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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영혼을 돌보는 심리치료

제1강: 영혼을 돌보는 심리치료

 

▶ 글을 여는 사례: 한 유태교 레지던트(정신과)와 그의 아버지와의 갈등

*아들: 저는 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네가 정신의학을 공부하는 것까지는 지지해 주었지만 왜 하필 정신과 의사니?

너에게는 성경이 있쟎니. 그런 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이냐?

 

이제까지 인간의 내적인 문제는 종교가 담당하던 영역이었다. 융의 말대로 모든 종교(물론 고등 종교를 말한다)는 치유의 시스템이며 기독교는 그 시스템의 꽃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20세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인간의 내적인 문제를 종교의 렌즈가 아닌 현상학적인 렌즈로 보려는 시도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정신치료”란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심리치료는 최면이나 연상작용과 같은 심리적 방법에 의해 병을 치료하는 것을 뜻하였다. 20세기 초 미국의 “임마누엘 운동”이 한창일 때 정신치료를 담당하는 자들은 정신치료에는 의료적인 방법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도덕적, 영적인 방법들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54년 Rickel이란 사람은 정신치료란 단어의 어원은 "Psyche-영혼"이란 의미를 포함하며 “치료자”는 “영혼을 섬기는 자”란 정의를 내렸다. 정신치료의 과정은 종교적 혹은 영적인 과정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Carl Jung의 저서인 “Modern Man in Search of a Soul"에서 융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환자들은 정신치료자에게 성직자의 역할까지 강제적으로 떠맡기려 할 뿐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자신들이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기를 기대하며 또 그것을 요구한다. 이 점이 바로 우리 정신치료자들이 엄격히 말해 신학자들에게 속하는 문제들을 취급하는 이유다”

 

다시 말해 현대의 정신치료 행위는 그 역사적 뿌리가 영혼 돌봄이라는 종교적인 행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Ⅰ. 영혼 돌봄의 도구로서의 “언어-수사학”의 문제

 

플라톤에 의하면 신체를 돌보는 의사의 과업은 물리적 수단을 통해 치료하는 것인 반면에 마음을 치료하는 의사의 과업은 “언어-수사학(rhetoric)”이란 도구를 통해 치료하는 것이라 보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수사학은 마력적인 힘을 갖고 있으며 수사학을 통해 환자의 감정을 정화(Catharsis)하는 효과까지도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제안이 후에 프로이트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영혼을 치유하는 자”로 여겼다. 그는 자신의 삶의 존재 목적이 “당신들의 영혼이 잘 되는 것임을 알려주고 또 설득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의 대화법은 “산파술”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내담자의 마음 안에 있는 참된 자기를 탄생시키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에서 마음을 돌보는 의사는 오직 한 가지의 도구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말”이었다. “말”에 의한 치료란 성숙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사람들을 설득하고, 도전하고, 안내해 감에 있어 선별된 말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Ⅱ. 기독교에서의 영혼 돌봄의 역사

 

* 크랩쉬와 재클이 말하는 기독교 치유의 4가지 요소: 치유, 지탱. 인도, 화해.

 

* 치유:

 

 

 

 

* 지탱:

 

 

 

 

* 인도:

 

 

 

 

* 화해:

 

 

영혼 돌봄의 역사는 고대 셈족 문화로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즉 인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혼 돌봄의 역사는 그 형태만 다를 뿐 그 본질은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영혼 돌봄의 역사는 고대 이스라엘의 현인들의 활동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현인들은 마음을 치유하는 실제적인 상담자 역할을 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명정대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후에 “랍비” 혹은 “지혜자”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영혼을 돌보는 것과 관련하여 가장 성경적인 이미지 중의 하나는 “牧者像”이었다. 에스겔 선지자는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며 병든 자를 치료해주고 상한 자를 싸매며 잃은 자를 찾아 나서는 者로서의 목자상을 제시하고 있다(겔34:15). 만약 이들이 하나님이 주신 목자의 사명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할 때 하나님이 친히 양무리를 먹이시며(겔34:15), 어린양을 품에 안으시며(사40:11), 쉴만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신약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릴 뿐만 아니라 양무리들을 인도하고 보호해주는 선한 목자로 묘사되고 있다(요10:11-16).

 

기독교 전통에서 영혼 돌봄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고백(confession)과 회개(repentance)”였다. 카톨릭에선 주로 이미 저질러진 특정한 죄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고백이 시작된다. 루터가 이를 비판하는 글을 썼을 때 그는 지은 죄를 일일이 열거하면서 자신의 죄를 깊이 묵상하는 것의 가치를 일부 인정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더욱 강조하였다. 루터교도들과 칼빈주의자들 그리고 청교도들, 부흥운동가들은 한결같이 회개할 때의 “느낌”과 “용서”와 거듭남의 “경험”에 관심을 가졌다.

 

영혼 돌봄의 전통은 종교개혁 이전에도 그 뿌리가 깊다. 기원 후 4-5세기에 이미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사막의 교부들”은 그들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영혼의 정결과 훈련을 위해 영적인 여정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남겼다. 영적 교부들은 먼저 행함을 통해 모범을 보였으며 말에 의한 가르침은 그 다음이었다. 이들의 영적인 지도에 관한 역사는 15세기에 러시아에도 이어져 러시아에선 영적인 스승이나 가이드를 일컬어 “Startsy"라고 불렀다. 이들은 치료자 자신이 직접 환자의 화신이 되어 환자의 혼란한 마음속으로 들어가 대리로 고통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그 고통에 동화되는 일을 감당하였다.

기독교 전통에서 영적 돌봄의 역사는 광범위하다. 13세기에 도미닉 수도회에선 수녀들이 영혼 돌봄의 역할을 헌신적으로 감내하였다. 개신교의 태두인 루터 역시 개인적으로 수많은 이들을 돌보며 지도하여 ”영적 상담 편지“라는 서간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17세기에 활동하던 인물인 리챠드 박스터 목사 역시 그의 교구에서 牧會하면서 영혼을 돌보는 일에 관한 책을 남겼다.

 

Ⅲ. 영혼의 치유에서 마음의 치료로

 

홀리필드의 “미국에서의 목회적 돌봄의 역사”라는 책에 의하면 영혼의 치유에서 마음의 치유로 Paradigm이 바뀌게 된 사건은 1905년 미국의 임마누엘 교회의 감독들의 모임을 통해 새로운 흐름이 도입되게 되었다. 이 교회의 교구 목사인 Elwood Worcester과 그의 동료인 McComb은 수 천년간 유지되어 온 영혼의 돌봄이라는 역사가 계속해서 기독교 전통에 의해서만 주도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당시에 유행하고 있었던 새로운 조류인 정신치료라는 과학에 의해 주도되어야 하는지를 놓고 고심하였다. 이들은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과학을 수용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여러 교파의 지원을 받아 임마누엘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몇 년이 되지 않아 이들은 “Psychotherapy"란 정기 간행물을 발행하였다. 홀리필드에 의하면 이 시기야말로 영혼 돌봄이 ”영혼 구원에서 자아실현“ 으로 넘어가는 시기라고 보았다. 홀리필드는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회심과 부흥을 통해 신자의 ”내적 상태의 변화“가 중요해짐에 따라 자기 성찰이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면서 자아실현이라는 새로운 조류가 형성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또한 이 시기에 기독교의 영적 전통 대신 자아 실현이라는 주제가 서서히 미국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기독교의 타락 때문이었다. 동양 종교가 소개되고 다윈의 진화론이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태동하면서 기독교의 가르침은 그 권위를 잃게 되었고 더욱이 교회의 도덕적인 타락으로 인해 생긴 종교의 쇠퇴는 영적 공허함을 부채질하였다. 이 시기에 이러한 영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생겨난 것이 ”정신치료“였다. 이 시기에는 영혼들에 대한 치료가 “병든 마음들에 대한 치료”로 바뀌게 되었다. 폴 비츠는 “종교로서의 심리학(77년)”이란 책을 통해 자아주의가 종교를 대신하고 있다고 혹평하였다. 마음의 병이 있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목사를 찾지 않는다. 상담자나 정신과 전문의 혹은 심리치료사를 찾아가게 되었고 영혼의 구원보다는 자아 실현이 더 중요한 삶의 문제로 인식되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통찰과 마음에 생긴 질병은 고대로부터 종교가 그 역할을 담당하여 왔는데 어느 시점에선가 종교가 과학적 심리학에 그 권한을 넘기게 되었다.

 

무엇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등장은 종교와 정신치료를 단절하는 중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즉 그는 종교야말로 환상이며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투사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는 평생을 두고 자신의 이론을 수정 보완하면서도 “성적인 인간”이라는 전제를 유지하였으며 이로 인해 기독교와 적대적인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다시 심리치료 이론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자각이 일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인간을 단순히 생물학적인 존재나 심리적인 존재가 아닌 영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시각이 공식화되기도 하였다(W.H.O에서 말하는 건강의 기준에 정서적인 면과 더불어 영적인 측면이 부각된 것은 그것을 증명하는 단적인 예이다).

 

프로이트의 제자이며 동료였던 칼 융은 종교의 영적인 측면을 강조하였으며 종교와 정신치유는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 후 빅터 프랭클이나 후기 프로이트 학파로 분류되는 대상관계이론가들(리주토나 건트립, 존스 등)은 종교의 치유적 측면과 인간의 영적 측면에 대해 심리적인 견해를 밝혔다. 이제 기독교 상담은 이러한 전통 위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상담과 목회 상담이 무엇이 다르냐고 물을 수 있다. 목회 상담은 안수 받은 목회자가 하는 상담이고 기독교 상담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종교 개혁적 정신에서 본다면 기독교 상담 역시 영혼을 돌보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기독교 상담의 정체성은 목회 상담과 연계하면서 그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다. 서로의 관계가 보완적일 때 영혼의 돌봄이라는 우리의 목표가 더 심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와 상담이란 종교와 인문과학의 조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의 정체성과 인문 과학으로서의 인간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질 때 영성적 돌봄의 전통과 인간 치유의 주제를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이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폭력과 상처

 

설 연휴를 전후로 해서 여전히 뜨고 있는 한국 영화 두 편이 있다. 이미 700만명을 넘겼다는 '실미도'와 10일만에 200만명을 넘겼다는 '말죽거리 잔혹사'이다. 두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두 영화 모두 6-70년대 암울했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의 내용이 모두 폭력을 소재로 한다는 것이다. '실미도'가 분단 상황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비극의 일면을 그렸다면, '말죽거리 잔혹사'는 학교의 병영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학교내 군사 문화가 판치던 시절의 일면을 그렸다. 모두 6-70년대의, 아니 어쩌면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폭력이라는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실미도'는 이름도 군번도 없는 밑바닥 인생들이 저항할 수조차 없는 국가의 폭력 앞에서 어떻게 쓰러져 가는가를 보여준다면, '말죽거리 잔혹사'는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졌던 무지막지한 교사의 학생 폭행, 위계질서라는 미명하에 자행되었던 선후배간의 구타 행위라는 학원 폭력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상담학적으로 보면 폭력이라는 공통된 소재는 행동주의 심리학을 떠올리게 한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일정한 조건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행동 을 위해서는 적절한 조건을 제공하면 된다는 원리를 담고 있다. 조건에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시절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던 것을 생각해보자. 숙제를 한다든가, 일기를 쓴다든가 했을 때 선생님의 지시대로 잘 했다는 의미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도장을 받는다. 그때는 그 도장 하나를 받기 위해 얼마나 긴장하며 애썼던가. 도장을 통해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는 훈련을 하는데 필요한 조건이 된다. 이것은 잠깐 생각해보면 교회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것이다. 주일학교에서 나눠주는 달란트가 그렇고, 전도행사를 할 때 거의 경품에 가까운 시상을 하는 것도 그러한 것이다. 긍정적인 대가를 받는 조건을 형성해서 바람직한 행동을 훈련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나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시각의 평가들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말이다.

 

바람직한 행동을 형성시키기 위해서 부정적인 조건이 도입될 때도 있다. 학교에 지각하면 벌로 청소를 한다든가, 부모님 말씀을 안들었을 때 간식의 기회를 박탈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위의 영화에서는 주로 부정적인 조건 형성을 통해 바람직한 행동을 하는 인간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미도'의 경우 김일성의 목을 따는 인간 병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무수한 구타와 가혹 행위, 심지어 총격에 이르기 까지 극단적인 폭력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되고 있다. 군대에서 흔히 쓰는 말로 '까라면 까'라는 것이다. 어떤 순간에는 맞지 않기 위해서, 더 심한 경우에는 죽지 않기 위해서 주어진 목표를 향해 뛰는 것이다. 여기에 적응해서 목표를 달성한 사람은 잠깐의 휴식을 얻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목숨마저 내놓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위에서 원하던 목표는 이룰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더구나 결국 김일성 암살 이라는 계획이 사라짐으로 인해 그들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는 순간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과 배신감을 느끼게 되고 그 동안의 과정에서 억압되었던 설움과 분노는 죽음을 뛰어넘는 공격성과 파괴력으로 나타났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도 유사한 면을 볼 수 있다. 지각했다고 야구 방망이로 때리고, 소지품 검사에서 걸렸다고 교련 선생님의 군화발로 차고, 같은 학급의 친구임에도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폭행을 일삼는 등의 모습은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대 구호를 떠올리게 한다. 때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도하는 바가 정말로 인간으로서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모습인가는 별개로 하고 눈앞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때리면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공부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전달에 비해 몇 등이 내려갔나, 몇점이 내려갔나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손바닥을, 허벅지를, 때로는 홀라당 벗겨진 엉덩이를 선생님의 몽둥이 앞에 바쳐야했다. 이 영화의 내용이 어색하지 않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미 우리가 학창 시절에 거쳐왔던 그러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행동주의적 원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매우 익숙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성장하며 살아온 상황에서 그런 것들을 익숙하게 경험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90년대를 넘기면서 우리 사회는 과거의 군사독재를 청산하고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으로 습득한 군대 문화의 유산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남아있는 것 같다. 거기에 요새 한참 문제가 되고 있는 조폭 문화(?)까지 혼합되어서 그 사태의 심각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때로는 학교에서 때로는 직장에서 심지어 가정에서도 6-70년대식의 폭력과 위협으로 '군기'를 잡으려는 모습을 많이 본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수련회를 가면 거의 군대에서의 군사 훈련을 연상케 하는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의 군기(?)를 잡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일 개인의 생각만이 아니고 지난 세월을 거치면서 몸으로 터득한 우리 사회의 중요한 게임의 법칙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때로는 일정한 조건과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바람직한 행동을 훈련할 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 조건과 환경이 과연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적절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가에 대한 지속적인 반성과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일정한 조건 형성에 의해 움직여지는 동물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