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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창세기강해

창세기 25장 강해, 아브라함의 죽음과 이삭의 후예

창세기 25장 강해, 아브라함의 죽음과 이삭의 후예

 

노승수 목사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죽음과 그 후손에 대해서 적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이삭과 이스마엘뿐만 아니라 사라 사망 후에 얻은 후처 그두라로부터 얻은 후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순서는 역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후손들(1-11), 이스마엘의 후손들(12-18), 이삭의 후손들(19-34)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순서가 역순인 이유는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이 계대를 이어감에 있어서 여러 곁가지들을 먼저 설명하고 그 계대를 이어가는 구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시작하면서 "엘레 톨레도트"의 구조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창세기 24,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의 일은 이러하였다.” 창세기 51, “아담의 역사는 이러하다.” 창세기 69,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창세기 101, “다음은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이다.” 창세기 11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다.” 창세기 11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다.” 창세기 2512, “사라의 여종인 이집트 사람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다.” 창세기 2519, “다음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이다.” 창세기 361,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창세기 369, “세일 산간지방에 사는 에돔 사람의 조상, 에서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창세기 372, “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로 그 족보 중 다음 계대의 그리스도가 오실 계대로 이어지는 특징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에는 앞서 언급한 대로 2개의 "엘레 톨레도트"가 등장합니다. 12절과 19절입니다. 12절의 이스마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 앞의 여러 자손들은 아예 이 톨레도트에 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가 낳은 쌍둥이 에서와 야곱 이야기로 이어지는 구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누가 아브라함의 후손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해줍니다. 앞선 본문의 구조에서 보듯이 여러 아들들이 있지만 이 계보는 이삭의 아들들로 이어집니다. 앞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 곧 이스마엘과 이삭 이야기에 대해서 바울이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로, 이삭을 성령을 따라 난 자로 설명하면서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하는 상황에 관한 적용을 당시 유대인과 믿음있는 이방인의 관계에서 비교한 것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4:29). 바울의 권면은 육체를 따라 난 자처럼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는 자리에 서지 말라는 권면이며 성령을 따라 날 것에 대한 권면입니다. 오늘 본문도 같은 맥락을 보입니다. 이번에는 어머니도 다르지도 않습니다. 같은 어머니의 상태로 태어난 쌍둥이 간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이삭은 40세에 장가를 들어(20) 60세에 쌍둥이를 얻었습니다(26). 이삭의 기도로 리브가가 임신합니다(21). 그런데 쌍둥이가 태중에서 싸우고 이 때문에 리브가 하나님께 여쭈어 신탁을 받습니다(22-23). 이 신탁은 바울에 의해서 작정과 관련하여서 설명됩니다. 로마서 본문 9:10-13절을 인용해보면, 이렇습니다.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일이 하나님의 택정하심으로 말미암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 육체를 따라 나고 성령을 따라는 나는 것이 단지 어떤 어머니로부터 출생하고 양육되었는가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서 되는 일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지난주 살핀 어떤 어머니 곧 교회를 따라 양육되느냐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작정에 의해서 되는 일이라는 점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은 언약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지난주 오후에 배웠던 소요리문답 20문을 보면 그 답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선하신 뜻his mere good pleasure대로, 어떤 자들을 영생하도록 영원부터from all eternity 선택하셨고, 은혜 언약을 세우사 구속자Redeemer로 말미암아 그들을 죄와 비참한 상태에서 건져내어 구원의 상태estate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언약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드러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4항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은혜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testament과 연관되어 성경에 되풀이하여 나타나고 있다. 거기에는 언약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영원한 상속inheritance, 그리고 그 상속된 유업과 그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작정의 시행의 방편으로 언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즘 설명하면 신앙적으로 예민한 분은 눈치를 채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야곱과 에서의 팥(렌틸콩)죽과 장자권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우리가 작정이라고 하면 모든 게 하나님 손에 의해서 일어나니 그 책임이 하나님께 전가된다고 자주 생각하는 부패한 경향성이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로마서 본문의 다음절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9:14)"입니다자신의 불신을 하나님의 불의로 전가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고전 여씨춘추(呂氏春秋) 도끼를 잃어버린 한 나무꾼의 이야기가  거우(去尤) 편 에는 나옵니다어느 날 도끼를 잃어버린 나무꾼은 이웃집의 꼬마아이가 자기 도끼를 훔쳐 갔을 거라는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기 집 앞을 지나갈 때만 살금살금 걷는 아이의 걸음걸이가 꼭 도끼를 훔친 사람 같고, 자기를 볼 때만 흐려지는 낯빛 또한 틀림없는 도둑의 모양새였습니다. 아이가 하는 이야기도 도끼를 훔친 사실을 감추기 위해 둘러대는 것으로만 들리는 게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행동이 아이가 도끼를 훔쳐 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그러던 어느 날 숲에서 나무꾼은 자신이 예전에 잃어버렸던 도끼를 찾고 자신이 이웃집 아이를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도끼를 잃어버리기 이전처럼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저 천진한 귀여운 아이 같았다는 이야기입니다(김환기, "부정적인 사람들의 8가지 패턴", 정신의학신문 재인용). 이처럼 부패한 사람의 마음은 자기 잘못을 타인에게 더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여 저버린 언약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죄를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담대하게 이 하나님의 작정이 하나님의 불의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가 무엇이냐면이 작정이 언약을 통해서 시행되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에서는 이 언약에 있어서 신실함을 잃은 자의 표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강남성도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작정이 우리가 해야 하는 수고를 무력화하고 믿음이 우리가 드려야 할 헌신을 무력화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여러분이 언약을 배신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언약이 섭리 중에 시행되는 목적입니다. 우리의 전적부패로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나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주님 앞에 부름을 입은 성도는 반드시 그 믿음의 성향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믿음이 원인이자 도구가 되어서 거룩한 삶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이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은혜의 외적인 수단의 사용과 그 사용을 위한 분투(strive)는 신자의 필수적 덕목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야곱과 에서의 삶을 가르는 분수령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사랑해야 할 바는 너무나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에서가 이 장자권을 가볍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 히브리서 12:14-17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 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가볍게 여겨(25:34), 망령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언약을 저버림으로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망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신뢰는 마음의 수동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를 압도하는 역경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그 약속들에 (꼭) 붙어있기를 선택하는 영혼의 활기찬 행동입니다(Jerry Bridges, 1929-2016). 히브리서 12장의 문맥은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며 그 징계가 없는 자는 주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12:8). 그렇게 징계하심은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심입니다. 그런데 언약에 대해 망령된 자는 이 기회를 가볍게 여기고 망령되게 행함으로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가 언약에 대해 망령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요한복음 12:47-48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그런데 이 말씀은 요한복음 12:42-43의 문맥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하나님의 언약을 사랑하고 믿는다는 의미는 단지 믿는다고 입술로만 하는 말이나 에서처럼 그 믿음의 고백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받을 때, 예수의 이름만 부인해도 박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시인한다는 의미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현대 민주국가에서 시인과는 다른 맥락을 갖습니다. 43절이 말해주듯이 그들이 결국 사랑한 것은 사람의 영광이었고 이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마지막 날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지막 날에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속한 직장이나 인간관계에서 자신이 신자라는 사실을 감추고 삽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신자답게 살지 못해서" "하나님의 이름에 누가 될까봐" "자유롭게 직장생활 하는데 방해될까봐" 어떤 이유라도 이 모든 이유가 그저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함입니다. 달리 말하면 에서의 망령됨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더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사람의 영광입니까? 그것은 언약을 대하는 여러분의 태도가 여러분의 삶을 말해줄 것이며 그것이 최종 심판대에 심판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경계로 주어진 이 말씀은 우리를 겁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26절에서 그 아우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합니다. 27:36에서 이 이름은 "속이다"와 연결되지만 원래 뜻은 "하나님께서 (너를지키시기를"입니다. 언약의 자녀란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자녀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야곱의 삶의 여정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보살피시며 지키시는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우리가 믿는바 "성도의 견인" 교리가 이런 것입니다. 언약의 자녀는 자신들의 신실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살피심으로 믿음을 견고히 인내 가운데 지켜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반면교사로서 에서의 삶과 그 망령됨을 참 신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동안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 곧 행해야 할 것은 이삭과 리브가의 기도와 응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이삭은 리브가가 임신하지 못하자 그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Joy라는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기쁨이라는 뜻이지만 "Jesus first, Others second, You last"라는 의미를 담은 시그니처입니다. 기쁨은 나의 기쁨과 만족이 아니라 우선은 주님의 기쁨이며 다음은 이웃의 기쁨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삶의 자태인 것이죠. 이 삭은 이처럼 주를 기쁘시게 할 마음으로 리브가의 애타는 마음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주십니다. 지난주에도 우리가 살폈듯이 가정의 원리는 그리스도와 신부의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먼저 순종을 명령하고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하라고 권면한 대로 이삭은 아내를 사랑하고 위로를 얻었습니다(24:67). 이삭의 기도는 단지 아내가 임신치 못함에 대한 기도가 아니라 그를 사랑함의 발로였습니다. 그런데 리브가가 임신하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태중의 두 아이가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인해 리브가가 기도하고 신탁을 주께 받습니다. 그게 23절의 내용입니다. 앞서 우리가 믿어야 할 바에서 다룬 내용이기도 합니다. 야곱을 택하심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사랑함으로 그를 더 사랑했다고 합니다(25:28). 그에 비해 리브가는 특별한 이유를 기록하지 않고 야곱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신탁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주 배운 대로 리브가는 신부인 교회의 메타포이며 교회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여기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사랑에 관한 또 다른 교훈은 우리 육체적 이유 때문에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이유는 그의 사냥한 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에게 있었고 이삭은 이런 점을 간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27장에서 배우겠지만 이삭의 어두운 눈은 단지 어두운 눈이 아니라 이삭의 영적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것을 인해서 그의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야곱이 그를 속였을 때, 일반적 사고로 보면 속인 자를 향해 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이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11:20에서 이삭의 믿음을 말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이삭이 성령을 따라 난 자라는 점은 이런 데서 드러납니다자신의 육체적인 소욕으로 인한 잘못이 드러났을 때, 신실하게 주의 선하심을 따르는 것 입니다. 그것이 이삭의 믿음이었습니다. 육체적인 이유로 다른 것을 좋아하였지만 하나님의 뜻의 섭리적 드러남에 대해서 신실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소망할 것이 드러납니다. 이삭이 그의 아들들을 축복한 것이 장차 있을 일에 대해서 축복함이며 이것이 그의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전체 망원경과 같습니다. 수십억 광년 밖에 있는 별을 당겨서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게 하는 힘입니다. 소망은 하나님 나라의 일과 하나님에 대해서 현재 내가 사는 삶의 자리에서부터 교훈을 분명히 받고 그를 의지함으로 나가는 길입니다. 아마도 이삭은 야곱보다도 에서를 더 축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가 사냥한 고기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정서적 신뢰라고 합니다. 신뢰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인지적 신뢰와 정서적 신뢰입니다. 이 두 변인으로 2 by 24가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불신 상태(둘 다 없는 경우), 비즈니스 관계(인지적 신뢰만 높은 관계), 맹목적 신뢰 관계(정서적 신뢰만 높은 관계), 완전한 신뢰 관계(두 신뢰가 모두 높은 관계)입니다. 이삭은 에서의 망령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를 축복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리브가가 받았던 신탁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정서적 이유 때문에 에서를 신뢰하고 그를 축복하고자 한 것입니다우리 믿음의 여정은 이처럼 우리의  좋아하는 것들에 의해서 비틀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리브가에게 주신 신탁의 의미를 이해한 이삭은 육신을 따른 선택을 하지 않고 영적인 선택을 합니다. 소망이란 온전한 신뢰를 향해 우리의 인지와 정서가 초점 맞춰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소망의 증거로서 사랑을 말합니다. 로마서의 문맥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뜻합니다. 십자가를 깊이 이해하는 사랑이 그 마음에 부은바 된 것을 가리킵니다. 동시에 소망은 장래의 것임에도 현재에 그 증거를 지닌 것입니다. 이삭은 개인적 선호를 버리고 리브가에게 들었던 신탁을 따라 자신의 태도를 수정합니다이것이 히브리서 11:20의 의미입니다. 이삭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제야 리브가가 받았던 신탁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려던 축복이 단지 개인적 선호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렇게 섭리된 것, 곧 야곱에게 속아 그를 축복하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키시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누구나 자기 소망이 있는 곳에 애정을 쏟게 마련입니다. 고기를 좋아하고 그것에 애정을 쏟았던 이삭은 에서를 더 사랑했습니다. 리브가는 신탁을 인해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볍게 여겼던 에서와는 달리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을 사모했습니다. 이처럼 가볍게 여기는 자와 더 사모하는 자 중에 더 사모하는 자가 그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지난주에도 설명했듯이 소망은 우리 삶의 이유를 정조준한 영점조정된 소총과 같습니다. 이 목적과 주의 부르심이 불명확하면 우리는 아마 다른 목적지에 다다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사는 이유에 대해 여러분의 삶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때론 우리 목표가 이삭처럼 비틀릴 때도 하나님 말씀으로 자기 욕망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 주님의 신실하심 앞에 엎드리는 자가 소망을 붙드는 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