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묵상

오경의 핵심적 신학과 성경의 구조

오경은 한 사람이 그 저작자이고 그것은 모세일 것으로 보수 신학은 추정한다. 물론 후대에 일부 지금 형태의 오경이 갖춰졌다고 해서 이것을 '모세원저작설'이라고 한다.

오경에서 창세기의 10개의 "엘레 톨레도트"는 "씨" 곧 후손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족보는 단지 명단을 기록한 한국식의 족보가 아니라 구원 역사를 추적하는 방식으로서의 족보다. 그리고 이 방식은 그리스도 계시를 보여준다.

바울이 구원 경륜을 설명하면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본문 한 구절을 가지고 와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경륜을 설명하려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의 마지막 톨레도트인 야곱 톨레도트는 이런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언약을 말하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언급해도 요셉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이며 이 세 번의 약속은 언약의 삼중 구조와 삼위일체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4명의 족장이야기로 창세기를 설명하는 것은 오경 이해의 혼란을 가져다준다.

오경을 관통하는 구조 중 하나가 이 삼중 구조다. 10개의 구원의 계대와 출애굽기로 오면서 10개의 재앙과 10개의 계명이 다시 삼중 구조를 이룬다.

구원 계대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씨에 초점 맞춰져 있다. 바울이 자주 인용한 창세기 15장의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한 구절은 아브라함의 두려움과 아브라함의 씨에 대한 질문으로 이뤄져 있다. 이 질문은 14장에서 멜기세덱을 대면하면서 나온 질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이 장면을 아브라함이 그리스도라는 씨에 대한 약속을 받는 것으로 그것을 믿은 것으로 해석했다.

창세기의 10개의 계대는 구원자 문제에 대한 약속이라면 출애굽기는 구원 자체를 다룬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원 모티프는 항상 출애굽 사건으로 묘사된다. 예컨대, 누가복음에서 변화산에서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의논하시는 "별세"에 대한 논의는 원문상 "출애굽"을 의미한다. 마태복음은 예수를 새모세로 해롯을 바로처럼 묘사했다. 마태의 특수 중 하나는 아이들을 살해하는 것인데 이는 모세의 출생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도의 애굽으로의 피신은 역설적이게도 해롯과 예루살렘이 바로와 애굽으로 유비되고 그곳에서 탈출로 묘사되었다. 계시록은 예루살렘을 애굽이라고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구원 모티프로서 출애굽은 두 가지를 담고 있다. 하나는 심판이며 다른 하나는 건져냄이다. 대표적인 홍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는 건지심이요 바로의 군대에게는 심판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역시, 구원사적인 하나님의 큰 일을 듣는 구원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베드로의 요엘서 인용과 설교는 이것이 종말의 성취로서 심판의 사건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거기에 사용된 "모인 곳의 진동" "불의 혀" "급하고 강한 바람"은 모두 이스라엘을 고소했던 엘리야의 이상이기도 하다. 엘리야와 세례 요한의 의문점은 동일한 데 이런 상황에 심판하지 않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고소하는 것이다. 그때 엘리야가 받은 이상이 지진과 바람과 불 가운데 계시지 않는 하나님이었다. 이는 심판의 때가 지금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는 세례요한에게서 그래도 반복된다.

이 구원 모티프의 정점이 십자가다. 십자가는 우리편에서는 구원의 사건이지만 그리스도 편에서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심판의 사건이다. 오순절도 이 두 가지를 그대로 담고 있다. 구원과 심판의 두 가지 모티프를 출애굽기가 드러내는 방식이 10개의 재앙과 10개의 계명이다. 시가서들이 주석하는 대로 계명은 생명을 의미하고 10개의 재앙은 모두 애굽 신들의 사망을 의미한다. 특히 애굽의 주신인 아몬-라는 태양신으로 흑암의 재앙은 라의 죽음을 의미했고 신으로 숭배된 바로의 아들의 죽음은 애굽 신들의 죽음을 의미했다.

이렇게 10개의 계대, 10개의 재앙, 10개의 계명은 구원의 삼중 구조를 보여준다. 8세기 선지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심판의 삼중 구조, 역시 이런 특징들을 보여준다. 아모스가 심판을 설명할 때 항상 삼중 구조로 설명한다. 엘리야가 받은 응답 역시 삼중적 심판 구조를 하고 있다. 삼중적 언약 구조와 삼중적 심판 구조와 오경이 지닌 삼중의 10이라는 구조는 이런 맥락 속에 존재한다.

이것은 계시록에 가면 인과 대접과 나팔이라는 삼중 구조로 나타난다. 이 삼중 구조와 더불어 144000은 12*12*1000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대인의 열두 지파와 이방인의 열두 사도 그리고 이 10개의 삼중 구조의 조합이다. 천년은 그런 의미를 담는다. 솔로몬의 일천 번제가 완전한 헌신을 의미하고 엘리야의 7000명이 구원의 완전함을 의미하듯이 1000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이 삼중구조에 기원한다.

창세기는 족보의 민족들을 나타낼 때, 의도적으로 숫자를 70에 맞추기도 했다. 이는 창조의 완성의 7일과 구원자의 10개의 계대를 맞춘 의도적 구성이다. 마태복음이 그리스도의 계보를 다윗의 이름을 숫자로 푼 게마트리아를 이용해 14의 삼중적 반복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도 같은 이유다. 오경에서 7과 10은 중요한 숫자로 계속해서 반복되며 이것은 다시 삼중 구조로 드러나는데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가 구원사적 경륜으로 드러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블로그 > 목회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셉의 신학  (0) 2020.09.10
구원과 심판의 심리적 의미_미완성  (0) 2020.09.10
욕동과 믿음  (0) 2020.09.10
셉나와 엘리아김에 관한 말씀(사 22:15-25)  (0) 2020.08.12
무제  (0) 2020.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