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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교회론

칼빈이 말하는 진정한 기도란 무엇인가

칼빈이 말하는 진정한 기도란 무엇인가 
이승구 교수 '기독교 고전 읽기' - 칼빈<기독교 강요>기도편
"늘 기도하며 힘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응답 받는 것보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데 훨씬 더 많은 가치를 둘 것이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표가 그것이다." -조지 맥도널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형태와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자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소중한 자신만의 좌석'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기도 자체에 혼란과 좌절을 맛본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가 마치 다른 나라 얘기 같다.
예수 믿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믿기 전과 믿은 후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이승구 교수는 강의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구원'이나 '은혜' 그리고 '기도' 역시 예수를 믿기 전에는 전혀 상관없는 거지만 예수를 믿고 나서는 달라진다. 하지만 그건 내가 조정하여 내 안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우리 내면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는 '기도'와 '구원' 그리고 '은혜' 같은 측면은 우리 안에서 조정하고 움직여 하나님 뜻과 일치해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이 외부에서 우리 마음으로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키는 '외적인 은혜'라는 칼빈의<기독교 강요>중 기도에 대한 해석이다.
기도를 해석하며 '신인협력주의'라는 좀 난해한 용어를 쓴다. 이는 기도를 "하나님이 베풀어야 할 은혜는 반드시 사람의 의지와 호응해 작용되어야 하는 성취"라고 주장하는 용어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천주교의 해석대로 처음에는 우리 안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지만, 믿은 후에는 자신이 무언가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본다. 우리는 이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기독교 사상은 믿기 전이나 후나 우리 힘으로는 '구원'과 '은혜'가 시작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 후에 내려지는 단순한 '내리 사랑'과 같은 포상이자 선물이다.
이승구 교수는 "피조물들은 자연의 혜택을 받지만 그것이 주는 효과만 누릴 뿐 의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기도 자체에 그 어떤 의미 부여하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또한<기독교 강요>의 저자 칼빈은 "우리의 소망을 그분께 의존해야 한다"고 기도의 진실한 의미를 부여한다. 기도는 외부에서 다가오는, 그저 하나님께 의존하는 신앙의 요약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모범적인 삶에서 탄생한 기도하는 삶 자체를 누려야 한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지 그저 달라고 요구하는 것, 즉 주문을 외워 무언가 이룩하고자 하는 획득은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기도는 '인격체'로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교제가 아닌 사람과 사람사이 인격적인 만남과 소통으로 생각하여 대화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와 같은 기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1.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라
우리는 늘 '자신의 욕심'을 추구한다. 이는 기도에도 적용되는 필수적 요소이다. 기도의 특권을 남용하지 않기 위해 "자기 영광 위한 기도를 버리라"고 이승구 교수와 칼빈은 말한다. 자신의 간구만을 목적으로 기도하는 생각과 자세를 버려야 한다. 자기 문제만을 위해 밤낮 기도하는 일은 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신 '자신의 문제만을 위한 기도'보다 자신의 내면에서 겸허한 자세를 취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여 대화하는 기도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기도가 바로 기도의 시작이다. 이러한 독특성이 있기에 다른 종교의 기도와는 전적으로 다른 양상을 띤다. 결국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 영광과 뜻을 위해서 노력하는 행위, 마음 그 자체이다.
2. 부족함에 대한 자각
기도는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는 심리적 위안을 얻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중언부언하면서까지 장시간을 기도하고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방언'을 읊조려가며 노력하는 땀을 보고 있자면 "기도를 많이 해서 스스로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흡족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행위"는 기도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고 한다. 말을 많이 한다고 기도를 더 많이 들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기도를 안 하는 것은 더 시급한 문제이지만 하나님이 기도를 많이 한다고 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시간의 잣대를 들이대거나 기도의 결과로 선물을 받고자 하는 기도 역시 바라지 않는다. 
우선 칼빈은 자신의 부족함을 일깨워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기도하고 그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완벽하게 알았던 종교개혁자 루터는 늘 그 문제로 하루에 4시간을 하나님과 씨름했다. 기도는 자신만을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장시간 기도하여 남에게 자랑하려는 '액세서리'도 아니다. 
아래에서 문제 있는 기도 다섯 가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 기도는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깨닫기 시작하는 의식에서 나와야 하지만 자신만의 기도에 의미를 부여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하나님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노력하려는 생각을 한다면 헛된 기도라고 이승구 교수는 주장한다. 
두 번째, 유대인들의 외식하는 기도는 올바르지 않다.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보이든 안보이든, 어디에 있든 반드시 매일 9시와 3시에 서서 두 손 들고 기도한다. 주로 회당과 큰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유대인들의 기도(마태복음 6:5)는 상(포상)을 받았지만 예수는 이들의 기도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세 번째, 몇 시간씩 자신의 만족과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전혀 의미 없는 기도가 될 수 있다. 유대인들의 기도하는 마음에는 타인을 향한 매일 삶에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이룩하기 위한 기도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이 하나의 의미요 다른 하나는 그 기도로 인한 진정 자신만을 위한 기도로 변하여 퇴색되어 간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과 비슷한 양상을 띤다. 말을 많이 하면 들어줄 것 같은 심리적 보상을 노린다.(마태복음 6:7) 유대인들처럼 기독교인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로 시간을 때우기도 한다. '방언'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지적은 우리 같은 종교인들의 지적이 아니라 바로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지적임을 직시해야 한다. 심지어 예수는 그들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는 말을 남기며 아무도 모르는 곳,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보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간구하라고 선포한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 아버지는 은밀한 중에 사람의 마음을 보는 습성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마음의 상태에 따라 갚는다고 주장했다. 
네 번째, 1568년 교황 비오 5세의 업적(?)을 일궈낸<성무일과>라는 라틴교회 공적 기도처럼 공통된 기도의 형식대로 하는 기도는 문제다. 이는 기도하는 행위 자체를 더 높이 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것과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기도가 마치 의무화 된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마음에 그 어떤 형식이 있다는 것은 기도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다는 의미에 비춰볼 때, 진정한 의미를 퇴색한다. 이승구 교수는 "기도의 의식에는 '형식'과 '내용'이 함께 어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는 예수를 의존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섯 번째, 기도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사상을 제거해야 한다. 천주교의 기도는 마리아를 위한 기도, 성자들을 위한 기도 혹은 성자에게 부탁하는 기도, 세례명의 성인들이라고 말하는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수호성인'들에 대한 기도 등이 첨가되었다. 이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죽은 '성인'에 대한 모독이 될 수가 있다. 살아있는 성인들을 위한 기도 즉 동역자와의 교류와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진실한 목적을 상실한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만 기도해야 한다. 역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기도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 이는 살아있는 하나님을 다시 죽이는 일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다른 의미로는, 주문성을 가진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문구에서 그 자체가 갖는 효과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예수를 향한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이룩하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다.
3.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기도하는 마음'
첫째, 먼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둘째, 내가 기도했더라도 자신이 이룩한 생각을 지우고 기도가 '하나님의 약속'임을 생각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내가 기도했기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길 바라며 끈을 놓치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하기 전 어디서든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처소처럼 그에게 우리의 기도를 의탁해야 한다.
구약에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없었기에 기도에 제사적 의미를 부여하여 '성소' 혹은 '제사' 라는 예수의 보혈과 일맥상통한 상징적인 의미로서 기도가 행해졌다. 신약에 들어서는 구약에서부터 밝혀온 메시아 예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로 말미암아 기도 형태가 바뀌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기도의 올바른 해석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서 "무엇을 구하든지"의 의미는 기도를 주문처럼 외우라는 게 아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할 때, 하나님 뜻과 부합되는 모든 것들에 해당되면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된다는 뜻이다.
주문과 같은 신약의 기도가 이제 '언어의 미신' 같은 기도를 배제하고, 주문과 다른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구속사적인 감사에 더 치우쳐 기도하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가르친 기도는 성 어거스틴이 말하는 진정한 기도로, 그가 칭찬한 밀라노 감독이자 설교가인 암부로스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입이시다. 그를 통해 아버지께 말한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으로 칼빈이 말하는 기도는 '간구(solicitation)'와 '감사(thanksgiving)'하는 두 가지 태도를 수반한다. 간구는 하나님 뜻과 함께 우리 마음의 소원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 기도 후, 하나님 뜻을 필요로 하는 우리 욕구에 관한 것을 구하여야 한다. 감사는 기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그리고 영광을 그분에게 돌려 드리는 마음의 기도다. 
ACTS (기도의 네 가지 요소)
Adoration (흠모·예배): 하나님께 찬양.
Confession (고백·자백): 죄와 용서에 대한 자백과 삶의 고백.
Thanksgiving (감사): 신에 대한 감사
Solicitation (간구): 바라고 구함
Prayer is the wing where with the soul flies to heaven, and meditation the eye where with we see God. (기도란 천국을 향한 영혼의 비상들과 함께 하는 날개이며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는 눈의 묵상이다.) -Ambrose(암부로스, A.D. 340~397)
칼빈이 말하는 두 가지 기도, 사적 기도와 공적 기도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은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주는 것이다. 그런 기준에서 주의 깊게, 다른 사람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일이야말로 숭고한 사랑의 실천이다." -데이비드 허버드(David Hubbard)
1. 기도의 태도 
'기도하는 양태'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승구 교수는 이러한 기도의 양태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바뀔 수가 있다고 한다. 신약에 들어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후 유대인들은 주로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고 초기 기독교인들 역시 동일한 장소에서 드리기도 했다. 또한 일부는 가정집에서 이루어진 예배의 형태를 '처소' 혹은 '각처'라는 말로서 대신한 것을 엿보게 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나중에 기독교인들을 유대 회당에 발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다. 이단이라는 말과 함께 자신들의 신변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늘 그러한 위협을 느끼고 살았던 기독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에서 기도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당부한다. 신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그의 편지에는 피와 땀이 녹아 있다. 그는 힘들 때 위로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 것에 감사하고 감사했다. 그러나 그는 늘 외로웠고 배고파야 했다. 그것도 감옥에서 말이다. 제 삼자가 볼 때는 가히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다. 무엇이 그를 추위와 고통에서 방치했는가? 그래도 그는 예수를 쉬지 않고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예배하고 있었다. 그에게 장소와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중요했다. 
사도 바울은 살아 있는 동안 교회 혹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7~18)고 당부한다.<기독교 강요>의 저자 칼빈 역시 "모든 사람이 언제, 어느 때, 어떤 일에서든지 만사를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고, 모든 일로 그를 찬양하면서 자기들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기를 바울은 바란다"고 사적인 기도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 개인이 진심 어린 마음으로 간구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들어주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여기에는 '지속성'이 추가된다. 또한 '인내'가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기도와 예배를 쉬지 않았다. 기도의 우선순위를 아는 것이다. 그는 순교했다. 결국 그의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기도는 없었다. '자신의 잔을 옮기어 달라는 기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예수와 한 몸이었기에 그의 영광이 예수의 영광과 일치하는 순간이다.(요17:22) 
다니엘은 3주 동안 기도 응답을 기다렸으며,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의 예레미야 역시 열흘을 기다렸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가서 엿새를 기다린 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고 예수의 응답의 기도 역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요2:4)을 강조한다. 특히 예수는 십자가의 쓰라린 고통과 기도의 잔을 끝내 하나님 뜻에 맞추어 피하려는 개인의 욕심이 드러난 기도를 지속하지는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글 중 하나는 "비는 나쁜 자에게나 선한 자에게나 여전히 오늘 동일하게 내린다"라는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기도의 응답과 부재 역시 동일한 장소에서 '응답' 혹은 '응답 없는 응답'으로서 이 땅 위에 동일하게 내린다. 
2. 사적 기도와 공적 기도 
칼빈이 언급하는 두 가지 기도가 있다. '예배 차원'의 기도는 '사적인 기도와 공적인 기도'가 늘 동일하게 흘러간다. 기도에는 끊임없는 연속성을 가지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 사적인 기도 즉, '개인 기도'가 있다. 이와는 다르게 우리가 가끔 함께 모여 드리는 다수의 공식적인 '공적 기도'는 쉬지 않고 하기보다 일시적인 기도이다. 기간을 요하는 시간과 공간적 상황과 마주하는 '공적인 기도'는 일시적이면서도 공동체적 상황이 주기적으로 주어진다. 물론 요즘 공기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릴레이 기도'를 하는 곳이 늘어나는 풍토이지만 대부분은 일정 시간과 한 장소에 모여 함께 기도하게 된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에 의미를 너무 많이 부여하여 그곳에 참석하지 못한 자들에게 출석을 강요하거나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말하는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승구 교수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영적인 무지가 있다고 해야 할까? 바울이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고전 14:40)라고 표현한 것처럼 모든 일이 교회 안에서 잘 이루어져야 한다고 칼빈은 이에 대해 예견한 듯하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져 버린 후 우리는 예배 장소에 대한 장소적 개념을 받아들여 처소적 예배의 의미로서 여전히 구약 개념을 갖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교회라는 '처소' 혹은 '성전'이라는 의미는 인간이 만들어낸 장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오늘날 '교회'라고 하는 예배의 처소는 사람이 필요한 대로 짓고 정해진 시간에 함께 모여 유익한 나눔과 영적인 예배를 드림으로 진정 하나님나라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곳이다. 칼빈은 특히 '성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나름대로의 비밀스런 성스러움을 꾸며 놓았다고 한들 기도가 더 거룩해지거나 혹은 하나님이 특별히 들어 주시지 않는다"고 한다. 간혹 교회 안에서 맨 앞자리와 맨 뒷자리와의 관계를 은혜의 높낮이로 표현하는 것이 이에 해당되는 말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장소적인 예배'가 아닌 우리 자신이 참된 예배의 처소이자 성전임을 이승구 교수는 칼빈의 저서를 인용하며 명확하게 강조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교회 공동체가 성전이고 성령이 거하는 곳이 바로 예배 장소이자 그 성령이 거하는 우리 자신이 성전이다. 이제 교회 건물이 과거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는 아니다"라고 이승구 교수는 말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사라졌고 그 이후에 생겨난 공동체가 세운 것이 교회이다. 우리 공동체가 교회이고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점이 적용된다. 
문득 사마리아 성전과 예루살렘 성전을 비교하여 어느 곳이 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제구실을 하는지 물어보는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생각났다.(요4:21) 칼빈처럼 말하는 근거는 바로 예수가 여기서도 저기서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그것은 사실로 되어 오늘날 필요에 의해서 우리가 임대하든지 땅을 구입하여 교회 건축을 했다. 그러한 장소는 결코 예배의 참된 장소가 아니고 심령 깊은 곳에서 폭발하는 내 안에 움직이는 기도와 예배하려는 마음이 진정 예배의 중심지다.. 
이승구 교수는 "장사하는 곳이 나의 예배처소요, 모인 곳이 우리들의 예배 처소요, 사업하는 곳 즉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예배 장소"라고 힘주어 말한다. 나는 늘 다음의 기도 제목에 대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러한 기도가 올바른 것인가 아닌가 말이다. 특히 과거 어느 날부턴가 사람들의 기도에서 공통적으로 잘못된 한 대목을 본다. "내가 세상에서 죄를 짓다가 이제 주일을 맞아 하나님 전에 기도하러 나왔습니다…"라는 말이다. 과연 그런 마음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기도의 가치관일까? 이는 잘못된 기도이자 진정한 예배의 주체를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구 교수는 이에 대해 잘못된 기도라고 꼬집으며 "우리의 마음과 심령의 통곡이 바로 예배의 기도 자세로 마음에 있다"라고 말했다. 
칼빈 역시, '마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기도의 본질은 마음(롬8:27)에 있으며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쏟아 부어진 마음속의 어떤 감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골방'은 마음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마음을 살피는 '성령의 기능'을 통해 우리의 마음속 탄식과 하나님의 뜻을 살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은밀하게 우리 마음속으로 끄집어내려, 외식자들과 달리 문을 닫고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성령과 교통해야 하는 것이 기도에 대한 정석이다. 이는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기도의 '내면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외부적인 예배 형태를 이내 내부로 끌어들여 외부에 들어나는 것보다는 '내면에서 솟아나는 외면성'에 대한 기도의 본질이다. 
우리의 기도 자체는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쳐야 하며 이와 반대로 기도에 사용하는 소리나 노래가 마음 깊은 느낌에서 솟아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도 유익도 없고 급기야 입술 끝에서나 목 줄기에서 솟아나는 이 소리는 하나님의 진노만 부추길 뿐이라"고 칼빈은 강요한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청소년 때 번민 속에서 기도 모임을 하면 기도하다가 딴 생각이 나고 고민에 휩싸였던 것을 돌이켜보면 과거 '하나님의 진노'가 내 머리 위에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찬양하면서도 스스로 다른 문제와 씨름을 하느라 가사를 잊고 멍하니 바라보는 예배자로서, 오늘도 수없이 많은 고통의 자녀들이 치열한 전쟁에서 한판승 벌이는 게 오늘날 현실이다. 과연 무엇이 기도인가를 곰곰이 살필 시간과 고뇌가 필요하다. 기도는 중얼거린다고 입 속에서 무언가 튀어 나오는 요술램프가 아니라는 것은 다 안다. 그래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바라기에. 
교인들 모임에서 기도할 때, 다 같이 한 목소리, 한 입으로 같은 마음으로 예배하면서 함께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공적인 기도'이다. 혼자서 기도하고 자신과의 문제로 씨름하는 것과 다르게 공적인 기도에서는 중언부언할 수 있는 방언은 문제가 된다. 마치 과거 천주교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람들이 있는 곳에 '라틴어'로 기도하다가 또 라틴 사람들 속에 헬라어로서 예배하거나 기도했던 것처럼,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기도하는 건 함께 이룩해가는 협력의 의미를 잃고 두서없는 메아리가 될 것이다. 과거 천주교는 이러한 혼란스러움을 초래하는 언어적 방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어서 칼빈이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이들이 수정했다고 이승구 교수는 말했다. 
말에는 내면을 바꾸는 힘이 있듯이 우리에게 혀가 있기에 함께 노래하고 말을 알아들어야 전도가 되는 것이 방언의 참된 의미이다. 방언이 시간 때우는 것으로 전락한 오늘날 기독교 현실에서 전도와 방언이 함께 가야한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물론 방언은 중요하다. 방언으로 몰랐던 하나님의 뜻이 어느 한 곳에서 퍼져 나가 순간 근처에 있는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방언이 무엇인지 곰곰이 살필 수가 있다. 
참다운 예배 형태를 이룩하게 되면 한 몸 안의 영으로서 은혜가 넘치게 될 것이다. 이승구 교수는 "방언은 개인 기도 시간에 필요할 것"이라고도 한다. 나와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하늘의 언어'로 말한다면 아름다운 서시가 될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공적인 기도 혹은 사적인 기도 모두가 마음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받지 않는다. 
혀로서는 무당도 하늘에 제사 올릴 수가 있다. 어느 정도는 그 무당의 기도에도 힘이 들어가 있고 혹은 땀과 정성이 배어있어 혀로 기도하는 우리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말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하나님 존재 여부에 따라 판단된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신이 없으며 우리에게는 유일신 '하나님'이 존재하기에 우리 내면에서 발산되는 기도에는 헛된 노력이 없다. 기도는 우리가 하고 결정은 하늘에 맡겨야 한다. 우리 안에 내재한 '초월성'을 전제로 영원무궁함을 갖춘 '하늘에 계신 하나님' 말이다. 목회자이자 시인인 제럴드 맨리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가 자신의 시집 "The Poems" 에서 발표한<I Wake and Feel the Fell of Dark>의 한 대목을 옮긴다.
"… cries like dead letters sent. To dearest him that lives alas! away."
"가장 사랑하는 분, 그러나 슬프게도 너무 먼 곳에 사는 이에게 배달되지 못할 편지를 부치듯 그렇게 부르짖습니다."
사실 내 편지를 '받은 이', 늘 내 안에 있는 예수를 잊기도 한다. 또한 세상은 늘 그와 반대로 흐른다. 그럼에도 그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언제나 내 마음에 있다.
이승구 교수 '기독교 고전 읽기' - 칼빈<기독교 강요>기도편 : 예수의 기도(상)
"And if by prayer Incessant I could hope to change the will of him who all things can, I would not cease to weary him with my assiduous cries." 
(그리고 부단한 기도로 인하여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그의 의지를 바꿀 수만 있다면 나는 끊임없는 부르짖음을 가지고 넌더리나도록 지속할 것이다) - 존 밀턴(John Milton)
존 칼빈(John Calvin)은 시편을 가리켜 "영혼의 구석구석을 모두 꺼내 보여주는 해부도"라고 진단한다. 이는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감정과 고통이 숨겨져 있음을 나타낸다. 디트리히드 본 회퍼는 시편을 '예수님의 기도서'라고 말한다. 내게도 시편은 마치 '기도의 해부서'라고도 할 수 있다. 죽음에 임박하여 아픔과 슬픔을 간직한 예수도 마지막으로 기도할 때, 시편 22편의 첫 소절을 인용할 정도로 시편은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이 복합적으로 사무쳐 있어 우리를 위로한다. 
"그렇게 화가 나면 하나님한테 쏟아내면 되잖아요?" 랍비를 찾아온 한 남자는 당황스런 답변에 몹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앙의 위기를 겪으며 괴로워하던 도비드 딘은 랍비를 찾아와 몇 시간 동안이나 여러 가지 조언을 받았지만 이런 황당한 소리를 듣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는 갑자기 의문에 휩싸였다. 내 앞에 랍비에게는 폭언과 분통을 터뜨리면서 정작 자신은 하나님에게 쏟아 붓는 것을 한 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도가 하나님을 화나게 해서일까? 결국 그는 랍비의 손에 이끌리어 통곡의 벽 앞으로 동행한 후, 마침내 하나님께 분통과 원망과 고함을 시작으로 점점 기도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눈물이 통곡이 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중에는 흐느낌으로, 이렇게 그는 위로를 얻었다. 
사실, 우리는 평생 하나님께 자신의 하소연과 분통을 쏟아 내는 일에는 주저하고, 관계된 사람에게만 일격을 가한다. 왜 하나님은 내게서 멀리 있는 것 같은지, 왜 주님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하면서 굳이 기도해야 하는지, 나의 아픈 가슴과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의 빈곤을 알면서 왜 가만히 계시는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구해야 옳은지,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지 알기는 무척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하나님께 나의 간구와 원망을 쏟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끊임없이 간구하는 기도에 대해 칼빈의 말을 들어보자. 
1. 기도의 간구에 대한 칼빈의 주장 
첫 번째, '우리의 개인적 이익이 사라진다'다 해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또 그의 영광과 관련한 어떤 소원도 그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도의 소원에 대한 간구를 영구히 간직하라고 한다. 이러한 간구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며 그의 이름을 높이면 우리 자신도 '거룩'해진다. 
모세는 백성들이 죄 짓는 것을 두고서 "생명책에 지워"(출 32:32) 달라는 그의 분노에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잠재웠고, 바울은 자신의 사명에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롬9:3)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나라를 향해 집중할 것을 다짐한다. 이러한 파멸과 타오르는 열정이 담긴 기도는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기도의 종류로 이승구 교수는 "기도에는 '글로 쓰는 기도', '통성 기도', '침묵 기도' 등이 있는데, 기가 막히는 상황 가운데서도 내 안의 심령이 기도하는 때가 있다. 개인 기도는 정해진 틀이 없고 다만, 항상 늘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일용할 양식' 같은 간구의 기도는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것이 아니면 포기하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기도 목적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마음의 포커스를 하나님나라와 그의 영광에 맞추어 모세,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를 바꾸고 새로 쓰는 역사의 도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구할 때,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말고, 우리 앞에 그의 영광만을 놓고, 두 눈을 주목하여 이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라며 항상 염두할 것을 당부한다. 
이승구 교수에게 기도란 "종이 위의 어떤 '고지서 발부'하듯이 하나님에게 해 달라는 기도만을 올리는 투정은 이제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삶과 교회 전부가 하나님과 나누는 것이다. 그 이외에 다른 목적은 없어야 한다. 또한 이승구 교수는 최고의 기도로 말보다는 '이미지'로 기도하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간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칼빈은 우리에게 기도의 확실한 방법을 제시하면서 마태복은 6장 9절 이하에 나타나는 기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서 여섯 가지 간구를 예로 든다. 특히 이러한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처음 세 간구는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에 해당하는 것이고, 나머지 세 가지 간구는 우리 자신의 문제와 연관해 우리의 유익을 위해 간구해야 할 것에 해당한다.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의 첫 문장은 이렇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모세 (Moses) 
우리는 혹시 하나님 아버지를 지구 바깥 혹은 드넓고 푸른 '하늘' 위에만 존재하는 자로 오해하지 않는가? 우리는 늘 하나님을 찾을 때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의 하늘'이라도 그의 존재가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은 기독교 사상에서 멀리 이탈한 듯하다. 물론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늘을 보았고 하늘의 하나님을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늘 어디에 존재한다는 것을 골몰하는 인간들을 비웃듯, 세상의 모든 일에 간섭하여 역사를 뒤바꾸는 일들이 성경에 비일비재하다. 칼빈은 "하늘이 그의 보좌요, 땅이 그의 발등상이라고 말씀"(행7:49)함을 첨부하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마치 기둥 박은 울타리 속에 갇히듯, 하늘이라는 환경 속에 묶여서 갇혀 있다는 식의 결론으로 비약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하늘'이라는 의미는 공간으로서의 '하늘에만' 존재하는 의미가 아닌 그 보다 뛰어난 '초월성'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비록 유대인들은 '하늘'을 12족장의 유언에 따라 하늘이 일곱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데, 예수가 말하는 그 개념은 정녕 일곱 층의 하늘 중 '셋째 하늘'과 같은 의미가 결코 아니다. 또한 바울이 말하는 셋째 하늘이라는 개념도 몇 개의 주석에서 역시 '하늘들'이라는 공간적 제약보다는, 영적인 '한계의 초월성'에 대한 관점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늘 위에 계신 막힌 자'가 아닌 어느 곳에서도 우리 사고의 제한된 공간과 시간 안에 뛰어넘는 '초월함'을 알아야 한다.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에게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와 비교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솔로몬의 고백(왕상8:27)을 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비웃듯 멀어진 우리의 마음은 그러한 경계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으로 인해 그런 '경계적인 영역'은 없어졌다. 그가 우리 안에 있음은 그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정신과 더욱 일치한다. 더욱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친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비춰 주고 있다. 구약의 정신이었던, 저 멀리 우리와 가까이 할 수 없던 그 공간 속의 여호와라는 이미지에서 이제 '친근한 아버지'로 전환된다. 그 원인은 바로 예수가 가르친 기도에서 비롯한다. 모세가 예언한 '아버지'를 예수의 기도로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친근하게 부르게 한 예수의 기도는 '우리 아버지'라는 의미를 부각시켜 더욱 '거룩한 공동체'로 거듭난다. 
칼빈은 '아버지'에서 출발한 '우리 아버지'라는 예수의 기도를 더 집중 조명하고자 했다. 그는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경고받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한 아버지의 동일한 자녀가 되었으므로 우리 가운데 형제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큰가 하는 점이다"라고 주장하며 모든 기도가 그의 나라와 가족으로 세워진 '공동체'를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개별적인 기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위한 기도, 더 나아가 이 땅 위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한 절규와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야 하는 의무를 '예수의 기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세 가지 간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승구 교수는 마틴 루터의 명언인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되게 하라!" 라는 말을 들고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있는 우리 안에 하나님 자리가 없을 수 있다!"고 강하게 경고한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 중심으로 흘러가야 이 땅 위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룩히'라는 말을 '무겁다'라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승구 교수는 거룩한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배는 어느 정도 중심 한 가운데가 무거워야 함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균형 잡힌 삶과 예배가 있어야 앞으로 나아가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삶도 하나님 중심의 '무거움'을 가지고 그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허물을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무겁게 눌러 다시는 기도와 예배를 중심으로 죄악, 연약함 앞에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든지 이 땅 위의 모든 자녀들이 그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함으로 하나님의 무거운 거룩하심을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 우리의 삶과 영혼이 그의 거룩함에 가득 차 자신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재배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미소와 감동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받아 개인의 삶이 제대로 정립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존재가 거룩하게 드러나기를. 
"무거우심"의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핵심은 "우리가 무언가 노력한다고 해서 혹은 기도와 예배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 찬란하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노력도 모습을 떠나 그분은 그 영광 자체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더 짙어지거나 흐려지지 않는다. 또한 예배적 측면에서 주일, 수요일, 금요 철야, 새벽기도까지 빠짐없이 나오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선교하고 목회하여도 하나님의 영광이 더 찬란하게 발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실수로 인해 긁혀진 유리의 흠집같이 우리의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흠집이 더 가해지는 것도 아니다. 칼빈 역시 하나님의 '자비·전능·진리·완전함·거룩함'이라는 크고 놀라운 속성을 말하며 "우리가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이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들 안에서 거룩하여지기를 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미 완성된 '거룩히 여김'에 대해 다시 한 번 새겨 보아야 한다. 그의 거룩함은 절대 사라지지도 더해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것에 동조할 수 없다. 다만 그 거룩함을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역사·정치·경제·문화·과학 전체에서 우리의 위치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삶과 예배가 하나님의 영광을 극명하게 비추는지 살펴야 한다. 만약 '우리 내면의 하나님을 버리는 일'에 빠져, 전혀 하나님의 영광에는 흠집이 없는데도 삶과 예배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면 이는 되돌아보아야 한다. 균형 잡힌 삼위일체적 하나님 중심에 우리의 마음을 담아 두지 못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게 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을 치유하고 비추는지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그 안타까움과 불편함을 심각하게 자각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이내 울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가리지 않는지, 물질에 어두워 예배를 뒤로 미루지 않는지, 모든 것들이 내 중심으로 흐르지 않는지, 이런 내면을 자각하여 '내적 심리적 공황'이라는 심각한 자각을 가지면 이 땅 위를 울리고 대지를 적신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우리의 두 번째 간구는 완전한 '하나님나라'에 관한 것이다.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에 관한 개념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자기 백성 위에 행하시고 다스리어 그의 선하심과 자비의 부요가 그들이 하는 모든 일 속에 나타나도록 하는 일이다"라고 정의한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의 '통제성과 현재성'을 이룩하기 위해 우리 손을 내밀기 바라신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3중적 의미'를 바라보자. 
첫째, 예수를 통해 이미 통치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
둘째, 우리의 목표를 가지고 전진해 나가는 '하나님나라'를 친히 삶에서 이루도록 기도한다.
셋째, '하나님나라'는 '아직 아니 하심'(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의미)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혼자 이끌어 가고 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하나님나라에 이바지함으로 그의 나라를 바꾸거나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통치와 하나님나라에 협조하는 의미로 동참하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이승구 교수는 강조한다. 우리는 '삶과 말'로서 하나님나라가 과거에 이룩했으며 하나님께서 지금 통치하고 있다는 것들을 전하는 '하나님의 메신저'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인이고 그의 '메시지' 역할을 할 뿐이다. 
기독교인들이 아닌 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인 '하나님나라'의 일부분인 이 세상 속에서도 '번창함과 통제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정녕 이 땅과는 무관하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나라'(요17:14)의 성격은, 영적이며 부패하지 않고 영원한 성격을 띤다고 칼빈은 부르짖는다. 진정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 정신 차리고 '하나님나라' 메시지 역할을 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번영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조해야 하나, 일반 사람들은 칼빈에게 선교 사상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주님께서 새로 믿는 자들을 날이면 날마다 그의 백성에 더 보태사"라고 주장하면서 선교에 눈뜨지 못한 때부터 이미 선교를 향해 마음을 두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선교적 마인드로 "하나님나라가 어서 오소서!"라고 간구하며 기도해야 한다. 칼빈은 우리가 공동체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들에 회초리를 가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계시가 이루어짐에 따라 우리는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신비한 연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예수와 함께 동조한 수많은 선교사, 순교자, 봉사자들과 늘 함께 한듯하다. 비록 몇 십 세대가 지났지만, 마치 과거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문제를 제기하며 동일하게 받은 세례를 통해 연대감과 연합을 이루어 나가는 단계를 말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우리가 이 같은 간구를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모두 버리고,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애정을 주님께 향하도록 조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작성하신 대로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라고 칼빈은 세 번째 간구의 특성을 제대로 드러낸다. 즉 하나님은 개인에게 성령을 주었고 그 성령의 인도함에 따라 '하나님이 작성한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는 늘 내면의 깊은 자각이 없이 그저 보이는 대로 간구하며 보챈다. 이에 대한 인간의 심리를 이승구 교수는 "우리는 간구하라고 하면 늘 '바라는 바'를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바라는 바'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헬라어로 "에피두미아 (-epithoumia)", 즉 "~ 하려는 관점이나 의도로"라는 뜻이다. 인간의 보이지 않는 '욕망', '욕구', '탐욕', '정욕'등을 품고 있는 속마음을 일컫는다. 하나님의 뜻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너무 충만하여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갈 수가 없고 그 인간적 '에피두미아의 마음'은 쉽게 버릴 수 없다. 
나의 잘못된 '바라는 바'대로 흘러가는 기도보다는 하나님을 향해 '에피두미아'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 나의 애정이 하나님에게 향하여 나의 성령과 마음이 감화 감동되어 육체의 고집과 연관한 '에피두미아'적 요소는 버려야 한다. 지구상에서 진정 다른 자와 차별되어 아름답고 찬란한 영적 하나님과 연관하며 구별된 자로 거듭난다. 이승구 교수는 이를 두고 "거룩성은 관계의 개념이다"라는 짧은 표현으로 단정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연인과의 대화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교류한다. 그때부터 이제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 
하나님을 향한 간구에 대해 칼빈은 "우리가 간구하는 이 일들은 다 그때가 되면 우리의 생각이나 바람이나 간구 없이도, 일어날 일들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일들을 여전히 바라고 구해야만 한다"라고 말하면서 간구를 정의한다. 우리는 기독교 세계와 다른 사상을 가진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심지어 회의론자들은 '딴죽걸기'를 서슴없이 구사한다. 하나님이 최선을 모두 알고 있다면 기도할 것이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 '딴죽걸기'는 여기 '예수의 기도' 앞에 소용이 없어진다. 그의 길 앞에서는 모두가 다 겸허해진다. 그는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늘 기도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바대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아버지의 뜻대로 되길 기도했다.
"Prayer is not only asking, but an attitude of mind which produces the atmosphere in which asking is perfectly natural."
(기도는 '간구'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자연이 되기를 간구하는 공기를 생산하도록 하는 마음의 자세이다) - Oswald Chambers(오스월드 체임버스)
이승구 교수 '기독교 고전 읽기' - 칼빈<기독교 강요>기도편: 예수의 기도(중)
"…It is a kind of pride to insist that none of our prayers should ever be petitions for our own needs."
(자신의 필요한 것들을 위해 하나님께 전혀 탄원하지 않는 자에게 그것은 일종의 교만이 된다.) -Thomas Merton(토머스 마틴)
"지구상에 굶어 죽어가는 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승구 교수가 강의를 마치자 한 청년이 머쓱하게 만드는 질문을 하였다. 엄연히 따지고 들어간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좀처럼 이런 씻겨낼 수 없는 곤란한 의혹과 질문을 마주한다. 
뿐만 아니라 사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자들이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죽거나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해야 하는가. 
러시아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당을 지켜달라고 목 놓아 기도했건만 레닌 일파는 교회 98 퍼센트 폐쇄했다. 유태인 600만 명과 그리스도인 수백만을 처형한 히틀러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겼을 것이다. 세계의 고통과 환란 속에 놓인 톨스토이 역시 이런 난해한 질문 앞에 어떠한 신학적 해석도 내리지 못했다. 
우열곡절 끝에 이스라엘은 그러한 시련을 이겨내고 독립하여 자신의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이들 나라의 피해와 전쟁 속 굶주림과 죽음, 게다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팔레스타인 백성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나라 안 '가자 지구' 같은 몇 개 지역에 격리되어 번듯한 직장과 다양한 종류의 직업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생계가 필수이다. 9년 전 필자가 갔을 때 팔레스타인 청년들 대부분은 실업 상태고 일자리조차 없었다. 심지어는 학교도 몇 안 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은 말 그대로 하루 먹을 양식만을 말한다. 우리는 사는 동안 필요한 음식이나 옷 등을 날마다 구한다. 건강과 평화를 기원하면서 하루하루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누군가를 통해서든 혹은 자신이 일하여 얻은 양식이든 바로 우리의 기도이자 간구의 결과이며, 주의 은혜다. 
앞에서 나열한 '예수의 기도', 세 가지 간구를 이어받는 '일용할 양식'에 관한 간구는 우리 삶과 건강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탁하는 '공표'다. 그러나 단순히 우리에게 필요한 식량을 제공하는 의미로 하나님께 책임져 달라고 기도하거나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수단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승구 교수는 이러한 '나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달라고 떼쓰는 간구, 즉 이런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행위를 조작하거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의지와 힘을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몸의 기능을 주셨고, 그래서 주님의 일을 위해서 먹고 마시는 형태로 전환 되어야 한다고 충고하는 것이다. 
양식과 힘을 얻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 부족함 없는 상태를 지속해야 한다. 광야의 이스라엘 사건처럼 만나와 메추라기 같은 하나님의 필수적인 식량 제공에 대한 은혜는 근본적으로 당시에 필요한 하나님의 "특별 케이스"라고 이승구 교수는 말한다. 이러한 다양한 간구를 우리 삶에 잘 적용시켜 필요한 모든 것을 잘 얻도록 간구하여야 하며, 작은 '하나님의 식량 제공'에 대해 주님만 의지하는 마음과 결과를 수반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가끔 우린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할 테니 간섭 마시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들만을 위해 당신에게 기도할 테니 그것만 들어주세요. 아멘!" 이승구 교수는 이러한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크든 작든 모든 것들을 그분께 의탁해야 한다. "심지어 내게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믿고 맡기는 의지를 통해 그 분은 우리 안의 내면의 풍요를 기대하신다"고 이승구 교수는 말한다. 실제 우리가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무것도 없어 삶과 행동에 제약이 따르더라도 마음이 평안하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 하나님께 의탁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고 '하나님나라'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과 일치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야 하는데 심지어 신학생까지도 생계에 고민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본다. 기도에 대한 한 신학생의 대답은 명료했다. "기도하면 하늘에서 뭔가 떨어지나?" 
목사들의 걱정, 대학 진학, 유학 걱정, 이성 간의 교제 문제, 직장 문제, 사업 문제, 부부 간 갈등. 약간의 불협화음(?)들 속에 칼빈은 한 가지 통찰을 제공한다. "우리가 빵 한 조각, 물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그 분께로부터 얻기를 기대하는 사이, 이런 작은 문제들로 우리 믿음을 훈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칼빈은 사람들이 영혼보다는 육체에 더 관심을 두고 여전히 '육신의 문제'로 고통 받는 자들을 많이 접했다고 한다.<기독교 강요>초판을 쓰기 전, 자신이 믿고 따르던 천주교 안의 아주 심각한 심리적 갈등을 실어 놓았다. 심지어 그는 "보통 이런 불신앙은 대부분 사람들의 뼛속 깊이까지 그 뿌리를 박고 있다"고 토로한다. 개신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진짜 기도는 내가 만족할 만한 것 이상을 요구하는 간구가 아니라 나에게 꼭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만큼만을 구하는 것이라고 이승구 교수는 강조한다. "내게 필요한 만큼만, 내가 해야 할 일에 맞는 일용할 양식만큼만…." 
넘치는 물질은 감각적 쾌락과 과시 혹은 겉치레 같은 낭비와 욕망을 초래한다. 반대로 특별히 우리에게 재산이 넘치거나 혹은 창고에 그윽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은혜와 축복에 의지하여 '열매 맺지 않는 수고'를 거두지 않아야 한다고 칼빈은 언급한다. 항상 그날그날의 양식을 구하는 자세를 수반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검소한 직장 생활, 하나님께서 주신 것만이 나의 것이라는 '빈곤한 청지기 의식'을 요구하는 기도를 가정이나 사회, 교회에서까지 가르쳐야 한다. '참된 것 같은 소유욕'을 연결시켜 감사와 간구를 하는 '거짓 기도'를 없애야 하며 자신의 재산에 대해 권리를 내려놓고 이 땅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 드러내야 하는 기독교의 참된 사상이 영구히 발전하길 기대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린 진정 하나님께 빚진 자이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 빚을 탕감 받았다. 이 자유로운 탕감을 가로채는 자가 있다면 그는 예수를 기만하는 것이다. 탕감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모든 빚을 청산하여 빚을 면제하였음을 '대속물'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롬 3:24)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죄 지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대속물을 악용하고 있다. 칼빈이 말하는 중요한 사실 하나로 "어떤 자들이 자기나 또는 타인의 공로로 하나님이 만족하셨다고 믿는다든지, 이런 만족을 통해 사죄의 대가가 지불되고 구입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천주교)이 있다면 그들은 이 자유로운 선물을 결코 나누어 받을 수 없다"고 이들의 잘못된 방식을 꼬집고 있다.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구원에 들어가기는 바늘구멍이 아니라 천지와 맞먹을 만큼 큰 구멍으로 들어가기 너무 쉬울지 모른다.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양들의 문이신 예수 한 명뿐이거늘, 죄를 사하는 권한이 우리 모두 특히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것은 예수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칼빈 역시 이러한 카톨릭 사상에 분노하였기에 '기독교 종교개혁'의 씨앗이 되었다. 사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죄를 면제하는 '면제권'과 '고해'와 같은 실수는 오늘날 여전히 남아있는 종교적 범죄 중 하나이다. 우리는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예수의 기도에서 말하는 '사함'을 오해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을 통해 사람을 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이는 천주교의 올바르지 못한 방식인 죄사할 수 있는 여분, 즉 '잔여 공로' 혹은 '잉여 공로'로서, 사람이 가지고 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방식은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이는 '예수 십자가의 잉여 공로'만이 해당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의지함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 
앞에서 말한 간구들과 죄사함에 대한 간구 역시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네 가지 간구를 이룩해야 비로소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간구와 감사를 터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건전한 것' 혹은 '건전하지 못한 것'이라는 사태까지 가더라도 우리는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께 고백하고 감사하고 일용할 양식을 풍부하게 받았더라도 기도와 예수를 의지하는 삶 앞에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고 깜박하고 '죄 지을 수 있는 자리'에 들어앉게 된다.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재미난 사실은 "우리는 힘이 세지고 강해지면 이상하게도 힘과 밥으로서 죄를 또 다시 짖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날카로운 지적은 우리 인간에게는 필수 코스와 같다. 마치 골프를 치거나 야구를 할 때 타석에 서기 전에 몸을 풀듯이 죄를 짓기 직전에 먹어서 힘을 써야 무엇을 하든지 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단 한 번에 사함을 얻는 그런 고속열차보다는 조금 늦어도 천천히 주님과 동행하면서 걸어가는 어려운 길을 택해야 한다. 쉽게 번 돈은 쉽게 쓰고 어렵게 번 돈은 함부로 하지 못 하듯, 쉽게 죄사함을 얻었다면 다시 죄를 지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돈을 내면 사함 받고 또 죄를 짖고 고해성사처럼 누군가에게 다 고하여 탕감 받는 것은 쉬운 길이지만 필시 잘못된 길이다. 
그러나 사함 받은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가려는 우리에게는 지키기 어렵고 힘든 길이다. 혼자만의 죄 싸움에서 늘 넘어지고 낙마하기도 한다. 너무나 당연하다. 온전치 못한 삶은 다시 온전한 마음이 넘쳐나는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몸소 느끼고 성령으로 무장하면서 십자가 앞에 날마다 내 죄를 죽여야 회복할 수 있다. 이승구 교수가 강조하는 바, 우리는 그렇게 노력함으로 하나님을 만족(Satisfaction)시켜야 하는 의무를 완성한다. 
칼빈이 지적했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하는 용서와 자비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데 합당한 자격이므로, 이는 덧붙여진 '포스트 잇'처럼 붙이거나 뗄 수 있는 성격이 아님을 충고하고 싶다. 죄사함에 관한 예수의 기도 대목은 "셈어적 과장법(Semitic hyperbole : A-'죄 지은 자의 사함'와 B-'우리 죄 사함' 두 문장을 사용하는데 A를 이용하여 B를 더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A)처럼 우리 죄를 더욱 더 사해 달라는 것(B)이다. 이는 예수 시대 이후 사람들까지 죄를 사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A에서 B로 옮기는 과정 중 B를 더욱 더 부각시키는 전략을 사용한 것으로 예수의 기도에 대한 표현 방법을 극대화시킨다. 이는 '셈어'라는 방언 중 예수가 사용한 아람어도 이에 해당함으로 당시 문화적 혹은 언어적 기술을 사용한 것이다. 
진정 우리가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장애물이 개인의 삶 전체에 펴져 있다. 타인의 잘못을 함부로 소리치지 말고 우리 모두의 연약한 믿음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해야 한다. 타인의 잘못, 오해, 살인 등 을 가슴에 담아두지 말고 모든 것을 친구들에게 하소연 하듯 예수께 고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러한 '인내의 길'은 예수와 함께 거닐어야 비로소 감내할 수가 있다는 점을 칼빈 역시 강조하고 있다. 
첫 문장에서 질문한 청년에 대해 이승구 교수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모든 것, 즉 우리가 알아야 하는 설명할 수 없는 모든 허구와 진리를 모두 예수 앞에 내려놓아야 하는 자세가 더 선행 되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오늘도 우리의 기도와 간구 그리고 아픔과 함께 수반된다. 지구상에 고민 없는 자 없고, 억울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굶어 죽어 가는 배고픈 어린이들, 사기를 당한 자, 고통당하는 자, 위로를 받아야 하는 자들은 모두 예수가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예수가 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는 건강한 자를 위해 오지 않았고 가난한 자 때문이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2:17)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를 자유케", "눈 먼 자에게 눈 뜨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눅4:18)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왔다. 
만약 이 지구상에 그런 자들이 있다면 오늘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또한 이들을 위해 우리는 그들에게 가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것과 똑같이 가르치고 전해야만 한다. 그렇게 한다면 정녕 하나님나라가 바로 당신의 안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for this is another subtle way of trying to put ourselves on the same plane as God - acting as if we had no needs, as if we were not creatures, not dependent on Him and dependent, by His will, on material things too."
(…마치 하나님께 물질로서는 의존하지 않는 듯하면서,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피조물로 여기지 않는 것, 필요한 것들을 구하지 않는 행동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또 하나의 교활한 술책이다.) - Thomas Merton(토머스 마틴)
이승구 교수 '기독교 고전 읽기' - 칼빈<기독교 강요>기도편: 예수의 기도(하)
세상은 너무 위험해서 살기가 어렵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악을 방치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
"악과 기도의 문제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학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승구 교수의 강의를 다 마치고 세상을 향해 속 시원하게 불만을 토로하고 싶은 기분을 차분히 자제하듯 하나님과의 기도에 대한 고뇌를 토로하려는 그 의문점을 들고서 누군가 넌지시 묻기에 이른다. 
악의 문제에 있어서 9.11 테러보다 더 끔직했던 것은 인간의 손에 의한 재앙으로 남은 400여 만 명의 목숨(유대인2/3 포함)을 앗아간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건(Auschwitz Concentration Camp Incident) 혹은 그보다는 적지만 재앙으로서 큰 사건의 하나로 남은 1755년 11월 1일, 6개월 동안 250회나 강타한 리스본 지진(Lisbon earthquake)외 다수의 지진으로 21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이러한 일들이 악의 도전이 되었다고 18세기 유럽의 전통적인 견해에 학자들과 일반 시민들에게서 이에 대해 심각한 동요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저명한 폴란드 철학자 '콜라코프스키'는<철학과 철학자>라는 논문에서 현실과 비현실, 선과 악, 참과 거짓에 대한 고심에 대한 철학적 이성으로 삶을 환하게 비춰준다고 했지만 실상 그러지 못했음을 시인하는 말을 남긴다. "하지만 이제는 철학자들이 간단하면서도 고통스런 사실, 즉 유럽 철학이 2,500년 동안이나 관심을 기울여 온 문제들에 대해 단 한가지도 만족스런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때가 왔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선과 악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또는 우리가 기도함에 있어서 악에서 구원받아야 하는데 어디로부터 혹은 어떻게 누구에게 그 사실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목놓아 울어야 하는가? '악과 선'의 사이가 갈라지듯 이러한 난처한 결론에 올바른 대답도 내리지 못하는 당면과제가 되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상이 되어버린 '시험' 과 같은 것들이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인해 악을 판단하는 일체의 행위를 또 다시 악으로 규정짓는 풍토, 즉 더 쉽게 설명하면 악을 저지르는 것보다 악을 판단하는 것이 더욱 나쁘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철학자 수잔 니먼은<악과 현대사상(Evil in Modern Thought)>에서 그녀는 "현대의 악은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고 결론지어 우리의 심경을 대변하기도 한다. 한 영국의 저널리스트는 선과 악의 이분법을 논하는 부시 대통령을 논박하면서 "악의 축은 바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앞 소절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의미는 헬라어의 전후 문맥을 동원하여 문장을 만들어 본다면 "그리고 당신(하나님)은 우리를 시험에 인도 되지 않게 하소서"라는 의미로 직역을 할 수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이러한 다섯 번째 간구를 이어받아 시험에 들지 않도록 우리를 공격하는 엄청난 세력에 대한 인간의 나약함을 하나님께 절규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다. 
예수가 언급한 '악에서'란 의미는<ajpo;tou'ponhrou': 아 포 투 포네루>는 '악한 것으로부터'라는 뜻이다. "오히려 당신(하나님)은 우리들을 악한 것으로부터 보존하소서"라고 헬라어 본문을 직역하여 말할 수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거나 우리의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분출되거나 이마저도 아니면 다양한 '시험의 루트(Root, 뿌리의 기원)'를 통해 사탄이 우리의 시험을 넌지시 던져옴으로 인해 우리 마음의 악한 생각들이 심각한 어두움의 양상을 주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일에는 마치 빛과 어두움처럼 우리에게 매일매일의 삶에 젖어있어 매일 반복적으로 일어남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그런가보다"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칼빈은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우리의 눈을 바로 보아야 하고 우리의 눈꺼풀을 곧게 살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4:27)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논하고 있다. 특히 칼빈은 "부나 권세나 명예 등 그 휘황찬란함이나 가장된 선으로 사람들의 예리한 눈을 흐리게 만들고, 또 온갖 매력으로 치장하여 사람들이 그 계략에 포로가 되고 그 달콤함에 취하여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그런 종류들이다"라고 이런 상황을 단적인 예로 들고 있다. 
방자한 욕망, 가난, 수치, 역경, 곤란들에 위축되어 마음에 절망을 품고 사는,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완벽한 확신과 소망을 인내하지 못해 잃어버리는 '처절한 몸부림의 주저앉음'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그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외치거나, 심지어는 이러한 절망과 고통과 고난 속에 선보다는 악을 생각하게 하는 "신의 딜레마"까지 가는 의문의 질문을 서슴없이 하는 학자들과 기자들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이승구 교수는 이러한 악의 원인 중 가장 큰 '욕망'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하면서 "욕망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령 하나님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인 야채와 음식들인 '식욕', 입고 살아야 하는 것의 욕구, 밤에는 자야 하는 피곤함에 대한 '안식' 등 심지어는 성적인 욕망까지도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이 주신 값진 선물이기에 우리는 누릴 수가 있다"라고 그는 말한다. 상대방을 보면서 생육하고 번성해야 할 유대인들에게는 성적 욕망을 금기시하거나 혹은 그것을 매우 규탄하는 것은 하나님께 오히려 죄와 연관되는 바, 오늘날 우리에게 또한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더 나아가 이들의 욕망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을 망각하여 그 필요한 에너지들에 너무 치우쳐 낭비하거나 과용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먹는 것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 보니 하나님의 섭리를 망각하거나 결혼을 위한 성적인 욕구를 억제하지 못해 음란을 일삼는다거나 결혼 후에도 다른 여자를 범하게 되는 이런 "욕망 그 자체와 그에 대한 잘못된 활용"에 대해 구분 못하는 자들에게 경고를 일깨워주어야 한다고 으름장을 내건다. 
그 어떤 방향으로 우리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게 하든지 겸손하게 우리가 가야 할 바는 바로 선한 방향으로만 나아가기를 기도함에 있는데, 이는 또한 중용의 법칙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바로 번창할 때도 교만하지 않고 역경 속에서도 절망치 아니함을 포함하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부와 명예 그리고 심리적 쾌락에 쌓인 일상의 가운데 이루어질 바쁜 삶 속에서 이러한 것에 너무 목 메이지 않게 해주시고 매일 삶 속에서 주님을 늘 잊지 않고 노력하게 해달라고 그래서 고난 가운데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자에게도 역경과 환란은 있다. 만약 기도를 매일 쉼 없이 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것이 없다면 이 또한 문제가 심각해진다. 환란과 시험이라는 과제의 측면에는 반드시 기독교인들에게는 필수요소이다. 마치 사탄이 욥을 칭찬하면서 그를 시험하고 싶은 내기를 걸었고 그 하나님은 욥이 시험에서 이길 것을 알면서도 그 시험을 허락했다. 욥은 과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라고 칭찬하던 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기를 자세히 읽어본 자는 느끼듯) 하나님의 허락한 시험을 당한 처음에, 욥도 사실 많은 고민과 번뇌에 휩싸였다. 그는 자기 생일을 저주(욥3:1)했고 심지어는 자신이 부모 잉태 속에서 죽었어야 함을 저주(욥3:11)하기에 이른다. 그는 편히 자고 낙태되어 땅에 묻힐 자 혹은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을 부러워함(욥3:16)에 심각한 절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기도하는 자는 역경 속에 들어간다"라는 이승구 교수의 말은 일리가 있다.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시편 141:3~4절에서 보이듯 우리가 시험 당할 때 죄짓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가 더 가깝게 다가와야 한다. 또한 악에 문제삼지 말고 악을 이길 힘을 달라 기도하는 참된 영성을 가짐을 바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그 말에 자신은 포함되지 않는 듯 기도하거나, 그럼에도 실망하고 좌절한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친다. 심지어는 목사들의 횡포에 기도함을 잊고 이내 교회를 떠난다. 목사들이 여자들을 겁탈한다고, 목사들이 목에 힘을 준다고, 멋진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고, 헌금하면 천국 간다고, 교회가 타락했다고, 세상에 악이 너무 많아 하나님의 존재가 심각하게 대두되는 이 시기에 우리는 이에 대해 슬피 울고 있다. 
이러한 기도는 잘못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고 기도는 기도이고 인생은 인생처럼 따로 사는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참된 뜻을 구해야 할 것이다. 욥과 같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연단이 필요한 실정임으로 1000도가 넘는 뜨거운 불에 쇠를 넣어 단련시켜 날카로운 칼처럼 예수가 말하듯 세상에 온 것은 칼을 주러 왔다고 말하듯 우리는 이러한 뜨거운 용광로와 같은 이 세상에서 어떤 환란이 다가온다 해도 기도로 단련시키고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사탄이 자주 이용하는 "거래의 기술"중 하나인 욥의 시험을 통해 하나님의 허락한 시험에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한다면. "하나님.. 거 봐요~~ 내가 뭐라 했어요! 그가 넘어간다고 그랬잖아요!! 하하하" 이러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 이승구 교수의 핵심을 바라보아야 한다. 
Church Millitary(교회의 군사)로서 우리가 전투하는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라는 주인을 앞세워 영적인 전쟁을 치르는 마당에 혼자 스스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의탁해야 하고 의지해야 한다. 그러한 모습을 보이기에 앞서 바로 먼저 기도를 하는 일이다. 우리는 또한 승리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긴 전쟁이나 자신만을 위해 도취되어 나 자신의 승리로 외친다면 다음 번에는 반드시 혼자 힘으로 싸우게 될 것이고 이내 전투에서 낙마한다. 
이승구 교수는 "잘못한 것을 창피하게 하나님께 감추지 마라. 비겁한 삶 속에서 드러내어 시험에 이기도록 차라리 간구함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드러내어 기도하라"며 우리를 위로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전쟁에서 물들지 아니하고 이겨냄을 바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동참해야 한다. 이는 악을 피하지 말고 악을 이겨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도 바로 기도하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나를 위한 청원 기도가 아니라 다른 자들을 위한 그들의 책임을 져 달라고 하는 바, "제사장만을 위한 기도"처럼 공적인 기도가 핵심이다. 칼빈은 "이상 세가지 간구(일용할 양식, 죄사함, 시험과 악에 대한 간구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공적이어야 하며, 교회를 공적으로 세우는 일과 성도들의 교제를 증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라고 말하기에 기도의 핵심을 놓치면 타격이 심각할 것이다. 
우리는 '악'만을 보려고 하지 말고 그 악을 이기게 해달라는 '하나님을 향한 우주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또한 악을 가진 자들을 공격하는 것보다는 이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선과 악을 동시에 바라보는 노력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사실, 이 구절은 고대 사본에는 나와 있지 않은 구절이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성경에는 양쪽 괄호를 넣었다. 이는 실제로 A.D. 4세기 고대의 유력한 사본 및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누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나타나 있지 않다. 이 부분은 '전통'에서 시작된 유래로, 송영(Doxology)을 하였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거 후대 기독교회가 주기도문을 완전한 기도 형태로 만들기 위해 첨가한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 사실로 구태여 넣을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는 자들도 있다. 
아무튼, 이 말의 헬라어 사본 구절에 의거하면 "왜냐 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당신께 속하였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해석된다. 이는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라는 역대상 29:11절의 말에서 유래된 다윗의 감사 기도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또한 "사본1253"에는 첨가된 것으로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나라가 영원히 당신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헬라어)' 이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다. 
A.D. 2세기 이후에 편집된 디다케(Didache), 4세기에 번역된 '시리아 사본', '라틴 역본' 등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볼 수가 있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 이전에 있었을 마지막 고난의 때에 적용되는 암시라고 제안하며 이러한 유대인의 기도문은 보통 찬양의 고백으로 끝나는 예배 의식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거 성경에는 "대개"라는 말이 구절 앞에 나왔는데 사실 이 단어의 유래는 북경에서 쓰는 평안도 사투리로, 그 뜻은 "왜냐하면(for)"라는 이승구 교수의 말을 맛깔스럽게 들었다.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그 번역 과정에 추가되어 생긴 일이기에 최근에 나온 성경책에는 빠져있기도 한 이유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우리의 진정한 거짓이 아닌 참된 기도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권세와 그의 영광이 영원히 있어야 한다는 점이 더 나의 심장 가운데로 들어오고 있었다. 기도의 핵심 형식에 치우치지 말고, 다만 예수의 가르쳐준 그의 가르침을 뼈대로 삼아 우리의 기도가 올바르게 전개되고 갈고 닦아져서 하나님의 뜻과 이 땅 위에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인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님의 가르쳐준 기도는 표준 기도의 모델로 삼아야 하며 그 가르쳐준 기도마저 하지 않는 자가 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은 자명하다. "기도 안 하는 자", "기도해도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자", "어쩌다가, 간혹 예수의 기도를 구하는 자", 심지어는 "기도를 훼방하는 자"가 이에 해당되는 바, 우리의 기도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을 늘 거울 보듯 스스로의 마음을 간간히, 아니 영구적으로 비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기도에 넘어지는 자 천 명이고 기도를 게을리 하고 있는 자 삼천 명이며 기도를 버리는 자 만 명이고 기도하지 못하는 자 백만 명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단순히 가난한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닌, 이 땅 위에 영적이든 육적이든 쓰러져가는 모든 이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봐서라도..
The Divine Wisdom has given us prayer, not as a means whereby to obtain the good things of earth, but as a means whereby we learn to do without them; not as a means whereby we escape evil, but as a means whereby we become strong to meet it. 
(현명한 신의 지혜는 우리에게 이러한 기도를 주었는데, 세상의 좋은 것을 주려는 의미보다는 어떻게 하여 그것들이 없이도 배울 수 있는 의미로써 혹은 악으로부터 도망하여 벗어나려는 것이 아닌 우리가 그것을 만날 때 어떻게 하여 강하게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기도의 지혜로서 의미하는 것이다.
- 프레드릭 윌리엄 로버슨(Frederick William Robertson: 영국 설교자이자 교육 작가, 1816~ 1853)
이승구 교수 '기독교 고전 읽기' - 칼빈<기독교 강요>기도편: 기도의 실제
"To pray is to walk in the full light of God, and to say simply, without holding back, 'I am human and you are God'…."
(기도한다는 것은 되돌리는 망설임 없이 하나님의 가득 찬 빛 속으로 걸어가는 것으로 '나는 인간이고 당신은 하나님이다'라는 고백이다) -헨리 나우엔(Henri Nouwen, 1932~1996)
"고통의 현실을 보지 못한 사람은 우주의 절반 밖에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1893년 랠프 왈도 에머슨은<비극 The Tragic>이라는 글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 혹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비극과 고통에 대해 "짠 바닷물이 지구 표면의 2/3를 덮고 있듯이 슬픔도 행복을 느끼는 인간의 가슴속으로 더 많이 깊이 파고든다"라고 말한다. 이는 엄연한 하나님의 기도 앞에 현실이 되고 만다. 
기도를 하는 자에게도 역시 행복보다 슬픔이 많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이는 비 기독교인들의 비난과 조롱의 화살로 되돌아온다. 슬픔이 조금 줄어야 하거늘 하나님의 존재와 더불어 먹고 마신다는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비난은 감수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이다. 기도하지 않는 상당수 기독교인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이러한 비난과 조롱 속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앞에서 계속 이야기한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 범위 안에서 볼 때, 이제 비난과 조롱을 넘어서려는 개인의 이기적인 몸부림, 나아가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이룩하려거나 스스로 이루어 놓은 기도 응답에 대한 자신만의 성경책을 기록하려는 자가 있다는 사실이 애석하다. 
자신의 기도가 이러이러해서 응답했으니 이러한 기도를 강요한다거나, 나의 기도는 이루어졌고 당신의 기도는 올바르지 못하다고 질책하거나, 자신의 방법을 동원하여 기도하라고 한다면, 예수의 기도 의미는 사라질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위안 삼아야 하는데, 우리는 응답을 요구하는 강제적인 기도를 드린다. 이로 인해 정작 우리 내면을 위해 기도하지 않은 불안함을 제거하기 위해서나, 기도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못내 아쉬워 기도할 수도 있다. 그럼으로 마지못해 반 강제적으로 하는 기도는 자신의 수치심만을 드러낼 뿐 진정한 기도는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께 향하지 못하고 결국 기도는 땅에 떨어지고 만다. 
1. 기도 응답의 비본질적인 범위 
첫째, 자기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에 무언가를 집어넣으려는 비정상적인 행위의 기도
둘째,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고 멸시하면서 자신의 욕망에 날뛰는 심정으로 하는 기도
셋째, 믿음 없는 기도로 시작하고 그런 바탕을 추구하는 기도 
누가복음 19장 46절 강도라는 단어로 등장하는 "기도하는 집" 즉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것을 분명히 염두해야 한다. 실제 당시 강도떼와 시카리 무리들(요세푸스의<유대전쟁사>)에 의거한 강도 소굴이 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처럼, 우리의 마음속에서 출발하는 복잡한 내면의 기도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진정 하나님 앞에 올바른 강도의 소굴이 아닌 기도의 집으로써 우리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제 사적인 욕망을 위한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고 배웠다. 그것은 반드시 사적인 기도일 뿐이다. 이러한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우기는 자들도 있다. 의기양양하여 사적인 기도를 최고로 지향하는 자들도 예수의 기도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승구 교수는 "본질적으로 개인적 기도보다는 주님의 공적인 부분에 대해 기도하라. 교회 공동체를 넘어트리는 이런 비본질적인 신앙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교회를 위해 세워야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기도가 진짜 기도이다"라고 우리에게 충고한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기도 역시 '공적'인 기도에 더 분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2. 기도 응답의 본질적인 범위 
1)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큰 무리들이 먹을 양식이 필요했는데, 200데나리온(군인의 일당 혹은 품꾼의 하루 품삯으로서 약 200명분에 해당)의 떡이 부족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사 이들의 배를 불리게 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함"으로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진 이야기이다.(마태복음 14장에 오천 명을 먹이신 축사의 기도와 마태복음 15장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 모인 자들이 사흘 동안 광야에 있어 음식이 바닥날 것을 우려하고 이들이 길에서 기진할까 봐 말씀 후에 4천 명을 먹이신 기도의 응답) 
2) 마태복음 21장 22절, 마가복음 11장 23-24절에서 예수가 말하는 기도의 범위는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이는 산을 옮길 믿음처럼 마음에 의심하지 말라는 담대한 믿음을 주고 있다. 그만큼 믿음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는 과장법을 사용한다. 아울러 기도 응답의 제한성을 없애려는 발언을 통해 믿음에 더하여 나타내고 있는 심리 이야기. 
3) 요한복음 11장에 무덤에서 잠자는 나사로를 깨우기 전 눈을 하늘로 향해 들고 우러러 본 후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그러나 이 말씀하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며 예수를 믿게 하려는 하나님의 응답 이야기. 
4) 요한복음 13장에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십자가의 순교)가 왔도다…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라는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교하는 마음을 받아들인 그 때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응답 이야기. 
5)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의 '장편 기도'로서 "아버지여 때(십자가의 순교)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라는 긴 문장 속에 내포된 우리를 위한 하나님께 올리는 장문의 감사 기도 이야기. 
6) 누가복음 22장에서 성찬식의 유래인 마지막 만찬에 관한 '감사 기도' 이야기. 
7) 누가복음 22장 40절에서 습관에 따라 기도하면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경고하신 기도와 42절에서 땀방울과 핏방울이 동시에 교차하는 그 순간 피하고 싶은 내면의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는 가운데 십자가 고통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잔과 자신의 잔의 교체'를 위해 무던히도 애쓴 예수의 슬픈 기도 이야기. 
8) 마태복음 6장에 등장하는 기도에 대한 본질적인 교훈을 통한 예수의 기도에 대한 이론 이야기. 
예수의 기도 이론은 기도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아울러 외식하며 드러나게 금식하지 말고, 슬픈 기색을 보여 티내지 말고, 유대인들의 기도처럼 겉으로 드러내며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서 은밀히 기도하여 어둠보다는 빛에 의거하여 기도하고, 두 주인을 섬기는 기도는 절대 하지 말고, 근심과 염려하는 것 같이 이방인들이 간구하는 기도와 같이 하지 말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기도는 너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야 한다는 초점에서 출발하는 다양한 충고를 날마다 마음 판에 새겨야 한다. 
3. 기도의 실제 적용 
"일정한 기도를 떼놓고 기도하라"는 이승구 교수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자는 없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 기도하는 버릇, 습관에 따라 기도하신 예수처럼 일정 시간을 엄수하여 기도에 집중하려고 한다. 결국에는 영적인 기도를 갈구하면 할수록 진실이 추구된다. 
찬양하는 기도 역시 좋은 방법이다. 필자는 가끔 찬양곡 혹은 가스펠송을 틀어놓고 음악을 따라 하면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기도를 함께하기도 한다. 이승구 교수 역시 그런 방법을 할 수만 있다면 좋은 것이라 말한다. 심각한 것은 내게 어두움이 있을 때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는 데 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집중이 안 될 때 종이 위에 나의 진심을 기록하며 기도하는 방법이 있다. 눈을 감고 기도하기도 하지만 눈을 뜨거나 감는 행위를 넘어서 내 마음속의 눈을 뜨고, 그런 마음속에서 영과 함께 하는 탄식과 어려움 혹은 애타는 심정을 적는 것이다. 내 기도를 적고 객관적으로 체크하여 사람을 통해 역사하는 방법이다. 주님은 필요하다면 주위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도 사람이 변하기를 원하신다. 교회의 역할이 이에 해당된다. 
기도의 본질에 있어서 의심하는 기도는 가급적 피해야 한다. 묵상 기도로 나의 마음을 살피고 살피라. 울부짖는 기도도 필요하거니와 묵상을 통해 나의 잘못된 기도를 피함으로 나의 영이 늘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는 습관을 유지하길 바란다. 반드시 부르짖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세밀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부르짖는 기도도 필요하다. 그러나 가급적 골방에서 은밀히 기도하라. 개인 시간을 떼어 기도하여 자신의 영(성령)과 하나님의 영이 소통할 수 있도록 열어두어라! 
응답에 대한 결과에 미련을 버리는 기도를 하라! 세상에 살면서 응답 받지 못한 기도는 부지기수이다. 응답 받지 못했다고 응답을 달라는 기도를 오래하는 것도 기도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내가 응답 받지 못할 기도인지 아니면 응답 받을 기도인지 헤아려 보라. 혹시 먼 훗날 여러 세대에 걸쳐 이루어지는 기도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한 예수 십자가 보혈의 범위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그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여전히 존재한다. 
기도를 통해 연단하고 자극 받아 기뻐 하나님을 어떤 특정한 환경 속에 묶어 두고, 그에게 어느 시, 어느 장소, 일을 하시는 방법 등을 지정해 주려는 의도가 혹시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칼빈은 충고한다. 
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다면 혹시 나에게 문제가 있는지 살폈는가. 혹시 다른 의심 때문에 나의 기도를 방해하는 성숙하지 못한 내부 속셈이 있는지 고찰하라고 이승구 교수는 말한다. 
이러한 예수가 가르쳐준 혹은 예수가 기도한 부분들을 연구하면서 간직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기도하고 오래 기다림에 지치고, 무응답 속에 허우적거리거나 기도 응답을 지각을 할 수 없다 하여도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기도>(Prayer)의 저자 노르웨이 신학자 어레이 할레스비(Ole hallesby)는 기도를 "신뢰(faith)와 의심(doubt)의 경계 사이에서 마치 레슬링을 하는 것과도 같다"고 결론 내린다. 
필자 역시 과거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말에 동조할 수 있다. 끊임없이 신뢰와 의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여 도저히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하다는 기독교인들의 근심과 불안을 들었으며 그 내면의 불안과 초조에 대한 속마음 역시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이는 공통적인 사안이다. 이렇게 기도하기 싫어질 때,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한 나의 불완전한 영이 싫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기도에는 반드시 "인내"가 따른다. 한국적 사고에 의거한다면 기도의 응답 역시 '빨리빨리' 받기 원하고 응답이 없다면 이내 포기하고 예수를 떠나는 자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동안 이내 풀이 죽거나 긴 시간을 인내하지 못해 잊어버리거나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은 성경에서 말하는 선조들의 일화를 보면 안다. 
기독교적 사고는 반드시 인내와 긴 시간을 요한다. 더불어 핍박과 죽음이 도사린다. 무서운가? 사실 우리나라의 사정과는 전혀 부합되지 못한다. 눈앞에 무언가 빨리 이루어져야 편안한 한국적 사고방식과 부와 복 받기를 기원하는 기복신앙이 우리 마음속에 내제한다. 욥과 모세처럼 집과 재물과 자식들이 통째로 날아가거나, 40년 동안 광야 생활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이스라엘과 또 40년을 추가로 광야를 헤매는 모세를 보면서 깊은 탄식과 절망만이 도사리기는 여전하다. 그렇기에 한숨만 나올 뿐이다. 
기도에는 "인내"말고도 "연단"이 있으며 "시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삭이나 욥을 보면서 그들은 연단과 시험 그리고 인내를 통해 거룩한 자로서 승화되었음을 교훈 삼아야 한다.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야고보서 5장) 
당장 결과만 봤을 때 아무 것도 이룩한 것이 없다고 기도의 응답이 어디로 사라진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의 기도를 예수는 전부 기억하고 있다. 내가 엉터리로 기도하지 않은 이상 절대로 없어진 것이 아니다. 기도의 응답이 수반되는 때가 중요하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때를 우리는 무던히 참고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한다. 언젠가 추수하는 한 해를 기다리는 것이야 말로 농사하는 농부처럼, 걱정보다는 시기를 기다려 가을의 열매를 기대하라. 그때가 바로 당신이 미소 짓는 때이다. 물론 하나님의 미소와 함께 말이다.
"Whether it takes the form of words or not, does not mean anything to God, only to ourselves, Only he who is helpless can truly pray."
(기도하는 말의 표현 혹은 형태를 가지든 안 가지든 간에, 그러한 관심은 오직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의미가 없다. 다만 의지할 곳 없는 무력한 인간만이 전적으로 기도할 수가 있다는 것일 뿐이다.) -어레이 할레스비(Ole hallesby, 1879~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