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섯 번째 소극적 표지 : 성경이 갑자기 떠오름(216-220)
- 신앙감정들이 성경 본문을 마음속에 기억나게 한다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진정으로 거룩하고 영적인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It is no sign that religious affections are truly holy and spiritual, or that they are not, that they come with texts of Scripture, remarkably brought to the mind).
에드워즈 당시에 성경 말씀이 마음속에 떠올려짐으로써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은혜로 말미암은 감정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입장이 있고, 반대로 감정이 성경 말씀이 성경 말씀이 생각남과 동시에 일어날 때 그것이 그 감정을 구원하는 은혜로운 감정이라고 판단내리는 적합한 근거가 된다고 확신하는 자들이 있었다. 에드워즈가 보기에 전자의 입장을 고집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도 무조건 그렇다고 긍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즉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라도 한 것처럼 성경 본문이 떠오르고(혹은 계속해서 말씀이 떠오르면서) 경탄하며 눈물을 흘리든지 아니면 기쁨으로 충만해진다고 할 때에 그런 감정이 확실히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올바른 것이며, 그들의 영적 상태가 건전하다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확신하는 것은 그가 보기에는 어떠한 근거도 없는 맹신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신앙적인 일들에 대한 가장 높고 유일한 규범인 성경(the Bible, the great and only sure directory in things of this nature) 어디에도 그런 법칙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217).
이 문제에서 무지하고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잘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잘못된 것이 없고 순전하며 완전하기에 성경 말씀에서 비롯된 체험들은 반드시 옳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이 순전하고 완전하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주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체험은 옳고 또 옳지 않을 수 없다는 것뿐이지, 체험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생각난다고 해서 그 때 일어나는 감정이 반드시 옳다는 것은 아니다.1)
에드워즈는 자신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하여 성경적 증명을 시작한다. 성경에 보면 강한 능력을 소유한 마귀에게는 소리나 글자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사단에게는 그런 일을 하기에 충분한 전능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에드워즈는 강변한다. 심지어 마귀는 성경을 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성경을 악용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귀는 성경 말씀 이것저것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유혹하고 기만하려고 시도하였다(마4장). 만일 사정이 이와 같다면 무슨 근거로 우리는 사단이 악인들을 속이고 유혹하는 일에 악인들 스스로가 성경 말씀을 기억하도록 시도하지 않을 것이고 또 그렇게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사단은 성경에서 아주 탁월한 위로를 주는 귀중한 약속의 본문일지라도 능숙하고 용감하게 악용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위로의 말씀 하나를 떠올릴 수 있다면, 위로의 말씀 수천 가지를 생각나게 할 수도 있다.
사단의 도구인 타락한 이단의 교사들 역시도 성경 말씀을 악용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벧후3:16). 그들은 성경 본문을 악용하도록 허용되고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영혼을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마귀가 사람들을 기만하고 멸망시키려고 성경을 악용할 수 있는 것처럼, 사단의 어리석음과 부패함 역시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한다. 사람 속에 있는 죄는 그 죄의 아비와 같이 행한다. 사람의 마음은 마귀처럼 기만적이며, 또 기만하기 위해 마귀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인들과 전혀 무관하고 오히려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영향 때문에 자극된 감정이지만, 그 감정 안에 참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본질을 전혀 담지하지 않는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에드워즈가 예로 든 것은 마13장에 나오는 돌밭과 같은 마음이다. 이는 말씀을 큰 기쁨으로 받았지만 시련의 기간이 지나고 그 결과가 나타났을 때 그런 감정들은 구원하는 믿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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