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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근세교회사

스펄전과 내리막길 논쟁

스펄전과 내리막길 논쟁 

 

(청교도 시대 마지막에) 이런저런 방법으로 처음에는 사역자들이 그 다음에는 교회들이 '내리막길'에 접어들었고, 어떤 경우에는 그 걸음이 급하여 대개 매우 참혹했다. 사역자들이 옛 청교도의 경건한 생활과 옛 칼빈주의 교리에서 벗어나는 만큼, 일반적으로 그들의 설교는 진지함이 떨어지고 단순해지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문제는 더 사변적이고 덜 영적이며 계시의 위대한 핵심 진리보다 신약의 도덕적 가르침이 더 많았다. 자연 신학은 복음의 위대한 진리가 마땅히 차지했던 자리를 대신하는 적이 많고, 설교에는 그리스도가 덜 등장하게 되었다. 첫째는 설교자와 그 다음으로는 일반 사람들의 성품과 생활에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게 되었을 뿐이다.

The Sword And The Trowel

< Robert Shindler, "The Down Grade," The Sword and the Trowel(March 1887), 122. > 


87년 3월 찰스 스펄전은 자신의 월간지 The Sword and the Trowel에 '내리막길'이라는 제목의 두 기사 가운데 첫번째 기사를 실었다. 이 두 기사는 익명으로 실렸지만, 글쓴이는 스펄전의 친한 친구이며 동료 침례교 목사인 로버트 쉰들러(Robert Shindler)였다. 쉰들러는 스펄전의 말을 가지고 기사를 썼고, 그래서 스펄전은 첫번째 기사에 다음과 같은 개인적인 선전의 말을 각주에 썼다. "이 기사를 읽으려면 진지한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는 목이 부러질 것 같은 속도로 언덕을 내리닫고 있습니다."

< Ibid., 122n. > 

쉰들러는 청교도 시대부터 자신의 시대까지 복음주의의 상태를 추적하면서, 참된 복음주의적 믿음의 부흥이 있으면 한두 세대 안에 건전한 교리로부터 벗어나 결국 대대적인 배도에 이르게 되는 일이 뒤따랐다고 지적했다. 쉰들러는 이처럼 진리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비탈길로 비유했고, 그래서 이런 일을 '내리막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내리막길 Ⅰ 

첫 기사에서 쉰들러는 1662년 청교도주의가 쇠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영국의 중요한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그는, 청교도 시대 이후 첫 세대에 사실상 영국의 모든 비국교도(비영국 국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정통 신앙에서 벗어나 (원죄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소시누스주의(socinianism)라는 옛 자유주의 신학으로 향했던 사실을 지적했다. 쉰들러는 청교도 이후의 수백 개 교회가 어떻게 해서 합리주의적 회의주의, 유니테리언주의, 그리고 다른 자유주의적 신념을 선호하여 건전한 교리를 내버렸는지 이야기했다. 종종 아래로 치닫는 걸음은 천천히 시작되므로 거의 알아차릴 수 없다. 쉰들러는, 교파들이 (인간의 의지를 결정적 요소로 만드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선호하여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를 버릴 때 종종 '내리막길로 접어든다'고 말했다. 다른 집단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를 받아들였다. 또 어떤 집단은 간단히 학문과 세속 지혜에 매혹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진리에 대한 열정을 잃었다.

"장로교인들이 맨 먼저 그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고 쉰들러는 썼다. 그들은 세속적 지혜의 길을 택했다. "그들은 고전 학문과 다른 학문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그러므로) 장로교 사역자들이 학문적 재능에 관심을 점점 더 쏟고 영적 자격에는 점점 덜 쏟으며, 복음 전도의 열정과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눌 수 있는 능력보다 학문과 웅변술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것은 그릇된 방향으로 가는 첩경이었다."

< Ibid., 123. > 

더 나아가 쉰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경향에 빠지는 사람에게 흔히 있는 일이지만, '내리막길'에 접어든 어떤 사람들은 의도했던 것보다 더 멀리 내려갔고, 그래서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계속 나아가는 것이 더 쉽고 제동 장치가 없을 경우 멈추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칼빈주의로부터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속죄의 죽음과 의롭다 하시는 의를 믿는 믿음을 부인하고 인간 부패의 교리와 사람이 새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갱생시키셔야 할 필요성과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의 필요성을 비난하면서 고유한 신성을 부인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꿈에 생각했건 생각하지 않았건 이 결과는 현실이 되었다.

< Ibid., 124. > 

쉰들러는 믿음을 버린 어떤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정통 신자처럼 행세하면서 의심의 씨를 뿌리기를 좋아하며 일부러 자신의 회의주의와 이단을 숨겼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정죄를 더 악화시키고 자신의 위선과 속임으로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을 끝없이 파멸되게 만들었다(참고. 마 23:15). 그리스도의 사신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는 반포자라고 고백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주장을 무시하고 그의 권리를 부인하고 그의 인품을 깎아 내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찬란한 옷을 찢고 그 면류관을 흙에 던져 짓밟는 것이었다."

< Ibid., 125. > 

그런데도 참되게 믿음을 지키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하여 싸우기를 꺼려했다. 복음주의 설교는 종종 냉담하고 생기가 없었고, 건전한 가르침을 붙잡는 사람조차도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나눌 때 어디서 끊고 맺어야 하는지 주의하지 않았다. "정서적으로 참으로 정통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자들도 이단 사역자를 조력자나 임시 설교자로 자신의 강단에 끌어들이는 것처럼 태도가 분명치 않고 신실하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았다. 이런 식으로 아리우스 이단과 소시누스 이단이 엑서터(Exeter)의 장로교 교회에 들어왔다."

< Ibid. > 

그래서 겨우 몇 십 년 안에, 영국의 정신을 그토록 사로잡았던 청교도의 열정이 메마르고 냉담하고 배도적인 가르침에 무너졌다. 교회들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교회 일원이 되는 특권을 허용할 정도로 태만해졌다. 쉰들러의 말에 따르면 "새롭게 하시는 은혜의 사역과는 낯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내세우고 교회의 일원으로 심지어는 교회의 지도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사람들은 "평화의 유일한 방법이 무시되고 부인되었을 때 '평화로다' '평화로다' 하고 소리칠 수 있고 소리치려 하고 실제로 소리쳤던 사람들을 자기들 마음에 맞는 목회자로 선택했다."

< Ibid., 126. > 

쉰들러는 '내리막길'에 관한 첫 기사를 이런 말로 마감했다. "이 사실들은, 어떤 경우에 나타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새것을 위하여 옛것을 기꺼이 끊어버리려 하는 일이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나는 오늘날 한 교훈을 제공한다. 그러나 신학에서는 참된 것이 새것이 아니며 새것이 참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흔히 볼 수 있다."

< Ibid. > 


내리막길 Ⅱ 

The Sword and the Trowel지 4월호에는 '내리막길'이라는 제목의 두번째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서 로버트 쉰들러는 청교도주의가 쇠퇴하는 역사를 계속 개괄했다. 그는 교회 지도자들이 비탈길을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정통 신앙을 가르치는 자들도 열심히 싸우고 있지 않고(삿 3장) 믿음을 변호하는 데 약하다고 쉰들러는 말했다. 한 가지 예로 쉰들러는 오늘날 '주의 말씀 받은 그날'(O Happy Day), '은혜, 참 기쁜 소릴세'(Grace, 'Tis a Charming Sound)를 쓴 필립 도드리지(Philip Doddridge, 1702-1751)를 언급했다. 쉰들러에 따르면 도드리지는 "호감을 줄 정도로 건전했지만, 언제나 사려 깊은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지나치게 사려가 깊어서 그다지 담대하고 결연하지 못했을 것이다."

< "The Down Grade"(second article), The Sword and the Trowel(April 1887), 166. > 

도드리지는 1700년대 중반 대부분의 비국교도 사역자들이 훈련을 받으러 갔던 학교의 교장이었다. 쉰들러는 도드리지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다. "(도드리지의) 호감을 주는 성향 때문에 그는 좀더 단호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하고 말았다. 때때로 도드리지는 설교자를 바꿀 때도 정통 신앙을 가졌는지 의심을 받는 사람과 우의를 다지며 사귀었다. 이런 일은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래서 이 사람들이 판단을 내릴 때 일반적으로 감정이 여러 갈래로 갈리는 것을 막아 주는 역할을 했다."

< Ibid., 167. >

다른 말로 하면, 쉰들러는 도드리지가 비정통적 선생들을 관용한 것은 그의 신학생들이 이 비정통적 선생들이 심각한 오류에 빠지는 죄를 졌다는 두려운 현실을 잘 못보게 하고 그 선생들의 이단으로 말미암은 치명적인 결과에 영향을 받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쉰들러는 곧바로, 누구도 도드리지에 대해서 '이단인 듯이 의혹의 눈초리라도 넌지시 던질' 수 없다고 덧붙였다.

도드리지가 보여 준 관용의 태도 때문에 마침내 이 학교는 소시누스주의에 굴복했고 이리하여 도드리지가 죽은 다음 세대에 분열되었다.

< Ibid. > 

쉰들러는 호세아 4:9("백성이나 제사장이나")의 말을 바꾸어 이렇게 썼다. "그런 사역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선이 없고 그들의 의견을 찬성하는 청중에게 걸 수 있는 희망이 없다."

< Ibid., 168. >

쉰들러는 그와 같은 관용은 경계하는 마음을 늦추기가 쉽다는 것을 보이면서 그런 관용에 경고했다. 

너무 많은 경우에 회의주의적 대담 무쌍함은 복음 전도의 열정을 대신한 듯이 보이며, 사람들은 복음 진리의 유익한 떡보다 신학적 사변의 껍데기를 좋아한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의 길을 얼마나 꾸준하고 충실하게 걸을 수 있는가 하는 데 열심을 쏟지 아니하고 얼마나 진리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가 하는 데 열심을 쏟는 것 같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는 사자나 호랑이 같아서, 그들은 그 진리를 '멀리'한다. 우리는 이렇게 충고하고 싶다. 절벽에 너무 다가가지 말라. 자칫 미끄러지거나 떨어질 수 있다. 항상 땅이 굳은 곳에 있어라. 깨지기 쉬운 얼음에 올라가려 하지 말라.

< Ibid. > 

쉰들러는 '다윈주의라는 올챙이가 슈루즈베리, 하이 스트리트에 있는 오래된 예배당 (한 교인석)에서......부화했다'는 사실을 주목하면서 어떻게 해서 관용적 태도가 재난에 이르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었다. 슈루즈베리의 이 예배당은 찰스 다윈이 소시누스주의에 매료당했던 한 목사에 의하여 회의주의에 처음으로 끌여 들어갔던 곳이다. 또한 성경 전체에 대해 주석을 쓴 매튜 헨리(Matthew Henry)가 한때 목회했던 이 예배당은 오랫동안 '완전히 발전한 소시누스주의'를 가르쳐 오고 있었다.

< Ibid. > 

쉰들러의 지적에 따르면, 침례교도들은 자기네 교회들이 내리막길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켄트 주에 있는 소시누스주의를 받아들였던 서너 교회를 거명했다. 도버(Dover)와 딜(Deal)과 윙햄(Wingham)과 얄딩(Yalding)에 있는 교회들이다.

그러나 쉰들러는, 이 규칙에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예외가 있다고 덧붙였다. 기꺼이 믿음을 위하여 싸우고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들을 지지하려는 이 교회들은 내리막길에 서 있는 교회들의 운명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쉰들러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내리막길을 (대조적으로) 두드러지게 뚜렷이 보여 주는 오르막길의 유일한 몇 가지 실례였다.

어떻게 성경을 믿는 그렇게 많은 교회들이 길을 잃었는가? 그리고 왜 이런 일은 인간 역사에 거듭 나타나는가? 쉰들러는 이런 질문을 제기했다. 

잘못된 길이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잘못 디딘 첫걸음이 있다. 우리가 잘못된 발걸음을 추적할 수 있다면, 잘못된 발걸음과 그 결과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왕의 진리의 대로'에서 갈림길은 어딘가? 잘못 디딘 첫걸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교리를 의심하는 것 혹은 저 지적인 정서를 긴가민가하는 것 혹은 정통 신앙의 다른 신조에 대하여 회의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심과 회의주의는 앞서 간 어떤 일의 결과이다.

< Ibid., 170. > 

그러면 그 '일'은 무엇이었는가? 내리막길에 접어들기 시작한 모든 사람의 공통 분모는 무엇이었는가? 

잘못 디딘 첫걸음은 성스러운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는 동안은 말씀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정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법에 따라 말씀에 따라"가 모든 가르침에 대한 그의 간절한 소원이다. 그는 그 거룩한 책이 모든 것에 관해 옳게 말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그래서 모든 그릇된 길을 미워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의심하게 하거나 그 영감과 권위에 대하여 저급한 생각을 품게 하라.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안내 지도와 기댈 언덕이 없다.

우리가 간략하게 써 왔던 시대들의 역사와 시대들의 운동을 조심스럽게 훑어 보면 이런 사실이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이 성경을 믿음과 실천에 대한 권위 있고 오류 없는 규칙으로 주셨다는 진리를 사역자들과 기독교 교회가 굳게 잡았던 곳에서는 사람들이 결코 올바른 길에서 그다지 심각하게 벗어나서 방황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로 이성을 계시보다 높이고 계시의 대표적인 내용으로 만들었을 때, 온갖 오류와 재난이 생겨났다.

< Ibid. > 

쉰들러는, 성경의 권위에 여전히 헌신하는 많은 사람들은 '많거나 적거나 칼빈주의 교리'를 택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칼빈주의 교리와 성경에 대한 고상한 견해의 상관성을 지적했다.

< Ibid. >

The Sword and the Trowel 지 같은 호의 '촌평란'에서 스펄전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체계로서 칼빈주의보다 핵심적인 복음 진리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주의가 사람들로 생명의 진리를 붙잡을 수 있도록 돕는 보존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 Ibid., 195. >

스펄전과 쉰들러에게 있어서 이 말은, 성경에 대한 고상한 견해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상한 견해와 나란히 간다는 뜻을 분명히 담고 있다. 더욱이 쉰들러가 지적했듯이, 건전한 교리를 굳게 붙잡는 이 교회들은 건전하고 번성했고, 소시누스주의를 받아들였던 교회들은 필연적으로 사그라들고 소멸되기 시작했다. 쉰들러는, 소시누스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지만 그런데도 자유주의 신학을 가지고 장난치는 목사들에게 경고의 말을 쓴 좁 오르턴(Job Orton) 목사의 말을 인용했다. 

(오르턴)은 이렇게 말했다. "그 후로 나는 사역자들이 따뜻하고 애정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복음 전도의 동기를 불어넣지 않고서 명랑하고 멋진 일들로 교인들을 즐겁게 하고 일반적인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데 급급하고 대개는 도덕적 의무를 내세울 때, 복음의 독특한 것들을 무시하고 우리의 구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의무를 행할 때 항상 하나님의 성령께 의지하여 도움과 힘을 얻어 거룩하게 되어야 할 필요성을 결코 혹은 거의 드러내지 않는 동안, 그들의 회중은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어떤 교회들은 이제 50년 전 수백 명씩 모이던 때보다 출석수가 적은 우리 이웃의 몇몇 교회들마냥 점점 줄어들고 있다......회중들 위에 섬뜩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들은 '이 세상의 길'로 달리며 온갖 유행하는 어리석은 짓을 따른다. 그리고 가정과 개인의 경건함이 그들 가운데 대체로 사라진 듯하다. 생명과 열정의 모습은 거의 없다."

< Ibid., 171-72. > 

쉰들러는 비꼬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오르턴은 '내리막길'의 어리석은 짓을 보고서 증언하고 다른 사람을 막으려는 데 열을 내었던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 Ibid., 172. > 

그런 후에 쉰들러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며 충분하다고 호소하며 그 기사를 끝맺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사람들과 사람들의 견해를 제쳐놓고 영원히 굳게 선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사자의 일을 하고 사람들에게 주의 메시지를 말하는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말을 가진 자, 그로 하여금 나의 말을 신실히 전하게 하라. 알곡에 비하면 가라지는 무엇인가 하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의 노력이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을 아는 만큼 주의 일에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풍성하도록' 도우신다.

< Ibid. > 

이런 말로 두 기사는 끝맺었다.

쉰들러는 The Sword and the Trowel 지 6월호에 세번째 기사를 추가로 썼다. 6월호에 실린 세번째 기사는 뉴욕 앤도버(Andover)의 앤도버 신학교 교수와 관련된 미국 이단 재판에 대한 분석을 담았다. 앤도버 신학교는 일찍이 하버드 대학의 소시누스주의에 반대하여 약 100년 전에 설립되었다. 쉰들러는 앤도버의 설립자들이 "코튼 매더(Cotton Mather)식의 건전한 칼빈주의자였고, 그 대학은 그런 믿음으로 사람들을 훈련할 특별한 목적 때문에 세워졌다"

< Robert Shindler, "Andover Theology," The Sword and the Trowel, Vol. 23(June 1887), 274. >

고 썼다. 쉰들러는 "이제 교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다섯 신사"들이 "설립자의 믿음에서 심각하게 떠났다"는 이유로 비난했다. 그들은 속임수로 그렇게 한다고 쉰들러는 말했다. 그들은 이 학교의 교리 성명서에 서명하고서는 이제 누군가가 '진보적 정통 신앙'이라고 이름 붙인 자신들의 가르침으로 그 교리를 손상시켰다. 쉰들러는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평가했다. "실로 그 진행(progression)이 어찌나 빠른지 '정통 신앙'이 보이지 않는다."

< Ibid. >

쉰들러는 이어서 이 사람들이 가르치는 이단을 기록했다. 이 이단은 19세기 말에는 미묘하게 보였지만 사실상 믿음에서 심각하게 변절한 것이었다.

쉰들러는 앤도버의 재난을 내리막길의 위험에 대한 실물 교육으로 보았고, 주저하지 않고 미국 침례교도를 실례로 사용하여 영국 침례교 연맹이 그런 길을 향하여 내려가고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석 달 후 찰스 스펄전은 '내리막길'에 관하여 글을 썼다. 논쟁은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리막길 Ⅲ 

The Sword and the Trowel 지 8월호는 스펄전이 쓴 '내리막길에 관한 또 하나의 말'(Another Word Concerning the Down-Grade)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의 어조는 쉰들러보다 더 절박했다. 좀더 일찍이 실린 기사들은 두 가지 반응을 분명히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즉 쉰들러의 분석이 너무 비관적이라고 믿는 사람들로부터는 불쾌감을, 영국 복음주의에 나타나는 동향에 관하여 함께 괴로워했던 사람들에게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쉰들러의 경고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전에 건전하던 교회에 배도와 타협이 있다는 증거를 더 많이 제공하는 반응을 보였다. 스펄전은 이 반응을 읽고 화가 치밀었다. 어떤 사람은, "비가 오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해서 두 사역자는 자기를 조롱했다"고 소식을 알렸다. 한 여인은 "위로를 주었던 이사야의 고귀한 언약을 자기 교회 사역자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고 스펄전에게 말했다.

< "Another Word Concerning the Down-Grade," The Sword and the Trowel(August 1887), 399. >

The Sword and the Trowel 지의 편집부는 그런 이야기로 가득했다.

첫 문단부터 스펄전의 어조는 쉰들러의 앞선 기사들보다 훨씬 전투적이고 강했다. 처음 두 기사가 실리고 여러 주가 지나서, 스펄전은 The Sword and the Trowel 지가 '내리막길'의 비중을 낮게 평가했다고 느끼게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엄숙한 확신은, 많은 교회의 사정이 보는 것과 달리 훨씬 심각하고 급속히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비국교도 브로드 스쿨(Broad School of Dissent)의 생각을 대변하는 신문들을 읽고 이렇게 스스로 질문해 보라. 그들이 얼마나 더 멀리 나갈 수 있을까? 어떤 교리가 계속 버림을 당하고 있는가? 다른 어떤 진리가 경멸의 대상이 될까? 새 종교가 시작되었지만, 분필이 치즈가 아니듯이 이 새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리고 이 종교는 도덕적 정직성이 없으므로 약간 손질하여 스스로를 옛 믿음으로 가장하여 소개하고, 그런 구실로 복음 전파를 위하여 세워졌던 강단을 빼앗는다.

< Ibid., 397. > 

이 '새롭고 개선된' 기독교는 복음 전파의 자리에 오락을 들여놓고 있다. 스펄전은 많은 사람이 영화관의 가치관과 기법이 주님의 성전에 침투하도록 허용하면서 교회를 '극장'으로 만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스펄전은, 많은 교회가 더 이상 기도 모임을 갖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영적 열기가 줄어들고 회중은 드문드문해지고 복음을 위한 열정은 빨리 사라지고 있다. "애석하다. 많은 사람이 쇠퇴하는 (청교도 후기) 세대를 마취시킨 독잔으로 향하고 있다......'현대 사상'이라는 형식으로 된 '다른 복음'이라는 목숨을 노리는 코브라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사역자가 너무 많다."

< Ibid., 398. > 

그런 쇠퇴는 주로 누구 탓이었는가? 스펄전은 그것을 설교자 탓이라고 믿었다. "통탄할 노릇이다. 어떤 사역자들은 이교도를 만들고 있다. 스스로 공언한 무신론자는 의심을 흩뿌리고 믿음을 공격하는 저 설교자보다 십분지 일도 위험하지 않다......독일은 설교자들 때문에 믿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영국은 독일의 전철을 밟고 있다."

< Ibid., 399. > 

스펄전은 모더니스트들을 경멸하는 말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다. "우리의 교회를 파멸하는 이 파괴자들은 해를 입고도 만족하는 원숭이처럼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조상이 한탄했던 일을 그들은 즐거워한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사역에서 가난하고 일편단심인 사람들을 따돌리는 일을 칭찬할 일로 받아들이고 신령한 마음을 품은 자들의 슬픔을 자신들의 능력을 입증하는 증거로 본다."

< Ibid., 399-400. > 

이와 같은 노골적인 태도에 넌덜머리가 난 사람들에게 스펄전은 이렇게 썼다. "약간 분명하게 말해도 바로 지금 유익을 끼칠 것이다. 이 신사들은 혼자 있기를 원한다. 그들은 잡음을 일으키기를 원치 않는다. 물론 도덕은 망 보는 개를 싫어하고 흑암을 좋아한다. 누군가 소란을 일으키고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에게서 사람의 소망을 없애는 방법에 관심을 촉구해야 할 때이다."

< Ibid., 400. > 

이 기사 끝에서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공격했다. 이것은 이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것으로 그후에 이루어진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이제는 전에 성도들에게 전해졌던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 다른 복음으로 돌아선 사람들과 얼마나 친하게 지내야 하는지가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할 말을 주장하고, 분열은 괴로운 해악으로 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떠나고 있는 자들과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 일인가? 균형 있게 의무를 행하기 위해서는 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이다. 당분간 신자가 주를 배반한 사람들을 지지하고 원조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라건대 모든 경건한 사람이 더욱 많이 하게 되기를 바라는 일, 곧 진리를 위하여 교파적 제한의 경계를 모두 뛰어넘는 일과, 교파의 번영과 통일을 위하여 진리를 유지하도록 우리를 부추기려 하는 정책은 전혀 다른 것이다. 대수롭잖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영리한 사람들과 선량한 형제들이 범한 오류라면 못 본 체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탁월한 점을 너무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마다 스스로를 판단하게 하라. 그러나 우리로서는 새로 몇 개의 빗장을 우리 문에 질러 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사슬을 늦추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왜냐하면 종과 우정을 맺어달라고 간청하는 구실로 주인의 것을 훔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 Ibid. > 

스펄전은 이제, 참된 신자는 새 신학을 선포하는 사람들과 맺고 있는 조직적인 끈을 끊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넌지시 말한다. 그의 평가에 따르면 말씀의 진리는 타협에 의하여 너무 심각하게 손상되었으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린도후서 6:17의 명령을 살펴야 한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이는 새 교파를 만들라는 요청이 아니다. 분명히 스펄전은 이 땅의 조직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고백과 믿는 것이 따로 놀 만큼 비천한 사람들을 안에 들이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언제나 만드는 것이 가망 없는 일이 아닐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조상들의 기독교를 붙잡는 모든 사람들이 격의 없이 결연을 맺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할 능력이 거의 없겠지만, 적어도 침묵의 공모에 연루될 일에 항거하고, 할 수 있는 한 그런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만일 잠시 복음주의자들이 질 수밖에 없다면, 싸우다가 죽게 하라. 그리고 '현대 사상'의 지어낸 이야기가 꺼지지 않는 불에 타 없어질 때 그들의 복음이 부활할 것이라는 온전한 확신을 갖고서 그리하라.

< Ibid. > 

이 기사는 복음주의 세계를 흔들어 놓았다. 수십 년 동안 거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에게 존경을 받아 왔던 스펄전은 갑자기 자기 진영에서 비판가들에 의하여 포위되었다. 그가 제안하고 있던 것은 복음주의 사상의 합의 내용과 정반대였다. 모든 동향은 통일과 조화와 융화와 형제 관계를 지향했다. 갑자기 참된 신자는 분리자가 되라고 촉구하는 외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가장 영향력 있는 목소리였다. 교회는 그런 충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심지어 이 설교자의 왕자에게서도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내리막길 Ⅳ 

스펄전은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하고 그다지 불평을 심하게 하지 않은 몇몇 형제들로부터 변호의 말을 들었지만, The Sword and the Trowel 지 9월호에서 더욱 강렬하게 공격했다. 스펄전은, 앞의 기사들에 대한 독자의 반응이 자신의 입장을 옹호한다고 믿었다. 편지들이 쏟아져 들어와 그의 가장 심한 주장을 더 힘있게 만들었다. 사실 스펄전은 이제 자신의 경고가 너무 약하고 때 늦은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하였다.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우리는 시온에서 심해지는 시대 악에 관하여 경고의 목소리를 냈고, 그것이 그다지 빠른 조치가 아니었다는 증거를 넘치도록 받았다. 사방에서 온 편지는, 오늘날 교회의 형편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하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과장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고 훨씬 두려운 광경을 보여 주는 데 틀림없이 옳았던 것 같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슬퍼하게 된다. 우리가 잘못된 말을 잘 알고 있었다면, 진정으로 회개하는 고백으로 생각을 바꾸었을 것이며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고는 기뻐했을 것이다. 비난하는 것은 우리에게 기쁜 일이 아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과 적대적인 듯이 보이는 것은 우리 마음에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니다.

< "Our Reply to Sundry Critics and Enquirers," The Sword and the Trowel(September 1887), 461. > 

비판가들은 스펄전의 비난에 대답하기는커녕 그 비난이 모호하다고 선언했다(물론 쉰들러와 스펄전은 전혀 모호하지 않았다). 스펄전은 이제 재발하는 신장병과 싸우고 있었고 강단에 서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내리막길 기사들이 처절하게 병든 어떤 사람의 폭언이라는 느낌을 은근히 주었다. 분명 스펄전은 그런 주장 때문에 개인적으로 슬펐다. 

우리의 적수들은 우리의 병든 상태를 조소하듯 암시하는 일을 시작했다. 우리가 써 온 모든 엄숙한 일들은 우리의 고통에 대한 암시이며, 우리는 휴식을 오래 취하라는 충고를 받는다. 그들은 동정하는 체하지만 실제로는 무례하게 진리의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지적함으로써 진리를 손상하려 했다. 이 하찮은 일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할 말이 많다. 첫째로 우리의 기사는 우리가 힘이 펄펄 넘치는 건강할 때 쓴 것이며, 병이 날 조짐이 보이기 전에 인쇄되었다. 둘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인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이 달리더라도 인간성을 들먹거려 공격하는 일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 Ibid., 462. > 

스펄전의 적수들은 인격을 들어 스펄전을 공격했다. 물론 스펄전과 쉰들러는 인격을 비난의 주제로 삼지 않으려고 지극히 조심했다. 더욱이 스펄전의 적수들은 스펄전이 비난하는 핵심을 완전히 무시했다. "우리의 주장이 그르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스펄전은 썼다.

< Ibid., 461. >

스펄전의 비난을 조금이라도 부인한 사람은 없었다. 사실 아무도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비난을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사실 영국의 복음주의는 내리막길에 서 있었다.

스펄전은 자신이 전한 설교의 특징인 생동감 넘치는 심상을 사용하면서 이렇게 썼다. "집은 도둑 맞고 그 벽은 패어져 내려앉았지만 침대에 있는 선한 사람들은 따스함을 너무 좋아하고 머리가 깨어질까봐 너무 두려워 아래층으로 내려가 밤도둑과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들은 어떤 시끄러운 동료가 소란을 피우고 '도둑이야' 하고 소리치지 않을까 짜증낸다."

< Ibid., 465. > 

스펄전은 자기 생각에 복음을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과 교제를 끊는 일에 관하여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좀더 분명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 동안 스펄전은 침례교 연맹에서 가장 돋보이고 영향력 있는 회원이었다. 하지만 이제 스펄전은 양심의 문제로 연맹을 탈퇴하는 일을 심각하게 숙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날이 지나갈수록 갈라서는 문제가 좀더 분명해지고 있다. 성경을 믿는 사람과 성경을 저당 잡아 진보하려고 준비하는 사람 사이에는 틈이 벌어져 있다. 영감과 사변은 오랫동안 화평을 이루며 거할 수 없다. 거기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영감을 붙잡으면서 그것을 거부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속죄를 믿으면서 그것을 부인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타락 교리를 지지하면서 영적 생활이 인간 본성에서 진화한다고 말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회개하지 않는 자의 형벌을 인정하면서 '좀더 과장된 소망'에 빠질 수 없다. 이 길 아니면 저 길로 가야 한다. 결정은 시간의 요청이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선택했을 때는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과 교제를 유지할 수 없다.

< Ibid. > 

스펄전은 침례교 연맹의 복음주의적 지도자들이 개혁을 바라는 자신의 관점과 선택을 보기를 분명히 바랐다. 침례교 연맹은 어떤 교리 성명서를 고수하는 일을 결코 요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 연맹의 회원들이 모두 복음주의자라는 사실은 크든 적든 전제되어 왔다. 그러므로 회원이 되는 데 필요한 유일한 교리는 세례의 양태와 관계 있었다. 스펄전은, 그것은 진리를 침해하는 것을 막는 충분치 못한 방비책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회원들은 교리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새로운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침례교 연맹에 호소했다.

스펄전을 놓칠 수 있고 그러지 않으려니 연맹이 분열될 것이 확실한 상황에 맞닥뜨린 교파의 지도자들은 타협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펄전은 타협하기를 거절했다. 

좁은 길을 계속 갈 사람은 그 길을 계속 가게 하라. 그리고 자신의 선택을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하라. 그러나 동시에 넓은 길을 따르기를 바라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다.

여태까지 우리는 왔으니 잠시 쉬자. 한 마음이 된 우리는 이스라엘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기 위하여 주님을 모시자. 굳건한 믿음으로 우리의 태도를 취하자. 화를 내거나 의혹이나 분열의 정신이 아니라 경계하고 결연한 태도로 그리하자. 아무 느낌을 받지 못하면서 교제를 나누는 체하지 말고 우리 가슴에 불타고 있는 확신을 숨기지 말자. 시대가 위험스러우므로 모든 신자가 해야 할 그런 책무는 마땅히 져야 할 짐이다. 그 짐을 지지 않으려면 배신자가 된다. 각 사람의 평화의 길이 어떠해야 할는지는 주님이 그에게 분명히 알게 하실 것이다.

< Ibid. > 

스펄전은 이렇게 기사를 마쳤다. 그는 도전했다. 그의 지성과 마음은 정해졌다.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내리막길 V 

The Sword and the Trowel 지 10월호는 내리막길에 관한 스펄전의 세번째 기사를 실었다. '입증된 사례'(The Case Proved)라는 제목에 대개가 앞서 실린 기사에 대한 반응으로 스펄전이 받은 편지와 비평에서 뽑아 낸 인용문으로 구성된 기사였다. 이 인용문은 두 범주로 나누어졌다. 첫번째 범주는 논쟁을 폭풍우의 전조로 보고 폭풍우를 잠잠하게 하기를 바랐던 독자들의 글이었다. 스펄전은 그들을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싸울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평화, 평화'를 계속 우리의 모토로 삼아야 한다고 선언하기를" 원했던 '존경 받는 친구들'이라고 특징지었다.

< The Sword and the Trowel(October 1887), 509. >

스펄전은 그런 사람들은 "지나치게 우호적이어서 모든 것을 색유리 안경을 통해서 본다"고 비난했다.

< Ibid., 510. > 

두번째 범주는 어두운 상황에 대한 스펄전의 평가를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인 반응들을 담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칭 복음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있는 타협과 그릇된 가르침의 구체적인 예들을 서술했다.

다시 스펄전은 이렇게 질문했다. "정통 신앙을 고수하는 형제들이 그런 의견을 주장하고 가르치는 자들과 더불어 계속 연합함으로써 그런 가르침을 기꺼이 보장해 주려 하는가?"

< Ibid., 513. >

스펄전은 침례교 연합이 셰필드(Sheffield)에서 갖는 연례 가을 모임에서 이런 사안들을 채택할 것으로 믿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나타냈다. 

우리는 우리보다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취할지를 결정하도록 맡긴다. 우리에게는 한 가지 일이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가 고귀하게 붙잡는 것과 정반대의 근본 요점에 서서 가르치는 자들을 포함하는 그 어떤 연맹에 참석할 수 없을 것이다......우리에게는 타협이 가능한 일이 많아 보이지만, 교제를 나누는 체하여 배신의 행위가 되고 마는 일이 있다. 깊은 유감을 품고 우리가 깊이 사랑하고 마음으로 존경하는 사람들과 모이는 일을 자제한다. 왜냐하면 그들과 모이게 되면 우리가 주님 안에서 아무런 교제를 가질 수 없는 자들과 연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Ibid., 515. > 

그러나 셰필드에서는 이 사안이 결코 제기되지 못했다. 

연맹 탈퇴 

1887년 10월 28일 스펄전은 침례교 연맹의 사무총장인 사무엘 해리스 부스(Samuel Harris Booth)에게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친구에게

침례교 연맹 사무총장인 당신에게 내가 연맹을 탈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나는 더할 수 없는 아쉬움을 품고 탈퇴합니다. 하지만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탈퇴하는 이유는 The Sword and the Trowel지 11월호에 적어 놓았지만 여기서 다시 되풀이하는 것을 널리 양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누구를 보내어 재고해 달라는 부탁을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합니다. 이미 너무 오랫동안 생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시간이 지날 때마다 너무 지체했다는 확신이 마음을 짓누릅니다.

또한 개인적인 불쾌감이나 악의가 내게는 전혀 없음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바라던 것 이상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런 (연맹 탈퇴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오직 가장 높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는 더 나은 것을 바랐기 때문에 오랫동안 지체했던 것입니다. 경구(敬具).

C. H. 스펄전

< Cited in G. Holden Pike, The Life and Work of Charles Haddon Spurgeon, 6 vols.(London : Cassell and Company, n.d.), 6 : 287. > 

스펄전이 부스에게 편지를 썼을 때 이미 The Sword and the Trow-el 지 11월호에 글을 썼던 것이 분명하다. 스펄전은 "내리막길 논쟁에 관한 단상(斷想)"이라는 말로 기사를 시작했고, 이어 이런 말을 덧붙인다. "이제 우리 독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내리막길 논쟁에 넌덜머리가 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우리보다 십분의 일만큼도 그 논쟁에 싫증이 나거나 괴로움을 당했다 할 수 없을 것이다."

< The Sword and the Trowel(November 1887), 557. >

이 논쟁으로 스펄전은 연맹을 탈퇴해야 하는지 숙고하면서 생각도 감정도 진이 빠졌다. 그러나 스펄전은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느꼈다. 그로서는 복음의 적수들과 관계를 끊는 일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드러난 치명적인 오류와 교류하는 것은 죄에 참여하는 것이다."

< Ibid., 559. >

스펄전의 웅변력이 지닌 힘을 보면, 스펄전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분명히 우리는 이런 일들을 기독교 연합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 일들은 악에 끼어드는 공모와 같아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그 일들이 일호의 다른 측면을 지니지 않음을 두려워한다.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에 이 사실은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슬픈 현실이다."

< Ibid., 558. > 

스펄전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의 권위와 충족성을 의심하는 자들을 수용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이런 사람들이 그런 일을 믿는다면 그들로 그런 일을 가르치고 자신들을 위하여 교회와 연맹과 협회를 세우게 하라. 왜 그들이 우리 가운데로 와야 하는가?"

< Ibid., 559-60. > 

스펄전은 자신이 취한 행동 말고 달리 선택할 일이 없다고 느꼈다. "지난 달 동안 많은 사람이 걱정스럽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우리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에게 우리는 각자 스스로 주님의 인도를 찾아야 한다는 말밖에 달리 해줄 말이 없다. 우리는 지난 달 신문에 우리의 행동 방향을 알렸다. 우리는 즉시 그리고 명백히 침례교 연맹을 물러난다."

< Ibid., 560. > 

이 발표는 많은 독자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스펄전이 자신의 협박대로 밀고 나갈 것이라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평화와 통일을 기독교의 덕목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여겼다. 당대 영국 복음주의자 가운데 가장 돋보이고 인기 있는 찰스 스펄전이 분리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스펄전이 추구했던 길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스펄전과 침례교 연맹 

그러나 스펄전은 변덕스럽게 혹은 성급하게 탈퇴하지 않았다. 11월 23일 스펄전은 남부 프랑스에서 동료 목사 맥케이(Mackey) 씨에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편지를 썼다. "직원에게 전한 저의 개인적 항의와 전체 교회에 거듭 지적한 저의 호소가 쓸데없었기 때문에, 연맹을 떠나는 것이 제게는 당위였습니다. 저의 입장은 진지하게 탈퇴하는 것 말고 달리 취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 Letters of Charles Haddon Spurgeon(Edinburgh : Banner of Truth, 1992), 183. > 

맥케이에게 쓴 개인적인 이 편지를 침례교 연맹의 100인 협의회가 함께 읽었다. 이 사람들 가운데 80명이 12월 13일에 스펄전의 비난을 논의하기 위하여 모였다. 모인 사람 가운데 대부분은 스펄전의 비난과 이어진 스펄전의 연맹 탈퇴에 격분했다. 그들은 정확하지 못한 정보를 갖고서 비난했다고 스펄전을 비난했다. 그리고 연맹의 직원들은 스펄전이 '개인적 항의'를 하러 왔다거나 연맹의 교리 상태에 관한 어떤 관심을 표명했던 적이 없다고 딱 잘라 부인했다.

특별히 사무총장 부스는 더 잘 알고 있었다. 부스와 스펄전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연맹의 한탄스러운 상태에 관하여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사실상 부스는 스펄전으로 하여금 연맹에 마구 퍼지고 있던 모더니즘에 반대하여 목소리를 내라고 부추겼다. 분명 부스는 자기 생각에 정통 신앙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사람들의 이름과 광범위한 타협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스펄전에게 알려주기까지 했다.

< Lewis Drummond, Spurgeon : Prince of Preachers(Grand Rapids, Mich. : Baker, 1992), 671. >

그러나 부스는 자신들의 서신 교환에 관하여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스펄전에게 다짐을 받았다. 스펄전이 자신의 편지를 곧 폭로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부스는 이렇게 썼다. "당신에게 쓰는 저의 편지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비밀리에 쓰는 것입니다. 명예상의 이유로 당신은 그 편지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 Ibid., 697. > 

협의회 의사록을 보면, 부스는 스펄전과 자신이 나눈 대화의 성격에 관하여 협의회 회원들이 잘못 생각하게 했다. 부스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스펄전 씨와 나눈 모든 대화는 이 협의회에 제출하기 위하여 형제들에 대한 고소장을 작성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펄전 씨가 대화로 나눈 일들을 여기 제출하여 고발문으로 작성할 의도가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 Ibid. >

이것만 놓고 엄격하게 말하면 이것은 참말이었지만, 사건의 전모와 거리가 멀었다. 뭐니뭐니 해도 부스는 염려하며 스펄전을 찾아간 맨 처음 사람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대화는 듣고 흘려 버릴 이야기와 거리가 멀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부스는 이 위대한 설교자가 연맹의 동향에 관하여 갖고 있었던 깊은 우려를 잘 알고 있었고, (스펄전이 믿기로는)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스를 포함하여 침례교 연맹 협의회가 스펄전이 진리를 잘못 전한다고 고소했을 때도, 스펄전은 자신들의 서신 교환을 비밀로 붙이기를 바라는 부스의 소원을 존중했다. "스펄전은 부스가 보낸 서신을 제출하여 연맹 직원들과 자신이 사전에 얼마나 상의했는지 간단하게 입증할 수 있었다."

< Iain Murray, The Forgotten Spurgeon(Edinburgh : Banner of Truth, 1966), 145. >

그러나 부스가 고소자가 된 마당에도 스펄전은 욕설과 그릇된 고소를 감내했다.

"부스 씨가 내가 결코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말하니 놀랍구려. 하나님이 그 점에 관하여 다 알고 계시며 내 입장이 정당화 되는 것을 보실 것이오" 하고 스펄전은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 Susannah Spurgeon and J. W. Harrald, eds., C. H. Spurgeon's Autobiography, 4 vols. (London : Passmore and Alabaster, 1897), 4 : 257. > 

그러나 한 전기 작가가 지적했듯이 "스펄전은 결코 정당화되지 못했다. 많은 소식을 접하고 여전히 받는 인상은, 그가 입증될 수 없는 비난을 했고 증거를 제출하라고 적절한 요청이 있었을 때 포기하고 내뺐다는 것이다. 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스펄전은 부스 씨의 편지를 제출했을 것이다. 내 생각으론 그가 그렇게 했음에 틀림없다."

< J. C. Carlisle, C. H. Spurgeon-An Interpretive Biography(London : Religious Tract Society, 1933), 247. > 

침례교 연맹 협의회는 스펄전이 먼저 불만 있는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찾아가지 않음으로써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교훈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스펄전은 아내에게 보내는 다른 편지에서 그 비난에 이렇게 대답했다. "마태복음 18:15에 따라 내가 이 형제들을 개인적으로 찾았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겠소? 나는 사무총장과 의장을 여러 번 만났소. 그런 후에 나의 불평에 관하여 글을 써 냈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을 때 연맹을 떠났을 뿐이오."

< Autobiography, 4 : 256. > 

스펄전은 침례교 연맹 의장인 제임스 컬로스(James Culross) 박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이전에 의장과 사무총장을 만남으로써 개인적 항의에 관한 우리 주님의 생각을 따랐으며, 여러 번 항의문을 썼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저는 탈퇴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확실히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가 오류를 고집하고 선전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려고 돌아다녀야 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게는 그 사람들에 대하여 관할권이 없으며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갔다면 틀림없이 기분 상하게 하는 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렇습니다. 나의 문제는 연맹과 관계 있으며, 사실 연맹과만 관계 있습니다. 나는 줄곧 연맹과 상대해 왔습니다.

< Ibid., 4 : 263. > 

협의회는 마태복음 18장 문제를 제기하고 스펄전이 연맹 지도자 앞에서 자신의 관심을 제대로 제기하지 않았다고 비난함으로써 진짜 문제를 명백하게 회피하고 있었다. 그들은 스펄전을 만날 네 사람의 대표자를 파견하자고 제안하고 스펄전에게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지만 영국에 와 달라고 편지를 썼다. 스펄전은 영국에 돌아갈 때 그 사람들을 만나겠다고 말하고 사양했다.

스펄전은 협의회의 반응을, 자신을 문제로 삼고 연맹 내의 교리적 동향을 논쟁에서 제외시키려는 명백한 시도로 보았다. 더욱이 스펄전은 자신의 공격이 개인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했다. 그리고 이제 협의회는, 스펄전이 구체적인 이름과 세부 사항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비난이 자신들에게 너무 모호한 일이라 언급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스펄전의 공격을 개인적인 것이라 하여 스펄전에 불리하게끔 써 먹고 있었다. 스펄전은 그다지 자신을 변호하는 느낌을 주지 않는 말로 연맹의 핵심 기관 편집장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침례교도(The Baptist) 지의 편집장 귀하

근계(謹啓)-그래야 할 대단한 중요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문제로 당신의 사설을 채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맥케이 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직원에게 전한 저의 개인적 항의와 전체 교회에 거듭 지적한 저의 호소가 쓸데없었기 때문에, 연맹을 떠나는 것이 제게는 당위였습니다. 저의 입장은 진지하게 탈퇴하는 것 말고 달리 취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거짓이 아니며 부정확한 말도 아니었습니다. 레스터(Leicester)에서 고통스런 일이 일어난 후에(1883년 한 유니테리언주의 사역자가 그곳에서 침례교 연맹의 모임에서 설교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나는 사무총장과 의장 차운(Chown) 씨와 협의회 다른 회원들에게 진지하게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차운 씨는 고아원에서 친절하게 다가와서 그 일을 단독적인 사건으로 보아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오해했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이 문제를 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나는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 이후로 나는 사무총장(부스)에게 이 문제에 대하여 거듭 말했습니다. 그러니 그도 이 점을 기꺼이 인정할 것입니다. 내 생각으론 매년 사무총장이나 베인즈(Baynes) 씨가 침례교 연맹을 위하여 설교해 달라거나 연맹 모임과 관련된 선교 예배에서 설교해 달라고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이 선량한 간사들은 그와 같은 모임을 준비하는 동안 나를 찾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에게 말한 것을 양측에 이야기한 것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물론 이 모임에 공식적으로 참여하기를 거절한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임에 공식적으로 참여하게 되면 타협하였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이것은 단순한 말보다 더 크게 발언하는 행위입니다. 윌리엄스(Williams) 씨와 맥클래런(Maclaren) 씨와 상당히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 교환이 그 분들로서는 매우 탁월한 일이었습니다.

내 친구 윌리엄스 씨는 나의 편지가 '개인 편지'로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맥케이 씨에게 말한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부스 씨는 나의 의사 전달이 자신에게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일로 보지 않았고, 나도 부스 씨에게 그렇게 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부스 씨에게 불만을 표시했고, 반면에 나는 침례교 연맹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에 끼어듦으로써 그 문제와 나의 판단에 대해 타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중도(中道)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협의회 회원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저런 때에 내가 말한 것을 듣고 나의 견해와 감정을 아는지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으려 합니다만 맥케이 씨에게 한 말은 그 정당한 사유를 충분히 대겠습니다. 

이 문장의 첫째 절만 택하고 나머지("전체 교회에 거듭 지적한 저의 호소")는 빼버림으로써 그 절이 내가 의도했던 것보다 두드러지게 된 것을 주목하십시오. '내리막길'에 관한 나의 편지는 침례교 교파만 다루지 않습니다. 사실 나는 침례교가 다른 교파보다 훨씬 덜 오염되었다고 줄곧 인정해 왔습니다. 그러나 침례교 사람들은 지금까지, 다시 출판된 기사들이 전체 사역자에게 제출되고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다고 염려했습니다. '침례 교파의 기관'은 이 문제를 '큰 구스베리'(big gooseberry)로 비유하고 셰필드로 가는 길에 어떤 사역자들은 이 사건을 '떠들썩한 농담'으로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모임을 여러 번 가졌지만 한 공식 모임 앞에서 저를 공격한 일 말고 공적으로 언급된 경우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모임에서 저는 답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개인이 언급한 친절하지 못한 표현에 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누구도 나의 호소가 주목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누가 나의 호소를 진지한 것으로 판단했다면, 그 사람은 그 호소를 협의회에 말하여 개인적인 말이 공적인 말이 될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언급한 방식대로 진리를 말하지 않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실은 "스펄전 씨가 한 말이 참된가?" 하는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스펄전이 그렇게 썼기 때문에 연맹 직원들이 협의회 앞에 이 문제를 제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끼게 된 것인가?" 하고 물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쉽사리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는 전혀 다른 주제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의도했던 것과 내가 의도했던 것이 다르다는 주장으로 질문자와 대답자와 다른 사람이 무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즉시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형제들의 회의로서는 슬픈 출발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고의로 진실되지 못했다고 비난하지 아니하고, 진리가 아닌 것을 말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아마 나의 정신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했겠죠.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우둔한 사람과 회담하려고 대표단을 파견하는 것은 시간 낭비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추론하지 않을 것입니다. 확신컨대 나는 인간성을 들먹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동기를 탓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와 회담하기를 요청한 존경하는 형제들에게 무례하게 보이지 않으면서 이와 같이 많은 말을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경구.

12월 19일, 멘턴(Menton).

C. H. 스펄전

< Cited in Pike, 6 : 292-93. > 

이 잡지는 스펄전의 편지를 전혀 싣지 않았다. 

침례교 연맹의 징계 

스펄전이 프랑스에서 연맹의 파견자들과 만나지 않으려 한 것은 그들이 자신을 까다롭고 완고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고 할 뿐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스펄전은 수잔나에게 이렇게 썼다. "이런 식으로 나를 보려고 네 명의 신학자가 오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구려. 나는 매우 당혹스러웠고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몰랐소.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모르오. 1시까지 잠을 자지 못했소......네 명의 신학 박사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오. 하지만 그들편에서는 매우 현명한 움직임이라 생각하고 있소. 차제에 그들이 포기하게 된다면, 다행한 일일 것이오. 그러나 나에게 화해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비난을 퍼부을 의도가 있다면, 문제는 다르오."

< Autobiography, 4 : 257. > 

1888년 1월 13일에 스펄전은 런던에 돌아와 태버너클 교회에서 연맹의 파견자들과 만났다. 여기에는 사무총장 부스, 은퇴하는 의장 제임스 컬로스, 차기 의장 존 클리퍼드(John Clifford)가 왔다. 임명된 위원단의 네번째 위원인 알렉산더 맥클래런은-이 사람이 스펄전에게 동정적이었을 것이다-병이 나서 참석하지 못했다.

< "Brief Notes," The Baptist(February 1888), 84. >

이 사람들은 스펄전에게 탈퇴를 다시 고려해 달라고 요청했다. 스펄전은, 연맹이 복음주의적인 신앙 진술을 채택할 것을 제의했다. 파견단은 거부했다. 어느 측도 이 모임으로 무엇을 이루었다는 느낌이 없었다.

5일 후에 전체 침례교 연맹 협의회가 다시 모였다. 이번에 그들은 투표하여 스펄전의 탈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런 후에 그들은 스펄전의 행동을 비난하는 결의를 통과시킴으로써 그를 징계하기로 결정했다.

놀랍게도 한편으로 기울어진 대다수는 그들의 가장 유명한 회원에 대한 징계에 찬성했다. 약 100명 가운데 5명만이 스펄전을 지지했다. 협의회는 이런 결정을 통과시켰다. 

협의회는 스펄전 씨가 탈퇴하기 전에 그리고 그 이후에 당 연맹에 대하여 퍼부은 비난이 매우 심각한 것임을 인정한다. 협의회는 이 비난을 말할 때의 공적 일반적 방법이 전체 교회를 비난하고 스펄전 씨만큼 진리를 소중하게 사랑하는 형제들로 의혹을 받게 한다고 본다. 그리고 스펄전 씨가 비난을 퍼붓기로 의도한 사람들의 이름과 그 비난을 지지하는 증거를 제출하지 않기 때문에, 협의회의 판단으로는 이 비난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

< Ibid., 85. >


그때 한 저술가 리처드 글로버(Richard Glover)는 복음주의 비국교도(Evangelical Nonconformist) 지에서 이 사안을 정확하게 평가했다. 

그들이 채택했던 방책은 연맹의 평화를 혼란스럽게 하는 책임을 스펄전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스펄전의 비난이 너무 모호하여 진지하게 조사할 가치가 없고 스펄전이 죄 있는 사역자의 이름을 들어서 자신의 비난이 정당함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방책이 정치적으로 아무리 유용하다 해도, 문제를 부정직하게 소홀히 대하는 일로밖에 볼 수 없다.

< Cited in Drummond, 700-1. > 

우리가 보았듯이, 사실 스펄전은 그 이름을 거명할 수 있었다. 스펄전은 부스의 편지를 제출하여 자신의 혐의를 벗고 부스로 이단자들에 맞서서 역시 증인의 역할을 맡지 않으면 안 되게 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스펄전은 동료 침례교도 가운데 몇 사람의 출판된 책을 간단히 인용할 수 있었다. "스펄전은 증거를 많이 갖고 있었다. Christian World 지와 Independent 지와 Freeman 지와 British Weekly 지와 Baptist 지에 실린 유명한 사람들의 말이 있었다. 1887년과 1888년 동안 이 잡지에 실린 목록들을 언급할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스펄전의 일반적인 비난이 진실되다는 것이 풍부하게 입증될 것이다."

< Carlisle, 248. > 

왜 스펄전은 복음주의를 저버린 자들의 이름을 간단히 언급하지 않았는가? 한 가지 예를 들면, 스펄전은 개인에 관하여 논쟁을 벌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 논쟁이 개인적인 싸움으로 퇴락할까 두려웠다. "우리가 인격을 걸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다면, 이들 존경받는 몇몇 저술가들의 다른 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들의 말이 이 저술가들이 지금 썼던 것과 모순되지 않으면, 그들의 모든 생각이 좀더 잘 알려지는 데 보충 내용이 될 것이다."

< "The Case Proved," 27. >

"이 싸움은 너무 개인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내가 개입하지 않으려 한 어떤 사건들은 내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문제를 계속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은 즐거움이 아니었다."

< "The Baptist Union Censure," The Sword and the Trowel (Febru-ary 1888), 83. >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름을 떠들어대는 것이 사안의 본질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스펄전이 느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침례교 연맹의 방책이었다. 스펄전이 지적했듯이, 침례교 연맹은 교리 성명서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고, 그러므로 그릇된 가르침을 전한 사람을 징계할 권위가 없었다. "이런 헌법에서는 세례를 맹세코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이단이 될 수 없다."

< Ibid., 81. >

그래서 스펄전이 이름을 들었다 해도, 연맹이 기꺼이 복음주의적 신앙 성명문을 채택하여 모든 회원이 그 성명문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 이단에 대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여태까지 연맹은 바로 이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스펄전은 내리막길 논쟁이 연맹의 일반 회원들을 동요하여 협의회가 그런 정책을 세우도록 요구하게 되기를 진실로 바랐다. 

마지막 타협 

스펄전 시대의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널리 퍼져 있는 여론은 '신조가 아니라 그리스도'였다. 신조와 교리 성명서는 아무튼 수준 낮은 기독교에 속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합법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성경 위에 어떤 신조를 높이는 일을 막아야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신조는 우상, 즉 참된 예배를 실제로 방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스펄전은, 신조가 참되다면, 즉 성경과 조화를 이루고 성경에 따른다면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지적했다. 

'신조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다'고 말하는 것은, 신조가 옳지 않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아무리 명확하게 말한다 해도 진리는 신자를 그의 주님과 갈라지게 하지 않는다. 나에 관한 한, 나는 내가 믿는 것을 가장 분명한 말로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붙잡는 진리를 나는 가슴에 껴안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 진리가 오류 없는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떻게 진리가 나와 그 진리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나눌 수 있는가? 내가 하나님은 물론이고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내가 알기로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것에 나의 지성을 복종시키는 것은, 내가 나의 주님과 교제하는 한 가지 방도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건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받아들인다. 그 점에서 나의 가장 깊은 영혼의 겸손한 예배를 드린다.

나는 신조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동조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스스로 잘못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신조를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신조를 갖고 있다는 말을 거부하지만 틀림없이 갖고 있다. 그의 불신은 어떤 의미에서 신조이다.

신조에 대한 반대는 권징을 슬그머니 반대하고 자유주의를 바라는 매우 구미에 맞는 방법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노아의 방주처럼 정결한 것이나 불결한 것이나, 기는 것이나 나는 새나 모두에게 은신처를 제공할 연맹이다.

< Ibid., 82. > 

19세기 말 영국의 신학적 분위기에서는 누구나 스펄전이 할 말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펄전의 비난이 있은 후에야, 연맹 협의회는 4월 23일 총회 모임에서 신조의 사안을 다루어야 할 것임을 알았다.

스펄전은 연맹 총회에 대하여 희망을 걸지 않았다. The Sword and the Trowel 지 4월호 '촌평'란에 스펄전은 이렇게 썼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침례교 연맹은 4월 23일에 전체 총회로 모이며, 그러면 "이 연맹은 복음주의적 기초를 가져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중대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우리는 이 질문이 기분 좋게 논의될 것이며 그 결정은 올바른 것이 될 것으로 믿는다. 확실히 다른 기독교 교회가 자신의 신앙을 맹세하듯이, 침례교 연맹도 그렇게 해야 한다. 연맹의 신념이 무엇이든지, 연맹이 신념을 가지게 하라.

< Ibid., 197-98. > 

스펄전은 무엇보다 명료함을 호소했다. 그는 침례교도 지 편집자에게 이런 말을 담은 편지를 써 보냈다. "협의회가 무엇을 하든, 무엇보다도 그것이 서로 모순되는 두 의미를 합법적으로 가질 수 있는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분명하고 솔직하게 말합시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그 차이를 시인합시다."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March 1888), 148. > 

아이언 머리(Iain Murray)의 말을 보면, "이것이 협의회가 따르지 않았던 바로 그 정책이었을 것이다."

< The Forgotten Spurgeon, 147. >

협의회는 4월 연맹 총회가 열리기 전에 모여서, 간단한 성명서를 준비했는데, 다소 모호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복음주의적 교리 성명서였다. 하지만 이 성명서를 총회 모임에서 읽었을 때, 연맹이 회원에게 교리 성명서를 강요할 아무런 권위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더욱 나쁜 것은 부활과 최후 심판에 관한 구절에 대해서 '연맹에 속한 형제들은......보편적인 해석을 지지하지 않았다' 하는 각주가 붙은 점이다.

< Cited in Drummond, 704. > 

그런데도 총회에 참석한-스펄전의 동생 제임스를 포함하여-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낭독된 이 성명서가 받아들일 만한 타협으로 믿었다. 확실히 연맹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신 신학'의 지지자인 찰스 윌리엄스(Charles Williams, 유명한 소설가 찰스 윌리엄스와 다른 사람임)는, 총회가 타협한 그 성명서를 채택할 것을 동의했다. 윌리엄스는 자유주의 사상을 열정적으로 변호할 기회를 잡았다. 제임스 스펄전은 "윌리엄스 씨의 결심은 지지했지만 그의 연설은 지지하지 않았다."

< "A Welcome Conclusion," The Baptist(May 1888), 230. >

침례교도 지는 이렇게 보고했다. "스펄전 씨의 연설은 진지하고 용기 있고 씩씩하여 청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후에 있었던 투표에 실질적으로 만장 일치의 찬성을 얻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 Ibid., 231. >

이 결정은 2,000 대 7로 통과되었다.

헨리 오클리(Henry Oakley)라고 하는 한 사람이 그날 거기에 있었다. 수년이 지나 그 사람은 청중석에 일어난 큰 소란을 상기했다. 

그 동의안이 제출되고 지지를 받아 통과되었을 때 나는 시티 템플(City Temple)에 있었죠. 아마 시티 템플은 사람이 들어 찰 대로 가득 찼을 겁니다. 일찌감치 그곳에 갔지만 뒤쪽 회랑 복도에 '입석'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설을 들었죠.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연설은 찰스 윌리엄스 씨의 연설뿐입니다. 그 사람은 테니슨(Tennyson)의 말을 인용하여 자유주의 신학과 의심의 정당성을 옹호했습니다. 투표의 순간이 왔습니다. 회의실에 있는 사람만 총회의 회원으로 투표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징계 동의안이 제출되었을 때, 숲의 나무처럼 손들이 빼꼼히 위로 올라왔습니다. 의장 클리퍼드(Clifford) 박사가 '반대하는 사람은 손 드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올라온 손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만, 역사 기록을 보니 일곱 명이 손을 들었더군요. 찬반 수를 알리지도 않았는데, 많은 총회 회원은 별안간 소란스럽게 환호하기 시작하더니 그러길 계속 했습니다. 나이든 몇몇 사람들이 억제되었던 적대감을 표출할 구실을 발견했습니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자기들 말로 '반계몽주의의 구속'(obscurantist trammels)에 대하여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그전에는 보지 못한 장면이었죠. 그것을 보았을 때 눈물이 나려 했습니다. 저는 '스펄전의(대학) 사람' 곁에 서 있었는데, 제가 잘 알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스펄전 씨는 아주 낮은 곳에서 이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위대하고 관대한 스승에 대한 이런 징계를 접하고 즐거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정말 이상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총회 회원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지도한 가장 위대한 고상하고 탁월한 지도자에 대한 징계를 접하고 그토록 미친 듯이 즐거워하다니 말입니다.

< Cited in Murray, 149-50. > 

하지만 그날 참석한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오클리만큼 분명하게 보지 못했던 것이 거의 틀림없다. 그들은 그 투표를 스펄전에 대한 또 하나의 징계로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히 제임스 스펄전은 그 동의안을 지지했을 때 자기 형에게 모욕을 주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날 그곳에 참석한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처럼 제임스는 화해하려는 열망이 너무 커서 그 교리 성명서가-아무튼 어떤 성명서든지-자기들 편의 승리를 뜻하는 것으로 잘못 믿었다.

찰스 스펄전은 달리 생각했다. 그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내 동생은 승리를 얻은 줄로 생각합니다만, 나는 우리가 가망 없게 팔렸다고 믿습니다. 마음이 무너지는 듯합니다. 동생은 내가 해야 했던 것과 정반대의 일을 했던 것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동생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생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 내린 판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 Ibid., 148. > 

사건의 여파 

홀던 파이크(G. Holden Pike)는 이렇게 썼다. "그 일의 결과가 입증했듯이, (총회 투표로) 얻은 평화는 많은 사람이 예상하던 지속적인 평화는 아니었다. 연맹과의 불화는......결코 회복될 수 없었다."

< Pike, 302. >

찰스 스펄전이 줄곧 경고했듯이, 복음의 원수와 타협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침례교 연맹의 쇠퇴는 심해졌다. '신 신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연맹 총회 후에 대담해졌다. 이제 그들은 연맹의 권력을 쥐었다.

스펄전은 이렇게 썼다. 

각주와 동의자의 해석과 옛 협의회의 재선거와 아울러 그 결정은 모든 사람이 가장 기분이 좋았을 때 이루어질 가장 심한 일을 잘 대변한다. 그것이 만족스러운가? 다른 어떤 사람과 같은 의미로 그 결정을 이해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 일에 덕스러운 것이 있다면 양측을 약간 즐겁게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양측을 약간 즐겁게 하는 이것은 그 일의 해악이며 그 일에 대한 정죄가 아닌가?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June 1888). Reprinted in The "Down Grade" Controversy(Pasadena, Tex. : Pilgrim, n.d.), 56. > 

스펄전은 총회 모임에서 투표했던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알아챘다. 그것은 최후의 수정 내용이 교리 성명서를 갖고 있다는 사실 전체를 완전히 부정했다는 사실이다. 

언급한 요점들은 확실히 아주 기본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하나님이여 이 일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도우소서. 그들은 어디 있어야 하겠나이까?" 하고 외쳤던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사실 작성된 진술에는 별로 반대가 없었고, 이 진술들을 회원 자격에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 것에 반대가 있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님이 단순히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우리의 교제에서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속죄를 믿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이 대속을 거부한다 해도, 그도 우리의 회원에서 제거되어서는 안 됩니다."

< "Attempts at the Impossible," The Sword and the Trowel (Decem-ber 1888), 618. > 

스펄전은 분열을 싫어했다. 그는 나누어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양심상 복음의 원수와 손잡을 수 없었다. 결국 스펄전은 연맹을 탈퇴하는 것이 실제로 참된 통일을 촉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대개 거짓된 자들과 결별하는 것보다 참된 자들과 연합을 촉진시키는 것은 없었다."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May 1888). Reprinted in The "Down Grade" Controversy, 55. > 

스펄전은 분열이 자신을 위한 성경적인 필연성이라고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던 말던 나는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라는 본문에 힘입어 연맹과 협의회를 단번에 떠났다......나의 확신 때문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악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니고서 악을 상대하려는 시도는 완전히 쓸데없는 일이라는 체험 때문에 나는 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June 1888), 56. > 

스펄전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연맹에서 끄집어 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왜 성경에 신실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명백하게 내리막길로 그토록 질주하고 있는 조직에 계속 속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많은 선한 형제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복음을 침해하고 있는 자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주께서 나타나실 날에 인정하실 사랑스러운 처사인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복음의 근본문제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향한 참된 신자의 반드시 완수해야 할 의무는 그들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만일 개혁을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말에 동감이다. 그러나 그 노력이 쓸데없으리라는 것을 아는데 해봐야 무슨 소용 있는가? 교제의 기초가 오류를 허용하고 사실상 오류를 불러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고 그런 기초를 바꾸지 않으려는 명백한 결심이 있는 곳에서는 내부에 근본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복음주의적 당파 내에서 벌이는 활동은 그 악을 당분간 누르고 숨길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그 타협으로 죄가 저질러지고, 영구적으로 선한 결과가 따를 수 없다. 문제를 바로 해결하려는 소망에서 모든 신념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에 남아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온 가족을 회개시키려는 소망에서 우르나 하란에 머무는 것과 같다.

아주 탁월한 사람이라도 오류와 손잡으면 오류를 성공적으로 항거할 수 있게 하는 힘을 빼앗길 것이다......지금 우리의 슬픈 항거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의 문제 혹은 이 오류나 저 오류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이다.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October 1888). Reprinted in The "Down Grade" Controversy, 66. > 

내리막길 논쟁은 1892년 1월 31일 스펄전이 죽는 순간까지 계속 그의 슬픔이었다. 친한 친구들과 심지어 자신의 목회자 대학(Pastors' College)을 졸업한 몇몇 학생까지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나 끝까지 스펄전은 자신이 취한 태도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스펄전과 그의 초기 전기 작가들로서는 내리막길 논쟁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확실히 어려웠다. 스펄전의 마지막 시대에 이 논쟁은 어찌나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지 이를 지켜 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펄전이 취했던 입장이 실제로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스펄전은 국제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모더니즘에 전쟁을 선포하는 최초의 복음주의자였다. 침례교 연맹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교파간의 모임인 복음주의 연합(Evangelical Alliance)은 스펄전과 입장을 같이 하며 힘을 얻었다. 스펄전의 행위는 세계 도처의 복음주의자들이 모더니즘의 위험과 내리막길에 주의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원래 The Sword and the Trowel 지에 '내리막길' 기사를 쓴 로버트 쉰들러는 스펄전의 전기를 썼고, 그의 전기는 위대한 이 설교자가 죽은 해에 출간되었다. 스펄전이 초청을 받아 복음주의 연합에 연설하던 마지막 소란스러운 시절의 한 장면을 회상하며, 쉰들러는 이렇게 썼다. 

스펄전 씨가 연설을 하려고 일어섰을 때 청중들의 환대는 그 열기와 열의가 어찌나 뜨거운지 거의 압도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영혼을 휘젓는 강력한 감정과 앞선 연설가들의 말을 들을 때 그의 뺨을 타고 흐르던 그 눈물을 지켜볼 수 있을 만큼 강단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침례교 형제들이 불과 몇 사람 참여했지만, 틀림없이 그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그의 영혼에 위로를 주었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동감의 표현은 부족함이 없었다. 그 이후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많은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앞으로 여러 달 여러 해에 걸쳐, 스펄전이 하나님과 복음에 신실하므로 억누르지 못한 항거가 얼마나 필요한 일이었는지 점점 분명하게 될 것이다.

주께서 은혜를 베푸사 주님의 교회에서 모든 거짓 가르침과 거짓 교사와 이스라엘 진영의 모든 배신자를 깨끗이 몰아내어 주소서. 그리고 성령께서 높은 데서부터 모든 육체에 부어지셔서, 세상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소유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 From the Usher's Desk to the Tabernacle Pulpit : The Life and Labors of Charles Haddon Spurgeon(New York : A. C. Armstrong and Son, 1892), 2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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