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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창세기강해

창세기 22장 강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는 아브라함

창세기 22장 강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는 아브라함.


노승수 목

 

드디어 아브라함 이야기의 마지막 대목에 도착했습니다. 11:27에서 시작된 데라 톨레도트, 아브라함 이야기의 끝입니다. 12장에 부르심과 약속을 받아 가나안 땅에 당도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아내를 누이라 말하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씨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많은 재물을 이끌고 나옵니다. 이는 출애굽이 씨의 위기, 재물을 이끌고 나옴. 나온 후에 분쟁의 이야기로 이뤄진 것처럼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런 전형으로 애굽 사건이 기록됩니다. 13장에서 가나안에 나오자마자 조카 롯과 분쟁을 재산으로 인해 분쟁을 겪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후사로 생각하면서 그에게 양보를 합니다. 롯은 애굽에서 생명의 위기와 그에 따른 트라우마가 컸던 거 같고 예민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도시들이 있는 소돔 들을 택하고 악한 백성들이 거하는 소돔에 들어가 거주합니다. 그리고 14장에서 소돔 땅에 9개 임금들이 전쟁을 벌이고 이 전쟁의 포로가 된 롯을 아브람이 318명의 집에서 기른 사람을 데리고 구출에 나섭니다. 13장의 양보가 언약에 대한 불성실이라 해석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14장에서 롯을 구출하기 위한 아브람의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롯의 선택 후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땅에 대한 약속을 하십니다(13:14-15). 애굽 왕과의 불필요한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내를 누이라 말하면서 화평을 구하였으나 씨가 없는 중에 가장 근족이며 자신의 후계자인 롯이 사로잡히자 놀라운 용기를 발휘하여 그를 구출합니다. 그를 구출하여 나오다가 멜기세덱을 만나는데 멜기세덱은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이 멜기세덱의 계시는 아브람과 다윗에게 같이 주어지며 특히 다윗에게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계시로 분명하게 설명됩니다(110 참조). 아브람은 씨에 관한 어떤 계시를 멜기세덱을 만나며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15장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려워말라고 하시며 나타난 것입니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면 애초 나서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현현 앞에 아브람의 질문은 전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씨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라는 약속을 듣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16-18에서 이 씨가 단수인 것을 들어서 그리스도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아브람은 이 계시를 듣고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습니다(15:6). 16장에서는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출생하는데 16장의 목적은 혈통을 따라 나는 것이 아브람의 자손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장에서 할례언약이 주어지면서 15장에 일방언약과 달리 쌍무적 성격의 언약이 맺어집니다. 그리고 이 할례언약은 바로 중생에 관한 표로 구약에서 계속 설명됩니다(10:16, 30:6, 4:4, 9:26, 44:7-9, 7:51, 2:29 ). 중생자에게 율법의 제3용도를 따라 거룩한 의무가 주어지는 것에 대한 가장 단편적인 설명도 이 대목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할례언약 후에 후사가 이스마엘이 아니라 약속으로 나게 될 이삭을 통해서 주어지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17:21).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항상 심판과 구원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주어집니다. 가장 대표적인 출애굽 모티프에서 홍해는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사건이나 바로에게는 홍해에서 수몰되는 심판의 사건이며 노아 홍수는 노아의 가족에게는 세례의 사건이나 그외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물이었던 것처럼 씨의 언약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이어서 18장에서 소돔땅에 대한 심판을 그립니다. 17장이 구원의 사건이라면 18장은 심판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중보는 그리스도의 중보의 예표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오래참으심과 인자하심과 세밀하게 살피심 중에 일어나는 일인지를 롯을 향한 중보를 통해서 드러내보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19장에서는 롯을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구출하십니다. 그러나 롯의 열매는 그리 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14장의 사건을 겪고도 그 성에 거했으며 13:13에서 설명하듯이 그 땅의 거임은 악인들이었습니다. 롯은 의로웠으나 그의 심령은 상하고 피폐해졌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그에게 더하셨습니다(19:16). 그럼에도 그의 아내는 소돔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성을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기보다 산으로 피하라는 명령을 듣고도 소알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이도 그에게 들어주십니다. 소알에 이르러서는 두려움에 휩싸여 결국 다시 산으로 갑니다. 산에서는 그의 두 딸은 근친상간을 통해서 후손을 얻습니다. 그게 모압과 암몬이며 이 민족은 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할 때, 길을 내어주지 않음으로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롯의 열매로 보면, 롯은 구원과 거리가 멉니다. 그의 삶은 인간적으로는 의로웠으나 믿음이 없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악인들과 동거하기를 선택하고 많은 경고에서 아브라함의 그늘에 피하기보다 악인들의 틈바구니에서 가정이 파탄이 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도 자비로우며 선하시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20장에서 아비멜렉 사건을 통해서 씨의 위기를 다시 겪습니다. 첫 번째 위기(12)는 부르심 중에 위기라면 두 번째 위기(20)는 중생 후의 위기입니다(15:6_칭의, 17_성화). 그리고 이삭이 출생합니다. 지난주에 살핀 대로 이삭은 성령을 따라 났고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것이 우의라 할 수 있습니다. 생리가 끊어진 여인에게서 약속을 따라 난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누구인가를 보이신 것입니다. 이는 혈통으로 되는 약속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되는 약속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 사건 후에 아비멜렉이 와서 화친을 청합니다. 그리고 브엘세바의 언약이 맺어집니다. 쉐브아는 지난주 말씀드린 대로 일곱을 세바는 우물을 의미하며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을 따로 구분한 것은 이 우물이 7개였음을 암시합니다. 신약에서 우물과 거기 생수는 특히, 요한복음에서 성령으로 비유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씨인 이삭을 얻고 나서 화친의 약속과 함께 우물을 되찾는 것은 단지 사건의 무작위적 배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표를 보여주시는 것이라는 점을 지난주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2장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제가 이렇게 아브라함의 전생애를 길게 다시 요약해 말씀드리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22:1). 그 시험의 내용은 모리아 산으로 가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리아 산은 후에 다윗이 계시를 받은 타작마당(심판)이며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산입니다(대하 3:1). 하나님은 아브람을 12장에서 부르셨고 17장에서 완전하라하셨습니다. 그리고 22장에 들어서 그를 시험하십니다. 그 시험의 내용은 그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22:12). 그리고 그 경외함은 독자라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의 교육이나 유학, 결혼을 위해서 여러분의 제물을 아끼지 않으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서 그와 같은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믿는 것과 아는 것에서 하나되는 자리에 대한 시험입니다(4:13). 여러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 이런 요구를 하나님께 받았다면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자리에 섰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 주시지 않으시며 당할 즈음 힘을 주시고 피할 길을 주십니다(고전 10:13). 어떤 사람도 자신이 사랑하는 이상으로 헌신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헌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간에 하나님을 경험하여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의 결과이죠. 이에 반대의 증례가 롯입니다.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을 살았으나 롯은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 지 못하고 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이런 예를 하나 들어보죠. 이제 막 호감을 갖기 시작한 썸을 타는 남녀가 있습니다.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갖기 시작했죠. 그러나 사랑이라기엔 단지 호감에 불과하고 남이라기엔 궁금하고 알고 싶은 그런 관계입니다. 그런데 남자에겐 아버지가 큰 빛을 남기고 돌아가시고 병중에 투병 중인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돌봐야 할 동생도 넷이나 되었습니다. 빚과 병원비에 허덕이고 밤낮없이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동생들을 돌보기도 해야 했죠. 그런데 이 남자는 자신의 그런 형편을 여자에게 감추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다 이야기 하죠.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떤 여자도 이 남자를 충분히 사랑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 남자와 함께하기로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떠나보낸 여자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이 남자는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서로를 충분히 알기도 전에 자기 사정을 다 말해버린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인 사랑은 모든 것을 공유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런 관계로 자라기까지는 많은 경험을 공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믿음의 여정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을 경외함을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의 목회자 본회퍼가 그의 책에서 고대의 교회론을 소개하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성에 공주가 있는데 그 성의 공주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만 성문이 열려서 성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재물과 명예와 수많은 것들을 들고 와서 자기의 무용담과 재력과 용기를 과시하며 공주에게 사랑을 고백했으나 그 성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젊은 왕자가 그 성에 다다라 여러 고백을 했으나 성문은 여전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동안 왕자를 떠나지 않고 거기 머물렀습니다. 공주와 수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른 어느 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당신입니다" 그 때 성문이 열렸습니다. 이는 고대의 교회론을 보여주는 한 대목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보여주는 은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헌신을 묻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헌신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저 마음을 그렇게 내었을 뿐입니다. 그의 아들 이삭을 잡는 시늉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뿐인 독생자 성자 예수를 우리를 사랑함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다라야 할 곳은 이 연합의 지경입니다.

 

사랑하는 강남성도교회 성도 여러분,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럼 이 교회가 자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회를 각자의 형편에서 사랑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썸을 타는 사람에게 니 인생을 바치라고 하면 교회가 뭉쳐지겠습니까?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교회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교회에 대해 좋은 소문을 내고 교회와 좋은 추억과 감정을 쌓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란 것처럼 우리도 자라야 하는 것이죠. 그 자람에는 상처도 아픔도 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한 번도 하나님과 척을 진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지 딴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롯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 결과 영적 파산에 이르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심에 미쳐 그를 향한 온전한 헌신과 경외를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러 그가 받은 권세는 네 씨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는 것이며 그 씨가 크게 번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문은 고대에 재판이 이뤄지는 곳입니다. 그 문을 차지한다는 것은 통치권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씨는 곧 그리스도와 그 후손들이죠. 여러분은 지경은 대적의 성문을 취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하실 때, 밭에 감춘 보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13:44). 소작하던 농부는 보화를 발견하고 자기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왜 모든 소유를 팔았습니까? 밭에 보화의 가치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이 헌신은 아브라함은 이 보화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앞서 들었던 남녀의 예로 돌아가 봅시다. 썸을 타던 남녀가 서로에게 헌신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의 주변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대 교회론도 이를 설명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사랑을 고백했으나 정작 공주를 몰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강남성도교회 여러분, 여러분이 처한 교회의 외적 현실과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초라하기 그지없고 성도는 줄어들고 재정적 부담은 늘어나고 그걸 보면서 사랑할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송파에서 사역할 때, 원로 목사님께서 아침 예배 때 해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송파 지역에 유학하고 오신 목사님이 교회를 이루어 잘 성장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딴 교회 안수 집사가 교회에 등록해 와서 교회 재정 공개를 요구하더랍니다. 그래서 고민하면서 원로목사님을 찾아온 것이죠. 그때 목사님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조언을 하셨답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요구에 교회를 사랑해서 저러나보다 싶어 교회 앞에 공개를 하셨답니다. 빚이 많았던 것이죠. 80여명이 넘게 출석하던 교인이 그 다음주에 40명으로 줄고 물론 그걸 요구하던 안수 집사는 교회에 나오지 않고요. 몇 달이 지나 결국 교회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보다 외적 형편에 더 눈이 간 것입니다. 마치 롯처럼 말이죠. 소돔 들이 더 아름다워 보이던 눈은 결국 망하는 눈입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이 바라보셔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독생 성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랑에 믿음으로 선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네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게 내어 놓으라는 요구에도 순종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돈을 쓰는 곳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집에 가서 여러분의 가계부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재산보다 내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가 대적의 문을 취할 것이며 그들이 번성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은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을 매우 무미건조하게 그립니다. 그는 전혀 망설임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들 이삭의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하는 질문(22:7)에 흔들릴 법도 한대,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자신을 위해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기도 하며 동시에 계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섭리하셔서 그와 같은 계시적 대답을 하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을 아브라함의 믿음의 정수로 설명하면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다고 말합니다(11:17-19). 아브라함은 자기 모든 것과 같은 말년에 얻은 아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으로 주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시험을 믿음으로 통과하였습니다. 잘 되는 교회와 망하는 교회는 아브라함처럼 태도를 취하느냐 롯처럼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즉 신앙의 내용으로서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아니면 환경을 바라보느냐에 의해 달라집니다. 비유로 설명하자면 남자를 사랑하느냐 그가 가진 조건에 매몰되느냐 하는 것에 의해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남녀는 우리가 고교 시절 배웠던 왕후의 상, 걸인의 찬이라는 수필처럼 가난한 형편에서도 상대를 바라보고 사랑하면 환경을 이기지만 사랑이 없으면 조건을 바라보게 되고 결국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39일에 리디머 교회에서 은퇴한 팀 켈러 목사가 자신의 페이스 북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악몽은 거절이다. 힘에 중독된 사람은 굴욕을 당할 때 견딜 수 없다. 안정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안정이 깨지는 고난에 견딜 수 없다. 뭐든지 자신이 통제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불확실한 상황이 그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 된다." 한 사람의 중심에 있는 인생의 동력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은 모두 우상숭배입니다. 그리고 이 우상숭배의 근원이 아킬레스건입니다. 이것만 건드리면 픽픽 쓰러집니다. 하나님 외에 자신의 삶에 어떤 동력이나 동기도 남기지 않고 이것을 청산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동기와 동력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성경은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딤전 6:10). 자식입니까? 여러분이 자식에 목을 멘다면 몰록에게 자기 자식을 바치던 우상숭배자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명예입니까? 쾌락입니까? 사람들의 인정입니까? 그 무엇이 되었든지 이제 청산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사랑하는 강남성도교회 성도여러분 그러나 동시에 여러분의 위치에 맞게 사랑하십시오. 아직 주님과 썸을 타는 중이십니까? 롯처럼 조건을 보지 마시고 주님께 더 관심을 두시기 바랍니다. 혹 이제 밀월에 관계에 들어오셨습니까? 교회를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대해 사랑하며 좋은 소문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헌신하는 지경에 이르셨습니까? 여러분의 전 생애를 진력을 다해 교회를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여러분의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시고 그리스도만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큼이면 충분합니다. 그게 썸을 타는 중이든 밀월의 관계이든 여러분이 드릴 수 있는 삶의 전 영역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 오후에도 배웠듯이 어떤 가정도 아버지에게 좀 문제가 있다고 그 자녀들이 세상에 그걸 떠들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본능적으로 그게 사랑이 아니며 그게 나와 가족을 욕되게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대해서는 너무도 쉽게 그러는 무리들이 있죠. 그것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교회를 욕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 희망이 없습니다. 계속 영혼이 피폐해져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가 있어도 그렇겠거늘 바른 말씀과 성례가 시행되고 있다면 여러분이 교회를 향해서 가져야 할 태도는 어떠해야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피 값을 주고 사신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인 경외가 여러분의 경건이요. 영적 유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간곡한 부탁이요 권면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