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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창세기강해

창세기 19장 강해, 소돔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

창세기 19장 강해, 소돔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


노승수 목사

창세기 데라 톨레도트, 아브라함의 일대기를 이 쯤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그의 아버지와 함께 불러내십니다(창 11:31, 행 7:2). 그렇게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하란에 데라 일족이 정착을 합니다. 거기서 다시 아브람과 그의 조카 롯을 불러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십니다(창 12:1-5, 행 7:4). 그렇게 가나안에 들어오게 된 아브람에게 12:1-3의 주어진 계시의 확증으로서 12장 후반부의 애굽 사건이 주어졌습니다. 그의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3절의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의 확증과 같습니다. 동시에 아브람이 받았던 약속의 씨가 위기를 맞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런 위기 가운데 하나님은 그를 구원해 내시며 그는 큰 제물을 얻어 애굽에서 나오는데 이는 나중에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의 구속의 복의 예표이기도 합니다(출 12:35-26). 그렇게 애굽에서 거부가 된 아브람과 롯은 좁은 땅으로 인해서 분쟁하고 갈라집니다. 아브람은 형제 롯을 택했으나 롯은 삼촌 아브람을 택하지 않고 자기 안전과 재산을 택하여 소돔성으로 갑니다(창 13:6-13). 애굽에서의 경험에서 아브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고 롯은 세상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사건 후에 하나님은 계시로 아브람을 위로하시고 다시 그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십니다(창 13:14-18). 


그러나 안전을 향한 롯의 바람과는 달리 롯은 소돔성에서 중동 9개국 왕과의 전쟁에 맞닦뜨립니다. 그는 전쟁 포로가 되고 맙니다. 아브람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자기 집에서 길리운 318명의 사람을 데리고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전쟁에 나섭니다. 12장에서 아브람이 애굽 왕을 두려워 한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아마도 아브람은 롯을 자기 후사, 곧 하나님께서 주실 씨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애굽에서 사래를 누이라 속인 것 역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 속일 수밖에 없었고 후사를 위해서 필사적으로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편은 비겁해보이고 한편은 용감무쌍해보이는 서로 배반적 캐릭터는 이 씨에 대한 태도로만 통일성있게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런 그가 전쟁에서 돌아오다가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을 만나는데 그가 떡과 포도주를 들고 나오고 아브람은 그에게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 멜기섹덱은 그리스도의 계시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0편의 다윗이 말한 주이며 그는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으로 다윗에게도 계시됩니다(히 5:6-10). 히브리서 기자는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족보도 없는 제상으로 그리스도를 방불하는 제사장으로 그리스도의 모사로 봅니다(히 7:1-3). 즉, 아브람에게 그리스도가 계시된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고 15장에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네 상급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아브람은 자기에게 씨가 없다면서 생명을 다해 구출한 근족인 롯을 두고 집에서 기른, 아마도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오는 여정에서 얻은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후사로 언급합니다. 이 언급 자체가 14장에 멜기세덱 사건이 계시적 사건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공교롭게도 떡과 포도주를 들고 아브람을 찾아오고 아브람은 그에게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 사건을 계시로 하나님께서 다시 씨에 대해 확답하시는데 네 씨가 하늘에 별과 같을 것이라는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아브람이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는" 사건, 곧 이신칭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아브람은 12장에서 부르심을 얻고 비로서 15:6에서 중생을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때 약속한 "씨"가 단수인 것을 들어서 이를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갈 3:16). 멜기세덱과 하나님의 씨의 약속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받고 이 때 아브람에게 믿음이 들고 그는 비로소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 약속을 성취하실 것은 일방적 언약을 통해서 짐승을 갈라놓은 것 사이로 횃불로 지나가시므로 거룩한 성약이 맺어집니다. 


그리고 16장에 여종 하갈의 임신과 사래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4:21이하에서 이를 알레고리로 해석합니다. 즉 여종은 시내산의 율법으로 종의 언약인 옛 언약으로 사래를 예루살렘에서 맺어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새언약으로 유비합니다. 실제로 16장에 하갈에 대한 계시는 우리가 이렇게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은 단지 가정사를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체 구원 경륜의 사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갈로 말미암아 난 이스마엘을 육체를 따라 난 자로, 사래를 통해서 날 이삭을 성령을 따라 난 자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통해서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를 변증하는데 혈통적 유대인이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난 자라야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입은 자라야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상속자라는 점을 변증합니다(롬 4:11-14, 갈 4:28). 그런 점에서 시내산 언약의 후손으로 언급된 하갈과 이스마엘은 바울 당시 유대인의 태도, 곧 율법을 의지함으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과 유비가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7장에 할례 언약이 등장하는데 할례언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과 할 것이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말합니다(17:19, 21). 아브람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이삭과 약속을 맺고 그로부터 난 자가 바로 네 씨라는 점을 분명하게 합니다(롬 9:6-9). 그리고 할례언약의 표징이 의미하는 표의는 바로 중생입니다(신 30:6, 롬 2:29). 바울은 할례를 무할례시에 받은 믿음을 인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롬 4:11). 신약은 믿음을 인치시는 것을 성령으로 설명합니다(엡 1:13, 4:30). 바울은 갈라디아서 3:14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며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에 미치는 사건을 성령을 약속으로 받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성령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의 일관된 입장인데, 사도행전 1:4에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할 때, 이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며 구원의 보증으로 약속의 성령을 언급하는 에베소서 1:13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할례언약은 신약의 세례 언약과 등치를 이루고 세례의 표징 역시 궁극적으로 성령세례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장에서 이렇게 약속의 보증을 입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삭이란 씨를 약속하시는데 생리가 끊어진 여인을 통해서 약속하셨고 이는 불임 모티프로 동정녀 탄생과 여자의 후손에 관한 계시적 메타포 중 하나입니다. 동시에 이것이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약속에 의한 것이며 그 약속의 지위를 얻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하는 다스림의 위치에 있을 것임을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18장의 사건이며 이 계시는 18-19절의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는 표현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런 심판과 다스림의 위치에 교회가 있고 이 교회의 원형이 바로 아브라함을 부르신 궁극의 이유와 목적인 것입니다(18:19). 


이렇게 길게 설명드린 이유는 19장을 이해함에 있어서 17장의 사건, 곧 할례언약이 궁극적으로는 인치는 사건으로서 성령에 대한 약속이라는 점을 주지시키기 위함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세례 요한이 마태복음 3장에서 말한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과 성령(폭풍)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심판의 의미를 담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령 사건이 요엘서의 예언의 성취로서 종말론적으로 해설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심을 입고 가나안에 와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고 이스마엘의 출생과 할례언약을 통해서 성령의 약속을 성부로부터 받고 아브라함의 씨면 모두 약속의 씨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난 이삭이라야 아브라함의 씨이며 이것이 참된 약속의 씨라는 점을 보여주고 이제 소돔 사건을 통해서 성령 강림 사건이 심판의 사건임을 유비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서정으로 보면 부르심-믿음-중생-성령받음-인치심-보증-상속자됨이 구원 역사를 통해서 계시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소돔의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자비롭고 인애롭게 전개되는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과 헤어졌던 두 천사는 소돔에 이르렀고 18장에서 아브라함의 중보 장면에서 보았듯이 하늘에 들린 원성을 그대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런지를 알려 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창 18:21). 신약은 롯을 의로운 부류로 언급하지만 구원의 문제에 있어 롯은 멸망과 그 멸망이 얼마나 하나님의 오래참음과 자비하심과 신중함 가운데 전개되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실제로 롯의 후손이 모압과 암몬은 하나님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오지 못한다(신 23:3)는 말씀으로 보건대, 롯의 지위는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약속의 씨도 아니었으며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세상의 부와 안전을 더 신뢰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중대한 지점이 있습니다. 참 신자는 어려움과 고난을 만나 자기를 한탄하더라도 하나님께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신뢰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어려움을 만나 이런 환경을 탓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기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심리학자 융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은 어떤 어려움도 없다."고 말합니다. 세상 심리학자도 자기를 돌아보면 이 모든 어려움의 근원이 자기라고 정직하게 고백함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기 바쁜 것이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롯에 대한 환대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때, 롯은 아브라함은 안중에 없고 자기 재산과 안전만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가 택한 곳은 악한 사람들이 거주하던 소돔이었고(창 13:13), 거기서 전쟁을 만났으며 아브라함의 구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성에 거했으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16절이 말하는 것처럼 그는 "지체했습니다" 그가 가진 재산을 더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소돔의 악함은 천사인 줄 알고 그들을 윤간하려 했던 그들의 태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소돔의 악함을 신약성경 유다서는 이렇게 설명하는데요. 6-7절을 보면,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6절의 내용은 천사의 타락의 내용을 의미하고 7절의 내용은 소돔의 범죄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범죄를 설명하면서 6절의 천사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히 다른 육체를 추구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일종의 접신함입니다. 구약은 신접한 자를 용납하지 말라고 경고하는데요(신 18:11).  아마도 이 범죄는 바로 하나님의 이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노아 시대의 범죄도 소돔과 고모라의 범죄도 태초의 혼돈과 공허를 질서 세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역하는 범죄이고 그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베드로후서 2:6-11도 이런 문맥을 잘 보여줍니다. 롯의 의로운 심령이 상하였다고 하였지만 그의 이후의 삶은 그렇게 의롭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롯의 의로움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그의 행동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가 믿음의 약속에 있었다는 증거는 사실상 찾기 어렵습니다. 앞서 설명드렸다시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의 자비함과 신중함, 그리고 공정함을 보여주는 일련의 역할을 하는 것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에서 의로움이란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신 율법에 맞추어 사는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시편 1, 37편). 그런 점에서 롯이 나그네를 대접함으로 천사를 대접한 것은 잘한 처신입니다. 천사에 대한 악행 대신에 자신의 처녀 딸을 내어준 행동도 고대적 윤리관에서는 의로운 행동이었습니다(물론 현대적 관점에서는 말이 안되는 태도이지만 역사적 정황과 문맥 안에서 이 행동의 의미를 해석해 내어야 합니다). 롯은 그곳에 거하면서 그 심령이 상하게 되고 그 상함은 부지불식간에 두 딸과 동침하는 사건으로 이어졌으며 그의 부인은 소돔의 삶에 젖어 돌아봄으로 소금기둥이 되는 비극적 삶으로 롯의 생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에 선한 열매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의 후손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율법에 자신의 삶을 맞추고 순종하려는 일말의 의로운 행동을 보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조그만 의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신중하고 자비롭게 그의 진노의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회개치 않는 가버나움을 향해서 행하신 이적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행했다면 그 도성이 지금까지 있으리라고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십자가를 지러 오심은 하나님의 진노의 실현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진로를 그분이 받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진노를 지시면서도 세상을 향해 치유와 이적을 보이셨음에도 그 도성이 회개치 않는 것입니다. 창세기 19장은 구원 후에 심판의 이런 정황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롯은 아마도 애굽에서 겪었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거 같습니다. 아브람이 느꼈을 공포를 롯도 느꼈으며 그가 애굽에서 나온 후 소돔성을 택한 이유도 풍족함과 안전이었습니다. 앞서 설명드렸지만 그의 선택이 전쟁포로를 경험하게 했고 그를 더욱 더 악한 소돔성을 버리지 못하게 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가 계속 지체하는 이유도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9-20절에서 롯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그가 그렇게 성을 고집하고 전쟁에도 불구하고 악함에도 불구하고 소돔성에 남은 이유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염려가 무슨 큰 죄일까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주님은 천국 비유에서 이것이 열매 맺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22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이 구절의 가장 구체적인 예가 롯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연약한 자라 하더라도 끝내 인내하시며 심판을 이루십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구절이 마태복음 12:20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그렇습니다. 롯의 의로움 심령은 상하고 그는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심지 같았으나 끝까지 돌아보시고 그의 지체함에도 불구하고 기다리시며 악함이 하늘에 상달하여 들릴지라도 주의하여 살펴보러 천사들을 보내시며 그들이 행악함이 목적에 증거로 들어났음에도 롯과 그의 가족이 탈출하기까지 기다리시며 산으로 도망하라 함에도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 잡힌 롯의 요구를 들으시기까지 심판을 미루시고 수정하셔 마침내 심판하여 이기기까지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