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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묵상

전도서 7장 묵상

전도자의 지혜는 원칙이 아니라 삶의 자리를 딛고 서 있는데 있다.

 

기독교적 사랑인 아가페는 헬라적인 사랑인 에로스가 근본적으로 상승으로서의 충동이며 초월을 지향하는 것과 다르다.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헬라인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바로 몸의 부활이었다. 후에 영지주의가 창궐한 것도 이런 상승의 힘, 곧 영은 선한 것이고 육체는 악한 것이라는 헬라 철학에 기인하고 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의 육화를 믿을 수가 없었고 가현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본질로 현상계를 그 그림자로 놓은 것처럼 에로스는 이데아계로의 상승과 합일에 그 목적이 있었다. 낙원을 상실한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종교적 욕구였다. 그러나 몸에 대한 거부는 종교를 이상화시켰다. 이런 현상은 유대인들에게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는데 율법에 대한 사랑은 바리새주의로 흘러버렸다.

 

그러나 아가페는 하강으로서의 사랑이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가 그것을 버리고 종의 형체를 취하신 사랑이며 우리가 사랑받는 자리는 상승의 어느지점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떄"였다. 아가페는 우리 본질을 드러내게 한다. "쓰레기 더미에서 피는 장미" 같은 것이다. 은혜는 더 많이 사함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며 더 많이 사함 받음이란 자기 본질에 깊이 가닿음을 의미했다.

 

삼위일체께로 돌아서는 삶은 바로 상승 중에 만나는 은혜가 아니라 하강 중에 만나는 은혜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처럼 자기 삶의 자리와 맞닥뜨림이 없이 상승을 위해 애쓰던 맏아들은 맛 볼 수 없는 은혜였다. 기독교의 주요 교리 중 그리스도의 하강과 승귀가 있다. 하강이 먼저고 승귀가 나중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과의 연합인 것이다.

 

아가페의 하강의 은혜는 어떻게 우리에게 체험되는가? 바로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 본질, 곧 죄인 됨이 드러날 때, 깨닫게 된다. 전도자 코헬렛의 여러 체험들은 그의 무력함을 깨닫게 하고 삶의 자리에 선 유연함을 보인다. 주로 상승의 힘을 타는 사람에게서 관찰되는 것이 엄격함, 숭고함이라면 하강의 힘을 타는 사람들에게서 관찰되는 것은 유연함, 긍휼함이다.

 

전도자의 지나치게 의인되지 말고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라는 권면은 몸의 자리에 발을 딛고 서라는 권면이다. 전도자가 의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요. 악을 가볍게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이다. 전도자의 태도와 비슷한 면을 어거스틴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마니교도들이 카르타고에서 탈출을 돕고, 로마에서 중병이 들어 저승 문턱까지 간 그를 병간호해 주며 거둬 주고, 급기야는 밀라노 황실 교수직까지 알선해주었다. 어거스틴은 굳이 그들과 손을 끊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그 때 심경을 이렇게 고백했다. “나에게 순결을 주소서.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아직은 마소서.”(Conf. 8.7.17)

 

전도자가 지적하는 것은 이런 문제일 수 있다. 바울이 말한 세상 밖에 나가 살아야 하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고전 5:10). 전도자의 조언처럼 세상에 선을 행하고 죄를 범하지 않는 의인은 없다. 우리도 죄인 중에 부름받았으니 자신에 대해서 또 이웃에 대해서 지나치게 엄격함으로 상승의 욕구에 편승하게 되면 결국 바리새인처럼 고립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 삶에 스며들어오셨듯이 우리 삶의 자리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신자의 삶의 자리다.

 

(전 7:15)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전 7: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전 7: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전 7:18)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전 7:19)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전 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전 7:21)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전 7:22)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전 7:23)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전 7:24)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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