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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개혁신학의 중생에 관한 이해

역사적 개혁신학의 중생에 관한 이해

(부제, 노승수 목사가 연중론도 순중론도 다 지지하는 이유)


노승수 목사


※ 먼저 일러두기 : 괄호 안의 숫자 예) (716-2-1~2)는 벌콥의 책 716페이지 2번째 문단, 1~2줄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뜻


중생에 관한 여러 논란에 저 스스로 공부와 정리의 필요성을 느껴서 벌콥을 기본 기조로 해서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 의미는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 받고 새 생명의 원리가 처음으로 행동화되도록 하는 신적 행위"로(716-2-1~3) 포괄적으로 정의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을 보다 제한적 의미로 사용 (716-2-1) 했습니다. 이와같은 정의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첫째, “재발생”(begetting again) (716-2-3) 혹은 “발생”(generation) (714-2-7)이라고 하고 이것이 가장 제한적인 의미에서의 중생(721-1-1)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는 좁은 의미의 중생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생”(new birth) 혹은 생명이 발현되는 것 (716-2-3~4) 다른 말로는 “발출”(bearing) (714-2-8)이라고 정의되는 넓은 의미의 중생입니다. 그리고 이 중생을 가장 제한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잠재 의식적 생명(subconscious life)에서 일어나는 변화(718-3-1~2)로 이해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해 직접적으로는 인식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은밀하고 불가사의한 사역이기 때문에 중생 이후에 있어서도 인간은 단지 ‘그 결과에 있어서만’ 중생을 지각할 수 있다” (718-3-1~2, 4)고 분명히 중생은 잠재의식에서 일어나는 주권적 사역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에 비해 외적 부르심과 효과적 부르심, 회심은 모두 “인간의 의식 영역에서 역사” (719-4-1)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효과적 부르심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2절에 의하면, 효과적 부르심은 중생을 포함한다 (720-1-4~5)고 말합니다. 아래는 인용입니다.


“This effectual call is of God's free and special grace alone, not from any thing at all foreseen in man; who is altogether passive therein, until, being quickened and renewed by the Holy Spirit, he is thereby enabled to answer this call, and to embrace the grace offered and conveyed in it”


앞서 우리는 분명 벌콥을 통해서 중생이 잠재 의식에서 일어나는 변화라는 사실을 주지한 바 있고, 효과적 부르심은 의식 영역에서 역사한다는 사실을 주지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바로 이 효과적 부르심 다시 말해서 의식 영역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 중생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부조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벌콥의 틀렸는가? 아님 웨스트민스터 신조가 잘못되었는가? 어떻게 잠재의식적인 중생이 의식영역에 속한 '효과적 부르심' 속에 포함될 수 있는가? 이걸 어떻게 해야 납득할만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튜레틴의 회심에 대한 두 가지 설명을 이해해야 합니다. 첫 정의를 보면, "conversio passiva sive habitualis, passive or habitual conversion. commonly called regeneration(regeneratio)"(멀러의 신학 사전) 이 회심은 수동적 회심이라 불리고 또 habitualis 곧 잠재적 회심이라 불리며 이걸 '중생'이라 지칭합니다. 그럼 튜레틴이 말하는 이 수동적 회심 곧 중생은 뭘 말하는 것일까? 그건 벌콥의 개념으로 하면, 바로 “재발생”(begetting again) (716-2-3) 곧 “발생”(generation) (714-2-7)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이해되어야 하는 개념, 스콜라 체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벌콥은 '마지막 스콜라 정통주의 신학자'였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바빙크, 17세기 개혁신학의 거장, 튜레틴 이들이 모두 '스콜라 정통주의 신학자'들입니다. 스콜라 정통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변하지 않는 본질, 그리고 그 본질이 드러나는 방식이 바로 운동을 통해서 본질에 드러난다는 아주 '유기적 구조'로 세계관을 구성했습니다. 이 모든 세계의 정점에 '부동의 원동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세계상의 모든 존재는 4가지의 운동인을 통해서 그 본질을 구현해 갑니다. 이 체계를 가장 심플하게 정돈하면, habitualis 곧 '잠재적' 존재에서 actualis 곧 '실제적' 존재로 이행해 가는 구조입니다.


다시 중생 문제로 돌아와서, 가장 좁은 의미의 중생은 분명 '잠재 의식'에서 이루어진 구원 사역인데 반해서 '효과적 부르심'은 '의식 영역'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역입니다. 근데 잠재 의식 영역에서 이뤄진 '중생'의 사역이 바로 이 '효과적 부르심'에 포함되었습니다. 이건 바로 중생이 발현하면서 의식 영역에서 이뤄지는 '효과적 부르심'에 그 영향력과 효과를 침투시킨 결과입니다. 이게 중생을 분절적으로 이해하면 안되는 결정적 이유입니다. 벌콥은 중생과 회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중생 시 심겨진 새생명은 죄인이 회심할 때 그의 의식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표출하게 되고 (741-2-3~4) 중생 시 잠재 의식에서 야기된 변화회심에서는 의식으로 침투하게 된다 (741-2-4~5)고 말합니다. 중생은 일종의 유기적 생명체의 성장과 같습니다. 스콜라 체계가 '유기적 구조'라는 말도 이런 뜻입니다. 근데 중생을 갑각류가 성장하는 방식, 곧 '분절적'이고 '계단식' 구조로 이해하게 되면 중생이 가진 신비적 국면을 놓치고 맙니다. 벌콥의 말하는 회심시의 의식에로의 표출과 침투는 회심에 드러서서만 일어나는가? 만약 이런 이해를 가지는 것은 마치 도토리를 심고 모든 성장 과정을 생략한 채로 성채로서 상수리 나무와 그 씨로서 도토리만 생각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서설이 길었지만 논지는 간단합니다. '효과적 부르심'이 중생을 포함한다는 말은 중생이 의식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첫번째 싯점이 바로 이 '효과적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생은 종국적으로 “영혼의 지배적 성향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이고, 이 변화는 전인적으로 일어난다” (717-7-2~3)고 말합니다. 중생은 언제 전인적으로 나타나며 여기서 전인적이란 말은 뭘 의미할까요? 벌콥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인적인 변화는 지성, 의지 그리고 감정을 포함한다 (717-7-3~718-1-1)고 말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중생의 사역은 언제 우리 인격에 침투하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수술하실 때 우리는 수술대 위에 드러누운 환자일까요? 중생에 우리가 협력하지 않는 것은 자명하고 분명합니다. 왜? 그것은 의식의 영역이 아니라 잠재의식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중생의 발현은 점차 우리 의식 영역에 변화를 가져다 주고 그 결과 신자는 변화된 지정의로 중생에 걸맞도록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될 뿐 아니라 점차 그런 성향이 강화되도록 애쓰는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건 이미 제가 쓴 글 '전적 무능력과 중생'에서 충분히 밝혔기 때문에 생략합니다.


그럼 이 중생의 과정을 도표로 나타내봅시다.


도표 1


의식 영역(부르 심): ① 외적 부르심----> ③ 효과적 부르심----> ⑤ 회 심

regeneratio secunda

잠재 -> 실제: 중생의 침투 중생의 표출


잠재 의식(중 생): ②“begetting again”[첫 요소]----> ④ “new birth”[둘째 요소]->

conversio transitiva

믿음의 침투 믿음의 표출

믿음(fidei) 영역 : ②-1. semen fidei(믿음의 씨)

②-1'. Infusa habitus ----------------------> ④-1. Actus fidei(실제적 믿음)

③-1. habitus fidei(잠재적 믿음)


도표가 이해를 돕기도 하지만 때론 어떤 개념에 고착화되어서 이해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논리적 과정을 묘사하려니 단계적으로 묘사할 수 밖에 없지만 사실은 효과적 부르심이 중생의 첫 요소와 동일시 되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둘째 요소 역시 회심과 동일시 되는 지점이 있을 것입니다. 학자에 따라, 또는 개인의 견해에 따라 다소간에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그것은 신비인 중생의 영역이 가지는 특성일 것입니다. 또는 뭐가 앞이냐 뭐가 뒤냐는 걸 따지고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생이 가진 의식에 대한 침투적 성격은 자명하고 분명합니다. 그게 어느 시기 어떤 방식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중생과 믿음을 분절적으로 이해하다 보니, 놓치는 부분이 있어서 도표에 보완을 했습니다. 중생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begetting again”에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씨가 심겨지는 일이라고 좁은 의미의 중생을 정의하지요? 그럼 도대체 어떤 씨가 심겨진다는 말입니까?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 '씨'를 믿음의 '씨'라고 보았습니다. 도표에 나와 있는데로 입니다. 즉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 받고 새 생명의 원리가 처음으로 행동화"(716-2-1~3)하는 것을 'Infusa habitus'라고 불렀습니다. 번역하면 Infused habit" 입니다. habitus는 잠재라는 뜻이기도 하고 동시에 '습관'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즉, 새 생명의 원리이자 하나님을 향하는 거룩한 기질이자 성향을 우리 '잠재 의식'에 심으신 것입니다. '효과적 부르심'이 의식 영역에 중생이 침투 한 것이라면, 이것은 달리 믿음의 국면에서 설명하면, 의식 영역에 믿음의 기질이 침투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들을 귀'가 생기고 죄를 각성하고 애통하며 죄에 대한 확신를 가지고 죄를 애통해 하며 울고 자신의 영혼에 대해 절망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며 회개하는 일들이 일어나죠. 이런 일들이 가능한 것은 믿음이 점차 의식의 영역에 침투, 표출하면서, 거룩한 기질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과정은 "새 출생과 회심"에서 "Actus fidei"의 출현으로 완성이 됩니다. 또한 믿음의 영역에서 보자면, 4와 5는 동시적이지 않은가?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성령을 선물'로 받는 거 같습니다.


그럼 여기서 질문이 생기죠? 그렇죠? 중생의 두번째 요소 곧 “new birth” 이후에나 오는 '회심'의 반응처럼 보이는 것들이 위의 도표의 2와 4사이에 오게 되죠? 그럼 이게 '믿음과 회개' 일까요? 전통적으로 구원의 서정에선 repentanc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음은 특강 소요리 문답의 저자의 페북에서 인용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요리문답은 convert와 repentance의 용어 구분이 철저하다. 이를 번역하면서 구분 없이 모두 '회개'라고 해버리면 혼동이 온다. 아쉽게도 윌리엄슨은 소요리문답 해설에서 17세기 문맥을 무시하고 repentance를 구원의 서정 안으로 가져와 버렸다." 일단 마스터스가 회심 모델에서 회심과정를 설명하면서 repentance를 사용한 것이 혼동을 불러오는 면이 있습니다. 일단 제 방식으로 정리를 해본다면, repentance를 서정에 가져 온 것은 오류라고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와 4 사이에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의식의 영역과 믿음의 영역에서 말입니다. 적어도 연중론은 이 부분과 연관이 있습니다. 제가 한 이해를 이렇습니다. '실제적 믿음'이 영적 출생 이후에 오는 '회심'에서 드러나는 것은 기존 중생론의 주지의 사실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건 연중론자도 받아들일 수 있는 구원의 서정이 아닐까?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2와 4 사이에 '효과적 부르심'의 전 과정에는 '잠재적 믿음'이 역시 의식 영역에 침투해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까요? 이렇게 보면 '연중론'과 '순중론'이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것도 아직 미진한 정리이지만 말입니다.


그럼 이제 벌콥의 말하는 효과적 부르심의 정의를 들어봅시다.


이러한 효과적인 부르심은, 진리를 통해 영혼 안에 탄생된 새로운 성향이 최초로 거룩하게 발현되도록 한다 (721-1-6~7). 새 생명이 발현되기 시작하고, 심겨진 생명은 신생(new birth)을 일으킨다 (721-1-7~8) 그리고 이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사역의 완성이요, 회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721-1-8~9)고 말합니다. 이러한 설명이 시사하는 바는 대체 뭘까요? 그것은 중생이 생명체가 성장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연중론적 이해라고 할까요? ^^


그러나 동시에 벌콥은 중생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중생은 인간 본성에 대한 즉각적(instantaneous) 변화로서 즉시 전인에게 -지성적으로, 정서적으로, 도덕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718-2-12). 여기서 즉각적이란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벌콥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중생은 로마 가톨릭 교인들이나 모든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가르치듯이 인간의 영혼 안에 점진적으로 예비되는 사역이 아니다 (718-2-34)고 정의합니다. 이는 생명과 사망 사이에는 중간 단계가 존재하지 않기(718-2-45) 때문이며, 인간은 살든지 죽든지 양자 택일(718-2-5)이기 때문이라고 단언합니다.


둘째, 중생은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718-2-56)고 말합니다. 물론 이미 살핀대로,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이 중생을 성화까지도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해 온 것은 사실이기 (718-2-67)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구원의 서정이 오늘날처럼 완전히 발전되지 못한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718-2-78)라고 설명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사실 이 부분이 내가 순중론도 연중론도 동시에 지지하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합니다. 순중론자와 연중론자가 싸우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중생을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은 개혁파 신학의 역사적 전통과 유산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도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 중생을 제한적으로 사용한 이유는 역사적으로는 알미니안과 전투 때문에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고, 두 번째는 앞서 벌콥의 밝힌 '두번째 이유' 곧 구원의 서정의 발전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넓은 의미의 중생'이 구원의 서정의 발전으로 인해 여러 분화된 다른 표현들 속에서 녹아 들었기 때문에 중생을 제한적으로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 그런 까닭에 중생을 '순간적'이고 '즉각적'이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즉각적이란 말은 '좁은 의미'의 중생을 염두에 두고 구원의 서정의 발전을 염두에 두고 사용하는 표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넓은 의미'의 중생을 사용한다면, 이것은 지금과 같이 '구원의 서정'이 분화된 개념이 아니라 보다 종교 개혁 시기에 근접한 개념에 따라, 벨직과 도르트의 여러 문서에 따라 '중생'을 읽는다면, 연중론으로 중생을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튜레티의 개념을 인용해 와 봅시다, "Conversio activa sive actualis, active or actual conversion, commonly called conversion"(멀러의 신학사전) 회심을 잠재적 중생이 실제적 중생이 된 것으로 설명하고 이것을 '회심'이라고 불렀습니다. 튜레틴 방식의 중생의 정의를 '넓은 의미'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넓은 의미'는 '좁은 의미'를 빼고 '넓은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니라 '좁은 의미'를 포함한 '넓은 의미'라는 뜻이 됩니다. 더 인용해 와 볼까요? "Conversio activa is sometimes also called regeneratio secunda, a second or further regreneration, belonging to the renovation(renovatio, q.v.) of the individual"(멀러 신학사전) 놀랍게도 회심을 '두번째 중생'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회심'은 잠재의식의 중생이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실제적인 것으로 역사하여, 인간의 전의식 영역 곧 지,정,의에 침투하고 또 그것에서부터 표출되어 하나님이 심으신 생명 원리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과정인 셈입니다. 회심 시점이 중생의 완전한 침투와 표출이 일어나고 그래서 이 시기를 New birth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반복이지만, 위 도표에서 두 가지의 linear를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중생은 잠재의식의 영역임으로 근본적으로 사람이 이에 협력하거나 참여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 심겨진 생명 원리는 '잠재태'로부터 점차 '현실태'로 드러나는데, 들을 귀가 생겨 부르심에 '반응'하게 되고 중생의 침투와 표출에 의해 점차 의식 영역 전체가 중생의 영향을 받고 또 의식 영역에선 구원을 향한 '애씀'과 '수고'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회심'에 이르는 일련에 과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잠재 의식에서 '중생'은 '즉각적'입니다. 의식 영역에 침투된 '중생'은 '과정적' 요소가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초자연적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인 중생은 '즉각적'이며 자연적인 인간 의식 영역의 변화는 자연적임으로 '과정적'입니다.


결론적으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중생을 좁은 의미로 정의하면, 순중론을 지지하게 되고, 중생을 넓은 의미로 정의하면, 연중론을 지지하게 됩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중생”(regeneration)과 같은 단어는 항상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 전체를 지칭한다(661-2-11~13)는 벌콥의 표현의 의미도 이런 뜻일 것입니다. 아마도 이 글을 보시면 많은 논란이 생기겠지만, 어디까지나 저의 정리라는 점, 그리고 천지 님을 비롯해서 저의 입장 표명을 요구하시고 저를 회색분자 내지 잡탕 신학이라고 싸잡아 이야기 하신 분들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소소한 차이는 있을 겁니다. 그게 우리가 형제임을 우리가 개혁진영에 속한 개혁파임을 갈라 놓는 이유가 되어선 안되겠지요. 차이에 대해서 서로 인정하고 토론하면 이해를 깊이하는 데 나아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디테일한 순서를 놓고 큰 일날 일인 것처럼 싸우고 그러지 맙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