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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실/상담자료

심리역동과 핵심감정

심리역동과 핵심감정 

상담을 할 때 내담자가 제기하는 문제를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그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해답을 주려고 할 때 종종 그런 노력은 실패로 끝나는 경험을 한다. 예를 들면 직장 상사와의 갈등 때문에 찾아온 내담자에게 상사와의 인간관계는 이렇이렇하게 하라고 조언을 하는 경우라든지, 고부 간의 갈등 때문에 찾아온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화를 내실 때는 이렇저렇하게 대처하라고 지적인 답을 제시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조언은 이미 내담자가 모르는 바가 아니며 설령 머리로는 안다고 하더라도 막상 상사가 불합리하게 권위를 행사하는 그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감정이 폭발하여 사태를 악화시키게 되므로 실제로는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이 되지 않고 자꾸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내담자만이 아니라 상담을 하는 상담자까지도 과연 상담이란 것이 필요한 것인가 라는 회의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상담학을 어설프게 배운 기독교 사역자 가운데 이런 경우가 많아 처음 얼마간은 상담심리학에 관심을 쏟다가는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 그것은 역동상담의 개념을 충분히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갈등이나 문제는 지적으로 그 해결책을 알고 있는가 모르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고 보다 더 깊이 내재되어 있는 근본적인 어떤 부분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2. 잘 관찰해 보면 내담자가 현재 당면한 그 문제는 단순히 문제에서 끝나지 않고 유사한 문제가 닥치면 자꾸 거기에 걸려서 넘어진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예를 들면 직장상사와의 관계로 심각한 갈등이 생긴 사람은 그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다음에 또 그런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과거를 살펴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그 직장 상사만이 아니라 권위를 가진 사람과는 늘 갈등관계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군대에서는 상관이나 고참과, 교회의 지도자나, 또는 정부나 사회의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권위에는 늘 반항적이고 분노를 가지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며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추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한참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하! 이 사람은 직장 상사나, 교회 지도자나, 주위의 어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본인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권위에 대한 분노가 문제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내담자들은 처음 상담에 올 때는 문제가 자신의 바깥에 있다고 보기에 남편 탓, 시어머니 탓, 며느리 탓, 누구 탓, 누구 
탓, 하지만 상담이 잘 진행되어 가게 되면 점차로 문제는 자신의 안 쪽으로 들어오게 된다. 결국 세상의 모든 문제나 갈등은 내 하기에 달렸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3.또 어떤 때는 사람이 당면한 문제를 논리적으로 다 이해하고 또 어떻게 해야한다는 해결방안도 머리로는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유사한 문제에 부딪히면 전혀 아무 것도몰랐던 사람과 똑같이 반응하는 때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예가 부부싸움을 들 수 있다. 결혼해서 수 십년이 지나도록 수도 없이 많은 부부싸움을 하지만 알고 보면 대개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에 싸움을 하게 된다. 왜 싸우는지도 알고,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도 다 알지만 막상 닥치면 나도 모르게(?) 내 속의 또 다른 내가 폭발하고야 만다. 남편의 심리역동과 아내의 심리역동이 마주 치면 논리가 지배하지 않는 세계가 표출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기를 오랜 세월 동안 개미 쳇바퀴 돌듯 하지만 인간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안목이 없는 한 끝이 나지 않는 문제가 된다. 


4.따라서 인간관계의 문제는 논리로 풀어가야 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인간 각자가 평생동안 점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심층심리의 역동적인 문제이며 결국은 나자신과의 씨름이 되고 내마음속에 있는 어떤 문제와 씨름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평생을 살아가면서 이것이 나의 문제구나 하는 것을 깊이 알고 성찰해 나가는 성숙의 문제로 표현할 수 있다. 성숙해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적인 것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니요, 남보다 업적을 많이 쌓아 놓는 것도 아니며, 말로 안되는 그 어떤 부분이 있다. 


무의식의 중요성
5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알기 위해서는 무의식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할 필요가 있다. 흔히 인간의 심성을 바다에 떠 있는 빙산에 비유한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의식계는 바다에 떠있는 빙산의 1/10에 불과한 조그마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반면, 무의식은 그보다 훨씬 크고 바다 물 속에 잠겨 있는 빙산의 9/10에 해당하는 거대한 부분과도 같다. 무의식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마음의 부분으로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자료들, 감정들을 실제로 지배한다. 사람들은 인간의 생각과 삶에 있어서 무의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무의식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무의식은 말 그대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하여 뭔가를 안다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 무의식에는 이런 것이 있어’ ‘나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했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무의식적으로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알 때는 이미 그 부붖은 무의식이 아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진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는 일상적인 방법으로는 접근하기 힘들다. 오랜 세월에 걸쳐 전문적인 방법을 써야만 겨우 조금씩 알 수 있게 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나 자신을 충분히 알고 나의 인격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된다는 것은 매우 쉽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 세계의 심리역동을 이해하지 않고는 가능할 수가 없다. 이점은 크리스찬이라고 하여 예외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세상의 다른 인간들보다 성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무의식의 역동심리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천 중에는 인간의 의지가 보다 중요하게 때문에 무의식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기 위하여는 역설적으로 무의식을 잘 알 필요가 있다.


6. 무의식은 비합리적이며,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인 혼돈의 세계이다. (의식의 눈으로 보면 그렇다는 뜻이지 실제로는 나름대로의 정연한 질서가 있는 것을 점차 알게 된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삶 자체를 잘 살펴보더라도 합리적이기보다는 불합리한 것이 참 많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을 사귀는 것만 봐도 그렇다. 논리로만 생각한다면 상대방의 특성들을 요모조모 다 재보고, 즉 그 사람의 재력, 학력, 인격특성 등을 분석해보고 그 평가에 기초하여 사귀는 것이 옳은가를 결정하여야겠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다. 뭔가 막연히 첫눈에 ‘저 사람 참 좋다.’ ‘ 마음에 든다.’ ‘같이 있고 싶다.’ ‘대화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 사귀기도 하고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한다. 이것은 논리가 아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왜 인간은 어떤 특정인에게 호감을 갖고 친구로 만들는 반면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이유없이 싫고 같이 있고 싶지 않다고 여기며 심지어는 적대감을 갖게 되는 것일까? 거기에 타당한 객관적인 이유와 논리가 있는 것일까? 아니다. 대부분 거기에는 논리가 개입되지 않는다. 이러저러한 이유를 달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미묘한 감정이 먼저 가고 거기에 논리가 뒤따라 가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인간관계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은 논리나 의식보다도 무의식적인 감성이나 비논리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자식을 낳아 기를 때 이 점을 절실하게 느낀다. 나 자신이 자랄 때 우리의 부모들로부터 이러이러한 아픔을 겪고 자랐기 때문에 우리 애들을 기를 때 그렇게 해서 똑같은 상처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논리적으로는 알면서도, 아니 아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을 했지만 막상 닥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부모의 그 못된 버릇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섬찟한 느낌을 받게 된다. 내 속에는 내가 알면서도 안되는 또다른 내가 있어서 끈질기게 나를 밀어부치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자신도 괴롭다. 자녀양육도 이상적으로 제대로 키우고 싶은데 그렇게 되질 않고 자꾸 상처를 주게 된다. 그렇게 상처 주는 내가 밉고 죄책감이 든다. 이런 식으로 우리 무의식 속에 있는 그 어떤 요소들이 우리 인생의 대부분을 끌고 가는데, 특히 배우자를 선택할 때나 일생의 진로를 택할 때 등 중대한 문제는 결정할 때일수록 더욱 영향을 주게 된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나 의식의 논리가 아니라 항상 무의식 속에 그 해답이 있다. 즉 무의식 속에서 이미 결정지어져 있다. 그래서 그것을 정신결정론이라 한다. 


도치된 가정의 예


K양의 경우는 그 부모 간에 역할이 도치가 된 가정의 전형적인 예다. 어머니는 성격이 활발하고 적극적이며 좋은 직장이 있기 때문에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고 의사결정에서도 지배적인 반면, 아버지는 수동적이고 다소 무능하며 직장도 변변치 못해서 늘 엄마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런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자존감은 위협받게 된다. 겉으로는 잘 맞춰서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내가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불만이 깔려 있는데, 그래서 K양의 아버지는 평상시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가끔 술을 한번 마시고 나면 폭군으로 돌변해서 이성을 잃는 때가 있다. 평상시에는 아내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자기주장을 표현 못 하고 지니다가 술의 힘에 빌어 상한 자존감을 되찾고자 폭발하는 것이다. 두들겨 부수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한바탕 소란을 피우지만 그러다가 이튿날 술이 깨면 다시 평소의 조용하고 얌전한 남편으로 돌아와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 하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곤 한다. K양의 부모처럼 부부의 역할이 도치된 가정은 항상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불만이 차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배경에서 자란 K양은 사리 판단을 할 수 없이 아주 어렸을 때는 엄마처럼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의사결정을 하면서 사는 것이 자연스레 삶의 모습으로 자리잡는다. 약간의 경멸과 합께 남자를 휘두르면서 사는 것이 당연한 부부관계인 것처럼 여겼다. 그러다가 좀 더 성장한 후에 친구집에 갈 기회가 생겼는데 그 때마다 K양은 점차로 자신의 가정이 다른 집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기 집은 엄마의 짜증과 아빠의 불만 속에서 엄마와 아빠 사이에 항상 불안한 기류가 감돌고 있는 반면, 다른 집에 가면 엄마 아빠 사이가 뭔가 편안하고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자기 집과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아버지가 의사결정권을 갖고 가장으로서 든든하게 받혀주고 엄마는 다소곳하고 포근한 여성적인 역할을 하고 ... 그제서야 점차로 우리 집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이전에는 당연히 엄마가 옳고 엄마처럼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여기고 아버지는 틀렸다 생각했는데, 다른 집과 비교해 보니까 엄마가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는 이 다음에 커서 결혼을 하게 되면 아버지처럼 소극적이고 무능한 사람보다는 자기주장도 강하고 능력있는 남성, 번듯한 직장도 있고 자기역할을 하는 남성을 만나서 자신은 여성적인 역할을 하는 그런 가정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 다음에 부모들과는 달리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자녀들에게 정서적인 불안을 주지는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실제 상황이 생각과는 다르게 전개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남자친구를 사귈 기회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자기주장이 있는 남자를 만나면 어딘지 모르게 아주 불편하고 관계가 오래 지속되질 않았다. 의식적으로는 저런 남성이 능력도 있고 자신감도있어 좋겠다 생각하면서도 같이 있으면 아주 불편하고 힘들었다. 얼마 못 가 의견충돌이 생기고 짜증스러웠다. 그러나 아버지 같은 성격의 조용하고 수동적인 남자를 만나면 처음부터 아주 오래 사귀어 온 듯이 편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는 자신이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 남자친구와 함께 있으면 적극적으로 리드를 하면서 먹을 것도 사주고 데리고 다니게 된다. 
그래서 결국 K양은 자라면서 의식적으로는 부모님들의 결혼관계가 실패한 관계라고 생각해서 자신은 결코 그런 결혼은 안 하겠다고 다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스스로는 의식적으로 혐오하는 타입의 남성과 결혼해서 부모와 똑 같은 삶을 반복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어린 시절 형성된 K양의 심층심리를 이해하지 않고는 이러한 인생의 아이러니가 우리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는 현상을 이해하기는 힙들다. 아버지에 대한 경멸과 이제는 자신의 또 다른 일부가 되어 버린 그 경멸감에 대한 죄책감, 그것을 심리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재현, 이런 무의식의 복잡한 심리역동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파라독스의 세계인 것이다.


핵심감정


위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관계에서 형성된 여러 가지 해결되지 않은 갈등, 소망, 좌절, 욕구 등이 있어 성장한 후에도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영향을 미치게 된다 . 그런데 이런 무의식적인 요소들은 모두가 똑같은 비중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그 성장배경이 다른만큼 그에 따라 각기 다른 종류와 강도를 갖게 된다. 그 중에서도 어린 시절 특별히 해결되지 않은 갈등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가장 중요한 특정 감정을 갖게 되는데 이를 핵심감정(nuclear emotion 또는 core emotion)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일찍 분리되어 심한 분리불안(separation anxiety)를 느꼈던 사람은 성장해서도 남달리 의존욕구(dependency need)가 많은 사람이 되며 그는 항상 이 의존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행동하는 특성을 갖게 된다. 또 다른 예로는, 어려서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눌려 산 환경은 성장해서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끊임없는 분노를 무의식의 핵심감정으로 자리잡게 만들어 그의 삶은 늘상 분노를 폭발할 것인가 억압할 것인가의 갈등 속의 기로에 서게 한다. 이 핵심감정은 무의식의 여러 복잡한 요소들 중에서도 특히 다른 것에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영향을 그 사람의 심리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이를 파악하는 것이 역동상담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핵심감정은 실제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복합적인 개념으로서 그 형성부터가 여러 요인들의 상호 작용에 의한 결과이다. 즉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갖고 있는 유전적인 소질과, 출생시에 타고 나게 되는 기질(temperament)과 경향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러한 생물학적인 요인들을 가지고 태어난 애기가 부모와의 관계를 맺고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본능을 충족시키거나 좌절되는 상호작용을 통하여 여러 다양한 유아기적인 감정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특히 아주 어린 시절 성장과정에 있어서 상당한 결핍이 있을 경우 그것은 어린 아이의 심층심리에 다른 어떤 감저과도 견줄 수 없는 깊은 골을 패게 만드는데 이것을 우리는 핵심감정이라고 한다. 이 핵심적인 감정은 아동의 인격이 성장함에 따라 나름대로 이를 극복하고 사회심리적으로 생존하려는 방어기제에 의하여 더 한층 복잡한 반응양상을 띠게 되며 이 핵심감정과 이에 대한 방어기제의 상호 역동적인 양상을 핵심역동 (nuclear dynamic 또는 core dynamic)이라고 부른다.그러면 이제 핵심감정이가지고 있는 몇가지 특성에 대하여 좀 더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핵심감정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묻혀 있는, 어린 시절에 형성되었지만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어린시절의 감정양상이다. 그러면 과연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주로 어떤 것들이 갇히어 있을까? 아주 어린 시절에 겪었던 경험에서 생긴 좌절들, 갈등들, 양가감정-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우울, 분노, 외로움, 슬픔, 미쳐 성취해 보지 못한 본능적 충동들, 이런 것들로가득 차 있다. 그 중에는 일부 긍정적인 것들도 있겠지만 그러나성장한다는 것은 좌절의 연속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들이 주로 많이 들어가 있다. 애기가 갖 태어났을 때는 방어능력이나 적응능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주 어린 시절에 겪은 사건일수록 더 결정적인 결핍을 납기게 된다. 그러나 애기가 부모와의 관계를 통하여 성장해 감에 따라 2-3세 시기를 거쳐 6-7세 정도만 되면 어느 정도 인격의 방어기능이 형성되므로 그 이후에는 웬만한 자극이 들어와도 심각한 인격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것을 극복해 낼 수도 있게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핵심감정은 6-7세 이전에 형성된, 다시 말하자면 유아기에 형성된 감정이다. 따라서 그것은 미성숙한 것이며, 건강하거나 성숙하다고 말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핵심감정은 일반적으로 인격이 원만하고 건강한 사람에 있어서는 뚜렷지가 않지만 인격이 미숙하고 마음에 깊은 심리적 결핍이 있는 사람에게서는 더욱 뚜렷이, 그리고 아주 지속적으로 발견이 된다. 결국 우리가 인격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핵심역동이 얼마나 건강한가를 의미하는 것이며, 반면 핵심감정이 강렬하고 이를 방어하여 나가는 핵심역동이 병적인 사람일수록 우리는 그 사람을 신경증적이다, 또는 정신병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핵심감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닥치게되는 위기나 심각한 인간관계의 갈등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객관적으로는똑 같은 문제같아 보이더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 문제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 문제가 평생을 걸쳐 해결해야 할 화두처럼 심각하게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사람마다 고민하는 문제는 다 다르고, 그래서 사람마다 걸려 넘어지는 문제가 다 다르다. 같은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라도 어떤 며느리는 아무 문제가 없는 반면 어떤 며느리에게는 시어머니와 함께 생활을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긴장과 좌절의 원천이 된다. 남이 보기에는 아주 대수롭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끙끙거리며 고민하는 것을 보면 나에게는 우습게 보이기조차 할 때가 있지만, 반면에 내가 속으로 앓고 있는 문제는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그것은 왜 그럴까? 그러니까 어떤 문제든 그 문제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결국은 그것이 문제가 되어서 나를 걸고 넘어질 소지가 이미 내 마음속에 결정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환경이나 주위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마다 이미 마음속에 문제가 걸리도록 되어있는 어떤 취약한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취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어떤 촉발문제가 걸리면 그것이 외견상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굉장히 견디기 어렵게 분노를 끌어 일으키거나, 아니면 아주 절망에 빠지게 하거나, 아주 힘들어하거나 한다. 옆에서 보기에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데 당사자는 그것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어떤 때는 생명을 버리면서 까지 해결하려고 괴로워한다. 4다시 말하자면 핵심감정은 인간마다 각기 얼굴이 다르듯이 그것 또한 각기 다르다는 말이다. 


8 그것을 마치 열쇠가 맞지 않으면 들어가지도 않고 아무 문제가 없는데 어떤 특수한 열쇠만이 내마음에 콱 들어와 박히는 것처럼 문제를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이를 열쇠-자물쇠 기전(key-lock mechanism)이라고 말한다. 나의 내면에 있는 핵심감정이 의존욕구나 인정욕구일수도 있고, 상대방이 나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일 수도 있다. 문제의 핵심은 나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나의 내부에 있다. 사람들은 갈 등에 처하게 될 때마다 우리 남편이, 아내가,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하는 식으로 남의 탓이나 환경 탓을 하지만 사실은 문제의 해결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말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핵심감정은 각기 그 양상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러나 그중에서도 매우 보편적이고 중요한 몇가지가 있다.(이에 관하여는 제3장에서 상술할 것이다.)


핵심감정은 원칙적으로 무의식에 묻혀 있기 때문에 알 수가 없지만, 오랜 세월 인생을 살다보면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며 특히 심리학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성찰을 하면 상담부분 의식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안다고 하는 나의 심층심리는 다분히 본리적인 이해이며 감정적인 부분의 핵심감정은 그 전모를 잘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은 것이다. 6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아이러니는 나의 내부에 있는 문제의 본질인 핵심감정은 항상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상다적으로 쉽게 보이지만 나 자신에게만은 그것이 잘 안보인다는 사실이다. 마치 인간이 거울을 통하지 않고는 스스로의 얼굴은 볼 수 없는 것치럼, 옆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문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잘 아는데, 단지 자기만 잘 모른다. 이 핵심역동은 다른 사람에게는 잘 보이는데 자신에게는 가리워져 있다. 때로는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이것이 인간의 아이러니다. 


예를 들면 부부 간에서도 아내의 성격, 그리고 우리는 오랜동안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나의 성격을 스스로가 모두 잘 알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부부싸움 끝에 아내가 ’당신은 바로 그것이 문제야‘라는 식의 한 마디가 나의 오장육부를 모두 뒤집어놓고 머리 끝까지 분노를 일으키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제까지 내가 너무나 잘알고 있기 때문에 늘 스스로 잘 조절해 나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것이 별 문제가 아닌 줄 알았는데 그런데 정말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당신은 늘 그것이 문제야‘라는 말이 마음에 와서 꽂혀 상처가 되고 하루종일 기분이 나쁘게 된다. 이제까지 단지 잘 억압하고 지내왔을 뿐, 진정으로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바로 그 취약점의 정체가 어떠한지는 제대ㅐ로 파악이 안되고 있었던 것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진짜 중요한 핵심역동일 수록 자신에게는 가리워져 있고 남한테는 쉽게 보인다. 우리가 핵심역동을 깨닫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머리로는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핵심역동이 나를 얼마나 강열하게 끌고 가는지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전문가적인 개념을 갖고 경험을 해야 한다. 


세째, 핵심감정은 아주 끈질기게 일생을 통하여 반복된다.이것은 굉장히 끈질기다. 일생을 살다보면 조금은 완화가 되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다. 이 핵심감정이 끈질길수록, 변화하지 않을 수록 우리는 ‘성숙하지 못하다, 신경증적이다’라는 표현을 쓴다. 예를 들면 의존욕구가 너무 많은 사람들은 항상 생활의 무의식적인 목표가 어떻게 하면 의존욕구를 충족시키느냐에 몰두한다. 친구를 사귈 때도 상대방이 부담을 느낄 정도로서로 가까이 하고자 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상대방이 나를 싫어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이 무의식에 깔려 있기 때문에 자기 주장도 제대로 못 하고 질질 끌려가는 관계를 맺다가 뒤에 원망과 배신감에 휩싸여 관계를 단절하곤 한다. 이런 인간관계는 한번이 아니라 일생을 통하여 끈질기게 반복이 된다. 아내에게, 직장상사에게, 교회지도자에게, 상대방에게 의존적인 기대와 에 따른 좌절과 원망의 감정을 자꾸 반복하게 된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다음의 K씨의 사례를 참고하기 바란다.) 핵심감정은 반복되고 반복되어 드디어는 상담의 현장에 오게 된 내담자들은 현재 상담자 앞에서 그것을 다시 표출을 한다. 그러므로상담에서는 상담자가 내담자를 다룰때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잘 관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내담자의 핵심감정과 핵심역동을 추상적이 아닌 실제의 상황으로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담자가 퇴행이 되는 상태에서 이런 어린 시절의 부모에 대하였던 관계에서의 핵심감정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바로 전이(transference)현상이며, 이 전이르 잘 다루어 치료하는 것이 근본적인 핵심감정의 치료임이 분명해 진다. 아마츄어는 내담자가 제기하는 문제만을 논리적으로 생각할뿐이지만, 프로페셔널 상담자는 무엇보다도 내담자가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관계 속에서 핵심감정을 어떻게 다루어나가느냐 하는 차이가 있다. 핵심감정은 자꾸 반복하여 그 사람의 일생 사건들 속에 나타나 있으며, 더우기 상담자에게 와서도 역시 상담자-내담자 관계를 통하여 나타나게 되므로 내담자가 나한테 와서 어떻게 대하는지를 잘 관찰하면 내담자의 핵심감정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자꾸 반복이 되기 때문에 몇번 내담자를 만나게 되면 이것은 고부간의 문제가 아니고, 부부사이의 문제가 아니고 저분속에 저것이 문제구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문제해결이란 있을 수 없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이 핵심감정이 얼마나 끈질긴지 Karen Honey라는 학자는 이것을 ‘should라는 이름의 폭군’(‘Tyranny of should')이라고 했다. 특히 인격이 성숙하지 못하고 신경증적인 사람일수록 이 핵심감정에 좌우되기 때문에 이를 충족받기 위하여 일생을 폭군에게 끌려다니는 노예와도 같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나는 어디서든 인정을 받아야 한다., 나는 항상 일등이어야 한다, ’나는 어떤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한다.‘ 라는 성숙치 못한 should라는 전제를 머리에 두고 살기 때문에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삶을 산다는 말이다, 이러한 전제들은 물론 어린 시절의 핵심감정으로부터 형성된 신경증적인 경향이며, Karen Horney는 바로 이와 같은 현상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모습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들의 보편적인모습임에 틀림없다. 어려서부터 우리가 얼마나 인정을 받기 위하여 발버둥처 왔는가? 학창시절의 피나는 공부, 과로로 쓰러지면서까지 일에 몰두하면서 살아온 것은 모두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모두 다 ’인정‘이라는 폭군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남이 나를 무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불안은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이런 것들을 아직도 머리에 이고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의 인간관계는 이것때문에 긴장을 찌들고, 피곤에 지치며, 힘들어 하지만, 그것을 내려놓지 못한채 자신도 어떻게 하지 못하고 그냥 살아간다. 이렇게 핵심감정은 너무나 끈질기게 우리의 삶을 끌고 간다. 


그러면 여기서 크리스천으로서 당연히 드는 의문은 과연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중생한 후는 이러한 핵심갑정이 어떻게 되는 것일까에 관한 의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거듭나면 “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다”(롬 ) 라고 선언해 주셨는데, 그렇다면 이로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과거의 우리 무의식을 지배해 왔던 핵심감정과 이를 다루어 왔던 자아의 행동양식은 없어질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인격이 일단 형성되면 그 다음에는 아주 약간의 변화는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한번 형성된 핵심감정과 방어기제의 모습은 죽을 때까지 변화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기독상담학자들은 바로 이것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성경적이지 않다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무의식을 잘 모르고 경솔히 판단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너무나 정신분석의 이론과 성경의 선언과 괴리를 느낄지도 
모른다. 성경이 심리학을 잘 모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정신분석이 비성경이어서 틀렸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정신분석과 역동상담을 깊이 있게 공부하면 할수록 성경의 진리와 학문의 진리가 오묘하게 일치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의식과 핵심감정에 대한 통찰을 얻으면 얻을수록 그것이 바뀐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힘든가를 잘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 자신의 핵심감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거듭 나서 ‘새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대한 기적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핵심감정을 극복하고 자유로와 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야말로 왜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예수님이 필요하다. 나로써는 도저히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분으로 인하여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핵심감정의 이론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신분석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성경의 진리가 고상하고 정확하게 드러난다. 역동상담학 책 첫머리에는 정신분석을 하거나 역동상담을 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은 안되는 것이며, 단지 우리의 인격을조금 수리할 뿐이다 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예수 믿고 거듭나면 너희가 전혀 새로운 새 생명으로 대치되어 준다는 것은 보통 기적이 아닌 것이다.


네째, 핵심감정은 본능, 자아, 및 초자아 등과 같은 다른 역동심리적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에너지를 가진 힘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어떤 고정적인 심리적 기구나 역할의 개념이 아니고 생생하게 에너지를 갖고 끊임없이 충동하는 힘이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분노가 있다고 할 때 살아가면서 그것을 건드리는 상황에 자극될 때마다 그 핵심감정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강한 충동 에너지를가지고 분노의 감정을 확 일으킨다. 학교선생이나 직장상사이든, 또는 불합리한 국가 권력이든, 인간관계에서 누군가가 불합리하게 나를 압박할 때는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핵심감정은 대단한 에너지를 가지고 폭발하게 된다. 물론 감정을 폭발한다는 것은 그 결과 개체의 생존과 적응에 심각한 손실을 초래한다. 그래서 이것이 튀어 올라오면 사람들은 긴장하고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자아가 이것을 꽉 내리누르고 있다. 누르지 않고 매일 감정을 폭발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심감정이 강렬하면 할수록 그것이 폭발되지 않도록 누르면서 조절해가면서 살아가는데에도 그만큼 많은 에너지가 들게 된다. 물론 자아는 이 핵심감정을 나름대로 조절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어기제의 방법을 사용하지만 그만큼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피곤하고 힘들게 되는 것이다.


부인은 성격이 아주 깔끔하다. 차림새도 항상 깔끔하고 빈틈이 없다. 남보기에는 참 좋아 보이지만 그러나 자기자신은 항상 피곤하다. 어린 시절 형제 많은 집안의 세째 딸로 태어나 위로 아래로 치이며 소외당하며 커 왔다. 내면 깊숙이에는 낮은 자존감과 함께 남이 나를 무시하지나 않나 하는 긴장이도사리고 있다. 나이 많으신 부모님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항상 치밀하고도 완벽한 준비와 노력이 있어야 했다. 공부도, 집안일도 남보다 몇배의 노력을 해야 바로 밑 한살 아래 남동생에게만 쏠리는 부모님의 관심을 나누어 받을 수 있었다. 이제는 성장하여 어느 정도 성공한 가정주부가 되었고, 그 누구의 인정을 받을 필요도, 무시당할 염려도 없지만, 세심하고 깔끔한 성격은 H부인을 잠시도 편안하게 놔두지 않는다. 잠시도 다른사람에게 틈을 보여줘서는 안되며, 어디서든 내가 항상 베스트로 살아야한다는 전제가 폭군처럼 H 부인의 삶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살려면 굉장히 에너지가 많이 들고 힘이 든다. 남보다 좋은 평수의 아파트에, 좋은 가구와 좋은 차에, 우리 애들은 항상 일등을 해야 하고, 우리 남편은 제일 잘 나야 하고, 등등 이런식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그 무언가에 인정받으려는 욕구로 귀결한다. 그래서 마치 자기 머리 위에 should라는 이름의 폭군을 이고 사는 꼴이 되는 것이다. 때로는 삶이 이렇게 피곤해서야 라고 느낄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 느끼는 좌절감과 열등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자신이 자기 마음대로 안된다. 내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주장해서 
살지 못하고 항상 내 속에 있는 존재, 핵심감정에 의해서 질질 끌려다니게 된다. 자유롭질 못하다. 그래서 핵심감정은 에너지를 많이 들인다. 


핵심역동(nuclear dynamic 또는 core dynamic)

어린 시절 우리에게 핵심감정을 자리잡게 만드는 것은 정서적으로 중요한 존재, 즉 부모, 그 중에서도 특히 엄마와의 관계를 거치면서 이지만, 그 근본 출발점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즉 본능에 있다. 생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사랑을 받고자 하는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성적 충동은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의 원초적인 형태이다. 적개심 또한 성본능과 아울러 인간이 생존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욕구이다. 우리의 자아가 채 성숙하기 전 유아시절에는 무의식의 영역이든 의식의 영역이든 우리의 삶을 주로 지배하는 것은 바로 본능이었다. 그러나 우리 인격의 주인이자 의식의 지배자인 자아가 점차로 성장해 감에 따라 사정은 바뀌게 된다. 자기중심적이고 유아기적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본능의 충동들은 점차로 의식에서 밀려 무의식의 영역으로 쫓겨나게 되고, 의식은 주로 자아가 지배하는 영역이 된다. 그러나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려난 본능은 그대로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충동과 그 파생물들, 특히 핵심감정의 모습을 하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않고 기회가 있는대로 다시 의식의 영역으로 쳐들어와 우리의 인격을 지배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출렁거리고 있다. 따라서 자아는 현실에 적응하고 생존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이들 본능과 핵심감정을 통제하고 이들과 타협해 나가게 되어 있다. 특히 자아는 무의식의 길목을 가로 막고 서서 핵심감정인 과거의 분노나 좌절, 갈등이나 원망 등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컨트롤하거나 의식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법으로 변형을 하여 표출되도록 타협하는 역할을 하게된다. 이것은 마치 힘겨운 전투와도 같다. 도우기 이 심층심리의 전투장에 조금 뒤늦게 (6, 7세 이후) 초자아(superego) 까지 합세하게 되면 인간심리의 내면은 그야말로 복잡한 삼파전의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런데 이 본능이나 자아와 초자아는 어떤 박제된 그런 움직이지 않는 기관(organization)이 아니고 각자 나름대로 살아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어떤 에너지를 가진 힘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이란 것은 에너지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추구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다투는 힘들이 미묘한 균형을 이루면서 서로 영향을 미치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장이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우리는 정신역동(psychodynamic)이라고 부르며, 그 중에서도 이 역동의 모습을 특징지우는 것은 무의식의 핵심감정을 자아가 어떻게 다루어 나가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이를 핵심역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는 핵심감정의 힘은 항상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식으로 튀어 올라와서 우리의 전인격을 흔들려고 호심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반면, 이를 억압하고 있는 자아의 힘과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 균형은 확고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출렁거리는 물과 같아서 쉽게 깨어지게 되어 있다. 즉 주위환경이나 외부에서 핵심감정을 자극하는 스트레스가 영향을 미치게 될 때 아까 이야기했던 key-lock mechanism에 의해서 이제까지 겨우 이루고 있던 힘의 균형을 깨어버리고 의식으로 튀어 올라온다는 것이다. 때로는 외부로 부터의 핵심감정을 자극하는 스트레스가 없이도, 자아가 약해져서 잠시 틈을 줄 경우에도 이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보통떄는 자신을 잘 조절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던 사람도 병에 걸려 허약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화를 내고 자기중심적이 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평상시에는 자아가 잘 억압을 하고 있기 때문에 느끼지 못하다가 자아가 약하게 된 순간에 무의식 속에 있던 적개심이 튀어 올라오는 것이다. 몹시 피곤하다든지, 다른 일이나 사건에 몰두하는 바람에 자아가 잠시라도 방심하면 그 틈을 타 무의식 속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핵심감정들이 튀어 오르게 된다. 그래서 우리들의 자아는 항상 피곤한 존재이다. 그 뿐이 아니다. 또 한편에는 높은 삶의 기준과 양심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도달하도록 항상 채찍질을 하고 있는 초자아의 압박이 
있다. 초자아는 자아에게 어떻게 살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 속으로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예를 들면 대학입시에 떨어졌거나 남과의 경쟁에서 뒤쳐질 때) 옳지 않은 짓을 하면 가차없이 자아를 몰아세워 우리는 죄책감에 빠지거나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자아는 밑에서 치받히고 위에서 눌리고 하기 때문에 참 피곤하다.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고 각 부분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담으로 막혀져 있다. 인간의 내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일생을 살아가노라면 우리가 처한 환경은 항상 끊임없이 여러 가지 자극과 시련과 겪고 넘어가야 할 고통들을 자아에게 주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없는 벽으로 단절되어 있다. 이와같은 여러 힌들로 인하여 인간의 심층심리는 마치 작은 그릇에 물이 넘쳐 출렁거리는 것처럼 곧 깨어질 듯이 여러 에너지 힘들이 역동적으로 미묘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동의 개념이다. 그 균형은 결코 한번도 안전하게 고정되지 않고 순간순간 역동적으로 바뀌며, 일시적으로 이 균형이 흐트러질 때 자아가 느끼는 감정상태가 바로 불안(anxiety)이다. 
자아가 이 불안이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오래 지속되면 그것이 바로 우울증이 되기도 하고 강박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자아가 이 모든 갈등과 균형을 너무 힘겨워 하여 아예 그 통제의 기능을 포기하고 말 때, 이제까지 무의식에 감추어져 있던 기대와 욕구, 분노와 같은 핵심감정들이 뒤죽박죽 올라와 의식을 지배하게 되는 상태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정신병적인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역동상담학에서는 불안은 매우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인데, 즉 이 불안이라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두가지 측면이 있다. 물론 이 불안은 심해지면 병적인 증상이 되며 자아의 기능이 마비되므로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불안은 긍정적인 가치가 있기도 한데 즉 심적 역동의 균형이 깨져 가고 있으니까 이를 어떻게든 자아로 하여금 바로 잡으라는 경고의 싸인이 된다. 따라서 인간은 심리적으로 이 불안을 적절히 느끼지 못한다면 생존하기 어렵다. 어떤 위기상황에 접하면 자아가 불안을 느끼게 되며 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아는 적응적인 행동에 나서게 되는 계기가 되므로 이 불안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K씨의 사례  핵심역동과 신앙성숙
정신분석학은 이렇게 인간의 실존을 안밖의 힘들의 위협에 직면하여 내적으로 분열되고 나뉘어 진 채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그것은 자력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비참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이다. 특히 우리는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의지적으로 선하게 살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끊임 없이 하는 데도 불구하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볼수록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나를 압도하려는 또 다른 무의식의 나-핵심감정을 볼 때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놀랍게도 우리는 로마서 7장 15절-25절에서 너무나도 똑같은 고백을 듣게 된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니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러므로 정신분석을 심도 있게 공부하다 보면 성경적인 진리의 일단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타락으로 인하여 너무나도 절망적인 모습으로 훼손되어 있다는 통찰이다. 인간이 인격적으로 성숙하여 본래의 창조된 온전한 모습을 되찾고자 할 때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전제는 이러한 절망적인 우리의 자화상 앞에 직면하는 일이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리 속에서 구원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슬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합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 그런데 이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구원을 예고하는, 아니 보장하는 절망이다. 다시 말하면 절망을 느껴 보지 않는다면 성숙이나 구원은 없다. 인간은 절망에 직면해야 비로소 위를 바라보게 되며 내 스스로의 내면에서는 구원받을 게 없다는 것을 깊이 있게 깨달아야 위를 향하여 손을 내밀게 된다. 사도 바울은 마치 심층심리학을 철저히 공부한 사람처럼 누구보다도 이런 내면의 절망을 바라본 분이다. 그가 얼마나 괴로우면 세상사는 것이 너무 피곤하다고 깊은 탄식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우리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25절)라고 결론짓는다. 24절과 25절 사이에는 느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아주 깊이 있는 절망의 시련이 있다. 이 절망의 깊이를 경험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너무 뿌리가 깊고 철저해서 내가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Tyranny of should의 핵심감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느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인 것이다. 우리는 내 안의 모순과 허약함과 절망을 느끼면 느낄 수록 역설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예수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더 철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일 매일 끊임없이 그 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더욱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어 우리를 원치 않는 방향으로 끈질기게 끌고 가는 핵심감정의 정체를 우리는 역동상담의 방법으로 조금씩 알아갈 수 있다. 이 책은 그 방법에 관하여 하나씩 하나씩 서술해 나갈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내면에 묻혀 있는 핵심감정의 전모를 잘 이해하고 우리의 자아가 이를 잘 통제하고 끌고 나가게 될 때 우리의 인격은 성숙을 향하여 나아가게 될 것이다. 역동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힘겹게 그곳에 들였던 그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더 이상 들이지 않아도 된다면 우리는 마치 무거운 짐을 덜어 놓는 것처럼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을 느낄 것이며 그 에너지를 보다 창조적인 일에 사용하게 됨으로서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우리의 자아 혼자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인간에게는 그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바로 이 점이 세속적인 정신분석이나 역동상담과 기독교적인 믿은을 가진 상담자와의 전혀 다른 해법을 갖게 되는 입장 차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가 핵심감정을 깨닫고 인격성숙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되는 방법으로 역동상담을 공부하고 적용하는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이런 논리적인 방법이 아니고 단숨에 특별한 방법으로 갑자기 깨닫게 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혼자서 조용히 성경을 묵상하다가, 또는 열정적인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깨닫게 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어느날 부흥집회에 참석해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다가 갑자기 전기에 맞은 것처럼 찌르르하고선 그 다음부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채 눈물 콧물 막흘리면서 ‘아이구 잘못했습니다’ 하는 고백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오고, 그러고나면 이제까지 한번도 느껴 보지 못한 굉장한 평안이 오게 되는 체험을 한다. 그리고는 서서히 논리적인 깨달음이 온다. 과거에는 이런 현상에 대하여 우리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핵심역동의 개념을 알면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전적인 성령의 은사이다.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사이다. 자신도 모르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이에 우리의 가장 핵심적인 역동을 건드리시고 그 핵심적인 역동이 내 안에서 논리를 초월히여 나도 모르게 소화가 될때 우리는 한차원 높게 신앙적으로, 동시에 인격적으로 성숙했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알게되는 구나 라는 개념을 갖게 된다. 어느덧 마음 속에 걸려 있던 분노와 좌절 등은 내 안에서 용서되고 수용되면서 굉장한 자유함을 느끼게 된다. 이제까지 마음에 걸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절망하던 그 어떤 문제-사실은 핵심감정 때문에 걸려 있던 문제인데-가 마음 속에서 해소되고 자아는 새로운 차원의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착각하면 안된다. 아직도 우리는 조금 깨달은 것에 불과하다. 갈 길이 아직도 멀었다. 아니 오히려 첫 걸음이라고 보아야 한다. 무의식의 핵심감정은 이제야 겨우 그 한 쪽 발만을 내민 것이다. 사도바울도 ‘내가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고 그것을 붙잡은 바도 아니다’ 라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열심히 헌신적으로 쫓아다니고 했지만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심층심리는 아주 뿌리가 깊고 복잡하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우리가 역동상담의 밥법을 통해서 이것을 조금씩 이해하게 해주는 방법도 있고, 어떤 경우에 일시에 우리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노출 시키고 깨달음에 도달하게끔그런 방법을 쓰실 수도 있다. 우리는 이따금 성경말씀 보다가 뭔가를 새롭게 꺠달을 때가 있다. 아, 이전까진 내가 몰랐는데 이말씀을 접하는 순간에 갑자기 말씀이 살아서 피부를 확 찌르면서 느끼게 된다. 이럴떄 우리가 건드려지는 부분을 잘 살펴보면 내가 어린시절부터 느끼고 있던 나도 잘 모르는 어떤 막연하게 생각되는 핵심역동이 건드려지게 된다. 예를 들면 인정욕구 때문에 평생을 잘한다는 말 한 마디 듣기 위해서 힘겹게 살아 오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이와 관련된 말씀 안에서 그것이 해결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오래 전부터 예비하시던 살아 있는 메세지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구원의 문제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기 때문에 역동하고는 관계없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에서 회심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역동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최초의 회심 후 계속되는 신앙의 성숙은 이 핵심역동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우리가 이 핵심역동을 잘 이해하고 자아가 성령의 함께하심과 더불어 자신의 심층심리의 내면을 잘 들여다 보면 볼 수록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아무리 은사가 많아서 위대한 능력을 행할 수도 있고 병고치는 은사나 말씀을 신령하게 나누는 은사가 있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통찰하는 노력이 없이는 영적인 성숙과는 다를 수도 있다. 우리는 어느 한 때 모두가 다 병자이었다. 우리가 병자가 아니었으면 예수님이 필요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병자냐하면 마음 속이 조각조각 찢겨진 병자이었다. 그리고 자금도 그렇다. 우리 마음 한 쪽에서는 위로부터 떨어진 새생명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고 언젠가는 그것이 우리의 전 인격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게 되겠지만 아직도 우리는 병자이다. 그리고 우리가 병자라는 사실을 절망할 수록, 나 혼자서는 지금도 고칠 수 없는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절감하면 할수록 더욱 감사하다. 성숙의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핵심역동에 관한 부분을 이해하는데 게을리 하지 말 것과 동시에 상담의 현장에서도 내담자 자신이 잘 이해하고 그것에서부터 자유롭게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