 세크메트라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각성한다. 세크메트가 가는 곳마다 학살과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몰살하고 인간이 멸종할 상황에서 세크메트의 행동을 멈출 수 없었던 아툼-라는 붉을 술을 만들어 세크메트에게 먹이고 그렇게 잠든 세크메트가 깨어났을 때는 사랑의 여신 하토르가 되어 있었다. 이처럼 사랑과 죽음은 서로 짝을 이루는데, 이는 프로이트가 사랑의 신 에로스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들어서 우리 내면의 사랑의 욕망과 죽음의 욕망을 구조화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에로스는 그리스적 관점에서는 상승의 힘을 담은 사랑이다. 여기에는 자기고양과 바리새주의 같은 힘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기대가 클수록 분노도 큰 법이듯이 자기 욕망을 위해서 죄의식을 해소하는 길이 막힌 채로 상승의 힘인 에로스적 요인에 집착했던 종교는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것이 마녀사냥이다. 우상 숭배가 주는 전체주의적 요소이기도 하며 그 광기는 희생양을 만들어내고 자기 내면의 미움을 특정 대상을 향해서 폭주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학교 장면에서 보는 왕따나 일본에서 나타난 이지메도 모두 이런 경향이다.

 

그럼 두 번째 패턴인 마녀사냥은 2절에 나타난 안식일과 성소 개념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레위기에서 흔히 만나는 성소 관련 표현은 "죄를 깨닫거든 너희가 성소에서 제사를 드리되"라는 표현이다. 성소는 자신이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해서 자비와 긍휼을 구하기 위해서 나가는 곳이다. 삼위하나님께로 돌이킨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행하시는 큰 일을 바라보며 안식하는 곳이다. 그런데 자기 욕망을 위해서 죄의식을 해결할 목적을 멈추었다면 당연히 자신을 재물로 내어주신 십자가의 예수께 나아와야 하지만 여전히 상승의 힘인 에로스나 바리새인들이 의지하던 노모스 곧 율법의 행위를 따른 자기 의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이 상승의 힘이 위협받을 때, 적개의 잇빨을 드러내게 된다. 예수님을 죽이려 들고 그것을 계획에 옮겼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태도가 그와 같다. 그들에게 성전은 자기애의 상징일 뿐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안식하는 곳이 아니었다.

 

오늘 레위기 26장이 십계명 중 2계명과 4계명을 들어서 언약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종교가 바로 이 두 계명으로부터 2가지 방식으로 왜곡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거짓 종교는 이렇게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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