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23장, 사라의 죽음과 장사의 신학적 의미
노승수 목사
0. 사라가 127세를 살고 가나안 땅에서 생을 마감합니다(1). 오늘 본문은 사라의 죽음과 장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유하는 여자였고 성령을 따라 났으며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낳은 어머니이며 예루살렘, 곧 교회로 비유된 여자(갈 4:22-31)였으며, 창세기 3:15에 약속된 여자의 후손이신 그리스도를 낳는 여자의 첫 모델이었던 여자, 그녀가 그 사명을 다하고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 넷의 도시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아마도 이 이름은 4개의 길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도시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사라와의 사별을 애도합니다. 이삭을 바칠 때,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 믿은(히 11:19) 아브라함은 부활의 소망 중에 사라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사라를 장사하기 위해서 헷사람들의 땅에서 매장지를 구하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은 헷사람들에게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당신들 중의 나그네요, 거류자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고 우리 원래 고향이 하늘나라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과 2장에서 베드로는 참 신자들을 권면하면서 그들을 나그네라 부릅니다. 그는 이르기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1-12)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 말씀은 마치 아브라함을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릴 정도입니다. 시험을 통해 하나님 경외함을 인정받았던 아브라함은 그의 나그네의 세월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로 보내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겠다는 약속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창 13:14-18). 그가 사라를 장사했던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받고 나서 하나님께 예배드렸던 장소이기도 합니다(13:18). 그 사통팔달의 도시(넷의 도시)는 땅의 약속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멀리 드리운 길의 끝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나그네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야할 여정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여정이라는 점도 배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받았을 때, 충분히 알지 못했으나 그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동행하면서 이 땅에 대한 약속이 단지 땅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성령에 대한 약속이며 성령을 따라 날 후손에 대한 약속이며 이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 나라에 대한 약속이라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긴 세월, // 동행의 여정을 통해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 약속을 이해했다는 사실은 그가 자신을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자처하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사라가 먼저 갔고 자신도 따라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 경외함을 깨닫는 일은 말씀과 계명을 사모하며 구하는 데서 비롯됩니다(잠 2:1-4). 말씀에 붙들렸던 아브라함은 삶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갔습니다.
이런 경외하는 아브라함의 태도에서 베드로 사도의 권면 속에 나타난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사람들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비용을 지불하는 것, //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한 인증을 받은 아브라함은 선한 행실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늘 도성의 백성으로서 이 땅을 나그네로 살았던 것입니다. 동시에 그가 매장지를 헷사람들의 손에서 돈을 주고 산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신탁과 예언적 퍼포먼스가 떠오르게 합니다. 예레미야 32:6-15을 보면, 예레미야는 포로로 잡히는 상황을 앞두고 숙부 하나멜의 아나돗 땅을 기업 무름으로서 돈 주고 사고 그 매매증서를 작성하고 그것을 인봉하여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록하던 바룩의 손에 부칩니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지만 70년 후에 이 고토로 돌아와 다시 매매하게 될 것을 예언적 포퍼먼스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돌아와 이 땅을 다시 경작하게 될 것을 비용을 지불해 백성들에게 메시지로 전한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13:14-18에서 이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5:13-16에 일방언약을 맺으시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이 400년 동안 이방의 객이 되어 압제를 당하다가 이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을 이미 들은 바 있습니다. 이 땅의 거주민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음이 1차적인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이 이렇게 땅을 은 사백 세겔을 주고 거래를 하는 것은 예레미야가 고토로 돌아올 것에 대한 약속으로 그리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 대로 그 후손을 이 땅에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에 대한 믿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 가나안 7족속의 죄가 관영치 않아 그 약속은 성취되지 않았지만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의 후손들을 돌아오게 하실 것에 대한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동시에 단지 땅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실 것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여기에 반영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살펴보았지만 갈라디아서 3:1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복은 성령의 약속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약속은 에베소서 1:13-14의 말씀대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약속의 성취가 출애굽한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옴으로 1차적으로 성취되고 동시에 언약의 씨가 성령을 따라 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이해하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하는 데서 온전히 성취됩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거류민이요 나그네로 인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를 장사함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은 매매 계약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후에 살필 것이지만 언약의 세 조상들, 곧 사라와 아브라함,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라헬이 모두 이곳에 장사됩니다. 매매 계약은 예레미야에게서도 보듯이 가나안 고토로 돌아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을 담습니다. 그것이 나그네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약속받았던 하나님 나라에 비하면 이 장사지는 조그만 동굴로 초라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는 것은 사라의 주검과 이 초라한 장사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 초라한 장사지와 주검을 보면서 패배감에 낙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사별 후 더 낙담할만한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별을 맞으면 낙담하고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프로이트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발생한 전쟁미망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로 "애도와 멜랑콜리(Trauer und Melancholie)"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여기서 그는 애도와 우울을 구분하는데요. 애도는 주로 애착대상의 상실과 관련이 있고 우울은 주로 욕구의 좌절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합니다(.239-258). 이 두 감정은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감정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신 산상수훈에 따르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이 애통은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을 대면해서 나오는 애통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이 이별하게 된 것에 대한 애통입니다. 아브라함의 애통은 그런 종류의 애통으로 하나님 나라의 동지를 잃은 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슬픔, 혹은 우울은 전혀 다른 감정입니다. 자기만족의 욕망에 대한 패배적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가나안 땅에 와서 성공하려는 그의 꿈이 좌절된 것으로 그가 느꼈다면, 그런 욕구의 좌절에서 비롯되는 감정으로 멜랑콜리(우울)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삭을 바칠 때도 그러했지만 사라를 장사하면서도 아브라함의 애도는 오랜 동지를 잃은 석별의 정이었지 자기 욕망의 좌절 때문에 겪는 우울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관련한 좋은 예를 존 밀른(John Milne, 1807–1868) 목사의 설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르기를, "왜 우리는 하나님 나라 안에 살면서 세상에 가득한 냉담함과 적의에 낙담합니까? 진실은 주님께서 다스린다는 사실인데 말이죠. 주님에게는 충직한 종들이 많고 그는 높은 곳에서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그런 영광스럽고, 강력하고, 우세하며, 영원한 나라에 속하였는데 왜 오히려 기뻐하지 못합니까? 우리는 큰소리치는 골리앗 앞의 이스라엘처럼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 겁을 먹고 서있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광스러운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위대함과 그 능력을 말하며 다윗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당신은 우리가 새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이 땅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으로 비유된 여자, 사라와 // 그의 남편 아브라함은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낯빛은 새 예루사렘에서 사는 자의 기쁨입니까? 세상에 속한 자의 패배감과 수치심입니까?
1. 사랑하는 강남성도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대면해서 어떤 태도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속한 교회의 초라함과 거기서 비롯된 "되면 되고 안 되면 마는 거지"라는 패배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지 않습니까? 밀른 목사의 말처럼 세상이란 골리앗 앞에 이스라엘처럼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 서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진정 이 하나님이 피값주고 사신 교회를 사랑함으로 당신의 마땅한 태도를 보이고 계십니까? 사실 참 신자를 분별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 욕망의 방향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향했는지 자기만족을 향했는지를 보면 적어도 자신은 분별해 알 수 있습니다. 단지 미몽 때문에 변별을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운전을 기어가듯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초보 운전자가 자신이 어떻게 운전하는지를 모르고 있지만 주변의 능숙한 운전자들은 다 아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사는 자는 자기가 어쩌는지 모르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참 신자 눈에는 다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기쁨 가운데 승리의 발걸음을 내딛는 다윗입니까? 세상이란 골리앗 앞에 두려움과 패배감에 젖은 이스라엘의 낯빛입니까? 초보 운전자처럼 세상이란 도로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나그네로서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지난주에도 살폈지만 내 동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맞춰진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이요. 세상의 성공이나 명예, 인기나 재물, 입신양명이나 자녀의 잘됨이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 모든 것이 상대화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치라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망설임 없이 하나님 경외함으로 이삭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의 가치는 이 세상이 있지 않고 그의 나라에 있음으로 그는 나그네로 삽니다. 나그네와 여행자는 많은 것을 쌓아 두고 살지 않습니다. 어떤 여행자가 여행을 하면서 에어컨, TV, 냉장고, 전자레인지, 세탁기, 자동차, 옷장과 침대를 들고 다니는 여행자가 있습니까? 그의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거추장스런 것을 지고 여행하는 자는 없습니다. 잃을 게 많은 자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행자는 쉽고 가볍게 자기 발걸음은 옮깁니다. 미련을 둘만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소돔을 뒤돌아보는 롯의 아내가 되지 마시고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하늘나라 시민으로서 이 땅의 나그네와 거류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2. 동시에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나그네는 이 땅에서 언약을 생각하면서 분명한 확신 가운데 자신의 목적에 맞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며 그 일에 온전히 헌신합니다. 예레미야가 포로로 잡혀가는 시간을 앞두고 그의 친척으로부터 아나돗 땅을 값주고 산 것처럼 그에게는 고토로 돌아오는 소망이 그가 포로로 잡혀감을 앞둔 자신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사실 70년이란 포로기간을 생각할 때, 예레미야에게는 포로 귀환의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예레미야가 땅을 산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예레미야의 이런 행동은 포로를 앞둔 사람의 행동으로는 미련한 행동입니다. 오히려 다 팔아치워야 할 때에 땅을 샀습니다.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수용소와 게토에 갇힐 때, 살아남기 위해 보석과 재물로 바꾸고 그걸 은밀하게 보관하는 것, 이것이 포로된 자의 상식적 행동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샀습니다. 그의 목적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포로로 잡혀가지만 반드시 이 고토로 돌아올 것에 대한 소망이 그를 움직이는 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강남 성도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고토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의 막벨라 굴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가치를 두며 살고 계십니까? 어쩌면 허비처럼 보이고 낭비처럼 보이는 그 일은 그가 하나님 나라에 가치를 두고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의 눈에 가장 낭비로 보이는 일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예배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마르바 던이라는 여성 신학자는 예배를 거룩한 낭비라고 불렀습니다. 예배를 온전하게 드림에 있어서 비용이나 합리성을 따지지 않고 예배에 가장 집중하고 집중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이 그렇게 맞춰야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을 때(마 26:7, 요 12:3), 가룟 유다와 몇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을 들어 마리아의 이 행동을 비난합니다(마 26:8-9, 요 12:4-6).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이런 낭비적 행동을 칭찬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재물도 이 거룩한 낭비에 우선적으로 맞춰져야 합니다. 그녀의 목적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헌신으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마 26:11-13, 요 12:7-9). 그리스도의 장사됨은 예배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사됨을 따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롬 12:1-2).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눅 10:38-42). 인간적 관점으로는 당연히 70명의 제자들을 위해 주방에서 봉사하는 마르다를 돕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은 주님께 말씀을 듣는 일에 더 초점을 두시고 그것을 그녀가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영혼의 생명과 같습니다. 예배와 말씀을 듣는 일은 우리가 아무리 바쁘다고 음식을 먹는 일을 뒤로 하고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와 그 의에 초점이 맞춰진 사람은 예배와 말씀을 위해 마음과 재물을 거룩하게 낭비를 하며 자신의 인생을 드리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둡니다. 여러분의 최우선 순위의 일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설명해주는 좌표입니다. 백 마디 말이 의미가 없습니다. 말과 혀로 하는 사랑은 사탕발림에 불과합니다. 독자 이삭이라도 아끼지 아니함으로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3. 나그네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거룩한 낭비를 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삽니다. 바리새인들은 부모님께 드릴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린바 되었다고 하면 부모를 섬길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기 이득과 자기만족을 취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막 7:10-13). 그러나 아브라함은 마땅한 가격보다 훨씬 비싼 가격, 곧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습니다(23:15-16). 매매와 관련하여서 어떤 가격의 흥정도 하지 않고 깍지도 않습니다. 달라는 대로 다 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선한 행실로 이웃을 대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이웃을 함부로 대해도 좋다는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허물을 알고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요구를 알고 헌신하는 일, 모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허물을 보지 않는다고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그 고통을 견뎌내는 것이 실력이며 사랑입니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는 것이지 내가 대접받고 싶은 것을 그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1장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규정은 흔히 동해복수법으로 이해됩니다만 문맥을 잘 보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하는 규정이 아니라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하는 규정입니다. 즉, 동해복수법이 아니라 동해동질배상법인 셈이다. 이웃의 피해에 대해 정당하게 배상하는 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 규정을 말씀하시면서 오른 뺨은 치면 왼 뺨을 돌려 대라 하신 것입니다. 이 규정의 오남용을 방지하며 피해자 역시 사랑으로 대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5:38-42, 출 21:23-25). 21장을 보면 손해에 대해서는 4-5배를 갚도록 되어 있습니다. 회개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던 삭개오도 자신이 소유의 절반을 나눠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갑절이나 갚겠다고 했습니다(눅 19:8). 이것은 누가 누구에게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이 사랑의 대상은 아름답고 흠모할만한 대상이 아니라 허물이 있는 이웃입니다. 자신은 1만 달란트나 주인에게 탕감을 받았으면서 정작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견디지 못하고 옥에 가둔 동관은 주께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땅을 나그네로 사는 사람은 자신이 탕감 받은 것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4. 그러나 이런 신자의 삶을 쉽게 성취되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훈련으로 세워집니다. 그것이 우리가 나그네로 사는 이유입니다.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한 몫에 가나안 땅을 주시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읽어보면, "그러나 그 땅이 황폐하게 됨으로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출 24:29-30)" 이는 신자의 성화가 더디고 점진적인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주심입니다. 우리가 다치지 않도록 하심입니다. 가끔 로또 당첨자의 삶이 망가지는 기사를 볼 수 있는데, 갑작스럽게 늘어난 재물은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물이 넉넉해질 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이기도 합니다. 조그만 어려움에도 인내하지 않게 될 옵션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 아니면 일이 없느냐며 쉽게 내팽개치고 다른 선택으로 옮아가고 잘 준비해서 뭘 진행하지 않고 돈이 있으니 욕심대로 하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부패한 본성이 이리처럼 삼킬 대상을 여러분의 삶에서 노리고 있습니다. 본질상 은혜도 같은 성질이 있습니다. 은혜가 넘치면 곧잘 그것이 나 때문인 줄 알며 거기에 잠재된 부패성을 망각하고 전에 긴장 중에 다스려지던 부패성은 고삐가 풀립니다. 은혜가 우리 부패를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그럼 더 간절히 주의 은혜를 의지해야 할 텐데, 권력을 얻은 줄로 생각합니다. 권력을 행사할 때, 뇌신경 중 거울 신경이 망가지며 갑질과 망나니 같은 행실이 튀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일은 한몫에 되지 않으며 한 번의 은혜로 되지 않으며 단기간의 훈련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래토록 지속적 은혜 아래 지배와 여전히 죄의 세력을 남겨두심으로 오히려 이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예전에 런던 어시장에 청어를 공판하는데 유독 한 어부의 고기만 싱싱했다고 합니다. 그의 비법은 잡은 청어와 함께 천적이 되는 물고기를 넣어두는 것이었습니다. 청어들만 갇혀있으면 금새 다 죽고 말 일이 천적으로 인해 도망 다니다가 템즈강까지 생존해서 도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어부의 고기만 싱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가시, 혹은 부패의 세력을 여전히 남겨 두시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다른 의미로 은혜처럼 보이는 형통의 순간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버려둠일수도 있습니다(롬1:24-28). 부패의 본질이 드러나는 상황은 권력과 득의함에서 시작됩니다. 요즘 세간에 뉴스가 되는 #Me Too에서 보듯이 이 범죄는 한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제2, 제3의 경우가 등장합니다. 돈과 권력이 주어지면 득의한 줄 알고 제멋대로 살고 그럴 때, 우리 안의 죄와 부패가 고개를 듭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징계하시면 사생자가 아니라 아들이며(히 12:7-8), 내버려두심은 그가 유기자라는 의미입니다(롬1:24-28). 또 징계를 당하여 참 신자는 회개를 하며(행 2:37-38), 유기자는 슬피 울며 이를 갑니다(마 22:13).
사랑하는 강남 성도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 마음에 부패한 본성이 독사처럼 고개를 빳빳이 처들 때가 영적 위기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형통한 듯하고 뜻대로 된 거 같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오히려 부패를 남겨두시고 천천히 제거해가심이 우리가 황폐해지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세심하신 자비라는 사실을 믿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단거리 경주가 아닙니다. 마라톤과 같습니다. 몇몇 사실을 지식으로 알았다고 여러분의 신앙이 온전해졌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착각에 대해서 성경은 헤롯의 삶을 통해서 설명합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막 6:20). 말씀을 듣는다는 사실이 우리 믿음을 온전케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윗 같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도 방심함으로 넘어졌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삼하 11:2-5). 그래서 온전한 안식에 들어가기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사는 삶이 바로 나그네의 삶입니다. 우리의 나그네의 세월이 이렇게 긴 이유이기도 합니다.
5.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늘 시민이자 이 땅의 나그네인 우리는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며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하늘 소망이 있으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의 분명한 목적을 위해 우리 마음과 재물을 거룩하게 낭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낭비를 빙자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이 일에서 죽음과 같은 낙심을 만날 때, 곧 우리의 자람이 더디다고 느껴질 때, 낙심치 않고 우리 안에 있는 부패와 싸우며 마침내 승리에 이르기까지 기도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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