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제자들을 생각하며
김홍전
우리가 잠시 생각하려는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에 대하여 제자들이 처음에 보인 반응은 무엇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먼저 부활하신 날 새벽에 보면,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에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예수의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막 16:9-11). 이것이 제자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만 보고 와서 두 제자에게 얘기하고, 두 제자는 묘지에 가서 점검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 동안 막달라 마리아는 뒤늦게 다시 헐떡거리고 묘실로 와서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반가움, 기쁨을 얘기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도,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당신을 나타내 보여 주셨다는 것도 믿지 아니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에 대해서 나중에 책망을 하시고 실증해 주셨습니다.
묘소에서 돌아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뵌 갈릴리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가서 그 소식을 전했지만 또한 믿지 않았습니다. "무덤에서 돌아가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들에게 고하니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더라"(눅 24:10-11). 주의할 것은 다른 제자들뿐만 아니라 사도들도 안 믿었다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만은 무덤을 점검하러 왔다가 무덤이 빈 사실을 보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기록할 때에 세마포가 놓인 상태와 머리를 쌌던 수건이 개켜 있는 것을 보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부활에 대해 가르친 것을 생각하지는 못하고 그냥 갔다고 했습니다(요 20:9-10). 어떤 사실을 보고 그 사실 자체는 승인하되 그 의미는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논리와 결론은 승인하지만 아직도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예언으로 가르쳐 주신 바 부활에 대한 계시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 가운데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보이신 후의 이야기에서도 불신이 드러납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밤에 길을 돌이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남은 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막 16:13)는 기록이 나옵니다. 안 믿었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의 기록에는 시몬에게도 나타나셨다 하는 얘기를 덧붙이고 있지만, 마가복음의 기록에는 고하였으되 그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안 믿은 사실에 대해서 또 마가복음에서 보면, 이것은 부활하신 다음 한 주일 후 곧 주께서 여섯 번째로 나타내 보이신 얘기입니다만,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전하는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 16:14). 이렇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나타난 현실을 보고라도 그들은 의아해했습니다.
부활의 현실을 보고서도 의아해한 사람들을 또 볼 것 같으면,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 28:16-17)고 했습니다. 이것은 갈릴리 어떤 산에서 여덟 번째로 나타내 보이신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더라 했습니다. 아직도 그렇단 말입니다.
이런 현실이므로 주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깨우쳐 주실 때에도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하셨습니다(눅 24:25). 미련하다. 어째서 미련하냐?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미리 얘기를 하도록 하시고 그 의미를 가르쳐 주셨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그래서 그것을 못 믿는 사람들이므로 미련하다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5절). 그리스도가 죄 없이 고난을 받으셨으면 하나님의 공평과 공의에 의해서라도 이번엔 영광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냐? 너희들이 알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신관이나 기본적인 정의의 관념으로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하느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그렇게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둔해서, 미련해서, 깨우침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주께서는 무엇을 주시느냐 하면, 그냥 실증만을 죽 늘어놓고 너희 영혼의 기능을 가지고 추리를 해서 결론을 얻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계시를 내려 주십니다. 이것 한 가지는 늘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우리의 논리가 우수해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각각 자기의 논리 형식에 의해서, 자기의 추리에 의해서 어떤 결론을 얻겠지만, 그것에 의해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의지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수한 논식(論式)으로 위대한 신앙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믿음의 발생에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먼저는 말씀에 대한 지적인 수용이 있어야 합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아, 그렇구나. 그것이 사실이구나. 진실이로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필연적으로 이런 결과가 와야 하지 않는가’ 하고 자기가 수긍하고, 수긍할 뿐 아니라 자기 속에 ‘과연 그렇다" 하고 깨달음에 대한 기쁨을 표시하는 정서가 있고, 그리고 ‘이제 그렇다면 걱정할 것이 없다. 이런 보장이 있으니까 가자" 하고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위 지적인 수용이 있으면 그에 의해 자기 마음 가운데 정서적 승인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의지를 발동해서 나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신앙의 요소들입니다. 이런 절대적인 요소가 없이는 안 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사람들이여" 하고 나무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일이 아닌 말씀을 강의하시는 일로써 제자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잊어버리거나 안 믿는 사람에게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말씀도 못 믿으면 그 다음엔 더 믿을 게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허락도 못 믿으면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께서는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사 다시 깨닫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들의 빈곤한 논리, 빈곤한 사유력에 힘을 주시고 또 자세히 풀어 가르치셨습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글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엠마오로 가던 이 두 제자를 깨우쳐 주시느라 주님은 토라, 느비임, 케투빔에 쓴 바 예수께 관한 내용들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나중에 아직 예수님이신 줄 모르는 상태에서 저녁에 예수께 강권하여 함께 유하러 집에 들어갔다가, 결국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그때는 이미 예수님이 사라지셨지만, "아, 주께서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풀어 이르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그래, 그때 마음이 뜨거웠었다. 그렇구나" 하고 수긍을 하면서 그 의미가 마음에 새롭게 비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깨달음을 가지고 그 길로 되짚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가 없다고 되돌아간 것입니다.
그들이 본래 어디서 살았는지는 모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로 가던 사람들이었지만 자기네 집이 그 근방 어디 다른 촌에 있었는지 우리가 알 수 없으나, 가령 엠마오라 하더라도 예루살렘에서 대략 25리나 되는 곳입니다. 그러면 2시간 이상 걸어야 할 것입니다. 실컷 2시간 반이나 걸어왔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캄캄한 밤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제자들을 보고 말을 하니까, 아까 마가복음에서 본 대로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믿지 않은 사실이 그 이후에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제자들은 어떠한 사상 가운데 있었던 것인가? 그 동안 그렇게도 훌륭한 많은 교훈을 받아왔는데 어떻게 된 연고로 그런 결과를 빚은 것인가? 그들이 교훈으로 받아 축적한 내용과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얻은 깨달음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들이 맞닥뜨리게 될 여러 가지 문제를 능히 잘 해석하고 해결해 나갈 수 없는 정도였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믿어야 할 부활에 대해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 이전에 이미 믿었어야 할 내용 가운데 믿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람들은 비록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배우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독특한 사상의 기저가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메시야관이 그것입니다. 부활의 전제는 죽음입니다. 죽어야 살아나는 것인데, 그들은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죽어야 하는 까닭을 못 믿었던 것입니다. ‘왜 메시야가 죽어야 하느냐? 그리고 죽어서 성취할 것이 무엇이냐’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던 까닭에 그랬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그들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문제 즉 주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는 말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하고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실은 역력한 현실인 까닭에 믿고 안 믿는 문제가 아니고, 승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는 거룩한 하나님의 경륜의 의의는 모르는 까닭에 그저 사람이 살다가 죽은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돌아가심이 품고 있는 특수한 의미와 하나님의 독특하고 거룩한 계획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었던 까닭에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런 정도였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그냥 소홀히 넘기지 않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의 기저가 무엇이었고, 또 특이한 예수님의 교훈 아래서 어떤 생각들을 하고 따랐던가 하는 것들을 충분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재료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재료가 대단히 희박할지라도 그 동안 배운 복음서에서 충분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활을 못 믿은 이 사람들은 결국 십자가에 대해서 이해를 못했던 것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찾아왔으며, 평소에 누구로 알고 지지하고 따라다녔나? 또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있는 그 인식의 기본은 무엇인가? 즉 어떠한 생각과 어떠한 사상 가운데서 예수님을 따르고 가르침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사상이 예수님을 만난 후 얼마만큼이나 변했나?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구속의 은혜 가운데 들어갔으면 어떠한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인가? 대체 그가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생각이나 세상을 추구하는 마음은 얼마만큼이나 변했는가? 그전 그대로 완고하게 주저앉아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은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실 때 미련할 뿐 아니라 ‘완악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소나기가 쏟아지듯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 세상의 생각이나 발상법이나 사상을 제거하고, 신선한 하나님 나라의 사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인간을 바라보고 또 역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 우리의 기저(基底)에 이 거룩한 사상을 보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결국에 가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상과 내용을 체현하고, 천명하고, 설교하고 나간 사도들의 믿음을 찾아서 배워야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육신으로 계실 동안 따라다니던 당시 제자들의 형편은 어떠했는지,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자기들의 중심을 새롭게 바꾼 위대한 변혁을 일으켰는지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요 위대한 일입니다.
- 예수님의 행적 10권 121강 가운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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