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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교회론

시편 기도시의 문맥에서 본 칼빈의 기도론

시편 기도시의 문맥에서 본 칼빈의 기도론
김이곤 교수
서론 
칼빈의 신학이 지닌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그의 “기도론”에 접근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 중의 하나로 보인다. 왜냐하면, 인간이 “기도”를 하여야 할 그 이유에 대한 그의 주장은 전적으로 그의 신이해(신론), 그의 그리스도 이해(기독론), 그의 성령 이해(성령론), 그리고 그의 인간이해(인간론)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비로소 가장 잘 파악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기도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만이며,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와 성령이고, 그리고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는 “유전적 부패성(불결성)”1)을 가진 존재 즉 근본적으로 “결핍된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그는 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삶이 이와 같이 “기도”할 수밖에 없도록 “방향 지어져 있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을 통한 계시활동을 취급하는 “신학”에 우리 인간이 제대로 관여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 신학을 어떤 특정주제에 한정하여 접근하는 것은 실효성을 거두기 힘들다 하더라도, 그의 기도론을 통한 그의 신학에 접근하는 것은, 그의 신학이 실천적이라는 점에서 볼 때는 더욱, 결실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2) 주목할만하게도, 인간은 창조 때는 완전성과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창조되었으나 그러나 자기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타락함으로서 “유전적 부패성(불결성)”에 걸리게 된 존재이다 라고 하는 인간학적 대전제를 칼빈은 가지고 있었고 또 인간이 왜 이렇게 창조되었는지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비밀이라고 역설하는 매우 특수한 신학적 전제도 또한 그가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는 인간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하여야 하는 존재, 즉 인간은 근본적으 “기도하여야 할 존재”로 철저히 이해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타락과 함께 그 결핍된 선(善)과 그 잃어버린 자유를 갈망하도록 훈육(訓育)받아야 할 존재로 결정지어졌던 것이다. 즉 인간은 자비(긍휼)에 의하여 그 부패된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은, 스스로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는 없는 존재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는<기도에는 대전제가 있어야 한다>는 기본입장이 있었다. 즉 인간은 기도를 하여야 할(기도를 절대 필요로 하는) 존재이나, 그러나, 기도의 보증인이시요 기도의 준비자이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의 은혜”를 근거하지 않고는, 즉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기도자인 인간 사이의 중재자, 화해자가 되지 않고서는, 이를테면, 타락한 죄스러운 인간에게 있어서는 절대적 공포의 대상인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의 보좌를 그리스도의 대속적 중재에 의하여 은혜의 보좌로 만들기 전에는 기도의 가능성이 전혀 열려 있지 않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하는 대 전제를 갖고 있었다. 이 “그리스도”는 또한 “성육(成肉)하시는 말씀”이시었다. 그러므로, “말씀”이 앞서지 않으면, 즉 말씀에 근거되지 않은 기도, 이를테면, 말씀과는 역행하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스스로를 독려하려고 하는 기도는 잘못된 기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말씀”(로고스)에 대한 긍정과 신뢰에 기초한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기도의 “객관적 가능성”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그리고 그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도자의 신앙을 그 출발점으로 하는 기도의 “주관적 가능성”은 성령의 도우심에 의하여 성립되며 이 성령은 “기도의 효력”을 돕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3)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칼빈 신학의 중심주제들을 한 줄로 꿰고 있는 그의 “기도론”을 논한다는 것은 곧 칼빈 신학의 본질 또는 개혁신학의 본질에 접근하는 최선의 길 중 하나로 보인다.
4) 그러므로, 칼빈 신학에 의하여 정위(定位)되어 있는 “기도”는 본질상, 우리 기도자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열심히 관철시키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뜻하시고 약속하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질(성취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일 뿐임을 보게 된다. 실로, 우리 기도자는 우리의 최고의 소원이 곧 “하나님의 뜻”자체가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올바른 기도를 드리지는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빌 4:6-7)에서5)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모든 일의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어 모든 우수사려마저도 모두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동시에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반드시 인간을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도는 본질상 모든 사건을 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는 하나님 신앙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칼빈의 “기도론”의 출발점은 “기도의 필요성”을 논하는 일이었다. 비록 칼빈의 신학을 논리와 구조를 가진 사상체계로 해석하는 것이 어렵다라고 최근의 칼빈 연구가 결론짓고 있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 신학을 지배하는 칼빈의 최대관심과 목표가 “신의 영광”(cf. H. Weber; O. Ritschl; A. de Quervain; U. Smidt et al.)을 증언하는 것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길은 없을 것이다.
6) 이러한 사실은, 철저히 믿음의 교육을 전제한 “기도의 필요성”에 관한 논의를 그의 “기도론”
7)의 출발점으로 하여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질상 “기도의 필요성을 가진 존재”라는 전제에서 그의 기도론을 전개할 때, 그가 말하려는 기도론은 인간이 그 필요한 바를 하나님께 요구한다는 통속적인 개념의 기도관념에서 말하는 “간청” 그 자체나 “간청의 성취” 그 자체 “이상의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기도는 하나님의 본질과 그의 행위에 철저히 근거되어 있을 뿐임”8)을 보게 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조정하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기도의 시작과 전개 그리고 그 결론이 모두 하나님의 계시활동과 섭리하심에 기초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편 기도시에 나타난 기도의 신학 역시 이러한 칼빈의 기도 신학을 정당화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1. 기도의 필요성, 기도하여야 할 존재인 인간 
하나님의 사랑을 흡수한 하나님의 의(義), 그 의를 통하여 계시(啓示)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서 볼 때, 칼빈에 의하면, 인간은 모든 선에서 그리고 모든 구원의 능력에 있어서는 완전히 결핍된 존재로서 “자기 자신 밖에서”(outside himself) 구원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주님에게는 필요하지 않았으나 우리 인간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며 명령하기까지 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기도는 본질상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복종”9)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고 하겠다. 인간은 “기도하여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풍요로운 은혜에 이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길(Sam D. Gill)이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 “기도는, 대부분의 종교적 관점이 그렇게 보고 있듯이, 인간 상황의 필연이며, 그리고 이 인간의 물질세계가 신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때, 기도는, 비록 임시적이라 할찌라도 이러한 피조물의 
결함(gap)을 매우는 하나의 수단이다”10)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율법과 복음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라는 청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늘 아버지의 풍요에로 이르는 길이 결핍된 피조물인 인간에게도 “기도”를 통하여서는 열려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기도”가 얼마나 필요하냐 하는 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사실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 준 것은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성서, 즉 그리스도의 성육(成肉)이요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이다. 이 문제를 취급하는 가장 고전적인 성구는, 칼빈에 의하면, 구약에 있어서는 요엘서 2:32와 시편 145:18을 들 수 있고 신약에서는 로마서 10:13과 사도행전 2:21에 나타난 구약의 해석과 그리고 마태복음 6:9-13(누가복음 11:2-4)의 주께서 친히 가르치신 기도를 들 수 있다. 
“주의 날”에 관한 요엘서의 종말론적인 메시지, “누구든지 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욜 2:32[3:5])라는 종말론적 메시지는 시편 기도시의 제의(祭儀) 전통을 거쳐11)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의 전통과 함께 야훼의 종말론적 약속의 성취로 해석되었다.12) 즉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현재하심에 대한 약속의 보증을 의미하였다. 말하자면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기도자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시편 기도시가 말하는 바, “야훼께서는 자기에게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계시는도다”(시 145:18)라는 신앙고백이 의미하는 바와 일치한다. 그러나, 구약의 “주의 이름”은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치되었다. 이 점이 “기도”에 대한 칼빈의 관점의 결정적인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즉 인간에게는 그 타락으로 인한 부패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 칼빈의 기본 
입장이요 그의 강력한 주장점이다. 이러한 주장 점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서 볼 때 더욱 분명해 진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선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상의 물건을 볼 때 그토록 관통하는 힘을 가지고 있던 우리의 시력도 태양을 향할 때는 몽롱으로 변한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일단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의 본질과 의와 지혜와 권능의 무쌍한 완전성을 상고할 것 같으면 전에는 우리 자신에게 있던 것이 의(義)라는 구실 하에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였지만, 이때부터는 가장 큰 죄악으로 보이게 되며 싫어하게 될 것이다.”13)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기도의 필요성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서 본 인간의 부정적 자기이해로부터 각성되기 시작하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관점은 안셀름(Anselm)이 하나님을 “시공을 초월한 접근할 수 없는 빛”14)으로 이해한 관점과도 상응한다. 
(1)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타락한 피조물이다. 
인간이 기도하여야 할 그 기본 이유는, 칼빈에 의하면, 인간이란 모든 선(善)에서부터 완전히 결핍된 존재이며 뿐만 아니라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아무런 방법도 결핍하고 있다는데 있다.15)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밖에서부터”16)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자원과 방법을 강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스스로는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인간이 자기의 존엄성에서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하므로 창조 때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이 심각하게 부패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라는 통로를 통하여 하나님에게로 이르는 길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칼빈에 의하면, 자신을 알 수 있도록 그가 창조하신 만물 위에 이미 계시(啓示)해 두셨으나 인간이 자신의 타락으로 인한 부패 때문에 하나님을 인식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불확실성의 미궁 속에서 신(神)을 찾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말씀”을 통하여 또한 자기를 계시(啓示)하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얼굴빛은 우리가 “말씀”으로서 지도(가르침)를 받기 전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궁과 같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신(神) 계시(啓示)이해는 시편 19A(1-6절)로부터(자연계시로부터) 시편 19B(7-11)(토라 계시)로의 전이(轉移)에 대한 현대 시편 주석가들의 이해와 정확히 상응한다고 하겠다.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육(成肉)이신 “말씀”(λογο?)에 기초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찾는 일과 “기도”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칼빈의 강조점은 이 하나님의 말씀도 “성령의 내적 증언”을 통하여 확인되기까지는 인간구원의 지식을 산출해내는 효력을 갖지 못한다고 보는데 있다.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callingupon God=invocation)은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한 “믿음”의 가르침을 전제한다.19) 따라서, 기도하여야 할 존재인 인간은 자신이 피조된 그 목적과 그리고 자신의 역량의 그 결핍성을 철저히 먼저 고려하여야 한다. 즉 하나님의 자비(긍휼)가 필요한 존재라는 자기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존재이며, 그러므로, 그 타락한 본질을 교정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의 구제책을 강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 하다는 것이다. 칼빈의 이러한 입장은 인간이란 본질상 그 타락으로 인한 부패성 때문에 스스로는 하나님에게 이를 수 없다는 부정적 인간이해를 철저히 전제한다는 특성을 가진다. 즉 인간은 철저히 기도가 필요한 존재이지만, 그러나, 또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로 이를 수 없는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에,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기도는 철저히 본질상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의도 및 인간의 공적에 의존해 있지 않는 것으로서 기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기도의 응답은 어디까지나 이미 성서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일 뿐이고, 그러므로 인간의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동참할 수 있기를 요청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 일수는 결코 없다고 하겠다.20) 일종,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 기도이고 이 기도는 또한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 기도는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 것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것일 뿐, 이것이 아닌 그 어떤 다른 것 일수는 결코 없다는 말이 된다. 즉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기원하여서는 안된다. 
이 경우, 칼빈의 기도론은 심각한 “반대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즉 만일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의지와 열심으로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그가 하신 약속대로 성취시켜 가신다면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필요가 있는가 라는 질문이 가능해지게 된다. 이 물음에 대한 칼빈의 대답은 이것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인간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21)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도 제정은 우리 인간이 우리를 위하여 제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제정하여 명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의 기도관을 설명하는 칼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 없는 인간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셨다”22)는 것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첫째로, 이 기도를 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항상 찾는 불같은 열정(azealous and burning desire)을 갖게 하기 위하여, 둘째로는 우리의 속마음을 하나님 앞에 다 토설해내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수치스러운 욕망이 우리 마음에 침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셋째로는 감사한 마음으로 주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넷째로는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더욱 열렬히 주의 친절하심을 명상하게 하기 위하여, 다섯째로는 기도 응답의 인식을 더욱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로는 우리의 기도의 습관과 경험이 주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하여서라고 대답한다.23) 따라서, 칼빈의 기도론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논의를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겠다. 
(2) 인간 기도의 대상은 성부(聖父) 하나님이시다. 
기도를 제정하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의 유일한 대상이라고 할 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삼위일체” 문제를 접하게 된다. 즉 그리스도와 성령도 기도의 대상이 되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일체가 되심에도 불구하고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태 4:10 cf.신 6:3)라고 엄히 경계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틸리히가 말한대로, “기도론에서는 삼신론(三神論))이 불가피하다”24)는 말인가? 
칼빈에 의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하나님이기는 하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은 성자가 아니라, 각자는 모두 나름대로의 특성에 따라 “구별”된다는 것이다.25)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구별”은, 칼빈에게 있어서는 성부?성자?성령 사이의 분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의 본질적 통일성을 전제하고 그 세 위격의 불가분리적 관계 안에서 피차 관계하고 있는 세 가지의 기능적 특성에 따라 구별된다는 의미의 “구별”이다. 즉, “성부”는 행동의 원칙과 만물의 원천 및 지혜의 출처가 되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오는 지혜(로고스)이며 “성령”은 그 지혜의 실천이라는 각자의 기능적 구별을 가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부?성자?성령은 본질상 “같은 하나님”으로서 결코 그 본질이 분할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분할은 없으나 그러나 구별은 있다는 것이다. 즉 성부가 강림하셔서 죽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성자가 죽고 부활하기 위하여 성부의 보냄을 받아 성육한 “말씀”이고(요한 1:1-4) 성령은 보혜사로서 보냄을 받은 말씀의 “힘이요 효능”이라는 것이다(요한 14:16; 15:26).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기능상의 “분할”이 아니라 기능상의 “구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로고스)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요한 1:1)의 의미라고 칼빈은 설명한다. 
이러한 칼빈의 삼위일체적 신 이해는 그의 기도론을 통하여 분명하게 정리된다. 즉 기도의 대상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삼위가 다 가능하나, 그 기능에 있어서는 “성부”(聖父)만이 기도의 대상이고, 그리고 이 성부에게로 이르는 길을 타락으로 인한 부패성 때문에 전적으로 상실한 인간이 감히 그 성부에게도 이를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주는 기도 매체의 근거와 기초는 “로고스”로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리고 그 기도의 실천을 돕는 힘과 효능을 제공하는 기도의 실행은 성령이 담당하신다는 것이다.26) 그러므로, 칼빈은 “나는 하나만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을 생각하는 순간에 그 하나는 셋의 광채에 싸이고 만다. 동시에 그 셋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도록 곧장 하나로 돌아간다”27)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기도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부”에게로 제한된다. 이 사실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기도하신 것과 그리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것에서 가장 분명하게 입증된다. 예수님은 “기도”에 관한 신약의 전문용어인 “프로슈코마이”(προσε?χομαι)28)라는 용어를 자신에게는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신약성서는 기록하고 있고 그 대신 예수님께는 “부탁한다”는 일반적인 용어인 “에로타오”(?ρωτ?ω)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29)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는 기도의 대상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聖父)”로 가르치셨다는 점이 중요하다(요한 15:16; 16:23, 30; 마태 6:9-13; 눅 11:2-4). 이것은 성부(聖父)가 기도의 대상으로서 특별한 역할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성부(聖父)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계시는 창조주이시므로 우리 인간이 그에게서 이끌어 낼 수 있는 필요한 모든 것의 근원지가 되신다는 것이며 또한 동시에 그의 본질은 선, 자비, 긍휼, 위로, 사랑, 공의, 은총, 진리라는 부성(父性) 속성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다.30)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러한 풍요하심에 이르는 한 수단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인간이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풍요하심에 이르는 길(수단)이 있음을 알려주신 분은 그 분 또한 역시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지 인간의 각성의 결과는 아니었다. 이것이 칼빈 신학의 특징이었다.31) 예언자 요엘과 시편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누구든지 주(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욜 2:32) 
“야훼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 145:18) 
“야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시 34:15[16]) 
성서의 이런 증언들은 모두가 “기도의 길이 인간에게 열려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약속”의 언어들이요, “하나님의 명령 및 요구”의 언어들이며,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대한 “신앙과 확신”의 언어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일에 참여하는 행위32)이며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대한 복종(순종)행위이고33)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통한 구원섭리를 현재화하는 행위34)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기도행위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모든(!) 일의 조정자35)이시라는 “믿음”이36)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이상의 것은 어떤 것이든 구하거나 강요하지 말아야 하는 것37)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기도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행위가 그 목적에 이르도록 하는데 인간이 참여하는 일이라고 하겠으며 그러므로 진실함으로, 중단 없이, 그리고 인내를 가지고 드려야 하는 것이 기도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의 풍요하심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여기서 제기된다. 즉 기도하여야 할 존재이지만, 인간은 그 타락으로 인한 부패 때문에 스스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이를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어떻게” 기도가 가능한가? 라는 근본 문제가 제기된다. 칼빈은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고 이 입장은 칼빈의 기도론의 특징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2. 기도의 근거와 실행 : 기도를 가르치시는 성자와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 
칼빈의 기도론의 특징을 가늠하는 것은,<인간이란 본질상 타락으로 인한 그 부패성 때문에 중보자 없이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라는 그의 신학적 대 전제38)위에서 그의 기도론이 전개된다는 점에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도하여야 할 존재인 인간으로서는 과연 “어떻게” 기도할 수 있으며 또 기도할 수 있는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칼빈은 여기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즉 그리스도는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관문이라는 것이며 이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는 하늘 아버지에게 이를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성육(成肉)하여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타락한 인간세계를 회복하여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부(聖父)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며 그러므 이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성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자신을 계시(啓示) 하시는 것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임마누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통로라는 것이며 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서만” 인간의 기도가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칼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하겠다. 
이 사실은 전적으로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신(神)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주장되었다. 즉 사도 바울이 로마서(롬 10:13)에서 요엘 2:32 (누구든지 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cf. 사 28:16)의 예언에 나타난 야훼의 이름을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치한 것39)을 가리켜서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를 “항구적 중재 기도자”(aconstant intercession) 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딤전 2:5)로 보게 해 주는 그 대표적인 성서적 전거(典據)라고 보았다.40) 따라서, 칼빈은 모든 사람은 기도할 때, 그 모든 기도를 그리스도의 대도(intercession)에 의존하여야[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기도자의 “믿음”, 즉 하나님 아버지에게 있는 무한한 구원의 은총을 우리를 위하여 이끌어 낼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만이시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칼빈의 기도론이 “믿음과 기도”라는 주제로 시작될 뿐만 아니라, 올바른 기도의 4대 규칙(1. 존경하는 마음, 2. 진실 된 부족의식과 참회의 자세, 3. 자신에 대한 자만을 버리고 겸손히 용서를 비는 태도, 4. 응답확신의 희망을 가지는 것)41)을 논할 때 그 논의를 끝맺는 결론부에서도 또한 “기도와 믿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끝내고 있는 그 이유로 보인다. 즉 신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는 “믿음”이 기도에 선행되어야 하고, 그러므로 인간의 기도는 본질상 신의 약속이 성취되는 그 신의 역사섭리에 인간이 참여하는 행위라 하겠으며 따라서 인간의 “기도”는 주의 구원사 섭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비는 행위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겠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기도의 유일한 중재자이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우리 기도의 근거가 되고 기초가 된다고 하는 기도의 이러한 본질적인 성격정립은 다음 세 가지 사실, 즉 성부되시는 하나님 자신께서 이미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자신과 부패한 우리 인간 사이를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변호자(advocate) 또는 중재자(mediator)로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요한1서 16:24; 딤전 2:6)과 그의 이름에 근거하고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시리라고 주님께서 직접 약속하셨다는 사실(요한 14:13-14; 16:23), 그리고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하기를 주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명령하셨다(요한 16:24, 26)는 사실을 통하여 확립되었다고 하겠다.42)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칼빈이 본 바, “기도”의 본질적 성격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구원사 섭리의 현재화를 기원하는 신앙고백 행위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신앙행위라고 성격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기도하거나, “스스로” 인간 자신을 의지하고 힘쓰고 애쓰므로 “스스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이르려고 기도하거나 그렇게 하여 자신의 간구를 관철시키려는 모든 간구 행위는 응답 받을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본질상 참기도는 “아니”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중재(代禱:intercession)를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위한 기도나 다른 사람의 기도나 간에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 라는 중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칼빈의 대답은 “예”이고, 이러한 원리는 “태초부터”(from the beginning)43) 그러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의 주장은 여기서 오히려 좀 더 분명한 논리로 전개된다. 즉 요한복음 16:14와 16:26의 주장에서 제기된 문제를 요한1서 2:1과 기타 많은 성서적 입증자료들(cf. 롬 8:34; 딤전 2:5; 엡 6:19; 골 4:3 등)을 통하여 대답하는 형식으로 그 대답을 좀 더 분명한 논리로 정리하고 있다. 
그의 논리는 이러하다. 우선 그는 주님의 명령 또는 약속의 언어를 통하여 문제제기를 한다.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 하였으나, 그러나 [지금부터는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러면 [응답] 받으리라 (요한 16:24) …
그 날이 오면 너희들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다(요한 16:26)” 즉 그리스도의 성육(成肉) 이전에도(!!), 말하자면, 태초부터, 인간은 중재자 없이는 인간 스스로 기도를 드리거나 기도 응답을 받지는 못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언어는 그리스도 이전엔 기도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뜻 즉 중재자의 역할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의 논리의 강점이 드러난다. 말하자면, 성서는, “중재란 모든 사람을 위한 것”(딤전 2:1, 4)이라고 말함과 동시에 “그 중보자는 오직 한 분(그리스도) 이시다”(딤전 
2:5)라고 말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이 오직 한 분이 바로 그가 또한 모든 사람의 중보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오시기 이전이나 오신 이후나 간에(!) 이 한분 중재자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제물이 되시어 중재자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이다. 
요한1서 2장 1-2절은 이 예수 그리스도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망라하는 “영원한 중재자”44)(a constant intercession)이시라는 것을 증언한다는 것이다 : “만일 누가 죄를 범한다 하여도 아버지 앞에는 이미! 우리를 위한 대언자(보혜사)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한1서 2:1-2).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 앞에 있는”이라는 언어는 또한 로마서 8:34의 “하나님 우편에”라는 언어와도 상응한다는 것이다. 즉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약속된 우리를 위한 영원한 중재자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이전이나 이후나간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모두 영원히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중재에 힘입어 응답된다는 것이다. 단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이 기능에 대해서 “분명하게는”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육 “이전”의 기도중재는 “속죄제물”을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는 “제사장”이 속죄의 피로서 중재기도를 대신할 수있었다(출 28:9-21)는 것이다. 이 제사장은 영원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의 예고자였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히 7:11, 15)이라고 명명하고 이 새로운 길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통하여 열렸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히 8:26-27; 10:20).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시편 20편의 기자가 “[야훼께서]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고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2-3절) 라고 한 것은 제사장이 드리는 “희생제물”이 기도를 동반한 것으로서45) 기도의 재가(裁可: sanction) 역할을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성육 이전부터 시편기자가 알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을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피차를 위하여서도 대도(代禱)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중재하심의 은혜를 잊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여 조심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무가치함을 용서하시고 자신을 위한 기도 뿐 만 아니라 피차를 위한 기도도 허락 하신다”46)고 칼빈은 이해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고 변치 않는 중재자이시며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의 중재자이시고,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기도의 “유일한 중재자”로서 우리 기도의 유일한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그 어떠한 존재도, 즉 성인이나 신앙의 조상이나, 천사도(성모마리아도)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중보자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이 점이 칼빈의 신학에 기초한 칼빈의 기도론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핵심적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성인들의 대도와 중재에 의존하는 기도, 모세와 사무엘같은 기도의 대가들이나, 노아나 다니엘이나 욥과 같은 의로운자들, 그리고 사도들의 대도나 중재에 의존하는 기도도 또한 성립불가능이라고 칼빈은 주장한다(Institutes, Ⅲ, ∫20-23, pp.877-882). 뿐만 아니라, 죽은 성인들이나 족장들의 대도도 불가능하다(Institutes, Ⅲ, ∫24-25, pp.882-885). 단지,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모범(시편시, 주기도)에 따라 그리스도(성육하신 로고스)의 이름으로 드리는 성도들 사이의 피차를 위하는 기도는 주께서 귀를 기울이신다고 보았다. 기도의 중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특징일 뿐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일어나고 이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부터 온다(롬 10:14, 17)고 하겠다. 
(2) 성령이 우리의 기도를 도우셔서 우리의 기도를 실행하도록 도우신다. 
이 성자 예수는,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신 성육(成肉)하신 “말씀”(로고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그것은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우리의 기도의 근거가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명령에 기초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추구하는 것 이여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진리요, 세상을 비추는 빛이시므로, 그러므로, 이 진리요 말씀이며 빛이신 그리스도는 비록 우리 기도의 근거요 기초는 되시지만, 그러나 그 빛이 너무 밝아서 인간으로서는 그것을 바로 볼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즉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47) 
이러한 주장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3권 xx장, ∫5에서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제시된다. “성령은 올바른 기도를 도와주신다. 우리의 능력은 그러한 완전함에 이를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도와 줄 구제책을 찾게 된다. …우리의 이 약함을 다스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줄 선생으로서<영>을 보내 주셔서 무엇이 올바른 기도인지 가르쳐 주신다.”48)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칼빈은 로마서 8:26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는 말씀을 해석하면서, 성령의 탄식행위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즉 기도의 기능이 “성령”에게 넘겨진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기능은 우리의 마음에<회개>를 일깨우고<기도응답의 확신>을 일으켜 줌으로써 기도를 올바르게 할 능력, 즉 기계적 기도, 습관적 기도, 생각 없는 중얼거림의 기도, 진지하지 않은 경박한 기도(불성실한 기도), 지속적이지 못한 기도, 위선적 기도 등등을 하지 않고 회개”를 선행한 합법적 기도를 드릴 능력을 부여해 준다는 것이다. 즉 “합법적 기도는 회개를 요구한다”49)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이를 입증하는 성서의 증언들이 적절히 제시된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5) “네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그리고 좀더 긍정적인 성서 증언들도 나타난다. “무엇이든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니라”(요한1서 3:22) 
이러한 성서 증언들은 “하나님의 긍휼(자비하심)과 공의로우심”에 대한 성서의 증언과 그리고 기도하는 “인간의 참회적 겸손”에 대한 성서의 긍정적 평가를 통하여<합법적 기도는 기도자의 회개를 요구한다는 것과 그리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참회 기도의 부르짖음에는 성실히 응답하시는 분이시다>는 것을 확증시켜 준다. 때문에, 칼빈은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죄의 용서를 비는 것”50)이라고 말하고 시편 시인이 “참회적 겸손”으로 기도의 문을 여는 지혜를 찬양한다. 즉 인간의 자기를 낮추는 겸손, 자기의 죄성을 진실하게 고백하는 겸손만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충동할 수 있다는 시편 기도시들의 모범들을 부지런히 상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나의 고통과 나의 수고를 보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소서”(시 25:18. cf. 시 51:5). 이러한 회개의 부르짖음을 가능케 하시는분이 “성령”이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를 요구할 때(고전 14:15), 그것은 곧 성령의 충동이 
우리에게 기도의 능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라고 칼빈은 보았던 것이다. 성령의 충동은 이렇게 하여 우리로부터 게으름을 몰아내고 기도의 훈련을 교육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눈은 의인(참회의 겸손을 가지고 부르짖는 사람)을 향하시고 주님의 귀는 의인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는 것”(시 34:15; cf. 시 33:16; 벧전 3:12)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참회의 겸손을 가지고 부르짖는 탄원자를 의인과 평행법적으로 상응시키고 있는 칼빈의 생각과 시편 시인의 생각사이의 일치를 보는 것은 하나의 놀라움이다.51) 기도의 이러한 가능성은 성령의 도움을 받은 인간의 참회적 자기 낮춤에서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기도론을 기초로 하여 정리된 칼빈의 기도의 법칙 및 기도의 원리는 대강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3. 올바른 기도의 원칙론 
이상에서 살펴 본 칼빈의 기도론은 칼빈의 “신의 영광의 신학”에 잘 부합하고 있었다. 기도자인 인간은 그 타락으로 인한 부패성 때문에 스스로는 빛이신 영광의 성부(聖父)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 따라서, 유일하고 영원한 중보자이시고 성육하신 성자(聖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은총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 성취의 섭리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수 있다. 
은혜의 하나님은 오직 기도를 통하여서만 자기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지킬 수 있도록 율법과 복음으로 집약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이 복종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기도를 명하시고 계시며 인간이 하나님 자신의 일(구원섭리)에 참여하도록 임하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인간은 기도를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일종, “응답된 기도를 드리는 것”52)이라 하겠으며, 우리 인간은 기도를 배우지 않을 수 없고, 율법과 복음(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여 그리고 가식 없이 진실하게” 하나님께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의 원칙”(the rules of right prayer)53)이 수립되어야 하고 그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칼빈은 여기서 기도의 사대(四大)원칙을 매우 광범위하게 정리하여 제시한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점은 이 모든 기도의 원칙들의 틀을 어디까지나 “믿음”을 좌?우 또는 처음과 끝에 두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믿음”이 없이는, 즉 은혜의 무한한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유일하고 영원한 중재자로서 우리 부패한 인간의 기도를 가능케 하는 기도의 근거와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믿음, 우리의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도우심에 대한 믿음,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명령)의 성취이므로 반드시 응답된다는 믿음, 이러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 기도의 원칙들이 크게 넷으로 분류, 제시된다. 
(1) 기도 규칙의 첫 번째로는 기도자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가지고 기도하여야 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 존경심(reverence)의 개념 설정이 중요하다. 칼빈에 의하면, 이 존경심은 우리 기도자 자신의 육욕적 생각으로부터 자유하고 초연한 “간절하고 경건한 초연함”(devout detachment)54)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맥락에서 말한 것이다. 
칼빈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시하는 신학”의 한 단면이 이러한 기도규칙의 제1번속에도 뚜렷히 잘 나타나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하겠다.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은 그 무엇보다 우선, 하나님의 선(善)을 남용하지 않기 위하여서 인간 자신의 무가치함을 철저히 인식하고 모든 인간적 욕심에서부터 초연하는 자세를 가지고 세상의 우수사려로부터 자유 하는 것, 즉 성속(聖俗)의 혼합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이상을 구하지 말고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권능에 복종시키는 마음, 스스로 깊은 심연에 떨어져서 부르짖는 자세(시 130:1)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기도자는 “성령의 도움”(롬 8:26)이 필요하며 그러므로 기도자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는 것(고전 14:15)이 마땅하다는 것이다.55) 
(2) 기도 규칙의 두 번째를, 칼빈은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56) 참회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기도자의 주요한 요건이 “진실”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즉 기도자는 “부족한 마음”을 가지고 그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것을 “진솔하게 그리고 열렬하게 지속적으로” 간구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는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것”, “습관적으로 행하는 것”, “생각 없이 중얼거리는 것”, “손에 피가 묻었는데도 거짓으로 용서를 비는 위선적인 기도”, “가슴이 냉랭한 기도”이어서는 안된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따라서, 올바른 기도는 자신의 부족함과 하나님의 도움의 필요성을 가슴 가득히 느끼고 참회하는 자세로 진솔하게, 열렬하게, 지속적으로 드려져야 하는 것으로서 시련이 강할수록 더욱 강렬하게 드려져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는 기도의 열성과 지속성을 충동하며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는 대로’57) 기도하여야 한다”(시 32:6), “모든 것을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7, 18)라고 성서가 우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서의 이 모든 가르침과 명령도, 물론, “야훼는 자기에게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시 145:18. cf.렘 29:13-14)라는 신의 약속에 대한 성취의 믿음에 근거하고는 있으나, 칼빈은 여기서는,<기도자의 비(非)진실은 기도의 응답을 얻어내지 못 한다>는 성서의 증언에 더 큰 무게를 싣고서 기도의 제2규칙을 논증한다.58) 즉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5). 말하자면, 기도가 그 진실성을 잃을 때 그 기도는 하나님에 대하여 신성모독이 되고 “무의미한, 즉 비겁하거나 위선적인 애곡소리”59)가 된다. “네가 기도하나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네 욕심에 따라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라는 야고보(약 4:3)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칼빈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는 자들만이 올바르게 기도하고 또 응답을 받는다”60)라고 주장한다. 
(3) 기도 규칙의 세 번째로는 기도자의 “겸손”(humble supplication)을 제시한다.61) 여기서 말하는 “겸손한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명성(영광)을 위한 기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기도자는 그가 기도할 때 자신은 죄인임을 인식하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서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비는 자세로 기도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칼빈은 설명한다. 사죄기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촉발한다는 것이며 인간의 공적은 전적으로 고려에 넣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니엘의 기도를 그 예로 든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그러나, 나의 하나님이여 주님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단 9:19) 말하자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크신 긍휼을 의지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단 9:18)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한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기를 결정하신 후, 먼저 말씀하시기를,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마태 9:2)라고 하신 것은 기도 응답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시편 시인이 “나의 고통과 나의 수고를 보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소서”(시 25:18)라고 한 것도 바로 이와 동일한 문맥에서, 즉 하나님의 은혜(자비)를 전제한 (시 25:7)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비에 기초하지 않는 기도는 결코 하나님께 상달될수 없다”62)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시편시인이 “나는 경건하오니, 나의 생명을 지켜주소서”(시 86:2 cf.왕하 20:3; 이사야 38:3)와 같은 기도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현대 학자들도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나는 경건하오니”(키?하시드?아니)는 바로 직전의 구절체(시 86:1)에 나타나는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키?아니?웨아비욘?아니)와 바로 직후(시 86:26)에 나오는 “당신의 종”(아브데카)과 동의 평행구를 이루는 것으로서 어떤 경건한 자들의 영예스러운 지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그 어떤 고난의 상황에 처하여 있다는 것과 고난 중에 있는 자신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도움의 응답을 받을 특권(응답특권! the privileges of being heard)63)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칼빈 역시 이 구절들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표현들(시 86:2, 왕하 20:3; 사 38:3)은 자신들이 경건하고 의롭다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라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의 종들이며 자녀들이라는 것을 인정해 달라”64)는 표현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은(야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희(의인)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는 도다”(시 34:15)라는 말씀처럼, 의인(경건한 자)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선하심(godliness)을 열망”하지 않는 기도는 “진실성”(sincerity)이 결여된 기도라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65) 
이러한 시편기도자의 신앙은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의지 신앙과 연결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자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고 이러한 기도자를 조롱하고 괴롭히는 “원수”는 곧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신앙과 일치하는데, 칼빈은 시편 기도자들과 성서의 기도자들이 기도할 때 이러한 신앙의 맥락에서 자신들의 의(義)를 제시하는 것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no wonder)66)라고 말한다. 
(4) 기도 규칙의 네 번째, 즉 마지막 규칙으로서 칼빈은 확실한 희망(Confident hope: 응답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여야 하는 것을 제시한다.67) 구약의 대표적 기도문학을 담고 있는 시편 기도시의 경우도, 절박한 탄식과 간구의 분위기와 응답확신의 분위기가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칼빈도 “회개와 신앙의 불가분리적 결속”68)(an indissoluble bond)을 결론적으로 강조한다. 그러므로, 기도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필수적인 것은 기도자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 “믿음”은 기도에 있어서는 역설적 이중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즉 ① 기도자 자신은 걱정과 근심 속에서 신음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과 그리고 동시에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도움의 손을 벌리고 언제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그 손을 벌리고 계신다는 것, 이 사실을 확실히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 ②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을 줄로 믿는다는 것(마태 11;24), 이 두 개의 믿음이 기도의 절대적 전제라고 칼빈은 보았다. 그러므로,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며(약 1:7), 하나님은 기도자에게 그의 믿음의 분량대로 주신다(마태 8:13; 9:29; 마가 11:20)고 하는 성서의 증언에 따라, 칼빈은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69)라고 결론짓는다. 물론, 이 믿음은 주님의 약속(욜 2:32; 롬 10:13; 사 65:24; 시 145:18; etc.)에 대한 믿음이다. 
이러한 칼빈의 주장은 신학적으로 좀 더 심화되고 확대된다.70) 즉 칼빈은 기도자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완벽한 믿음이나 완벽한 회개를 요구하는 성격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예컨대, 복수에 불타는 원수 저주기원(삿 9:20; 16:28, 시편 탄원시들 중 원수저주 기원의 시들 등)이나 참회를 가장한 거짓기도(왕상 21:27-29의 아합의 기도) 또는 응답받지 못한 기도(창 18:23의 소돔을 위한 기도, 삼상 15:11의 사울을 위한 기도, 렘 32:16f의 예루살렘을 위한 예레미야의 기도 등)의 경우, 그들 기도자의 믿음을 완벽하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기도가 무의미한 것은 또한 아니라는 것이다. 즉 기도가 말씀의 규칙에 맞지 않는다 하여도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칼빈의 설명은 주로 기도 응답자인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긍휼, 인자)를 강조하는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따라서 하나의 보편적이고도 우주적인 법칙이 개개의 기도 예들에 의하여 파기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즉 우리의 무지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게는 기도할 자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편적인 불변의 뜻이 아닌, 즉 기도자 개개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감동을 준 그 어떤 개별적인 특별하고도 임시적인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드리는 기도도 있으며 따라서 비록 거기에 기도법칙의 결점과 오류가 섞여있는 기도들이 있다고 할찌라도 무효화 되지는 않는다71)는 것이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무시하시지 않기”(시 51:17f)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련 중, 가장 심각한 시련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시 80:4) 또는 “하나님께서 아예 우리의 기도를 물리치시는”(애가) 경우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험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결점을 용서해 주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았다. 즉 부적합한 기도도 기도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향상에 따라 합법적이 되는 원리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본래부터 심어 놓으셨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기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칼빈의 이러한 “기도론”은 주께서 가르치신 모범적인 기도, 즉 “주기도”에 대한 해설에서 좀 더 분명하게 정리된다. 
4. 칼빈의 “주기도” 해설72)(마태 6:9-13; 누가 11:2-4) 
칼빈의 “주기도”해설은 인간의 자기 부정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에 잘 부합하게 정리되었다고 볼수 있다. “주기도”는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 인간에게 가르치신 가장 모범적인 기도로서, 세 개씩 짝을 이룬 여섯 개의 기원문이 그 맨 앞에 기도의 대상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부름구”(invocation)를 두고 그 맨 끝에는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송영구를 둔 형식의 틀을 취하는 기도문이다. 중심 기원문들을 “앞 뒤로”감싸고 있는 가장 중요한 언어는 “아버지”라는 언어이다. 
“아버지”73)는 아들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나은 중재인을 찾을 수 없는 유일 최선의 중재인(변호인)으로서 모든 위로의 근원이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시다(고후 1:3-4). 그렇다면, 이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엇을 하실 것인가? 그 대답은 누가복음 15장 11-32절의 두 아들 비유(속칭 탕자의 비유)가 최선의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기도의 특별히 중요한 점은 이 “아버지”를 “<우리의>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다(명하셨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양자됨”의 권리를 획득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이 우주의 “아버지”가 우리 모두의 “공통의 아버지”(One Father common to us)74)이시라는 것과 따라서 우리는 보다 더 큰 “우주적 형제 사랑의 감정”을 가질 의무를 지니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1) 제 1기원 :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태 6:9), 
칼빈에 의하면 우리에게 이 기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큰 수치”75)(our great shame)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배은망덕함이나 우리의 악한 의지, 우리의 신성모독적인 방종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빛을 발하지만, 그러므로, 그것이 인간의 악함 때문에 손상을 입는다는 것은 이보다 더 무가치한 것은 없는 일인데, 실제로, 하나님의 그 거룩함을 주님께서는 이 지상에 계실 때(him on earth) 무가치하게 강탈당하였기 때문에, 최소한, 그분의 거룩성은 그분에게로 돌려지기를 비는 기도가 우리의 기도 속에 첫 번째 것으로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더욱 강도를 높혀서 본래부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계시(啓示)하고 계셨으므로, 모든 입은 그의 그 영광을 찬양하여야 하고 이 기원은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역설(力說)한다.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다른 모든 이름들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이름과만 결부되어 있으므로”76) 순수한 영광은 하나님의 이름에게만 돌려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불경건은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제 2기원 : 나라이 임하옵시며(마태 6:10), 
칼빈이 보는 “하나님의 나라”는 (a)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인간적 육(肉)의 욕망을 모두 바로잡는 날, 그리고 (b)우리 인간의 모든 생각을 주님의 규칙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나라이다.77) 이 나라의 평화는 모든 반 평화적, 평화 파괴적 부패로부터 깨끗한 자들에 의하여, 그리고 그 나라의 제왕적 홀과 같은 “말씀”을 통하여 통치되고 지켜지는 것이므로, 모든 인간의 마음이 이 나라의 질서(하나님의 의)에 자발적으로 복종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 2기원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가 임하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육체의 욕정은 억제되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조건(the condition of God's Kingdom)이라는 것이다. 
(3) 제 3기원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 6:10) 
제 3기원에 대한 칼빈의 해석은 좀 독특하다.78) 즉 이 기원을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땅)에서 통치하신다”는 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our ignorance) 때문에 첨가된 것이라고 그는 보고 있다. 
말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세계통치”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조정하시고 모든 것을 자신의 목적에로 이끄신다는 더 넓은 신비한 의미를 두고서 한 말이 아니라, 여기서의 의미는, 하늘과 땅을 비교하는 방식을 통하여, 모든 것이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그 나라가 이루어지듯이 그렇게 땅에서도 또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기원은 우리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탄핵하는 
기원이며 이 기원을 통하여 인간의 “자기부정”(self-denial)을 실현하고 “인간 안에 새로운 마음을 창조”(시 51:20)하려는 데 목표를 둔 기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비는 기원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지배하는 세계를 기원하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미워하는 법을 배우게 해 달라는 기원”(learn to hate)이라고 하겠다. 
이상, 주기도 전반부의 세 기원은 우리 인간은 고려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께 빚진 자로만 생각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God's glory alone)을 목전에 두어야 한다는 그의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에 철저히 기초되어 해석되고 있다. 
(4) 제 4기원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태 6:11)79) 
제 4기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제 6기원으로 이어지는 주기도의 둘째 부분의 세 개의 기원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우리들 인간 자신의 문제로 내려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에 작별”(farewell to God's glory)을 고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칼빈의 기본입장이다. 즉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고전 10:31; 롬 14:7-9),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오직 우리가 위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제 4기원으로부터 시작하여서는 우리의 몸이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기원을 드리게 되는데, 그러나, 이 기원은 하나님의 “양육자로서의 기능”(God the officer of nourisher)80)을 강조하는 기원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돌보심(양육하심)과 섭리하심”에 내어 맡기기를 요구하는 신학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 4기원을 철학화하여 일용할 양식을 “초 실질적 양식”(supersubstantial Bread)이라고 말하거나, 또는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하여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말하거나 하는 것을 칼빈은 강력히 비판하면서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만 있을 뿐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내생 뿐만 아니라 금생에 대해서도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라는 말씀이 마치 육체의 연단을 가치 절하하는 말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반박하고81) 하나님은 불법적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합법적인 것이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에 속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일용할”이라는 말은, “만나”의 교훈이 말하듯이, “무절제한 욕망”을 제어하는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신 8:3; 마 4:4)는 것을 각인시켜 주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우리가 생명과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로운 선물임을 가르쳐 주는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5) 제 5기원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赦)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태 6:12)82) 
이 제 5기원에서도 칼빈의 돋보이는 해석학적 통찰이 나타난다. 즉 구약의 새 계약 예언에는 (a)율법을 돌비에가 아니라 마음(심령)에 새겨 주시리라는 것과 (b)인간들의 악에 대하여 자비할 것이라는 신의 약속이 들어 있었는데(렘 31장 33장 참조),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서 그 약속에 뒤이어 “제 2의 은혜”(the second grace)로서 우리로 하여금 감히 “사죄 기원”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고 또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셔서 악에서 구하여 주시기를 기원할 수 있는 은혜를 제 2의 은혜로서 “덧붙여” 주셨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우선, 칼빈은 죄를 “빚”이라 부른다. 즉, 범죄를 용서하는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속한 일(사 43:25)이므로, 빚진 자들을 탕감해 주듯이, 그렇게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들에게 분노, 미움, 보복 등의 마음을 버리고 이웃의 잘못에 대한 기억을 버리도록 하는 것이 이 기원의 의도라는 것이고,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의도는, 이 기도의 근본 의도는 오히려 만일 우리 안에 이웃에 대한 미움이 남아 있으면 차라리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말아달라”라고 하나님께 요구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하여서는 우리로부터 잘못을 철저히 씻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용서에 근거하여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인간의 “공적론”을 지지하는 뜻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이 기원을 통하여 가르치고 계시는 주님의 의도는 “우리의 믿음의 약함을 위로하고 격려하여”83)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의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도록 
하려는 의도의 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용서의 자비하심을 불러 일으켜 우리가 진 빚으로부터 우리가 자유하게 되어 그의 사죄의 은총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 5기원을 해석할 때, 이 기원을<만일 우리 안에 미움이 남아 있으면 차라리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 달라>라는 의미로 해석한 칼빈의 의도는 우리 안에 “항상”(!) 남아있게 마련인 인간적 오점(이웃에 대한 
미움)을 먼저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상처를 입히지 않게 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리는 “신의 영광”과 “신의 은총”을 앞세우는 칼빈 신학의 성향을 읽을 수 있다 하겠다. 
(6) 제 6기원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태 6:13)84) 
여기서도 칼빈의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만을 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의 신학은 여전히 이 제 6기원의 기반을 형성한다. 
우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기원의 “시험”개념과 “악에서 구하옵소서”할 때의 “악”의 개념은 통속적 개념을 넘어간다. 
즉 “시험” 또는 “유혹”(temptation)은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긍정적인 것(창 22:1; 신 8:2; 13:3)과 사탄이 시험하는 파괴적인 것이 있어서, 전자의 경우는 “우리가 피하기를 기도하지 말아야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85)으로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명하기 위한 “시련”(trial)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하려고 유혹하는 것으로서 무장이(준비가) 안 된 자들을 공격하는 “파괴적” 성격의 것이 있다. 칼 바르트도 이 부분을 해석할 때, 칼빈과 동일한 입장에서,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상대적 성격의 시험과 우리가 빠지지 말라고 기도해야 하는 절대적이고 종말론적인 시험이 있다고 해석한다.86) 즉 상대적 악(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창조세계의 “안에”(우편에)있는 것이고 절대적(종말론적) 악은 창조의 영역의 “바깥”(왼편)에 있는 것이라고 본다. 
칼빈은,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 아니라(고전 10:13; 벧후 2:9)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서, 시편기자처럼, “시험받게 해 달라”(시 26:2)는 기원을 드리는 것도 결코 빗나간 것은 아니라고 강변한다.87) 
왜냐하면, 인간은 시험을 통해서 각성 받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은 본질상 하나님의 본성에 역행하기 때문에(약 1:13), 시험의 동기는, 그 시험이 하나님의 창조영역 안에서 오는 것이든 밖에서 오는 것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탐욕(lust)에서부터 오는 것일 뿐(약 1:14)이라고 못박는다. 
주기도 해설을 끝내면서, 칼빈은 우리의 기도가 교회의 공적인 교화를 목표로 하는(교회에 덕이 되는) 기도여야 함을 강조하고 “주기도”야 말로 “합법적인 기도”(Tertullian이 명명한 것)로서 그 “완벽함에 있어서는 이 기도와 필적할 만한 기도는 없는 신의 지혜가 가르쳐 준 기도”88)라고 결론짓는다. 
덧붙여서, 칼빈은 기도 없이 시간이 지나가도록 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와 잠자리에 들 때, 그리고 식사를 할 때 정한 시간에 따라 기도할 것을 권고하였고 자신을 위해서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마 6:10) 먼저 구하도록 권면하였다. 그리고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신의 섭리의 법칙에 복종하는 자세로 (낮이고 밤이고) 쉬지 않고(시22:2) 기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요구한 것과 꼭 같은 형식으로는 응답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것(요한1서 5:15)을 믿으라고 하였다. 
5. 시편 기도시의 문맥에서 본 칼빈의 기도론 
시편의 기도시(탄원시)는 성서가 제시한 매우 표준적인 기도형식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시편 기도시는, 비록 그 발달의 역사를 분명히 갖고 있기는 하나, 현재 시편 속에서는 초기의 매우 짧은 탄원시 형식과 아주 후기의(포로기 이후 공동체의 역대기 역사서 참조) 산문 기도들(cf. 느헤미야 9:6ff) 사이의 기간에, 즉 이스라엘 제의(祭儀) 역사와 함께 자라오면서 정착된 표준적 기도형식을 갖추어 일종의 기도의 책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89) 그리하여, 비록 그 순서는 유동적일지라도 그 구성 구조는 크게 보아서 각각 세 가지의 중심적 구성요소로 엮어진 2부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즉 (1)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호신구(呼神句: invocation)와 
(2)시인의 고난상황에 대한 탄식구(歎息句: complaint), 그리고 
(3)고난의 상황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기원구(祈願句: petition)로 엮어진 제1부 탄원부(歎願部: outcry [z/tse?aqah])와 (a)하나님에 대한 신뢰고백(trust), (b)구원응답에 대한 확신(confidence), 그리고 찬양/감사/신뢰의 맹세(vow)로 엮어진 제2부 신앙 고백부(faith)로 구성되어 있다.90) 그러나, 칼빈의 기도론은, 그것이 16세기 시대 종교개혁가의 실천적 가르침이므로, 그것을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써 그 절정에 이른 양식비평학적 시편 연구결과와 대비시켜 그 문맥 안에서 살핀다는 것은 분명히 일정한 제한을 전제한다. 즉 그의 기도론은 현대 양식 비평학적 “기도(탄원시) 문학”의 맥락에서 기도의 문학 양식사적 구조분석과 그 삶의 자리를 논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 문제는 이 논문의 논외의 문제라고 하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시편 탄원시(기도시)의 신학의 문맥에서 칼빈의 기도론의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는데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다음 네 가지 관점에서 칼빈의 기도신학과 시편기도시에 대한 현대 시편해석가들의 시편 신학 사이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발견된다. 
(1) 기도자와 기도 대상자의 문제 
기도에 있어서 기도와 기도 대상자 사이의 문제는 이교사상과의 접촉관계 때문에 생겨난다. 시편 기도시는 이 점에서 다른 고대 중동의 종교문학, 특히 고대 바벨론 종교의 기도시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며 시편 기도시의 특유성을 나타내 보여준다.91) 즉 시편 기도시는 고대 바벨론 기도시들(cf. 애굽, 앗수르, 힛타이트, 가나안 종교시들)처럼, 기도의 대상인 신을 복수로 표현한다든가, 신을 성적(性的)으로 구분한다거나, 신의 서열을 설정한다거나 하는 일 없이 오직 야훼 하나님 한 분에게로 절대적으로 제한하고 그 신을 부를 때는 장황한 수식어(아첨사)로 수식하는 일(long invocation)은 철저히 배제하며, 그리고 기도자는 어디까지나 철저히 고난(苦難)받는 신앙인이지 낮은 계급의 신(神) 또는 반신(半神)의 존재들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 칼빈의 기도론은 시편 기도시(탄원시)의 신학과 정확히 일치한다. 칼빈의 “신 인식 또는 신 신앙”92)은 기도의 대상을 오직 모든 은혜의 근원이요 자원이신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과 구원주 하나님 아버지로 본다는 점(성인이나 사자[死者]를 향한 기도금지!)에 있고 이와 대조적으로 기도자인 인간은 철저히 타락과 더불어 부패해진 “도움이 필요한(기도가 필요한) 존재”로 이해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단지 강도의 차이를 말한다면, 칼빈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기도 가르침을 출발점으로 하여, 즉 매우 그리스도론적인 성격을 띄고서 기도의 대상을 “하늘에 계신 은혜의 아버지의 자비하심”(the most gracious Father)에 두는데 강조점을 둔다면, 시편 기도시(탄원시)의 경우는 기도의 대상은 약자를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전쟁용사”(the Divine Warrior)93)의 이미지에 강조점을 둔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속성에 있어서는 전쟁용사로서의 야훼는 결코 마르시온적 전쟁신이 아니라 전쟁의 종식(평화수립)을 원하시는 긍휼(자비)의 해방 신94)이시므로 “은혜의 아버지” 이미지와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 칼빈신학과 탄원시 신학은 긴밀히 연결된다. 
덧붙여서, 칼빈이 기도의 중언부언을 엄격히 금하고 기도자의 진솔한 간구를 강력히 강조한 점95)은 시편기도가 고대 바벨론의 기도에 나타나는 “긴 아첨사”(a long predicate)를 배제하는 그 시편의 기도신학과 상응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기도자가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인간 실존으로 제한되고 “낮은 신들의 기도”가 배제되는 점은 칼빈이 말한바, “주님에게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를 제정해 주신 것이다”96)라고 강조한 것과도 잘 상응한다고하겠다. 특히, 사도요한이 증언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요한 16:26)라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었다. 여기서 칼빈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서 기도한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므로, 칼빈이 강조한 바, 그리스도의 기도 중보론97)은 물론(!) 그리스도와 성령이 자신을 위하여 또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는 것은 논의할 필요가 없다(로마서 8:26의 성령의 기도는 우리 안에 “확신”을 일깨우는 의미로 한 말씀이라고 본다. ∫5, p.855.). 시편기도시의 신학과 칼빈의 기도신학은, 그러므로, 기도의 본질을 “구원이 필요한 인간과 무한한 구원의 
가능성을 가지신 한 분 창조주 하나님과의 진솔한 대화”라고 제한 정의된다. 
(2) 기도에 있어서 “응답확신”의 역할 
칼빈의 기도론의 또 하나의 특징은 기도의 필수조건으로서 기도자의 “믿음”을 특별히 강조한다는 점이다. 즉 그의 기도론은 “믿음과 기도”의 관계를 논하는 논리로 시작하여(Institutes, Ⅲ, xx, ∫1) “기도는 확신을 가지고 드려야 한다”는 기도 규칙을 선포함으로서(Institutes, Ⅲ, xx, ∬11-14) 끝마무리를 한다. 그러한 주장의 절대 유일의 근거는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에 근거한다.98) 그러므로, 기도란 “이미 응답된 기도를 신앙고백하고 있는 것”99)이라는 칼 바르트의 기도 이해는 종교개혁자들의 기도이해를 아주 정확하고 바르게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녀의 기도는 그 기도가 하늘 아버지의 약속과 그의 명령에 기초한 것이라는 그 이유 이외에도 , 성자(聖子) 그리스도가 대속의 화목제물이 되어 기도의 근거가 되어 주시고 성령께서 또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성서의 증언이 있다는 사실100) 때문에, 기도는 “이미 응답된 것의 신앙고백”이라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이해는, 놀랍게도, 시편 기도시가 지니고 있는 수수께끼와 같은 문제, 즉 시편 탄원시가 언제나 절망적인 위기의 호소와 위기타개를 위한 절박한 기원에 의하여 매우 어둡게 시작하지만, 그러나 뚜렷한 근거를 제시함이 없이 어두운 탄원 분위기가 언제나 갑자기 응답확신으로 그 “분위기가 급전환”되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한 대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 시편 주석가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지금까지 세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해 왔었다. 즉 (a)시편 탄원시의 탄원과 응답확신 사이에는 제사장 또는 제의 예언자의 구원신탁 선포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F. Küchler)과 (b)기도자의 순수한 심리적 반대 감정 병존 현상에서 그러한 분위기전환이 왔을 것이라는 가정(F. Heiler), 그리고 (c)제의에서 행해지는 “구원사 재연”의 제의극(culticdrama)에 참여한 한 결과로 그러한 분위기 급전환이 왔을 것이라는 가정(A. Weiser) 등이 제시되어 왔었다.101) 그러나, 필자는 학위논문102)에서 이러한 가정들의 부적합성을 지적하고, 이러한 기도시의 분위기 급전환 현상은 시편 탄원시인들의 “전쟁용사이신 야훼”에 대한 절대의지의 신앙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거룩한 전쟁 이념”의 문맥에서 논증한 바 있는데, 이러한 시편 기도시의 신앙현실과 칼빈이 주장하는 바, 가장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에 대하여 그의 “자녀”된 기도자는 절대 신뢰를 가지게 된다고 보는 그 신앙현실은 아주 잘 상응한다고 판단된다. “야훼여!”라고 그 이름을 외치는 순간, 이미 그 기도는 응답 확신에로 전이되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시편 기도시의 진정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편 기도시의 신앙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칼빈이 그 증거자료로서 제시하는 마태복음 7:9-11의 말씀,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던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그 구하는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그 말씀(cf. 사 49:15)에 나타난 현실103)과 잘 상응한다고 판단된다. “기도”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부르짖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의 성취를 바라는, 그리고 그의 구원섭리가 현재화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신앙고백일 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시편시에 나타난 “기도”의 진정한 현실이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중심 현실이며 믿음의 전제를 강조하는 칼빈의 기도론이 갖고 있는 핵심적 성격이라고 하겠다.

 

(3) 기도의 중재자의 필요성 문제

 

칼빈의 기도론의 가장 강력한 특징은 우리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仲保)없이는 하늘 아버지에게로 이를 수 없다는 기독론적 전제에 있다. 즉 우리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부패하였으므로 스스로 우리가 하나님께 이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자(聖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내 이름으로 구하라”(요한 16:60; cf. 요한 16:24)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편 탄원시는 그리고 구약의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의 중재 사상을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의 기도는 모두 무용(無用)하다는 것일까? 칼빈은 분명히 유대인들은 초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중재자의 기능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런, 칼빈의 기도론은 좀 더 넓은 해석학적 차원에서 전개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고 그의 중보자적 역할이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라고 할 때(요한 14:6; 16:24, 26), 그 의미는 주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거부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때모든 기도는 가능하다는 의미로 칼빈은 해석한다(!) 여기에 결정적인 포인트가 있다. 그러므로, 칼빈의 기도론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중보역할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그 의미가 확장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유일한 중보자요 시대를 초월한 모든 사람의 중보자라는 것이며, 따라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 세계교회가 유일하신 중보자에게로 가는 상비(常備)의 원리”(an established principle)라고 칼빈은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 기능은 말씀이 성육(成肉)하신 그 기능에 따라 더욱 확대된다. 즉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성육(成肉)하여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고 가르치심으로서 기도중보의 역할을 담당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성서를 통하여(성육하신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 기도의 모범에 따라”(after their example) 기도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시편 시인이 그들은 당신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당신께 부르짖어서 구원을 받았고 당신께 의뢰하여서 그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습니다”(22:4-5)라고 한 것은 주께서 주신 기도의 모범에 따라드린 기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시편에는 이러한 종류의 많은 기도가 있다. 시편에 의하면, 기도자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가 구하는 바에 맞게 하나님께서 귀 기울여 주시기를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라고 칼빈은 주장하면서 그가 즐거이 인용하는 구절을 예증으로 든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니라”(32:6)라는 구절을 예증으로 들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성육하신 말씀에 기초한 기도가 올바른 기도이며, 이 말씀을 들으므로 믿음이 생겨나며 이 믿음으로부터 기도가 일어난다라고 칼빈은 말한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칼빈은 <말씀에 기초한 믿음은 올바른 기도의 어머니(the mother of right prayer)이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빗나가는 그 순간 그 기도는 반드시 부패해진다>라고 경고한다.

 

 

결론

 

칼빈의 기도론은,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루터의 기본주장과 행보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친 기도는 성육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로고스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으로서 주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하여 그 약속의 성취를(그의 구원사적 섭리의 현재화를) 믿는 믿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본질상 하나님에 의하여 규정된 것이지 우리 자신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개혁자들의 확신이고 칼빈의 기도론의 중심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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