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썸네일형 리스트형 31조파의 형성기원 약사 31조파의 형성기원 약사 황대우 교수 고신교단과 자매인 화란의 31조파의 형성기원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31조파는 1944년에 클라스 스힐더가 개혁교회로부터 축출될 때, 그를 지지하는 일단의 목사들과 교인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나, 그 뿌리는 1834년에 발생한 헨드릭 더 꼭 (Hendrik de Cock) 목사의 국가교회로부터의 축출 사건 (이 사건은 흔히 '분열(Afscheiding)'이라고 명명된다)에서 찾을 수 있다. 더 꼭이 제명되자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스홀떠 (Hendrik Peter Scholte) 목사는 자신을 따르던 일부 무리를 이끌고 스스로 국가교회를 나와 더 꼭과 동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채 5년이 되기도 전인 1838년에 스홀떠를 따르던 무리는 도르트 신조를 거부함으로.. 더보기 개혁교회의 표지: 칼빈과 16세기 개혁파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개혁교회의 표지: 칼빈과 16세기 개혁파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황대우 교수 교회의 표지 - 칼빈과 네덜란드 신앙고백 ‘교회의 표지’라는 말이 교회를 정의하는데 결정적일 역할을 하게된 것은 종교개혁시대부터이다. 물론 이전에도 이 용어가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종교개혁가들이 이 용어를 빌어 당시의 부패한 로마교회로부터 참된 교회를 구분하려고 했던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결국 로마교회가 개혁운동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표지는 로마교회로부터 개신교를 구분시키는 개신교의 표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용어는 개신교 역사에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개신교는 이 용어를 통해 개신교는 자신의 로마교와 구별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루터를 .. 더보기 페트루스 발데즈(Petrus Valdes) 페트루스 발데즈(Petrus Valdes) 페트루스 발데즈(Petrus Valdes 혹은 Petrus Waldes)는 발두스(Waldus)나 발데시우스(Valdesius), 발두스 (Valdus), 피터 왈도(Peter Waldo), 삐에르 발데(Pierre Waldes)라고도 부른다. 페트루스 발데즈(†1218)는 리용(Lyon)의 상인이었고, 후에 발도파(Waldenser)라고 부리운 신앙공동체의 평 신도 설교자였다. 발도파는 중세기의 이단, 혹은 이교도로 여겨졌으며, 종교재판을 통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신앙공동체이다. 그의 이름 페트루스(Petrus)는 당시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짐작컨대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후에 덧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1. 리용에서의 행적(Leben.. 더보기 도르트 총회록 도르트 총회록 화란에 아르미니우스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 바로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1515-1563)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카스텔리오는 칼빈의 추종자로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을 따라 제네바로 따라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인문학교교장직을 시험하는 시의회의 심사에서 "솔로몬의 아가서"를 단순한 연애편지로 이해하고 정경에서 제외해야함을 주장하였고, 칼빈의 제네바신앙문답에 "지옥으로 강하"라는 표현을 비판하였는데, 칼빈의 "사도신경"을 근거로 한 변증에 시의회는 카스텔리오를 추방하기로 결정합니다. (당시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으나, 제네바의회는 관용을 베푼 것이라고 합니다.) 1543년에 있었던 이 일 이후에 카스텔리오는 칼빈과 베자의 예정론을 비판하는 책을 기술하였고, 그 책은 그의 사후 1578년에 이르러서.. 더보기 발도파(Waldenser) 발도파(Waldenser) 발도파는 12세기 말 리용의 상인 Petrus Valdes를 통해 프랑스 남부에 세워진 신앙공동체로, 이탈리아와 남 아메리카 등지에까지 이르는 개신교의 하나이다. 발도파는 로마카톨릭교회로부터 종교재판을 통 이교도로 박해당했다. 발도파에 속한 이들은 베스트팔렌(Westfalen), 사보이(Savoy)와 피몽(Piemont)의 경계에서 중요한 소수의 공동체였다. 또한 17세기 말 같은 곳에서 수천명의 발도파들이 남서독일과 헤쎈으로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여러번에 걸쳐서 이주(망명)하였다. 이와 연관하여 발도파들은 피몽, 사보이, 프랑스, 스위스 그리고 네델란드 등지에서 종종 종교회의에서 이교 도로만이 아니라, 특정한 악마를 숭배하는 마녀, 마법사, 마술사 그리고 점성술사로 여겨져 처.. 더보기 한국(한반도) 초기 선교와 장로교 형성 한국(한반도) 초기 선교와 장로교 형성 2012년 9월 1일을 시점으로 한국 장로교회 총회 성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이 의미 있다고 보여 되짚어 보고자 한다. 한반도에서의 기독교 선교의 역사는 사실 상당히 오래되었다. 아마도 신라 시대에 당나라 군사들을 통해서 네스토리우스를 태두로 하고 있었던 경교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짙다. 몽고를 모체로 하고 있는 원나라 궁정에서의 경교의 지위에 대해서는 이제 많이 연구되고 있다. 불행스럽게도 원나라와 고려 사이의 그 종교적 교섭사는 불교를 중심으로만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 흔적을 알 길은 없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반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로마 가톨릭 교회 안의) 예수회의 해외선교 활동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이르렀으며, 중국에서 .. 더보기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Sébastien Castellion) 이야기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Sébastien Castellion) 이야기 권현익 선교사(GMS) 글을 시작하며… 깔뱅의 생애 가운데 그를 굉장히 힘들게 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있다면 카스텔리오(Sébastien Castellion)라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깔뱅에 관한 온갖쓰레기 자료들은 이 카스텔리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깔뱅이 통치한 불과 5년 동안에 당시 전 인구가 1만 3천 명에 불과한 제네바 시에서 13명이 교수대에서 살상되었고, 10명이 목이 잘리고, 35명이 화형되는 끔찍한 범죄들이 벌어졌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조용하던 제네바 시는 종교개혁이라는 이름하에 처참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피의 도시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질렀던 너무도 잔인한 고문과 참변에 치를 떨어.. 더보기 한국적 샤머니즘에 가미된 한국식 기독교 전통, 새벽기도회 한국적 샤머니즘에 가미된 한국식 기독교 전통, 새벽기도회지원용 교수 새벽 “기도”와 새벽 “기도회(예배)”는 분명히 다르다. 성경대로 행하는 개인적인 기도는 언제 어디서든지 바른 실행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형식으로 자리를 잡게 됨으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풍조가 일어나고 있다. 개인이 자발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실행하는 것은 그의 믿음을 보여주지만, 공식적인 예배로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못하다. 육신적 열성은 결국 순수한 기도를 망치고 교회의 바른 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식 기독교에 익숙하고 외형적 종교행위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 부분이다. 1. 한국 토속신앙이 교회로 유입되다 (1) 선도(仙道)의 삼영군신(三靈神君)에게 하던 기도- 새벽기도회 한국에서 처음 기독교를 .. 더보기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헐버트는 한국의 은인,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받는 인물입니다.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에서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헐버트는 1884년 다트마우스(Dartmouth)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교 재학 중이던 23세 때 육영공원(育英公院) 영어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하였습니다. 1886년 9월 23일 개원한 육영공원의 운영과 교육내용 및 방법에 관한 규정으로 ‘育英公院 設學節目’을 제정한 헐버트는, 학생들이 세계 지리에 관심을 보이자 1889년에는를 한글판으로 발행했는데 이 책은 많은 학교에서 필수 교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5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한 후 학교가 문을 닫자 귀국했던 헐.. 더보기 개혁교회 예배의 선구자들: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예배의식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더보기 이전 1 ··· 4 5 6 7 8 9 다음