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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창세기강해

창세기 20장 강해, 두 번째 겪는 씨의 위기의 의미

창세기 20장 강해, 두 번째 겪는 씨의 위기의 의미


노승수 목사


창세기 20장은 창세기 12:10-20의 애굽 기사의 반복처럼 보인다. 12장은 바로와 관련한 기사이고 20장은 에비멜렉과 관련한 기사라는 차이점을 제외하면 둘은 같은 내용, 곧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기사다. 이를 두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같은 사건의 다른 자료의 기사의 배치라고 본다. 내용의 유사성 때문에 각기 다른 전통의 기사가 편집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좀 더 본문을 유심히 보면, 독특한 지점이 있다.  예컨대, 12장의 기사는 3절의 예언의 성취이자 씨에 관한 계시 후 닥친 첫 번째 위기라는 점이다. 이 사건 후 아브람과 롯 간에 분쟁이 생기고 갈라선 후(13장), 발생한 전쟁에서 롯을 구하고 오다가 멜기세덱을 만나 계시를 듣는 사건으로 이어진다(14장). 그리고 15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신칭의의 거듭남을 경험한다. 16장을 통해서는 혈통의 씨가 참 씨가 아니라 성령의 씨가 진짜 씨라는 점을 계시하고 17장에서는 할례언약을 통해서 마음의 할례, 곧 성령을 보증하신다(엡 1:13, 행 1:4, 갈 3:14). 18장에서는 이삭의 출생의 약속과 심판의 중보가 그리고 19장에서는 심판이라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다시 12장과 같은 행태의 사건으로 돌아 간 것이다. 이는 바로가 꿈꾼 두 꿈은 하나이며(창 41:25), 이 두 사건이 거듭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기 때문이다(창 41:32).  12장에서 바로 기사가 있고 난 후에 15장에서 약속이 있었던 것처럼 20장에서 아비멜렉 기사가 있은 후 그 구체적 징표인 이삭이 출생한다(21장). 16장에서 이스마엘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 것처럼 21장에서는 이스마엘을 내쫓는다. 성령의 약속 후에(18장), 19장에 심판이 오는 것처럼 이삭의 출생 후에 22장에서 모리아 산에서 심판이 온다. 창세기 22:2의 모리아 산은 역대하 3:1에서 보면 예루살렘이며 다윗이 계시를 받은 타작마당이다(대하 3:1).  이 장소는 사무엘하 24장을 보면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이다(대상 21:15 비교). 이 타작마당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그 진노가 누끄러뜨려지고 화목케 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며 이 장소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다. 바울은 이 진노의 누그러뜨림을 로마서 3:25에서 화목제물로 묘사했다. 마태복음 3장의 세례요한, 곧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여자가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 구약 계시로서 그리스도를 최후로 묘사한 요한은 바로 이 타작마당의 이미지를 통해 그리스도의 심판을 그린다. 그리스도의 길을 바로 알곡은 모아 곡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실 적을 예표한 것이다. 그가 오해한 것은 이 심판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에게 이뤄질 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창세기의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로서 아브라함의 삶의 계시를 살펴보는 중에 두번의 반복은 이 일이 확정되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바로 18-19장에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로서 또 그 일에 아브라함이 정의와 공도로 함께 다스릴 것이라는 점에 강조점이 있었다면 22장의 모리아산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준비하심을 계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데라 톨레도트로서 아브라함의 기사는 12-19장과 20-22장으로 나뉠 수 있고 그 기점이 되는 사건이 바로 씨에 대한 위기와 침습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 통치의 도래이며 이 통치는 바로 죄를 진멸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도가 시행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우리 스스로 이룰 수 없기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구원얻을 길이 있다면, 다시 말해서 율법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해주듯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선에 이르러 구원을 이를 수 있는 이가 없고 하나님의 의의 조건을 충족할 이도 없다. 이로서 우리 운명은 진노의 길 외에 달리 다른 길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진노의 길이 아니라 사랑의 길이 열린 것이다. 우리가 지난주 배웠던 19장의 사건 역시 진도 중에서 하나님의 세심하신 살피심과 아브라함의 중보로 드러난 대로 자비하심이 롯의 구원의 과정에서 보여진 것처럼 그 계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일, 곧 자비의 구원이 펼쳐진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이 길에 무임승차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나눈 그 사랑에(요 17:24) 우리가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믿음으로 연합하는 길 외에는 없다(롬 6:5). 그래서 믿음은 바로 이 구원 역사를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며 그의 약속에 대한 무한한 신뢰이다. 


그런 점에서 20장의 사건은 단순히 12:10-20의 반복이 아니라 계시의 점증으로 읽어야 한다. 12장에서는 단지 부르심을 입은 구도자였다면(15:6에서 중생함), 20장에서는 선지자로 소개된다(20:7). 아브라함의 이런 면모는 이미 19장에서 드러났으며 이 중보는 그리스도의 예표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가 된 것은 바로 15:6의 이신칭의의 사건으로 거듭나고 18장의 할례언약으로 성령을 보증으로 약속받는 사건 후의 일이다. 그의 중보로 진노가 거둬질 것이라는 계시가 아비멜렉에게 꿈으로 주어진다(20:7). 이에 따라 아브라함의 기도로 아비멜렉의 집이 치료된다(20:17). 


여기에 더해 20:3-6에서 보듯이 아비멜렉은 사라를 가까이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현몽하셨다. 미리 막으실 수 있는 일이지만 사태가 벌어진 후에 수습을 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문제 곧 사라를 누이라 소개하는 문제에서 사라와 이미 합의를 오래 전에 본 상태다(20:11-13). 사단의 궤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비상한 간섭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로부터 날 씨를 보호하셨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태의 열고 닫음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깨닫게 하신다. 그들이 처음에 생각하던 것처럼 21장의 이삭이 단지 혈통에 의한 출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출생이라는 점을 이 아이러니한 사건을 통해서 교훈하신다. 아마도 사라가 임신이 임박하면서 전에 임신할 수 없었던 상태, 곧 생리가 끊어진 상태가 개선되면서 노파가 아니라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회복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아비멜렉이 유혹을 받았을 것이고 이런 일이 생길 때 부부가 통상적으로 해오던 것을 해온 것뿐이다.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할 부분은 선한 일이 가까이 올 때, 악한 일도 함께 온다는 것이다. 이 시험에서 신실한 자가 승리한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이 일에 개입하심으로 이것이 단지 혈통의 출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가 약속의 후사를 잇는 사건이라는 점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의 여정을 통해서 믿는 것과 아는 일에서 하나가 되어 자라갔다(엡 4:13). 이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의 복이며 우리가 누릴 영적 지위를 보여준다. 정의와 공도를 행하시기 위해서 심판의 문제도 아브라함과 나누셨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상의 태의 열고 닫음과 망하고 일어섬이 아브라함의 기도에 달렸다. 우리를 이런 자리로 부르신 것이며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누리는 영적 지위가 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