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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묵상

시편 18편



15.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고대인의 사고를 드러내준다. 바다 밑에 세상의 터가 있다고 보았다. 하늘, 땅, 바다와 음부, 특히 바다는 테초의 혼돈과 공허의 은유로 자주 등장한다. 성경은 자주 흑암 중에 계신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이는 혼돈 이전에도 전능하신 이심을 드러낸다. 이는 중세 로마네스크와 바로크 양식에도 반영이 되어 있다.

우리가 성경의 영감을 유기 영감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의 이런 세계관을 사용하셔서 성경을 기록하셨다는 의미다. 받아쓰기가 아니라 성경 저자들의 삶과 세계관을 반영한 기록이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이런 고대인의 세계 이해 자체가 성경이 전하고자하는 진리가 아니라 그들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되심을 해석해내는 것이 신학함의 이유이며 의미다.

즉 물 곧 바다 밑에 세상에 기초가 있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의미다.

데카르트 시대의 중력에 대한 물리학의 이해와 이를 수학적으로 해석해낸 미적분학의 발달은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의 위로부터 아래로의 우주구조로는 세상이 설명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성경은 그럼에도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백성이란 산학을 고수하고 있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답습한 스콜라 구조는 수정이 불가피했다.

종교개혁과 전통주의가 고수하고자 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나 스콜라주의가 아니라 성경의 계시였다.

푸치우스나 브라켈이 코케이우스의 신학을 반대한 것은 코케이우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반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위에 계신 하나님과 땅의 백성이란 구조가 무너지면서 필연적으로 밀려오게 되는 이신론에 대한 경계였다.

중력이란 다중구조는 초월로서 하늘을 제거해버렸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의심과 그것의 자기동일성으로 세계를 건설했고 거기에 포섭된 제3사유의 하나님은 이신론적 경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데카르트나 코케이우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력이란 새로운 우주 이해 이후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신학적 설명을 할 체계를 성립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에서 장로교회가 데이비드 흄의 극단적 회의론에 반대하여 상식철학을 기초로 놓은 것처럼 이런 류의 신학적 작업이 확장되어야 하는데 그 전통은 자유주의와의 전투에서 일반 계시와 자연 과학의 영역을 버려버리고 근본주의 연대를 함으로 장로교회 전통안에 세대주의를 트로이 목마로 받아들이게 되고 말았다. 장로교 신학이 근본주의 신학과 연합전선을 가지므로 그 성향이 바빙크나 카이퍼가 세상에 대해 문화명령을 이해하던 방식에서 멀어져 은사주의나 오순절주의와 유사성이 높아져버렸다.

시편 18편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9절) 세상에 강림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현현은 창조의 근간을 드러낸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 9절의 가르심은 마가의 성자의 수난에 관한 신학과도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시인의 구원의 간구에 대한 응답에서 비롯되었다. 이 진노는 그 본질이 십자가가 그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