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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레위기강해

소제에 대한 규례(레 2:1-16)

소제에 대한 규례(레 2:1-16)


노승수 목사


[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 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3]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4]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병을 드릴 것이요 [5] 번철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6] 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을지니 이는 소제니라 [7] 네가 솥에 삶은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지니라 [8] 너는 이것들로 만든 소제물을 여호와께로 가져다가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져다가 [9] 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0]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찌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11]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12] 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단에 올리지 말지며 [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14]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너의 소제를 삼되 [15]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할지니 이는 소제니라 [16] 제사장은 찧은 곡식 얼마와 기름의 얼마와 모든 유향을 기념물로 불사를지니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전체적으로 : 


소제는<민하>라고 합니다. 원래는 "예물"과 "교제"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를 가졌던 제물 전체를 가리켰습니다. 민하는 비제의적 맥락에서는 '선물'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에서의 환심을 사기위해서 바친 선물에서 사용이 됩니다(창 32:13ff). 야곱이 애굽에 곡식을 구하려 아들들을 보내면서 요셉에게 선물을 바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쳐진 즉, 고르반의 의미와 동시에 그 백성과 소통하는 교제의 의미를 가진 제사의 형태였을 것입니다(창 4:3-5 참조). 그러나 레위기에 이르러서는 이 소제는 동물을 잡아서 바치는 제사와 구별된 곡식을 드리는 제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국한됩니다. 


대체로 오늘 본문은 3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3절은 익히지 않은 곡식의 제사, 4-10절은 익힌 곡식 제사 11-16절은 소제에 관련된 규례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첫 두 문단은 히브리어로 유사한 구문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구별이 가능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이라는 구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이런 특징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비교적 1절은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 반면 4절은 간략히 번역을 했습니다. 


그럼 본문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누구든지>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래<네페쉬>라는 단어로 생명이 있는 존재, 영혼이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성경의 용례는 굉장히 광범위합니다. 지상에 생명을 가진 동물들 전체를 가리킬 때도 이<네페쉬>가 사용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이 단어는<예배할 수 있는 자>라는 함축적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예배의 본질은 제물의 드리는 방식과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요한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할 것입니다(요 4:23-24). 나는 참으로 예배하는 자입니까? 


어제 이미 살핀대로 '예물'은 '고르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받쳐진 것이지요. 그러나 어제 이미 살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께 드린바 되었다고 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막 7:11). 즉,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마 5:23-24에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사화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바르게 드리는 이 예물은 형제와의 바른 관계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님께 예물을 준비해야 함을 설명합니다. 그 준비된 제물을 제사장 앞으로 가지고 오고 제사장은 그 중에 고운 기름 가루 한 붐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살라 제사를 드립니다. 여기서 화제란 제사를 드리는 방식으로 불태워드리는 방식의 제사를<화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제는 번제와 화목제와 함께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는 3 개의 제사 중의 하나입니다(2, 9, 12절). 


또한 번제는 전체를 하나님께 완전하게 태워드림으로 '완전한 헌신'의 상징이었던 것에 비해 소제는 기념물만을 취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그 남은 곡식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이유가 여호와께 태워서 드리는 제사 중에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먼저 '기념물'의 개념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일부를 드리지만 전체를 드리는 것으로 이해해달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말에 '기념' '기억하다' '생각나게 하다'는 모드 한 어근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기념물은 다르게 번역을 하면, '저는 ~~을 기억하고 싶나이다'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 제사를 드리면서 드렸던 기도문에서 나온 의미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시기를 바라고 다른 한편으로 내가 이것을 기억하여 내 모든 소유가 주님께로부터 나왔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받을 수 있는 다른 한 가지의 교훈은 이 제물을 일부만 태워서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에게 돌리는 내용입니다. 이 제사장과 목회자의 관계를 일대일의 대응관계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루터가 표현한대로 우리는 이미 모두가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목회자가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 교회의 일들에만 전념하는 것과 구약의 제사장이 성전에만 전념하여 다른 일들을 하지 않는 것은 같은 맥락을 가짐으로 적용적 유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현대의 교회가 사실상 모두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예물의 정신이 지체와의 화목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전제하는 것이기에 당연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주의 종들의 필요를 채우는 일은 교회의 당연한 책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극히 거룩한 것임으로 제사장에게 돌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극히 거룩하게 쓰여져야지요. 물론 목회자가 자신의 생활의 형편을 돌아보는 모든 일에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요? 그러나 이렇게 거룩한 제물을 일부를 받은 제사장으로서 이것이 거룩하게 여긴 것처럼 오늘날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은 물질을 사용함에 있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다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달라고 하면서 주님께 드린 것은 이 일부가 주님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일종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므로 1/10을 드리는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머지 9/10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거룩하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일부의 목회자와 선교사의 이야기이겠지만 그런 물질을 참으로 사치로 사용한다는 소식들을 들으면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여기서<지극히 거룩한 것이라>는 표현은<코데쉬 코다쉼>으로 흔히 지성소라 일컬어지는 성소의 커튼 안쪽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는 이 단어를 제사장의 몫으로 구별된 속죄제물과 소제의 일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앞서 기념물을 설명한대로 이미 그것의 소유주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사장에게 돌려졌습니다. 예배당에 바쳐진 헌금들은 이미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일부가 목회자의 생활비로 주어졌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함부로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이 레위기에서는 예물 전체가 성별되어서 일상적 용도로 사용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는 참으로 1/10을 바치면서 그것을 기념물로 여기고 9/10를 성별되게 사용하는 참된 청지기입니까? 


4-10절은 익힌 소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4절은 화덕에 구운 것, 5-6절은 번철에 부친 것, 7절은 솥에 삶은 것, 8-10절은 2-3절과 같은 기념물과 성별에 관한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럼 왜 소제를 이런 다양한 것들을 언급할까요? 우리가 어제 번제는 소득 수준에 따라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 등으로 누구나 드릴 수 있고 드려야 하는 예배에 대한 강조점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오늘 소제는 이런 소득이나 생활 수준의 차이보다 우리 삶의 전 영역이 주님께 드려져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곡식을 거두는 것에부터 우리의 일상이 먹는 것으로 주된 시간이 짜여지는 것처럼 생활의 여러 일상들 모든 것에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함을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떡을 구을 때도 전으로 부칠 때도 국수나 면은 아니더라도 소제물을 솥에 삶아서 먹던 히브리인의 어떤 삶의 방식 속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것을 구별하여 드려야 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 삶의 모든 영역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11절 이하는 소제물을 드림에 있어서 주의 해야 할 규례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룩이나 꿀을 금하는 것은 이것이 발효를 일으켜 원래의 형태를 변형시키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드려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적으로 유비해 볼 수 있을까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우리가 편한 우리 방식으로 변형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이 원래 명하신 것을 따라 드려져야 합니다. 예물은 예배의 중요한 한 부분인 것처럼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형을 변형시키는 것이라서 금지되는 것이라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정하신 법도 대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2절에 처음 익은 것은 맏물을 가리킵니다. 익은 것이라 번역되었지만 역시 "예물"과 같은 의미의 단어 '고르반'이 사용되었습니다. 즉 소제물의 첫 예물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룩과 꿀, 그리고 첫 소제물들을 하나님께 드리지만 제단에서 사르지 말고 드리라는 것은 이것이 제사장에게 돌려져야 할 예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꿀이나 누룩이 없는 떡이나 빵이 얼마나 먹기에 힘들었겠습니까? 그것이 들어간 식재료들은 아마도 고급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부드럽고 먹기에 좋고, 사람에게 좋으니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마음들이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에 마음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아마도 이 규례가 없었다면 제사장들은 늘 누룩없는 먹기에 힘든 고난의 빵을 늘 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드리되 사르지 말고 제사장에게 돌리는 것은 사실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11절은 화제로 살라서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에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11절과 12절의 연결이 의미가 충분히 잘 살지 않습니다. 12절은 이런 의미인데요. 첫 곡식 제사에 이런 것들 즉, 꿀이나 누룩을 넣어서 하나님께 드려도 되지만 그것을 제단에 올려서 사르는 제사로 드려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13절의 소금은 이중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앞서 누룩이나 꿀이 원형의 변형 때문에 금지되었지만 또한 동시에 제사장들을 위한 부드러운 빵과 식생을 위해서 필요한 것처럼 소금 역시 보존과 정화의 특성을 가집니다. 소금이 금이라 불리는 것은 그것의 변치 않도록 보존하는 속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소금은 언약의 소금 즉, 변치 않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이기도 합니다(민 18:19, 대하 13:5). 또한 소금은 양념이기도 하지요. 따로 농사를 짓거나 거래를 하지 않는 제사장들이 양념이 없는 빵과 떡을 먹는 일은 매우 힘든 일기도 합니다. 그것들을 하나님께 드리되 그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소금을 반드시 넣고, 누룩은 반드시 빼라고 말하는 것은 변형의 금지, 그리고 원형의 보존에 대한 이미지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예배 생활은 어떻습니까? 


14절의 첫 이삭은 가장 먼저 추수된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게 아직 충분히 여물지 않은 상태여서 그냥 곱게 빻을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기름으로 볶아 굵게 만든 다음 굵게 빻아서 소제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로 나아오는 우리의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인도하십니다. 수확의 첫 열매는 항상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의 맏아들이나 짐승의 첫 새끼도 하나님의 것입니다(출 13:1ff 참조). 여기서 처음은 으뜸의 개념을 포함한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 역시 1/10을 드리는 개념보다 내 소유의 으뜸을 드리는 개념을 가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나는 내 삶의 어떤 영역이든 처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