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조파의 형성기원 약사
황대우 교수
고신교단과 자매인 화란의 31조파의 형성기원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31조파는 1944년에 클라스 스힐더가 개혁교회로부터 축출될 때, 그를 지지하는 일단의 목사들과 교인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나, 그 뿌리는 1834년에 발생한 헨드릭 더 꼭 (Hendrik de Cock) 목사의 국가교회로부터의 축출 사건 (이 사건은 흔히 '분열(Afscheiding)'이라고 명명된다)에서 찾을 수 있다. 더 꼭이 제명되자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스홀떠 (Hendrik Peter Scholte) 목사는 자신을 따르던 일부 무리를 이끌고 스스로 국가교회를 나와 더 꼭과 동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채 5년이 되기도 전인 1838년에 스홀떠를 따르던 무리는 도르트 신조를 거부함으로써 더 꼭을 떠나 자신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들은 '고난받는 개혁교회 (Gereformeerde kerk onder het kruis)'라 불리운다. 반면에 그들이 떠나자 더 꼭을 따르던 무리들은 '기독교 분열교회 (Eene christelijke afgescheiden gemeente)'라는 임시명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1869년에 이 두 교단은 '기독교 개혁교회 (Christelijk gereformeerde kerk)'라는 이름으로 연합하게 된다. '고난받는 개혁교회'에 속한 교인들 가운데 이 연합에 동의하지 않는 무리들은 잔류했다.
기독교개혁교회는 다시 1892년에, 아브라함 까위뻐가 국가교회로부터 제명되었을 때(1886년) 따라 나온 무리들인 돌레앙찌 (doleantie) 교회와 연합하게 되는데, 이것이 스힐더를 제명한 개혁교회 (Gereformeerde Kerken)이다. 이 때도 역시 이 연합에 동의하지 않고 잔류한 무리들이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소위 Afscheiding에 뿌리를 둔 '개혁교회교단'은 스스로 분리를 선언한 무리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834년의 헨드릭 드 꼭과 1886년의 까위뻐, 그리고 1944년의 스힐더 모두 교회 내에서 개혁을 외치다가 제명되었다. 교회로부터 축출된 그들은 더 이상 교회 내에서 자신들의 개혁의지 (분리의지가 아니다!)를 고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또 다른 새로운 교회로 설 수 밖에 없었다.
화란 개혁교회 역사 가운데 교회개혁을 이유로 스스로 분리를 선언한 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1969년에 31조파에서 갈려나간 '네덜란드개혁교회 (Nederlandse Gereformeerde Kerken)'라는 교단이 지향했던 것이다. 이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도르트 교회법 31조항에 문자적으로 충실해야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스스로 분리해 나갔다. 그래서 그들은 완전히 다른 성격의 노회와 총회를 가진다. 즉 네덜란드개혁교회의 노회와 총회는 단순한 토론의 장 이상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권위도 없다. 이 점에 있어서 네덜란드개혁교회는 역사적 개혁교회정치체제를 떠난 것이다.
*이 세 사람 각각의 제명 원인에 대해서는 차후에 기회가 되는대로 상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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