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 언약의 의미
노승수 목사
데라 톨레도트 곧 아브라함과 그 후사 이야기는 단지 그 씨가 그리스도라는 계시를 드러내는 데만 목적이 있지 않다. 율법은 430년 후에 시내산에서 받게 되지만 이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조감도의 세부 계획서 같은 것이다. 바울은 이미 창세기 16장의 사라와 하갈의 이야기가 시내산의 율법과 예루살렘의 복음이라는 점을 갈라디아서 4:21이하에서 유비를 통해서 밝혔다. 바울은 어째서 이런 해석을 한 것일까? 지난주에도 다루었지만 16장은 하나님께서 하갈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에게 계시를 주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번주 본문인 17장을 유심히 읽어보면 언약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제외되어 있다. 하나님의 외재적 사역으로 작정과 창조와 섭리에 있어서 자연적 섭리 외에 이런 초자연적 개입은 특정한 목적으로 이뤄지는 개입이다. 이런 류의 성경 상의 초자연적 개입은 모두 그리스도의 계시에 관한 것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서 16장의 사건이 하나님께서 그냥 하갈이 불쌍해서 그도 아브라함의 자식을 잉태해 있으니까 그래서 불쌍히 봐서 그의 삶에 개입해서 사라에게 돌아가서 순종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런 본문을 대할 때, 너무 지나치게 인간적인 관점에서 읽어낸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해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하갈의 삶에 이런 개입을 하셨으며 그렇게 개입하신 사건을 이렇게 성경의 기록으로 남도록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변죽처럼 보이는 이 기사의 참된 목적은 언약 밖에 있는 롯이나 이스마엘이 참된 씨가 아니라 언약의 참된 씨는 따로 있으며 특히 이것이 혈통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려는 목적을 지닌다.
그 과정에서 롯과는 달리 약속의 여자 사라 외에 하갈에게도 계시가 주어진다. 사실 16-17장은 이해할 수 없는 국면이다. 롯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단지 아브라함의 기도와 롯의 의로운 행동에서 비롯된 신의 현현이라면 하갈에게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계시로 그의 행동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삭의 출생 전에는 사라에게 가서 순종하라더니 이삭이 출생 후에는 그를 내어쫓으라고 말씀하신다. 사라의 태도는 일관된다. 이삭 출생 전후와 상관없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경원시 한다. 더 이상한 점은, 이를 인간적으로 읽으면 하나님이 사라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시다가 어떻게든 수습해 보시려다 안 되서 미안한 마음에 자식에 대한 언약을 주는 것처럼 읽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적인 생각일 뿐이다. 이는 율법과 복음의 긴장관계를 보여주는 유비이다. 율법은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 의하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며 죄를 깨닫게 함으로 주께 돌아오게 하는 기능을 한다. 뿐만 아니라 중생한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율법의 제3용도, 곧 "성화의 준거"로서 기능을 한다. 이런 선한 기능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의지했던 대부분의 유대인이 실족했다. 이유가 뭘까? 그 긴장을 바울은 창세기 16-17장에서 유비적으로 해석해내었다. 이스마엘은 통제되지 않는 들나귀로 묘사된다. 그러며서 거기서 만난 하나님을 하갈을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이 살피시는 하나님(엘-로이)은 율법을 연상시킨다.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인들을 종의 멍에를 멘 것을 묘사할 때, 하갈의 신분과 유비가 된다.
질문해보라 17장 본문에 의하면 언약은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과 맺지 않고 사라가 낳을 이삭과 맺겠다고 명시적으로 말씀하신다. 그런데 왜 언약에서 외인인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하나님은 이런 약속을 하시는가? 하나님을 시간 선상에서 우연의 연속 안에 존재하는 인간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성경의 기록된 계시적 개입은 단지 초자연적 섭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계시를 지향하고 있다. 바울이 이 사건을 유비로 읽은 것은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바울이 그냥 자기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서 창세기 맥락과 관계없이 창세기를 자기 입장에서 원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성경을 매우 오독하고 복음을 바울의 복음으로 격하시키는 행동이다. 바울의 관점에서 16-17장의 하나님께서 하갈과 이스마엘의 삶에 개입하시는 것은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으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모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인 것으로 읽은 것이다.
창세기의 자체 맥락에서 이 계시의 의미는 이스마엘의 출생 후에 언약을 맺고 이 맺어진 언약에서 이스마엘이 제외되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위해서 하나님의 계시적 개입이 이뤄진다. 왜? 그것은 바로 율법 밖에 있는 언약의 씨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복음을 계시하시기 위함이다. 바울의 이 관점은 승귀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들은 바, 복음의 기원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난삽하게 보이는 가서 복종하라고 했다가 내어쫓으라 하고 하는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이 계시적 개입은 율법이 우리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측면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참된 복음은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말하는 "율법 외에 한 의"라고 말하는 바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창세기 16-17장의 계시는 율법과 복음의 이러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바울은 해석했다.
게다가 15장의 언약이 일방적인 언약이었다면, 17장의 할례언약은 쌍무적 성격의 언약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완전을 요구하신다. 이 할례언약은 바울 당시에 이 언약에 참여하는 자는 율법의 모든 것을 지킬 것을 요구받고 그렇게 함으로 자기 구원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즉 구원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순종이 아니라 내가 한 율법의 행위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할례언약은 완전을 요구하는 언약으로 읽혔으며 그 전통은 바울 때까지 지속되었다. 또 기이한 점은 아직 이삭이 낳기 전이고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이스마엘 역시 이 할례언약에 동참하지만 언약은 이삭으로 말미암아 맺겠다고 하는 점이다. 이런 점 때문에 할례를 받았으나 언약 밖에 있었던 이스마엘과 바울 당시의 할례언약 안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언약 밖에 있었던 유대인이 유비적으로 연결이 된다. 할례언약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430년 전의 사건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완전을 요구하셨고 모세와 그 후손은 이 완전을 율법의 요구에 순종할 것을 요구받는 것으로 이해했다. 즉 율법은 세대주의자들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으로 도리를 주셨는데 불순종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주신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통치의 원리다. 아직 율법이 계시되기 전이지만 할례언약으로부터 그 후손들은 율법의 요구를 읽은 것이다.
유대인의 복음에 대한 오해에도 불구하고 이 언약은 오해를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쌍무적 언약이라는 점이다. 바울의 비교점은 두 가지다. 16장에서 시내산에서 비교되는 하갈과 예루살렘에 비교되는 사라와 17장에서 할례언약을 받고 율법의 조항을 지키나 언약 밖에 있던 유대인과 할례언약과 동시에 아브라함이 맺었던 언약의 당사자가 된 이삭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스마엘을 육체를 따라 난 자로 이삭을 성령을 따라 난 자로 묘사한다.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오해하기 쉬운 점은 바울이 율법과 복음을 대비하고 율법은 폐기되고 그것을 이은 것이 복음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이 대비하여 유비하고자 한 점은 율법은 받았으나 언약 밖에 있던 이스마엘과 할례언약을 받고 이 언약의 게승자로 있던 이삭을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을 받고 언약 밖에 있던 유대인과 할례언약의 쌍무적 의무의 계승자로서 복음 안에서 언약을 맺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대비하고 있다. 우리가 창세기 17장을 읽을 때, 이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이 할례언약이 이스마엘이 육체적으로 할례를 받았음에도 이스마엘과 맺어진 것이 아니라 언약의 자손인 이삭과 맺어진 언약이라는 점이다. 신약과 구약이 계속해서 이 할례에 대해서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행해져야 함을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신 10:16, 30:6, 렘 4:4, 9:26, 겔 44:7-9, 행 7:51, 롬 2:29). 할례언약이 기표라면 이것의 기의는 마음의 할례, 곧 중생이라 할 수 있다.
이 계시를 우리 삶에 적용해보면, 오늘도 여전히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있다. 율법이 지향하는 바 사라에게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삭으로 대표되는 성령을 따라 난 자가 되어야 함에도 여전히 종의 자녀로 육체를 따라 율법 안에서 의를 얻으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참된 언약이 올 때, 이스마엘처럼 쫓겨날 운명인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왜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들려주시는가? 육체를 따라 난 자로 신앙생활하지 말고 복음적 회개와 거듭남으로 성령을 따라 난 자로 율법 밖에 있는 한 의 곧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에서의 미쁘심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이 신실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꼼수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 부패성을 자각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요즘 젊은이들의 말로 하면 1도 자기로 얻을 수 있는 의는 없으며 그러기에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오면 된다. 그렇게 오는 자를 주님은 버리시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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