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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양화진 https://www.youtube.com/watch?v=wkSVkYMgjHQ 더보기
마틴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Jones 1899-1981) 마틴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Jones 1899-1981) 1. 영혼의 의사 - 남웨일즈의 카디프(Cardiff)에 있는 도날드 스트리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헨리 로이드 존스는 회중교도였고 후에는 칼빈주의 감리교회에 출석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장학생이었던 그는17세에 성바돌로매 병원의 의과대학생으로 입학했다. 4년 뒤 의사자격을 모두 얻었으며 유명한 의사 토머스 호더를 돕는 역할을 맡았다. 그 즈음에 기독교인으로 머물렀던 그의 신앙에 근본적인 변화를 받았다.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면서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었다. 한 교회의 지체였고 정규적으로 예배에 참석했으며 모든 설교자들이 그렇게 인정해주었다. 금세기(20세기) 교회가 저지르는 가...장.. 더보기
제레마이어 버로우즈 (Jeremiah Burroughs, 1599 - 1646) 제레마이어 버로우즈 (Jeremiah Burroughs, 1599 - 1646)버로우즈는 3권으로 된 『청교도들의 생애』(The Lives of the Puritans)를 쓴 벤자민 브룩에 의하면 '매우 온화한 성직가'였다고 한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임마누엘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국교에 따를 수 없어 도중에 그만두고 잉글랜드를 떠나야 했다. 그는 세인트 에드먼즈(St. Edmunds) 교회에서 에드먼드 캘러미(Edmund Calamy) 목사를 도왔고 다음에 5년 동안 노폭의 티벳샬(Tivetshall, Norfolk)에서 강의했다. 박해가 심해지자 그는 생계 수단을 박탈당하고 1636년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 거기서 그는 노틀담에서 목회하던 윌리엄 브리지(William Bridge)를 도왔다... 더보기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 성경적 기독교철학과 교육의 토대를 쌓은 신학자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창궐하는 성경파괴의 자유주의 신학 사상과 현대주의 철학에 대항하여 유럽과 미국의 기독교회를 거뜬히 지켜낸 3대 개혁주의 신학자를 들자면, 대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벤자민 B. 워필드(Benjamin B. Warfiel),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를 든다. 이들은 개혁교회의 전통을 잘 이어받고 또 멋지게 후대에 전달하여 준 시대의 영적 파수꾼들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헤르만 바빙크는 개혁주의 신학 사상에 입각한 기독교철학과 교육을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신학자로서, 기독교를 훼파하려는 수많은 적들로부터 여호와의 신앙을 수호하.. 더보기
카파도키아 3대 교부들 카파도키아 3대 교부들 바실리우스, 그의 친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그의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우리는 카파도키아 3대 교부로 부른다. 1. 바실리우스 바실리우스는 비잔틴 전례 문헌에서 ‘교회의 등불’로 정의된다. 동방교회뿐 아니라 서방교회에서도 그의 성덕과 뛰어난 교의 그리고 사변적이고도 실천적 자질의 종합으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바실리우스는 330년경 카파도키아 체사레아의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수사학자였던 아버지의 이름 역시 바실리우스였고, 어머니는 에멜리아(Emelia)였다. 바실리우스의 동생 그레고리우스는 후에 니사의 주교가 되었고, 페트루스(Petrus)라는 이름의 그 아래 동생 역시 후에 세바스테(Sebaste)의 주교가 되었다. 장녀 마크리나는 동생들, .. 더보기
갑바도기아의 세 학자들 갑바도기아의 세 학자들 아타나시우스는 A.D. 373년 숨을 거두기까지 그의 전 생애를 바친 정통 교리의 마지막 승리를 목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가 남긴 저술들을 보면 결국 아리우스주의가 패배하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노령에 접어들면서 그와 동일한 신념을 지닌 새로운 세대의 신학자들이 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 바로 갑바도기아인들로 불리우는 이들이다. 갑바도기아 지방은 소아시아 남부에 위치하며 현재에는 터키에 속해 있다. 바로 이곳에 흔히 “갑바도기아인들(The Great Cappadocians)”라는 이름으로 보다 잘 알려진 세 사람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살았다. 이들은 곧 “대 바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신학자 가이사랴의.. 더보기
현대교회사 현대교회사 후스토 L. 곤잘레스 제1부 정통, 합리주의, 그리고 경건주의 제1장 도그마와 회의의 시대-13 합리주의가 유럽을 휩쓸게 되었다. 모든 인간들이 공유하고 있는 재능인 자유이성이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에 관한 근본적 문제들에 관해 답을 줄 수 있는데, 왜 분쟁과 편견만을 낳기 마련인 기독교리의 세밀한 문제 때문에 골치를 썩어야 하느냐는 것이 이 운동의 주장이었다. 도그마가 신앙을, 그리고 정통교리가 사랑을 대체했다. 개혁파, 루터란, 그리고 가토릭들은 모두 신자들이 고수해야할 정통 신조들을 발전시켰으며, 이에 순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신자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까지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감리주의자들과 대륙의 경건주의자들은 기존 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은 채, 보다 열정적이고 개인.. 더보기
깔뱅의 시대와 세르베 화형 사건 11) 엑소더스 프랑스 깔뱅의 시대와 세르베 화형 사건 11) 엑소더스 프랑스 연대기적으로 쓴다면, 우리가 이 연재를 시작할 때 계획했던대로 이제 세르베 화형 사건 자체에 대해서 좀 더 심층적으로 논의할 장면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던 이야기를 끊고 또다시 돌아오는 일을 피하기 위해 조금만 더 위그노들에 대한 대대적 학살 사건들 이후, 프랑스 개혁교회의 계속된 흐름에 대해 잠시 돌아본 후에 세르베 화형 사건의 전말에 접근해 보기로 하자. 16세기 중반 깔뱅이 쥬네브로 이주할 당시 프랑스 인구 15-20%는 이미 프로테스탄트가 되어 있었다. 어림잡아도 그 수효는 10만을 훨씬 넘어 15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깔뱅이 쥬네브로 떠나 난민의 신분으로 신앙과 신학, 교회와 공동체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다가 소천한 그 이후 30여년의.. 더보기
위그노는 왜 조국을 떠났나 위그노는 왜 조국을 떠났나 프랑스 신교도인 위그노의 엑소더스가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역사가들의 전반적인 평가다. 16세기 초 프랑스에서 시작된 칼뱅파 신교도(위그노)의 종교개혁운동이 프랑스 왕정의 박해로 위기에 직면하자 위그노들은 독일·네덜란드·스위스·영국 등 유럽 전역으로 대대적인 탈출을 감행했다. 심지어 남아프리카·북아메리카 등 미지의 대륙에도 진출, 신문명의 불씨가 됐다. 위그노의 엑소더스가 역사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끄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종교적 신념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이자 엔지니어들이었다. 신교의 상공업 숭상주의 덕분에 위그노들은 일찌감치 제철·염료·화학 등 하이테크 분야에서 진면목을 발휘했다. 정치적인 박해를 피해 유럽 곳곳에 퍼진 위그노.. 더보기
신학의 역사(History of Theology) 신학의 역사(History of Theology) 표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모 양 의 미 이중(굵은)선으로 표시된 네모 칸 개혁주의의 역사 흐름. 즉 정통 기독교. 단선으로 표시된 네모 칸 개혁주의와 다소 동떨어진 입장의 신학 사조들. 단선으로 된 화살표 개혁주의 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을 말함. 점선으로 된 화살표 개혁주의권이나 비개혁주권에서 상호간에 직접적 부분적 영향을 주고 받은 것을 말함. 굵은 이중선으로 표시된 네모 칸 안에 표기된 신학만이 바른 신학이며, 정통 기독교입니다. 그 외의 신학 중 일부는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고,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성경에서 이탈한 위험한 신학들이니 경계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