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24장, 이삭의 아내, 리브가
노승수 목사
0. 본문 1절은 아브라함이 범사에 복을 받았다라고 하며 시작합니다. 이 복은 우리가 지난주에도 살폈듯이 갈라디아서 3:14의 아브라함의 복이며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 범사에 복을 받았다는 사실이 잘 살게 되었다. 부자가 되었다. 하는 일마다 잘 되었다고 읽으면 오독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이 없지는 않으나 구약 성경이 복을 말할 때는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는 말씀을 근본으로 합니다. 따라서 복은 당연 구원을 근본으로 합니다. 24장의 이삭의 아내를 얻는 장면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1.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얻기 위해서 종에게 자기 허벅지 밑에 손을 넣고 맹세하게 합니다. 허벅지 밑에 손을 넣는다는 의미는 아브라함의 씨를 두고 맹세하게 한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허벅지라는 표현은 생식기를 애둘러 한 표현입니다. '생명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생식기를 만지면서 맹세하는 것은 의무를 특별하게 강화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이미 12장과 15장에서 살핀대로 하나님께서 약속한 씨를 두고 맹세한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요구는 이방 여자 중에서 이삭의 아내를 구하지 말고 그렇다고 하란으로 되돌아가지도 말고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이 땅에서 얻을 후손을 위해, 이삭의 아내를 구하라는 요구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회고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회고하면서 그 땅으로 돌아가지도 말고 이 땅의 여인을 아내로 취하지도 말 것을 부탁합니다. 잘 아시는대로 성경의 권면은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고후 6:14, 참조: 출34:15-16; 신7:2-4; 수23:12-13). 솔로몬이 우상숭배자로 타락하게 된 것은 그가 이방 여인을 부인으로 많이 둔 탓입니다(왕상 11:1-10). 성벽을 재건을 통해 공동체를 재건했던 느헤미야도 이스라엘의 이 죄를 엄히 묻고 성전에 수종드는 자들을 정결케 했습니다(느 13:23-31). 우리가 지난주에도 살폈듯이, 사라는 예루살렘, 곧 교회로 비유되었습니다(갈 4:26). 칼빈도 바울의 이 표현을 따라 교회를 어머니로 묘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의 품속으로 자녀들을 모으시기를 즐거워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유아와 어린아이 시절 동안만 교회의 도움과 봉사로 양육 받을 뿐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 어른이 되고 드디어는 믿음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Inst., IV.1.1)."라고 말하고 더 나아가, "우리를 태속에 품고 낳고 그의 가슴 속에서 우리를 기르고 마침내 우리가 가사적인 육체를 벗고 천사들처럼 될 때까지(마 22:30) 그의 지킴과 지도 아래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생명으로 들어갈 다른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리브가 역시 성령을 따라 난 자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은유로 보아야 합니다. 다른 곳이 아니라 말씀과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는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우리 믿음에 대한 교훈을 받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2. 또한 리브가가 언약의 신부로서 청함을 받는 과정을 섭리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 곧 행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동시에 언약적 관계가 어떤 것인지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그 인도하심의 첫 증표는 신부될 자의 '자발성'이었습니다. 자기에게 물을 떠 줄 뿐 아니라 요구하지 않은 낙타를 먹이는 것이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님께서 제자를 선택하실 때, 선택의 기준 중 하나가 이 자발성이었습니다. 리브가는 종으로부터 요구받지 않은 낙타를 먹이는 일까지 종의 입장에서 생각해서 수고합니다. 사랑이란 자발적인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주를 기다림으로 기름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마 25:1-13). 열 처녀의 운명을 가른 것은 바로 자발성이었습니다. 다섯은 준비되지 못했고 다섯은 준비되었습니다. 그들의 차이점은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교회가 가진 헌신의 자발성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신들이 가난한 중에도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긍휼과 섬김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함으로 섬겼습니다(고후 8:3-4). 연보의 원리가 인색함이나 억지로가 아니라 하여서 즐겨냄이 없는 자를 주께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고후 9:7). 교회를 향해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이라도 아끼지 아니하심 같은 사랑이 요구되는 것입니다(롬 8:32).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이요 아브라함은 이 믿음의 시험을 통과한 신자였습니다. 동일하게 리브가에게서도 이런 영적 자발성을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 신부의 증표는 즉각성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름에 그물을 버려두고 즉각 주를 따랐습니다(마 4:20, 22, 막 1:18, 20 등). 주님의 부름에 '곧' 따랐습니다. 제자로 부적합했던 자들은 여러 핑계가 있었습니다. 부모를 장사해야 하는 일(마 8:20-21), 재산이 많음으로 근심하여 가는 일(마 19:21-22) 등이 있었습니다. 리브가의 가족은 충분한 이별의 말미를 요구합니다(창 24:55). 그러나 종의 요구는 단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형통한 길을 주셨고 그러므로 즉시 돌아갈 것을 가족에게 요구했습니다. 사실 지난주에도 보았듯이 마르다가 예수님께 마리아가 자신을 돕지 않는 것을 하소연할 때처럼 가족들의 이런 요구는 인지상정입니다. 어제까지 같이 지내던 딸과 여동생을 내일부터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이별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고 어쩌면 인간적으로 당연한 요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의 마음도 리브가의 마음도 이 일을 계획하시고 경륜하시는 하나님께 맞춰져 있었습니다. 리브가의 대답은 "가겠나이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신 선하신 증거 앞에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가 취해야 할 사랑의 자세이며 신앙의 자태입니다. 바울은 제자될 사람들의 충성스러움을 3개의 직업을 들어서 설명합니다(딤후 2:1-6). 첫째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병사, 둘째 경기에 참여하는 운동선수로 규칙대로 함을 셋째, 농부로 그들의 수고함을 들어 이러한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일을 맡기라고 당부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교회의 구성원은 모두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이며 이들이 요구받는 충성스러움은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로버트 콜만의 주님의 전도 계획이라는 책을 보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세 가지 특징을 고려하셨다고 합니다. "가르치기는 좋은 사람들, 자기의 부족을 고백하는 정직한 사람들, 복음을 수용하는 마음이 넓은 사람들"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성별이었는데, "순종을 요구하셨고눅16:13), 제자는 비용을 계산을 요구하셨으며(요6:67), 그 순종은 배우는 것이다(요8:31)"이라고 주님의 전도 방법을 정리합니다.
그렇게 먼길을 돌아온 종과 리브가는 들에 나와 묵상하던 이삭을 만납니다(창 24:63). 묵상은 계시를 두고 하는 것이며 여기서 이삭은 계시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종은 그간 있었던 신부인 리브가의 순전함과 충성그러웠던 일을 이삭에게 고합니다(창 24:66). 그렇게 그의 신부는 신랑에게 인도됩니다. 여기서 신부인 리브가는 앞서 설교의 모두에 설명드린 것처럼 교회로 묘사된 사라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은유됩니다. 그의 여정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형통한 여정이었습니다(21, 40, 42, 56). 사랑하는 강남성도교회 성도 여러분 지난 3년 여 여러분의 강남성도교회와의 인연과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여 오셨는지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참 신자는 아브라함의 종과 리브가처럼 그 길의 여정이 어려웠을지라도 형통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을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 사상도 하나님의 형통하게 하시는 인도하심입니다(21, 40, 42, 56). 앞서 설명드린 것이 충성스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리브가의 모습이었다면 지금 설명드릴 것은 우리가 반면 교사로 삼아야 할 완악함입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후에 교회에 섞여 들어온 수많은 잡족들(출 12:38) 때문에 패역하고 목이 곧은 범죄에 빠지고 맙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셨고 순적하게 인도하셨음에도 악한 말로 원망하며(민 11:1), 참외와 오이, 생선과 부추와 마늘이 없다며 불평과 원망을 일삼습니다(민 11:5). 악한 말로 원망함에 하나님이 진 끝에 불이 붙어 사르게 하시고 그들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시고 그 고기가 잇사이에서 씹히기 전에 그들에게 진노하셔서 욕심을 낸 백성을 죽이십니다(민 11:34).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뱀에게 물려 죽고 음행하다가 하루에 2만3천명이 죽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오늘 우리를 위해서 기록했다고 말합니다(고전 10:6-12).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살았던 것처럼 우리는 인생이라는 광야를 삽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있고 우리 삶을 곤고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 3년의 삶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삶을 어떻게 인도해 오셨습니까?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에 충분히 감사하고 계십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하신 그 많은 자비를 마치 내가 한 것처럼 여기고 교만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살아온 지난 날들에 비해 지난 3년의 기간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의 시간이었는지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욥의 형통함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하루 아침에 다 없어지는 이슬 같았습니다. 선 줄로 생각합니까? 넘어질까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고전 10:12). 리브가의 입장에서 종의 요구는 수고롭고 번잡한 일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 여겼다면 아마도 이스라엘이 광야에게서 당했던 일을 자신의 삶에서 결과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리브가가는 자발적이며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교회의 마땅한 태도와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는 묵상하는 신랑 이삭을 만납니다. 그는 성령을 따라 난 자며 참 아브라함의 상속자였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이 묵상하던 이삭이 리브라가를 만나는 장면을 소개한다는 점에 여러분은 주목하셔야 합니다. 이는 말씀에 터 위에 선 것이 은유이며 그리스도의 은유입니다. 그런 그가 리브가를 아내로 삼고 사랑합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사랑합니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며 아내는 그리스도께 하듯 말씀을 따라 인도하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엡 5:24-25). 바울의 권면에서 아내에게 먼저 순종을 요구합니다. 오늘 본문도 리브가가 먼저 너울로 얼굴을 가립니다. 이는 순종의 표요, 권위 아래 있다는 표입니다. 이런 그녀의 태도에 대해 남편인 이삭은 사랑함으로 응답합니다.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우리가 소망해야 할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대리인인 종과 리브가의 관계는 일종의 언약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종이 청합니다.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24:17),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에 대해 리브가는 자발적이며 즉각적으로 순종하며 반응합니다(24:19, 58). 이는 교회인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마땅하게 취해야 할 태도와 자세를 보여줍니다. 이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종은 여호와께서 평탄한 길을 주심을 확인하고 리브가에게 선물을 합니다(24:22). 언약의 양식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본문을 출애굽기 19:5-6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여기서 소유는 다르게 보물로도 번역됩니다. 고대 종주-봉신의 언약에서 봉신이 왕에게 충성을 언약할 때, 왕이 선물을 내리면서 너는 내 보물이라고 말한 데서 기원합니다. 이런 고대의 언약적 관계에 세례를 베풀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리브가와 그 주인인 이삭의 관계는 이런 관계를 보여줍니다. 대리인인 종이 그에게 먼저 청하고 리브가는 여기에 응답하며 그 주인 될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습니다. 오늘 설교의 서두에 인용한 칼빈의 교회에 정의에서 "믿음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Inst., IV.1.1)."는 말씀처럼 이 언약 관계는 마침내 우리 믿음의 목적지인 구원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남성도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미래의 구원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주어진 언약 관계 안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자발성과 즉각성을 주님께 보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땅에서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까? 천국과 영생과 구원입니까? 여러분의 목적지가 어디이신지를 바라보면서 오늘 내 삶의 방향을 설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총렬의 사소한 오차가 표적지에서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부릅니다. 소망은 여러분의 삶을 목적에 맞게 정조준하는 것입니다. 내 삶은 내 소망에 맞게 정조준되어 있습니까? 나는 언약 안에서 주님께서 내게 주신 십계명의 말씀을 따라 정조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대강 지키다 말다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언약에 대한 소망이 여러분의 목적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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