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에 대한 개혁신학의 전통적 이해
이남규 (합신, 조직신학)
[아래 글은 2012년 5월 30일 천안에 있는 고려신학대학원 수요저녁 경건회 시간에 강의한 내용입니다. 신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언약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가능한 전문용어를 배제하면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언약에 대해서 관심있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인간이 가져야 하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리는 것에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3-4) 사도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이유는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누리는 사귐에 동참하게 하려는 것이다. 즉 복음선포는 영혼들을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데려와 교제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등장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런 질문이 등장하는 이유는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간격이 크기 때문이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는 그 간격만 생각한다면, 그 교제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여러가지 동물들을 본다. 동물들도 사람처럼 생명을 가진 존재이다. 호흡이 있고, 움직이며, 보고, 듣는다. 그러나 영적이지 않다. 하나님을 인식하여 예배할 수 없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입히시어 기르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그것들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마 6:26).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는 아직 언약관계는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시고 만물 위에 세우셨다(창 1:27-28). 하나님은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다(창 2:7). 인간은 하나님의 소생이다(행 17:28). 인간은 영혼을 가졌다. 이성과 양심을 갖고 선한 것을 바란다. 먹고 마시는 것이 그에게 낙이 되지만 그는 짐승이 아니라서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에게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롬 1:19-20). 짐승과 동일한 것 같으나 하나님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에게 있는 시험이다(전 3:18).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주셨다(전 3:11). 사람은 시간 안에 살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영원을 본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교통할 수 있도록, 예배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을 알므로 하나님의 속성에 합당한 것에는 상이 그렇지 않은 것에는 벌이 올 줄 이미 안다. 하나님과 사귀고 그를 예배함으로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곧 종교의 씨(semen reliogionis)가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아,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이다.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친히 내려오셔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 들어가는 방식은 언약의 방식이었다. 언약의 당사자가 하나님과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먼저 시작하는 것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언약은 언제나 일방적(momopleuron)이다. 또한 “언약”이란 용어는 필연적으로 쌍방성(dipleuron)을 함의한다. 사람이 언약의 당사자가 될 때 아무 합리성과 자결권이 없는 나무 막대기로서 언약의 당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억압 없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언약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함의한다.
개혁신학에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사람과 시작하신 첫 번째 언약은 행위언약(foedus operum)으로 불린다. 행위언약은 다양한 용어로 불리면서 교의학에 자리 잡았다.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본성적으로 심기어진 양심과 도덕성과 자유의지에 근거하여서 맺어진 언약이기 때문에, 타락 후에도 이 언약에 대한 흔적이 인간 본성에 남기어져 있기 때문에 본성언약(foedus naturale)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 본성 자체가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시험의 계명과 함께 언약이 시작한다는 것이 지적되면서 이 용어보다 다른 용어를 찾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에 의해 시작되었기 때문에 율법언약(foedus legale)이라고도 불렸으나, 율법시대의 은혜언약(소위 옛언약)과 구분이 어렵기 때문에 이 용어도 적당하지 않았다. 이 언약에 주어진 약속에 따라 생명언약(covenant of life)이라고 불렸으나, 은혜언약의 약속도 영생이므로 교의학을 위해선 완전히 만족스런 용어가 아니었다. 다른 용어들 보다 행위언약이란 용어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영생이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하는 행위를 통해 획득되기 때문이다.
개혁신학자들은 행위언약교리를 통해 창조된 인간이 순결한 상태(status integritatis)이지만, 아직 영광의 상태(status gloriae)에 있지 않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 하셨을 때, 그 명령에 대한 상이 단순히 죽지 않고 오래도록 사는 상태의 연속일 수 없다. 하나님은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상을 주신다. 그리고 아직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posse non peccare)였지만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peccare)는 아니었다. 그는 죽지 않을 수 있는 상태(posse non mori)였지만 죽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mori)는 아니었다. 지상 복락을 누렸지만 아직 천상의 복락을 누리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계명을 지킨 자에게는 생명을 주신다(레 18:5; 겔 20:11). 이기는 자가 받는 상은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동거함을 누리는 아들됨이다(계 21:3, 7). 아담은 시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보이는 후에,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의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영생에 이르러야 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아담이 받았을 때, 아담은 사인이 아닌 공인으로서 받은 것이다. 행위언약은 한 개인 아담과 맺은 것이 아니라, 인류를 대표하는 공인 아담과 맺은 것이다. 따라서 아담이 죄를 범하였을 때, 그 죄책은 인류전체에게 전가 되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롬5:1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전 15:21-2).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임무도 실패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이 뜻하는 바는, 그에게 만물이 맡겨져 있었어도 하나님의 뜻 아래서 맡겨진 것이고, 그의 돌봄과 경작(창 2:15)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땅은 저주를 받았고(창 3:17),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하게 되어서 탄식하며 고통을 겪는다(롬 8:21-22).
아담이 죄를 범하므로 행위언약을 파기하였다. 그에겐 사망의 형벌이 주어졌다. 그리고 죄책과 부패가운데 있는 인간은 더 이상 행위언약의 조건대로 율법을 완수함으로써 의롭다고 인정받아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로 나아가는 길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행위언약의 폐기는 인간의 부패와 무능력의 관점에서만 말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위언약에서 인간에게 요구하셨던 율법의 요구가 폐기된 것은 아니다. 행위언약 안에서 요구하셨던 율법의 요구는 계속 남아 있어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한다(롬 3:19). 행위언약에서 요구하는 율법의 완전한 성취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것을 포기함이 없이 구원은 이루어진다. 당연히 행위언약이 요구하는 율법의 완전한 성취 없이 영생 곧 하나님과의 교제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을 버리는 성격이 아니라 행위언약을 성취하는 성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둘 다 영생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갖으며, 둘 다 율법을 포기하지 않고 율법의 성취가 전제된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림에 있다고 했는데,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가 가능한가?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후 인간은 죄책과 부패를 짊어졌기 때문이다. 행위언약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과 사귀는 복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여전히 완전하시고 의로우시다. 인간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이웃을 미워하므로 날마다 더 많은 죄책을 쌓고 있다.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죄를 쌓는 인간의 불의는 함께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악인을 의롭다고 하지 않는다(출 23:7). 하나님께 죄값의 지불 없는 단순한 사면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신과 교제하는 복에 있도록 길을 준비하셨다. 그것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죄인은 자신의 죄 값을 치르기에도 부족하여서 다른 이의 죄값을 치룰 수 없고, 천사는 사람이 아니라 죄값을 치룰 수 없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감당해야 하며, 하나님의 진노의 무게는 하나님만이 감당하실 수 있으시다. 그래서 우리의 중보자는 참 사람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참 행복의 길, 곧 하나님과 교제하는 길로 들어간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언약의 중보자라 칭했고,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언약의 기초라고 불렀다. 영생의 이 복이 중보자의 죽음으로 얻어지기 때문에, 이 언약은 유언(Testamentum)으로도 불렸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얻어진 화목의 길을 은혜언약(foedus gratuitum)이라고 불렀다.
이 일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창 22:18)고 하셨다. 때가 차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갈 4:4).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7,8).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고후 5:21).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롬 5:19).
이 일은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서 비로소 계획한 일이 아니다.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이 있었다(엡 1:11).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른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미 결정한 것을 이루는 것이었다(행 4:27-28). 예수 그리스도는 주께서 택하신 여호와의 종이었다(사 42:1; 마 12:28).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그의 뜻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었다(요 6:38).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가 있고, 그들을 마지막에 살리신다(요 6:39).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룸”으로 성부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요 17:4).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언약에 속하여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 안에 있을 자들의 선택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작정하신 자들(롬 8:29), 곧 선택받은 자들이 있다. 이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을 위한 중보자의 구속사역도 작정되어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요 6:38, 요 17:4). 나아가 하나님의 작정 안에는 구속의 적용, 곧 성령의 사역이 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 6:44)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의 기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다(마 16:16). 그러므로 택함 받은 자들이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 안에 들어가는 이 일, 곧 그것을 위한 중보자의 구속사역과 성령의 구속의 적용까지 영원전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우리의 공로가 없이 즉 값없이 영원전에 결정된 일이다. 이 결정을 구원협약(pactum salutis)이라는 용어 아래서 설명하려고 몇몇 신학자들이 시도하였다. 구원에 대한 영원전의 결정은 언약이 참으로 값없다는 확증이 된다. 값없는 언약, 은혜언약이다.
은혜언약은 하나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하나의 중보자, 하나의 구원방식, 하나의 믿음이 있다. 구약시대의 조상들도 다른 중보자나 다른 방식으로 구원 얻은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다른 이로서는 구원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 4:12).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그러나 옛언약과 새언약을 분리하는 시도가 항상 있어왔다. 초대교회에 영지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구약의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열등한 신, 복수의 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다른 하나님,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 있다. 이에 반대해서 교회는 구약과 신약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신약은 구약에 숨어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명백해진다고 어거스틴이 말했다. 종교개혁시대에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이 유아세례를 부정하던 재세례파때문에 다시 강조되었다. “이스라엘 백성과 맺었던 바로 그 언약을 새로운 시대에 우리와 맺어서 우리는 그들과 한 백성, 한 교회, 한 언약을 갖게 되었다. 구약의 성도들은 우리와 함께 하나의 동일한 구원자를 가지며, 우리는 그들과 함께, 그들은 우리와 함께 하나의 백성이며 하나의 교회이다.”(츠빙글리)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처럼 기도교인들의 자녀도 언약안에 있기 때문에 언약의 표(유아세례)를 그들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실체가 다른 두 개의 은혜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동일한 은혜언약이 있다는 것이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이다(웨스트민스터 7장).
옛언약과 새언약의 차이도 있다. 옛언약과 새언약의 차이를 무시할 때, 중보자의 구속의 성취의 완전성을 부정하게 된다. 초대교회에 유대주의는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을 대항해서 신구약의 차이점이 밝혀지고, 구속의 완전한 성취를 말해야 한다. 새언약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옛 예식법의 제사에 머무르는 자는 그리스도 중보사역을 욕되게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우르시누스는 네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옛언약에서 오실 그리스도가 믿어졌고, 새언약에서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 둘째, 옛언약은 이스라엘 나라가 그리스도까지 보호됨에 대한 약속이, 새언약에서는 모든 정부 아래서 교회가 보호됨에 대한 약속이 있다. 셋째, 옛언약은 레위의 의식들을, 새언약에서는 세례와 성만찬이 세워진다. 넷째, 옛언약은 더 희미하고, 새언약은 더 분명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동일한 은혜언약의 다른 경륜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동일한 은혜언약의 옛 경륜과 새 경륜이며, 다른 말로 율법시대와 복음시대의 다른 실행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르면, 율법시대에는 은혜언약이 약속, 예언, 제사, 할례, 유월절 양, 또 유대 백성에게 주어진 다른 예표와 규례에 의해 집행되었다. 이것들이 오실 메시야를 예표하고, 이 약속된 메시야에 대한 신앙으로 완전한 죄사함과 영원한 구원을 얻었다. 복음시대에 약속된 메시야가 나타났고, 이 언약은 말씀의 전파와 성만찬과 세례로 실행된다.
때때로 개혁신학이 언약신학으로 불리는 것은, 이런 언약을 핵심에 놓고 성경의 내용을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설명하는 사도신경과 율법을 보여주는 십계명과 우리의 소망의 내용인 주기도문이 이 언약과 연결되어 있다. 복음이 언약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하나님과, 언약의 중보자와 적용과 은혜언약의 내용을 설명한다. 율법은 첫 언약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창조의 목적과 타락을 알려주며, 은혜언약 안에 들어온 자들이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려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언약 안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양자의 영이 하나님을 우리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실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관계(아버지와 자녀)가 현실임을 증거한다.
언약은 교회의 사역을 더 풍성하게 설명한다. 교회의 참된 표지로 말해지는, 말씀선포와 성례와 권징이 이 언약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교회의 중요한 일들이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진다. 세례와 성만찬의 두 가지 성례는 언약의 표(signa foederis)이다. 세례는 세례 받는 자가 은혜언약에 받아들여졌다는 표이며,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묶으신 하나님의 맹세를 봄으로 듣는다. 권징은 언약백성들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모욕 받지 않기 위해서, 고백과 생활에서 언약백성의 모습이 아닌 자들을 언약의 표에서 멀리하도록 한다.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고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다 이루시는 때에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계 21:3).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말씀하신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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