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승수의 강해설교/레위기강해

속죄제에 관한 규례 1 (레 4:1-21)

속죄제에 관한 규례 1 (레 4:1-21) 


노승수 목사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 하였으면 그 범한 죄를 인하여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4] 곧 그 수송아지를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5]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6]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7]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8] 또 그 속죄 제물 된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취할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하되 [10] 화목제 희생의 소에게서 취함 같이 할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번제단 위에 불사를 것이며 [11]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 머리와 다리와 내장과 [12]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청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사를지니라 [13]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14]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15]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16]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17] 그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18] 또 그 피로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는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19] 그 기름은 다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르되 [20] 그 송아지를 속제죄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라 [21] 그는 그 수송아지를 진 밖으로 가져다가 첫번 수송아지를 사름 같이 사를지니 이는 회중의 속죄제니라


전체적으로 : 


속죄제는 히브리어로<하타트>라고 합니다. 명사로서 흔히 '죄'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파생한 동사<하타>는 죄를 짓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정결제의 성격이 강합니다. 우리의 죄를 씻는 성격의 제사입니다. 구조로 보면, 1-2절은 속죄제에 대한 서론에 해당하구요. 3-21절은 성소에서 피가 뿌려지는 속죄를 22-35절은 번제단에 피를 바르는 속죄를 5:1-13절은 속죄제의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속죄제는 3일 가량을 아무래도 해설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레위기의 5가지 제사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의 본문이 등장하고 사실 이 제사야말로 구속에 있어서 결정적 예표이기도 합니다. 


1-3장과는 4장은 명백하고 구분이 됩니다. 1-3장의 경우 예물을 중심으로 해서 보다 값비싼 예물에서 보다 부담이 적은 예물을 나열하는 배열을 가졌다. 이것은 예물을 드리는 사람의 경제적 능력과 관계 없이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해야 함을 강조하는 성격임을 이미 설명드린 바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이 속죄제는 이런 경제적 능력보다 제사를 드리는 자의 사회적 지위가 문단을 배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사장의 속죄제(3-12)과 이스라엘 온 회중의 속죄제(13-21)입니다. 각 문단은<만일>로 시작해서<제사장이 그의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는 문구 혹은 그와 유사한 구절로 문단이 끝이 납니다. 다만 첫 문단의 경우 제사장 자신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용서를 선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첫문단에만 이런 구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 차례로 본문을 살펴 보겠습니다. 


2절에 역시 제사를 드리려는 자는 누구라도 단지 여호와의 금령을 단 하나라도 어길 시에 이와 같은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금령 곧 율법은 우리로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의식을 날카롭게 하고 그 참혹하고 비참한 마음이 되어 이 속죄의 제사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제사장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사장 역시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죄 없으시고 흠이 없으신 영원한 대제사장 곧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의지해야 할 유일한 분이십니다. 


구약의 제사장과 같은 은혜의 시대를 사는 목회자들도 역시 연약한 인간이고 그들도 범죄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제사장의 죄는 어떤 죄입니까? 단순히 자신이 부정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한다고 합니다. 여기서<죄얼>로 번역된 단어는<속건제>를 의미하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 제사장의 직무를 행함에 있어서 과실을 행하게 됨으로 백성에 그 폐해가 돌아가는 범죄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지도자는 더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항상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않고,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벧전 5:3).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로 오신 것처럼 목자된 자는 섬기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막 10:45).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딛 1:7) 그래야 양무리가 편안합니다. 물론 주님 앞에서 목회자 역시 어린양에 불과합니다. 그들도 연약한 존재이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양무리 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되는 일에 조심이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약 3:1) 


13절 이하는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란 우리가 생각하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죄는 개인적일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한 민족 전체가 그와 같은 죄에 빠져 있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양 정당화 됩니다. 역사상 이런 사례를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 하나만 생각해볼까요? 개혁주의가 발전한 나라 중에 남아공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 개혁주의 신학이 인종차별과 인권유린을 성경의 이름으로 정당화했습니다. 정당화 방식은 어처구니 없게도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에게 저주를 받은 함의 후손이 바로 흑인이어서 그들이 노예로 사는 것이다는 식이었습니다. 독일 교회는 히틀러의 유대인학살과 세계 정복 전쟁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교회들 역시 군사 정권의 인권탄압과 잘못된 정치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선지자적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로마서 말씀 인용하며 위에 있는 어떤 권위에도 순종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그 말씀을 잘 따르는 만큼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돌보라는 성경의 정신에도 함께 순종해야 했습니다. 이런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 되는 역할을 등한히 하면서 사학법 문제로는 목사들이 삭발투쟁을 합니다. 이런 삶을 성경에 순종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허물을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죄를 주께 고해야 할 것입니다. 


기타 제사의 절차들은 앞선 설교의 내용을 참조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다만 20절과 관계하여서 지금도 카톨릭 교회에서는 사제가 사죄의 선포를 하여야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고 종교개혁자들은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누구든지 사제를 통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그의 약속을 근거하여서 사죄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확신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주신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나는 나의 죄 문제 때문에 더욱 더 신실하게 주님께 나아가는 믿음을 소유하였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