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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강의

회심의 성격

회심의 성격


노승수 목사


※ 먼저 일러두기 : 괄호 안의 숫자 예) (716-2-1~2)는 벌콥의 책 716페이지 2번째 문단, 1~2줄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뜻


벌콥은 회심이 법적 행동보다는 하나님이 하시는 재창조적 행동(734-2-1)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신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바꾸는 것 (734-2-23)입니다. 근데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특이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회심이 이미 신앙을 전제(734-2-4)하고 있다고 말한다는 점이죠. 우리는 흔히 회심하면 '회개와 믿음' 이렇게 단순히만 생각하지만 왠지 벌콥의 설명은 다른 뉘앙스를 담고 있는 거 같습니다. 이 전제된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의 구속적 계시의 진리를 편견 없는 역사적인 의미로서뿐만 아니라 인생에 근본적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무시될 수 없는 실재로 인정하는 신앙(741-4-35 741-4-67)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를 일반적 신앙(757-3-14)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회심 이전에 '구원얻는 신앙'과 구분되는 '일반적 신앙'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회심이 단순히 '회개와 신앙'이란 등식으로만 이해될 수 없는 국면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가 종래에 알던 '회심' 이전에 믿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그리고 '회개'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제공된 구원을 인정하고 영접하는 것으로서 본래적 의미에서의 구원 신앙(741-4-56)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일반적 신앙'과 구분되는 소위 '구원의 서정'에서의 신앙을 말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充用, appropriating) 죄인인 자신이 의롭다 함을 얻는 일에 있어 도구가 된다.(원문에 있지만 번역에 빠진 부분)고 합니다. 즉, 칭의에 이르는 신앙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말하는 '구원얻는 신앙'이 아닐까 합니다. 신앙에 수식어가 붙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고 벌콥은 이 신앙과 구분되는 '일반적 신앙'도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회심의 순간을 명확히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회심에서 인간은(책의 내용은 오역임) 자신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의 공로 기초하여 용서된다는 기쁜 확신에 눈이 뜨인다 (awakens) (734-2-67)고 말하는데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빨간 글씨로 된 부분에 주어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셔야겠죠. 인간은 회심에서 용서의 기쁜 확신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미 중생 파트를 설명드리면서, 말씀드렸지만, 회심은 잠재 의식이 아니라 죄인의 의식 영역에서 발생 (734-3-12)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회심의 근원은 잠재 의식에 있습니다(734-3-2). 회심은 중생의 직접적 결과이므로, 자연히 생명의 역사가 잠재 의식에서 의식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734-3-24). 이게 무슨 말일까요? 조금 이따가 다시 설명하겠지만 우선 잠재의식에서 의식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포함한다는 말에 주목해주시길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회심은 의식 기저 (below consciousness)에서 시작되지만 완결된 행동으로서는 의식 영역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734-3-45) 이것 역시 시작과 완결이란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을 주목해서 봐주시길 바랍니다.


회심을 엄밀히 정의하면, 순간적인 변화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성화와 같이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없고(734-5-12), 회심은 한 번 일어나며 반복될 수 없는 것입니다(734-5-2). 그렇지만, 중생을 설명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돌발적 회심 (735-2-23)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 회심 (735-2-3) 곧 점진적 과정일 수도 있는(735-2-2) 회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생을 이해하는 방식과 회심을 이해하는 방식에 미묘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중생이 순간적이라고 보아 왔습니다. 동일하게 회심도 원리적으로는 과정이 아니라 순간적인 것이라고 정의를 확언합니다. 그런데 왜? 벌콥은 회심에 돌발적 회심만 말하지 않고 과정적 회심을 말할까요? 그리고 과정이라는게, 어떤 과정을 말할까요? 결국 이걸 이해하는 방식도 역시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전이라는 스콜라 체계가 아니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설명은 두 가지를 추론을 가능케 합니다. 앞서 설명드린대로 의식의 기저에서 시작해서 의식에, 더 나아가서 완결된 행동까지의 과정 다르게 말하면 잠재의식에서 일어난 중생이 의식에로 전이되는 과정 전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가지 방식은 중생과 같은 방식, 즉 좁은 의미로부터 넓은 의미로 가는 방식, 회심이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잠재적인 회심이 점차 현실적인 회심으로 되어 가는 과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회심의 엄밀한 정의에 사실 반합니다. 회심은 순간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전자 곧 중생이 의식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포함하는 방식으로서 회심을 이해하는 것이 벌콥의 여러 표현들을 볼 때도 자연스럽겠지요.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회심의 역사는 순간적이지만 의식 영역에서 회심은 과정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벌콥은 회심의 두 측면을 설명합니다. 능동적 회심: 하나님께서 중생한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식 영역에서 회개와 신앙 가운데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 (733-2-810) (Active conversion is that act of God whereby He causes the regenerated sinner, in his (Berkhof 책에는 “His”로 잘못됨) conscious life, to turn to Him in repentance and faith.) 수동적 회심: 그 결과로서,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회개와 신앙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생한 죄인의 행위 (733-2-1011) (Passive conversion is the resulting conscious act of the regenerated sinner whereby he, through the grace of God turns to God in repentance and faith.)[인간은 회심에서 협력한다” (740-2-16)와 연관됨]. 스콜라 정통주의를 읽을 때 독법 중의 하나는 초월의 영역과 자연의 영역을 항상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 합니다. 회심만 해도 그렇습니다. 능동적 회심은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이는 초월의 영역을 말하는 거지요. 이에 비해 수동적 회심은 그 하나님의 행위에서 유발되는 자연의 영역 즉, 인간이 회심에 협력하는 반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주권적 영역에선 순간적이고 인간이 협력하는 영역에선 협력이라는 단어가 담지하고 있듯이 '과정'이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협력이 어떤 점일 수는 없겠지요? 그럼 어떤 방식으로 있을까요? 당연히 과정이 존재하는 것이죠.


이를 도표로 나타내 보면 이렇습니다.


도표 2


중생(잠재 의식): ① “begetting again”[첫 요소]------------------------->③ “new birth”[둘째 요소]->

회심(의식 영역): ② 효과적 부르심------------------------------> ④ 회 심



중생의 역사가 순간적이듯이 회심의 역사도 순간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라는 점에서 분명 그러합니다. 그러나 시간적 한계 속에 사는 시간적 존재인 인간은 필연 중생과 회심을 어느 과정 속에서 인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위의 표에 빨간색 점선으로 표시된 어느 알 수 없는 시점 부터 new birth가 일어나는 싯점까지 혹은 Actus fidei 즉, 칭의를 얻는 믿음이 나타나는 순간까지를 회심의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나타나는 '믿음'은 '구원얻는 신앙'과 구별되는 '일반적 믿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래에서도 설명하겠지만 효과적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된 회개한 죄인에게 자신의 전적 무능력에 대한 지식과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욕망을 불어 넣으시고 그로 말미암아 회개가 나타납니다. 율법의 2 용도가 작동하는 것이지요. 즉, 회심 이전에도 '구원얻는 신앙'과 '생명에 이르는 회개'가 아니지만 다른 의미로 신앙과 회개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좀 다른 이야기일수 있지만, 개혁파는 은혜를 5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했는데요. 리처드 멀러의 신학 사전에 나와 있는 것을 간단히 소개하면, 1. Gratia praeveniens, prevenient grace 2. Gratia praeparans, preparing grace 3. Gratia operans, operating grace 4. Gratia cooperans, cooperating grace 5. Gratia conservans, conserving grace 인데요. 1번은 말씀을 뿌리는 겁니다. 죄인의 회개에 선행한다고 해서 선행적 은혜라 하고 이 은혜는 일반적 은혜입니다. 외적 부르심에 해당하겠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택자에게 주어진 은혜는 처음부터 특별은혜이지 일반은혜를 통해서 회개에 이르게 하다가 어느 시점에 특별은혜로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죠. 개혁파 은혜론은 이런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번은 부터는 특별한 은혜인데요 회개한 죄인에게 자신의 전적 무능력에 대한 지식과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욕망을 불어 넣으시는 은혜를 가리킵니다. 율법의 2 용도와 관련이 있고 효과적 부르심과도 관련이 있는 은혜입니다. 물론 좁은 의미의 중생과 연관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3번은 회심시에 주어지는 은혜로 의지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밝히며 믿음을 주시는 은혜를 가리킵니다. 4번은 성령의 내주를 설명하는 은혜이고 5번은 성도의 견인을 설명하는 은혜입니다. 1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특별 은혜에 해당하고 개혁주의 개념에는 일반은혜로 회개해서 특별은혜로 넘어가는 개념이 없습니다.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설명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