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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강의

역사적 개혁파가 남긴 소명과 중생의 재구성

역사적 개혁파가 남긴 소명과 중생의 재구성


노승수 목사 


글을 시작하기 전에 질문부터 하나, 구원의 서정은 좁은 의미의 중생 개념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을까요? 아님 후에 있었을까요? 전 부터 있었다고 하면, 구원의 서정에서 중생 개념은 넓은 의미가 될 것이고 후에 생겼다고 하면 중생개념은 좁은 의미가 되겠지요? 개혁파 신학은 역사적 신앙의 중요성을 늘 강조해왔습니다. 칼빈 스스로도 초대교회의 교리적 정통으로 되돌아 온 것이 종교개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전에 생긴 것이라고 하더라도 후에 정립된 중생 개념이 포함되었겠죠. 저는 개인적으로 전자 즉, 구원의 서정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 구원의 서정은 '소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것이 외적 부르심이 되었던 효과적인 내적 부르심이 되었든지 간에 부르심은 사실 우리 의식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살핀 벌콥의 글에서 옛 개혁파들이 중생의 효력을 지성에만 국한하고 의지에는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는 걸로 생각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 옛 개혁파의 견해가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바로 구원의 서정 가운데 인간의 애씀 곧 의지적 애씀의 요소가 중생 이전에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즉, 부르심을 듣고 중생이 지성에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임으로 의지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측면으로서 중생을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New birth입니다. 혼동을 말아야 하는 것은 begetting again이든 New birth 든 간에 이게 잠재 의식의 영역이라는 점이고 의지 영역의 변화가 실제로 구현되는 것은 '회심'의 영역입니다. 이걸 single linear하게 보면 안되겠지요. 잠재 의식에서 일어나는 중생과 의식 영역에서 일어나는 부르심과 회심은 double linear로 봐야 할 겁니다. 그게 초월과 자연의 스콜라적 구조이기도 할 겁니다. 그리고 이 새 출생에 의지적 애씀의 요소를 포함하는 구조가 바로 '소명' 다음에 '중생'이 오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생'은 New birth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 런데, 이런 개혁파의 견해에 수정이 불가피해졌습니다. 바로 알미니안의 등장이었죠. 알미니안은 개혁파 밖에서 태동된 것이 아니라 개혁파 안에서 태동이 되었습니다. 뭐 이건 잘 아시리라고 생각해서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개혁파 안에서 태동되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개혁파 신학 안에서 알미니안적 근거를 찾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어디에서 그 근거를 찾았을까요? 바로 중생이 지성에만 효력을 미치고 의지에는 효력을 미치지 않는다는 옛 개혁파들의 설명에서 그 근거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을 지성 뿐만 아니라 의지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로 '제한적 용법'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죠. 


근 데 이미 살핀대로 구원의 서정에서 '소명' 다음의 '중생'은 넓은 의미의 중생입니다. 그러니 구조 전체가 뒤 바뀌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죠. 즉, '중생' 다음에 '소명'을 놓는 방식으로 정리를 해야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파는 역사적 신앙에 대해서 대단히 존중하는 태도를 가졌고, 그래서 '소명' 과 '중생'의 순서를 바꾸지 않고 알미니안적 요소를 신학에서 제거하길 바란 것입니다. [논외로 한가지 더 생각해보면 좋을 듯한데요. 중생 다음에 소명이라고 하면 더 선명해질 것을 왜 굳이 '소명' 다음에 '중생'을 옛 개혁파를 따라 고집했을까요? 그게 단순히 개혁신학의 전통을 잇는 요소만 고려한 결정이었을까요? 이걸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이건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구요.]


아무튼, 그럼 '소명'이 중생을 포함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이미 제가 벌콥을 책을 통해서 여러 차례 밝힌 바대로, '효과적 부르심''회심'은 의식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중생'은 잠재의식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근데 중생을 설명할 때, 좁은 의미의 중생을 begetting again이라 하고 넓은 의미의 중생을 New birth라고 합니다그러면, 여기서 질문 하나를 할 수 있겠죠. 구원의 서정에서 '소명' 다음에 오는 '중생'은 좁은 의미의 중생 곧 begetting again을 가리킬까요? 아님 넓은 의미의 중생, New birth를 가리킬까요? 당연 New birth를 가리킵니다


? 우리가 이미 살펴본대로 '효과적 부르심'은 중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데 의식 영역에서의 부르심이 중생을 포함한다는 것은 잠재의식에 심겨진 생명이 발현 했다는 뜻입니다. 벌콥은 그의 글에서 중생이 현대 개혁신학자들에 의해서 매우 제한적 의미로 사용된다고 했고, 이승구 교수 역시 중생이 오늘날 개혁신학자들에 의해서 '구원의 시작'이란 의미로 사용된다고 했습니다.(사실 그러면 소명보다 중생을 앞에 놓는 것이 여러모로 오해를 줄일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그런데 역사적 개혁파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ㅎㅎㅎ 박사 학위 논문 주제 감이로군요 ^^) 구원의 서정은 사실 '알미니안'이 나타나기 전부터 있엇습니다. 구원의 서정에서 '소명'이 맨 앞에 온다는 사실과 옛 개혁파들이 중생에서 지성을 변화시키는 것이지 의지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소명이 먼저 오고 중생이 다음에 오는 구조는 사실상 '옛 개혁파'들이 세워 논 구원의 서정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글이 좀 난삽하고 반복되었습니다만, 다시 본류로 돌아가자면, 소명이라는 의식적 부르심 전에 잠재 의식에서 심긴 씨가 1차적으로 발현한 사건이 바로 부르심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들으려면, 살아 있어야겠죠. 죽은 자는 불러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들을 귀'라고도 하는 거죠. 심겨진 믿음의 씨가 '들을 귀'로 발현하는 사건을 카이퍼가 패큘티라고 한 거 같습니다. 비유컨대, 믿음의 씨가 세포분열을 하면서 처음으로 얻는 organic'들을 귀'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찌어다라고 하실 때, 이미 믿음의 기관으로서 들을 귀가 전제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 들을 귀를 통해서 듣고 인간 편에서 '반응'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인간의 협력'의 요소를 없애기 위해서 begetting again 단계에서 이미 '의지'까지 새롭게 되었고 이 믿음의 잠재적 성향으로 새롭게 된 의지가 말씀과 함께(cum Verbo)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에 능동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능동적 반응의 결과가 바로 New birth로서 중생인 것입니다. 그러니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임에도 '인간의 의지'가 반응하는 요소가 개혁파 신학 내에 여전히 남아 있고 이것은 옛 개혁파들의 설명 방식이라고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중생은 '순간적' 이고 '즉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혁파가 수정한 개념 곧 효과적 부르심 전에 부르심을 듣는 것이 가능하도록 주어진 씨가 심겨짐이 즉각적이며 순간적인 것입니다. 동시에 이 씨 심으심은 지성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고 의지적 변화 곧 성향적 변화(Infusa babitus=fidei)를 포함함으로 알미니안적인 구원의 협력하는 요소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씨는 곧 '들을 귀'라는 믿음의 기관(organic)이 되고 말씀과 함께 하는 성령의 효과적 부르심에 지성과 의지 전체가 반응하게 되는 것이죠. 그 결과 New birth가 있는 걸로 보입니다. 


씨가 심겨지고 그게 곧바로 분열해서 '들을 귀'가 생기고 그래서 부르심을 듣게 되고 그 부르심을 들으면, 이는 외적 부르심을 포함하는 상태임으로 말씀과 율법이 2 용도로서 기능을 하게 됩니다. 율법에 정죄를 받고 죄를 깨닫고 각성을 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들을 귀' 자체가 이미 '믿음의 기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입니다. 씨를 심으심, 부르심, New birth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고 설명하면 '순중론'이 되겠죠. 저는 다시 천명하지만 여기에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 이 행간에 대해서 성경 자체가 설명하지 않음으로 얼마든지 이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회심의 반응이 있고 회심의 여러 반응들을 통해서 인식론적으로 자신의 출생을 깨닫는 일들, 곧 벌콥이 말한 회심에 의해 '눈을 뜨는' 사건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여러 학자들이 설명을 하진 않지만 회심 사건을 역시 믿음의 기관으로 묘사한다면, '보는 눈'이 아닐까 합니다. 효과적 부르심이 '들을 귀'였다면 회심사건은 진리를 분별하여 '보는 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회심시에 일어나는 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선배들이 이런 설명을 했는지 모르지만, 저는 본 바 없으며 순전히 제 생각임으로 무시하셔도 무방합니다. 있다면 다행이고 ^^)


이에 비해서 앞서 말한 깨닫는 일은 깨닫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로마서 3:20이하가 보여주듯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는 사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들을 귀'가 생기면, 영혼과 양심, 그리고 인간의 의지는 이에 반응하게 됩니다. 이미 여러 개혁신학자들이 중생을 제한적 의미로 규정했고 그 제한적 의미가 '좁은 의미'라고 한다면 중생이 초자연적 영역에서 그리고 우리 잠재 의식속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비해 부르심은 의식 영역임으로 효과적 부르심이라는 말은 그 부르심에 인간이 의지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소명 다음에 오는 New birth 자체에는 인간의 의지의 참여가 들어있지 않지만 부르심을 받고 죄를 깨닫고 회심하는 과정에는 의지적 요소가 필연 들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연중론에서 말하는 잠재 의식에서 일어나는 New birth와 의식 영역에서 일어나는 회심을 동일 point로 보고 그 사이에 일련의 과정이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알미니안적 요소를 회피하면서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입니다.  잠재 의식에서 일어난 좁은 의미의 중생을 두고 중생을 순간적으로 일어난다라고 하면 사실 순중론이나 연중론 양자간에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순중론은 New birth까지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연중론은 begetting again이 순간적으로 일어난다라는 점에서 양자가 다 개혁신학이 받을 수 있는 범위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