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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창세기강해

창세기 21장 강해, 이삭의 출생과 브엘세바의 언약(창 21:1-34)

창세기 21장 강해, 이삭의 출생과 브엘세바의 언약(창 21:1-34)


노승수 목사


창세기 21장은 1-21절과 22-34절로 나뉠 수 있다. 전반부는 이삭의 출생과 이스마엘의 추방에 관한 기사이고 후반부는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우선 이 두 사건의 조합이 부작위에 의한 조합이 아니라 계시를 드러내려는 명백한 목적을 가진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전반부는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살핀대로 이스마엘이 이삭이 젖을 떼던 때에 그를 해코지 한 것을 빌미로 내 쫓기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갈 4:29-30). 창세기 18:14의 예고가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그저 말씀하시고 잊어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라를 돌보셨습니다. 사라를 어여삐 보시고 주의 깊게 돌보고 계셨습니다. 그 결과 이삭이 드디어 출생하게 됩니다. 이삭은 '그 남자(그 여자가, 사람들이)가 웃는다'는 뜻입니다. 그 해석은 첫째로는 사라가 기뻐서 웃었다는 것이요, 둘째로는 주변 사람들이 이 기쁨을 나누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18:12에 사라의 불신의 표현으로 웃음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이삭이란 이름을 통해서 사라의 불신이 믿음과 공동체의 기쁨으로 바뀌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는데 이는 이미 여러 차례 살핀대로 중생의 표이자 언약의 상징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성령을 약속하신 것입니다(행 1:4, 갈 3:14). 


그렇게 성령을 따라 난 이삭이 우리 나이로 4-5세 되어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합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를 해석하기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29-31)고 말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 육체를 따라 난 자들에게 핍박과 박해를 받는 상황에 대해서 성경의 예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를 따라 난 자는 기업을 얻지 못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계시인 것입니다. 바울 당시 육체의 할례를 신뢰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계없던 유대인의 그릇됨을 지적함과 동시에 우리 구원의 도리가 육체를 따라서는 아무런 유업을 얻을 수 없음을 분명히 드러내어 교훈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삭의 출생이 성령을 따라 난 것이라는 것은 사라의 불임과 그에 따른 돌보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동시에 교회는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가 함께 있어 육체를 따라 난 자들로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 핍박과 박해를 받으나 기업은 반드시 성령을 따라 난 이삭, 약속을 따라 난 이삭에게만 주어진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일로 아브라함이 기분이 그다지 좋지 못하였으며 인정으로는 아브라함이 맞고 사라가 틀린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정이 아니라 성경은 계시를 드러낼 목적으로 이런 것들을 비틀어 우리에게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중에도 육체를 따라 난 자의 대표인 이스마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도 끊이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해 불공정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의 입을 닫게 합니다. 하나님은 유기자에 대해서도 한 없는 긍휼을 보이십니다. 자기롭게 기다리시며 인내하시며 자비와 긍휼을 보이시며 은혜를 주십니다. 롯에게 보였던 긍휼과 인내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비의 크기가 얼마나 큰 지를 우리고 깨닫게 했듯이 내어 보낸 이스아멜과 하갈에 대한 보살핌과 후사에 대한 약속은 이런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0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의 다른 씨였던 이스마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근심하지 말라면서 일러주신 것처럼,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12)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자손은 이삭 한 사람이며 그로 말미암아 나는 자가 바로 성령을 따라 난 중생한 택자들인 것입니다. 이는 혈통이나 육정을 따라 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난 것입니다(요 1:13). 


후반부(22-34)은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는 장면입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언약을 맺기 원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우물에 대한 분쟁이 그 종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을 따로 세운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7개의 우물에 관련한 분쟁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이는 히브리 말로 일곱이 쉐브아이고 맹세가 세바여서 아마도 일종의 워드 플레이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물을 의미하는 브에르와 합쳐져서 맹세의 우물, 일곱의 우물을 의미하는 브엘세바라는 지명이 형성되었고 이 곳은 이스라엘 약속의 땅의 최남단입니다. 애굽이 죄와 그 세력을 상징한다면, 약속의 땅의 첫 성이 바로 브엘세바입니다. 이는 할례가 난 지 8일 만에 행해지는 것처럼 할례 약속의 진정한 의미인 이삭의 출생 후에 맺어진 언약으로 생명에 대한 약속에 대한 계시로 보아야 합니다. 우물은 통상 생명, 혹은 성령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사용됩니다. 이스마엘이 역시 이 샘 곧 우물에서 물을 얻어 가죽부대에 채워 마시게 함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이 부분을 주해하면서 이스마엘의 가죽부대를 "율법의 자루"라고 합니다. 생명의 근원인 샘에서 먹지 못하고 거기서 떠 온 물을 부대에 담아서 먹는 것이 마치 그리스도에게서 먹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가죽부대인 율법에서 먹는 것에 우의적으로 빗대어 해설합니다(오리게네스, 창세기 강해, 7, 5.). 예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 생수를 구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는 샘물이 된다고 하셨습니다(요 14:14). 그리고 다른 데에서는 그 생수를 성령이라 일컬으셨습니다(요 7:38-39). 


20장에서 보았던 씨의 위기 후에 빼앗겼던 생수의 근간인 우물들을 되찾습니다. 그것도 완전히 되찾습니다. 그것이 일곱 우물이 상징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이는 앞서도 설명한 갈라디아서 3:14에서 성령에 대한 약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 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상징하는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사로 드리는 22장의 사건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는 약속은 성령에 대한 약속입니다(행 2:33, 엡 1:13, 갈 3:14). 이삭이 성령을 따라 난 자라는 해석을 우리가 받으면 이어지는 브엘세바에서 하나님 앞에서 맹세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 아브라함과 함께함을 이제 아비멜렉을 통해서 확증하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이들을 부르시지만 이스마엘과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에게서 보듯이 그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마시지 않고 율법의 자루에서 마셨습니다. 이제 이삭의 출생, 곧 성령을 따라 난 자가의 남으로 하나님의 대적자라 할 수 있는 아비멜렉도 하나님께서서 그와 함께 함을 확증하고 아브라함으로부터 뺏었던 생수의 근원인 우물을 돌려주고 언약을 맺음으로 이웃과 평화를 이룰 뿐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서 성부께서는 성령에 대해서 약속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